< 58. 이변의 여파 >
"내 입장이 정말로 난처하게 됐네."
카틸리나는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만큼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다는 방증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없단 말일세. 지지자들의 뜻에 따라도, 원로원과 대립하는 선택을 해도,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느낌이라네."
"답답한 심정은 익히 짐작이 갑니다. 사람들은 돈이 얽힌 문제일수록 민감하게 반응하는 법이니까요."
"내가 집정관에 당선된 게 클리엔테스들을 그렇게나 자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네. 빠져나올 수가 없는 늪에 가라앉고 있는 느낌이야······."
카틸리나가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시선을 밑으로 떨군 카틸리나를 바라보는 마르쿠스의 눈이 일순 싸늘한 빛을 띠었다.
카틸리나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아직 확실히 결정을 내린 상태는 아니었다.
그래도 어쨌든 현재 염두에 두고 있는 세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하긴 해야 한다.
첫 번째는 이 문제를 수습해주고 카틸리나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 경우 집정관을 지낸 명문 귀족을 수족처럼 다룰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빌려준 선거비도 당연히 전액 회수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원로원과의 사이를 완벽히 봉합하지 않는다면 차후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었다.
두 번째는 카틸리나를 적당히 이용해 선거비 정도만 토해내게 하고 꼬리를 자르는 것이다.
위험부담이 가장 덜하긴 하지만, 얻을 수 있는 이득도 가장 적다. 기껏 해봐야 빌려준 선거비의 이자 정도나 건질 수 있을 테니까.
세 번째는 카틸리나를 냉정하게 쳐내고 그를 지지도를 얻기 위한 발판으로 써먹는 것이다.
빌려준 선거비는 건질 수 없겠지만, 원래 계획과 가장 유사한 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다.
다만 카틸리나가 집정관이 된 이상 계획의 세부내용을 전면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어느 쪽이든 지금 당장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아직 카틸리나가 어느 정도의 능력을 지닌 사람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예상보다 능력이 더 좋은 사람이라면 단순히 밟고 올라갈 희생양으로 삼기는 아깝다.
그러나 능력이 따라주지 않는 자라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품고 갈 이유가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 짧은 대화로 봤을 때 카틸리나의 판단력은 그리 좋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공약을 걸고 나온 이상 집정관에 당선됐을 때의 파장을 염두에 뒀어야 한다.
이제 와서 앓는 소리를 해봐야 자신이 부족하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는다.
'마침 잘 됐어. 지금 기회를 최대한 살려 저자의 밑천을 낱낱이 캐봐야겠다.'
마르쿠스는 카틸리나의 앞에 놓인 잔에 희석한 포도주를 따라주며 물었다.
"그런데 저보다는 먼저 키케로 님을 찾아가는 게 좋지 않았을까요? 현 집정관인 그분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원로원과 화해하는 것도 가능할 텐데요."
키케로의 이름을 들은 카틸리나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그 벼락출세한 평민 출신에게 가서 부탁을 하라고? 그건 절대 안 되네."
"평민 출신이라고 해도 이제 어엿한 귀족의 일원이며 집정관까지 하신 분입니다."
"그래도 평민 출신에 불과한 신참자일세. 나는 최소 3대 이상 내려온 귀족 가문이 아니라면 같은 귀족으로 인정할 마음이 없네. 평민으로 태어나서 평민으로 자랐는데 귀족의 신분을 얻었으니 귀족이다? 말이 안 되지 않나."
마르쿠스는 카틸리나라는 사람의 성향을 대강 알 수 있었다.
역사에서도 그의 오만한 귀족주의적 사고는 유명했다.
이 때문에 평민 출신의 신참자인 키케로와 크게 대립했고, 빈말로도 사이가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카틸리나 님은 로마의 정계에서 평민 출신은 배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평민에겐 평민의 역할이, 귀족에게는 귀족의 역할이 있는 법 아니겠는가. 민회와 호민관이 어째서 존재하겠나. 평민들은 자신들을 위해 마련된 장에서 활동하고, 원로원은 명망 있는 귀족 가문이 이끌어가야지."
"그러면 키케로 님과 제휴할 마음은 없다고 생각하면 되겠군요."
"물론일세. 자네를 찾아온 이유도 같은 눈높이에서 말할 상대가 필요했던 거니까. 명문 리키니우스 씨족인 자네라면 내 이야기에 공감해주리라 믿네."
"그거야 뭐······."
마르쿠스는 모호하게 말을 흘렸다.
원로원 내에서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여럿 존재했다.
카틸리나는 실제로 키케로와 사이가 악화된 뒤에 공식석상에서 그의 태생을 비웃은 적도 있었다.
마르쿠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건 그가 같은 명문 귀족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이었다.
카틸리나는 신참자에 불과한 이가 정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네가 부친에게 말을 잘 전해주게. 크라수스 가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원로원과 합을 맞추는 것도 어떻게든 가능하지 않겠나?"
"가능이야 하겠죠. 그런데 원로원과 어떤 식으로 합을 맞출 생각이십니까?"
"그게···아직은 잘 모르겠네. 자네에게는 좋은 생각이 있나?"
마르쿠스의 안에서 카틸리나에 대한 평가가 수직으로 하락했다.
키케로를 중심으로 한 공화주의자들과 친하게 지내야 하는 입장에서 카틸리나 같은 폭탄을 안고 가야 할 이유가 점점 사라졌다.
귀족중심의 사고도 마르쿠스가 구상하는 방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능력이라도 있다면 어떻게든 써먹을 방도가 있겠지만 지금까지 대화로 봐서는 그조차 여의치 않아 보였다.
"방법이야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겠죠. 우선 제일 시급한 건 카틸리나 님을 지지하는 세력의 분노가 폭발하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바로 그 방법을 모르겠으니 이렇게 고민하는 게 아니겠나."
마르쿠스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는 카틸리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상황은 카틸리나만이 아닌 마르쿠스에 대한 시험이기도 하다.
실제 흐름이 역사와 괴리가 생겼을 때 이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능력을 증명해야만 했다.
고작 이 정도 변수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로마의 정점까지 올라갈 수 있겠는가.
일단 마르쿠스는 첫 번째 방법은 기각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카틸리나의 능력을 보아하니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가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고방식이 저렇게 굳어진 이유는 추측할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몰락한 명문 귀족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경우라 놀라울 것도 없었다.
유서 깊은 귀족의 피를 이었지만 현실은 따라주지 않고, 예전의 성세를 회복할 길도 요원하다.
그러니 자연히 잘나가는 평민 출신 신참자들을 시기하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출세하기 위해 거액의 빚을 지며 선거를 치르는 동안 그런 마음은 점점 더 강해졌으리라.
마르쿠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부와 권력, 명예를 모두 갖춘 크라수스 가문은 카틸리나가 되고 싶었던 이상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꼭두각시로 쥐고 흔들 수 있었으나 오히려 그래서 더욱 매력이 떨어졌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양자택일뿐.
'적당히 이용하다가 쳐낼 것인가, 아니면······.'
마르쿠스는 절박해 보이는 카틸리나의 표정을 힐끔 살폈다.
끝까지 품고 갈만한 가치가 없다고 해도 바로 쳐내는 건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궁지에 몰리면 의외로 능력을 발휘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카틸리나 님이 해야 할 일은 시간을 끄는 겁니다. 그러면서 차근차근 지지자들의 불만을 가라앉혀야죠. 물론 완전히 가라앉히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폭동에 준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통제는 할 수 있을 겁니다."
"시간을 끈다···법안을 발의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되는가?"
"그러면 카틸리나 님의 지지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죠. 일단 법안을 발의는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카틸리나 님이 집정관에 당선되기 위해 거짓 공약을 내세웠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부채 탕감을 하자고 해봐야 실라누스가 즉각 거부권을 행사할 텐데?"
"그게 일반적인 흐름이겠죠. 그러니까 원로원과 말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다리를 놔드릴 테니 카틸리나 님이 직접 도움을 구하시면 될 겁니다. 진짜로 부채 탕감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입장 상 법안을 발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사회적 혼란이 커지지 않게 협조를 해달라. 이런 식으로 말하면 원로원도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카틸리나가 자세를 바로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듣고 보니 꽤 그럴듯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원로원과 어떤 식으로 협조를 하면 좋겠나?"
"중요한 건 채무자들의 분노를 한 번에 폭발시키는 게 아니라 천천히, 터지지 않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는 겁니다. 만약 실라누스 님이 무작정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채무자들의 반발감도 그만큼 크게 터져 나오겠죠. 그런 사태는 일단 피해야 합니다."
"즉각 거부권을 행사하는 건 참아달라고 해야겠군."
"예. 그리고 토론회도 하고, 사람들의 의견도 수렴하는 식으로 발의된 법안을 질질 끌어야겠죠. 감정이란 본디 시간이 갈수록 무뎌지는 법입니다."
인간의 감정이라는 게 그렇다.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분노도 몇 개월씩 끌리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무뎌지게 되는 법이다.
물론 당장 파산할 정도의 빚을 진 거액의 채무자들은 경우가 다르다.
카틸리나의 극렬 지지파 중에는 이런 상황에 처한 이들도 제법 많았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카틸리나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결국 부결되면 분노가 폭발하는 건 똑같지 않겠나? 오히려 기대감을 품었다가 더 실망하는 자들도 나올 것 같은데?"
"그러면 내용을 살짝 바꾼 법안을 다시 발의하면 됩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 시간을 끌면서 추가적인 대책을 고려해봐야죠. 소수의 극렬분자들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납득시킬 수 있는 합의점만 찾는다면 충분히 사태를 봉합할 수 있습니다."
"으음···그래. 일단 시간을 끌면서 합의점을 계속해서 찾아봐야겠군."
엄밀히 말해서 마르쿠스의 조언은 완벽한 한 수는 아니었다.
여러 가지 변수나 부작용이 나올 수밖에 없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아니, 반드시 어딘가에서 사고가 터지게 되어 있었다.
만약 돌발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르쿠스가 직접 개입할 의사까지 있었다.
이건 카틸리나의 능력을 알아보려는 의도도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카틸리나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낸다면 그걸로 좋다.
하지만 그릇의 한계를 드러낸다면 로마는 커다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현직 집정관이 사건의 중심에 있는 만큼 원래 역사보다 사태가 더 심각해질 수도 있다.
그때는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목으로 마르쿠스가 전면에 나설 예정이었다.
곪을 대로 곪은 로마의 사회적 문제를 카틸리나와 함께 터트릴 수 있다면 마르쿠스에게도 결코 손해는 아니었다.
어쩌면 처음 구상한 계획보다도 더욱 많은 걸 얻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더라도 대응할 수 있게 나름의 준비를 갖출 필요가 있었다.
한시름 덜었다며 홀가분하게 떠나는 카틸리나를 배웅하는 마르쿠스의 눈에 한 줄기 기광이 스쳤다.
더 이상 누군가의 배후에 있는 걸로는 충분치 않았다.
전면에 나서야 할지도 모르는 때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
마르쿠스는 약속대로 카틸리나를 크라수스와 연결해주었다.
크라수스의 중재 하에 카틸리나는 차기 집정관인 실라누스와 비밀리에 회동을 가졌다.
실라누스는 현직 집정관인 키케로도 동석시키려고 했으나 카틸리나가 완강히 거부했다.
카틸리나는 스스로의 평가를 계속 깎아내리고 있다는 자각이 없었다.
어쨌거나 실라누스는 카틸리나의 상황을 이해했고, 그의 제안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
카틸리나와의 회동 이후 실라누스는 키케로와 따로 만나 카틸리나의 뜻을 전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여주기 식 정쟁만 벌이자는 거로군요."
"그렇습니다. 카틸리나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원로원과 정면으로 대립하고 싶지는 않겠지요."
"우리로서도 나쁠 건 없어 보입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채무자들의 분노가 전부 카틸리나를 향하도록 만들고 싶지만 말이죠."
"으음···하지만 그런 혼란을 일으키면 장기적으로도 우리에게 득이 될 게 없지 않습니까. 일단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죠."
실라누스는 커다란 짐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키케로는 왠지 모를 찝찝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했다.
"하지만 생각대로 잘 되겠습니까. 시민들도 바보가 아닌데······."
"그러니까 우리가 연기를 잘 해야지요."
"그리고 저는 카틸리나 그자를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협력하는 척 하면서 뒤통수를 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설마요. 그렇게 무리한 짓을 하겠습니까."
"그거야 모르는 일입니다. 카틸리나가 자신을 터무니없이 과대평가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아무리 집정관이 로마 최고의 관직이라고 해도 집정관은 왕이 아니다.
동등한 권한을 가진 실라누스가 작정하고 막아서면 카틸리나가 할 수 있는 건 극단적으로 제약된다.
물론 이렇게 되면 카틸리나 역시 실라누스를 방해할 테니 국정마비를 피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카틸리나의 정치적 생명은 끝이나 다름없었다.
지지자들에게 버림받으면 선거에 당선될 수 없겠지만, 원로원에게 버림받으면 선거에 출마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로마의 국정을 마비시킨 인물이 이후 선거에 나오는 걸 원로원에서 허락해줄 리가 없다.
실라누스는 키케로가 과한 걱정을 하는 거라고 단언했다.
"카틸리나는 우리에게 협력하는 조건으로 부유한 동방 속주의 총독 자리를 요구했습니다. 그것만 봐도 그자의 생각은 훤히 읽을 수 있습니다. 일단 지지자들의 분노를 최소화하고 자신은 동방으로 건너가 돈을 긁어모으겠다는 거지요. 진짜로 부채 탕감을 노리고 있다면 굳이 부유한 동방에 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예, 납득은 갑니다. 하지만 실라누스, 카틸리나가 제시한 방법은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알고 계시겠죠?"
"물론입니다. 빚에 허덕이는 시민들의 부채를 어떻게 손을 보긴 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너무 첨예한 이권이 걸린 문제라······."
빚을 진 사람들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위해 돈을 빌린 거라면 자업자득이라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로마의 사회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게 아니었다.
막대한 채무에 허덕이는 자들 중에는 몰락한 자영농이 굉장히 많았다.
건전하고 소박한 농민들이 몰락한 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반복되는 전쟁과 거기서 발생한 노예들을 이용한 대농장 경영, 그리고 승리의 과실을 독점한 귀족들의 탓이 컸다.
계속해서 먹고 살기 위해 빚을 지고 결국 땅까지 빼앗긴 이들의 분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렇다고 채무를 완화시켜 주거나 농지법을 개혁하는 것도 현 상황에서는 무리였다.
실라누스의 말대로 수많은 사람들의 이득이 걸린 너무나도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 경우 손해를 보는 쪽이 기득권층이라는 점이 컸다.
어느 정치인이 기득권층의 이익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법안을 발의하겠는가.
그라쿠스 형제의 전례도 있는 이상 무리라고 봐야 했다.
실라누스도 문제를 인식하고는 있었으나 자신이 해결할 마음은 없었다.
실라누스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집정관이 된 자들 모두가 그랬다.
즉, 로마의 정치인 모두가 폭탄 돌리기를 하는 심정으로 축적되고 있는 사회의 모순을 애써 모른척하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원로원은 해가 바뀔 때까지 뚜렷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무의미한 토의만을 계속했다.
터져 나오는 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부족하다는 사실을 또다시 증명해버린 셈이다.
그렇게 원래의 역사와는 다르게 유혈사태가 일어나지 않고 기원전 63년의 해가 저물었다.
커다란 소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채무의 탕감을 원하는 자들과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자들 모두 아직까지는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로마의 사람들 모두가 지금의 안정은 폭풍전야의 고요함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았다.
두 명의 집정관은 한쪽이 수도를 비운 게 아닌 경우 번갈아 가며 군의 통수권을 가진다.
그리고 한 달씩 교대로 정무를 담당하는데 기원전 62년은 실라누스의 차례가 먼저 돌아왔다.
실라누스는 별다른 눈에 띄는 행동 없이 한 달을 마무리했다.
안정을 바라는 온건한 시민들은 불안한 기색으로 카틸리나가 담당하는 다음 달을 기다렸다.
거액의 빚을 지고 있는 카틸리나의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세상이 온 것 마냥 광장을 활보했다.
그리고 마침내 집정관 업무를 시작한 카틸리나는 곧바로 자신의 지지자들의 뜻을 받들었다.
그는 결국 집정관 입법의 형태로 로마를 혼란으로 몰고 갈 문제의 법안을 발의했다.
"지금까지 로마 시민들이 지고 있는 부채를 전부 탕감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법안이 발의된 시점까지 진 빚은 전부 없었던 것이 되며 당연히 시민들도 상환의 의무를 지지 않습니다. 강제로 돈을 받아내려 하는 자가 있다면 지엄한 법의 심판을 받게 할 것입니다!"
카틸리나의 연설을 바라보는 의원들은 드디어 올 게 왔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소식을 들은 민회도 발칵 뒤집혔다.
약속된 혼돈의 태풍이 로마를 휩쓸려 하고 있었다.
< 58. 이변의 여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