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 끓어오르는 분노 (60/326)

  < 59. 끓어오르는 분노 >

  "부채 전액 탕감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카틸리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의원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실라누스와 카틸리나 사이에 오간 모종의 협약을 모든 의원들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딘가에서 이야기가 새어나가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원로원의 정원은 600명이다.

  상식적으로 이 600명 모두가 비밀을 지켜 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래서 실라누스와 키케로는 믿을 만한 소수의 중진에게만 이 사실을 말해주었다.

  이 모든 게 계획된 연출이라는 걸 모르는 의원들은 실라누스가 즉각 거부권을 발동할 거라 믿었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난 실라누스는 그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움직였다.

  "카틸리나, 어째서 그런 허무맹랑한 법안을 발의한 거요. 이유를 설명해주시오."

  "실라누스!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이유는 무슨 이유! 굳이 저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들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냥 거부권을 행사하세요!"

  "집정관, 작년과 이야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예상과 다르게 일이 흘러가자 의원들은 다급한 반응을 보였다.

  철석같이 믿고 있던 실라누스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일이 심각해질 수 있는 까닭이다.

  특히 많은 채무자를 거느리고 있는 의원들은 당장이라도 실라누스의 멱살을 잡을 기세였다.

  호위를 서는 릭토르들이 아니었다면 몸싸움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키케로와 크라수스가 흥분한 의원들에게 진정하고 일단 이야기를 마저 들어보자고 설득했다.

  그럼에도 소란이 가라앉기까지에는 약간의 시간이 소요됐다.

  회의장이 다시 적막을 되찾자 실라누스는 자신을 노려보는 의원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진정하십시오, 친애하는 동료 의원 여러분.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하지만 저는 저 얼토당토않은 법안에 찬성할 생각이 없습니다."

  몇몇 의원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는 가운데 풀케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면 어째서 거부권을 행사하시지 않는 겁니까."

  실라누스는 이런 격한 반응이 나올 거라는 걸 이미 충분히 예상한 상태였다. 그는 침착하게 준비된 답을 들려주었다.

  "아무리 허무맹랑한 법안이 발의되었다고 해도 토론조차 하지 않고 거부권을 행사하는 건 관례에 어긋납니다. 특히 적지 않은 시민들이 감시의 눈을 번뜩이며 이 법안의 통과 여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답 무용으로 거부권을 행사하면 법안의 통과를 바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거기까지 말한 실라누스는 말을 끊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풀케르는 납득한다는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의원들을 쭉 둘러보던 실라누스는 키케로와 눈이 마주쳤다.

  키케로가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대로 잘 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이어지는 실라누스의 목소리가 한층 더 안정감을 찾았다.

  "그래서 저는 그들도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저 법안을 부결시키려고 합니다. 부채 탕감이라는 말도 안 되는 법안이 어째서 말이 안 되는지. 시민들이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혼란도 최소화되지 않겠습니까."

  수군거리는 의원들의 분위기가 변했다.

  조금 전만 해도 당장이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라고 외치던 사람들도 여유를 되찾았다.

  여기에 쐐기를 박듯 카토가 실라누스의 의견에 찬성했다.

  "혼란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는 그게 최선으로 보입니다. 물론 다른 집정관 한 분도 토론에 찬성하신다면 말이죠."

  이번에는 의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카틸리나에게 쏠렸다.

  법안을 발의한 뒤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그는 두어 번 헛기침을 한 뒤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어···물론 나는 찬성이오. 지금 로마는 수많은 빚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신음으로 들끓고 있소. 나는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이오."

  "그 고통 받는 사람에는 집정관 본인도 포함되는 것 아닌지?"

  "누구보다도 자신을 먼저 구제하려는 속셈이 뻔히 보이는 것 같은데?"

  여러 의원들의 이죽거림에 카틸리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평소 카틸리나의 성격을 아는 사람들은 묘한 위화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긍지 높은 명문 귀족인 그는 자신을 향한 조롱에 필요 이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꼭 필요한 말 외에는 한 마디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의원들의 이런 기색을 느낀 키케로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멍청한 인간 같으니. 그토록 평소처럼 행동하라고 했거늘.'

  저런 식으로 눈에 띄게 굴면 당연히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머리 회전이 빠른 몇몇은 이미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눈치챈 것 같았다.

  '실라누스에게 다시 주의를 시키라고 말해야겠군.'

  키케로는 보면 볼수록 카틸리나라는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어도 평민 출신을 깔보는 태도를 보이려면 그에 맞는 능력 정도는 갖춰야 할 게 아닌가.

  카토 역시 귀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그는 원로원에서 손꼽히는 지성의 소유자였다.

  물론 카틸리나도 우둔하거나 무능력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예 무능력한 사람이라면 법무관까지 올라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원로원 의원들 가운데 평균 정도라 할 수 있는 지성은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평민들을 깔보는 그 고고한 자존심만큼의 능력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집정관일 때 저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했다면 완전히 매장시켜버렸을 텐데.'

  키케로는 아쉬운 속내를 감추며 실라누스의 의견에 찬성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어서 크라수스를 필두로 한 옵티마테스의 중진들까지 찬성하자 다른 의원들도 대세에 따라갔다.

  사전에 계획된 흐름 그대로였다.

  카틸리나의 연기력은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일단 지금까지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토론회는 시민들도 볼 수 있도록 충분한 홍보 기간을 거친 뒤 포로 로마눔 광장에서 열기로 정해졌다.

  이번에도 카틸리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묵묵히 원로원측의 요구를 수용했다.

  회의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는 시간이 다 되자 기다렸다는 듯 후다닥 자리를 떠났다.

  카틸리나가 원로원의 중진들과 사전에 짰다는 걸 모르는 젊은 의원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번득였다.

  "키케로 님, 카틸리나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요?"

  "과한 걱정일세. 카틸리나는 그렇게까지 교활한 책략을 짜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

  "하지만 지나치게 조용하지 않았습니까."

  "자신도 감당 못 할 일을 벌여놨으니 겁이 난 게지."

  키케로를 비롯한 평민 출신의 신참자들은 카틸리나의 그런 모습을 꼴좋다는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신참자만이 아니었다.

  전통 있는 귀족 가문의 사람 중에도 카틸리나를 동정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그냥 조용히 있을 것이지 어째서 이런 소란을 벌이냐며 대놓고 짜증 내는 이들도 여럿 보였다.

  이게 현재 기득권 세력이 카틸리나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그리고 마르쿠스가 카틸리나와 함께 간다는 선택지를 초장부터 지워버린 이유이기도 했다.

  ※※※※

  부채 탕감 법안에 대한 토론회가 열린다는 소식은 즉각 로마 시내 전역에 퍼졌다.

  구경은 자유지만 어떤 종류의 폭력도 엄금하며, 무장한 경비병들이 호위할 거라는 경고도 뒤따랐다.

  회의 당일 광장은 로마 전역에서 몰려온 채무자들과 채권자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볐다.

  집회장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찼고, 근처의 신전과 회랑에도 구경꾼들이 가득했다.

  분위기는 결코 화기애애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거액의 빚을 진 사람들과 돈을 빌려준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토론의 기조연설을 맡은 실라누스가 먼저 단상에 올랐다.

  한 차례 주변을 둘러본 그는 예상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친애하는 시민 여러분, 오늘의 토론회는 현재 로마를 둘러싼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입니다. 누가 옳고, 누가 틀린 지 시시비비를 가리는 장소가 아니라는 점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오늘 토론회 한 번으로 법안의 부결 여부가 결정되는 것 또한 아닙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저희 원로원은 신중하게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겠습니다.

  시민 여러분도 저희를 믿고 지켜봐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또한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사람은 그 즉시 구금될 수 있으니 질서를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

  실라누스를 비방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채무자들은 의외로 온건한 발언에 야유를 퍼부을 기회를 놓쳤다.

  이어서 연단에 선 카틸리나는 짤막하게 이 법안이 통과되어야 하는 이유를 말했다.

  예상보다 힘없는 연설에 채권자들도 벙찐 표정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토론회는 예상보다 맥이 빠지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가장 큰 원인은 카틸리나가 필요 이상으로 소극적으로 토론에 임했기 때문이다.

  반면 원로원측은 수많은 전문가와 석학들을 동원해 일방적인 공세를 펼쳤다.

  어느새 토론회라기보다는 강연회가 어울릴 법한 풍경이 펼쳐졌다.

  "집정관 카틸리나, 부채 전액 탕감이 로마의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진지하게 고려를 해본 것입니까?"

  "···로마에는 빚에 허덕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구제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 구제 방안으로 부채 전액 탕감이라는 극단적인 방도를 제시한 근거가 무엇입니까?"

  "이렇게라도 해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채가 전부 다 사라진다면 로마의 경제는 완전히 붕괴합니다. 데나리우스와 세스테르티우스는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하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화폐로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원시적인 물물교환의 형태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정말로 그런 미래를 원하십니까?"

  카틸리나측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토론에 임할 생각이 없기도 했지만, 애초에 근거가 빈약했기 때문에 할 말도 없었다.

  카틸리나의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믿는 집정관의 무력한 모습에 탄식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고 원로원과 정면으로 대적하면서 법안을 통과시키려는 사람을 욕하는 것도 뭐했다.

  결국 첫 토론회는 원로원 세력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

  이번 일의 직접적인 이해당사자가 아닌 시민들은 채무자들의 빈약한 근거를 비웃으며 자리를 떴다.

  누가 봐도 합당한 논리는 부채 탕감 반대파에 있었다.

  이후로도 카틸리나는 법안을 지지하는 시늉만 할 뿐 적극적으로 통과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부채 탕감을 원하는 이들은 솟구치는 분노를 꾹꾹 억누르며 카틸리나에게 더 힘을 내라는 응원을 보냈다.

  카틸리나가 답답해 보이긴 했어도 지지자들은 아직 그를 믿었다.

  원로원 의원들은 600명이지만 카틸리나는 혼자에 불과하다.

  아무리 집정관이라도 상대편 역시 집정관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대 육백의 싸움을 수행하는 카틸리나를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아쉬운 소리를 하는 지지자들에게는 즉각 '그러면 네가 앞장서서 해봐라' 라는 비판이 날아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난히 혼란이 수습되고 있는 듯 보였으나 키케로는 아직 마음을 놓지 않았다.

  카토 역시 키케로의 생각에 동의했다.

  사이는 좋지 않았어도 원로원의 대표적인 석학 두 사람의 의견은 일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채 탕감 법안을 저지했다고 해도 이는 벌어진 상처를 일시적으로 막은 것에 불과했다.

  어쨌거나 이 갈등을 완전히 봉합하려면 빚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구제할 방도를 마련해야만 한다.

  일시적으로 불만을 눌러놨다고 해도 이미 막대한 부채 문제는 사회의 화두로 던져진 상태였다.

  사소한 불씨만 던져져도 언제든 다시 거세게 타오를 수 있었다.

  "이렇게 시간이 끌릴 때 몰락한 농민들을 구제할 수 있는 법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다시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할지 알 수 없습니다."

  키케로는 필사적으로 의원들을 설득했지만 소귀에 경 읽기 수준으로 의미가 없었다.

  대다수 의원들도 이제는 카틸리나가 진심으로 부채 탕감을 통과시킬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았다.

  이미 승리감에 취한 원로원은 부채 문제를 굳이 해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위험하다, 위험하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실제로 문제가 터진 적은 없지 않습니까?"

  "그라쿠스 형제 때도 비슷한 말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지금까지도 괜찮았습니다. 70년도 더 넘게 잘 버텨왔는데 너무 조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믿었던 실라누스마저 조금 더 추이를 지켜보자는 의견을 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 못 하는 이가 삼 분의 일, 심각성을 알아도 굳이 바꿀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이가 또 삼 분의 일, 절대로 기득권을 놓을 생각이 없는 자들이 나머지 삼 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니 해결책이 나올 수가 없다.

  결국 키케로는 이대로 아무 문제 없이 시간이 흐르기만을 신들에게 빌었다.

  그러나 신들은 몰라도 마르쿠스는 이대로 넘어갈 마음이 없었다.

  이렇게 일이 흐지부지 끝나면 자신에게도, 로마에도 좋을 게 하나 없었다.

  썩은 부위를 과감하게 도려내지 않는다면 곧 주변의 다른 장기들마저 쓰지 못하게 된다.

  크라수스에게 원로원의 현 상황을 전해 들은 마르쿠스는 더욱 과감하게 움직일 필요성을 실감했다.

  느긋한 자들이 개혁의 필요성을 실감하기 위해서는 조금 따끔한 충격요법이 필요한 법.

  마르쿠스는 바로 사람들을 동원해 그럴듯한 소문을 풀어 놓았다.

  그가 퍼뜨리는 소문은 며칠도 지나지 않아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퍼져나갔다.

  소문의 내용이 상당히 신빙성이 있었고 자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로마 시민들은 지금 속고 있다. 카틸리나는 부채 탕감 법안을 통과시킬 마음이 전혀 없다. 그는 애초에 집정관이 되기 위해 허황된 공약을 내걸고 시민들을 이용했을 뿐이다. 원로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할 생각이 전혀 없다. 카틸리나와 원로원은 사전에 짜고 연극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건조한 계절에 발생한 산불처럼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그럴듯한 정황증거도 많이 제시되었다.

  '카틸리나는 토론회에서 마치 지는 게 목적인 것처럼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다.'

  '토론회 일정도, 준비도 모두 원로원측에서 하자는 대로 따르고 주도적으로는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더라.'

  시민들은 이게 상당히 그럴듯하다고 여겼다.

  카틸리나가 이상하게 소극적이었던 것과, 원로원이 평소와는 다르게 시민 친화적으로 나온 이유가 전부 설명되는 까닭이다.

  마르쿠스가 퍼트린 소문은 추가로 여러 가지 살이 붙고 변형되었다.

  이미 로마 전역에 퍼져버렸기 때문에 소문의 진원지가 어디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채무자들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결정적인 사실이 알려졌다.

  '원로원은 카틸리나의 총독 임지를 가장 풍요로운 동방 속주로 정했다.'

  이 소문을 듣게 된 카틸리나의 지지자들은 분노가 폭발했다.

  이건 명백한 야합의 증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동방 속주가 총독들이 가장 원하는 임지라는 것쯤은 로마의 세 살배기 어린아이도 아는 사실이었다.

  집정관과 법무관 모두가 가고 싶어 안달 난 꿈의 지역이다.

  당연히 원로원 내부에서도 명망이 높고 의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우선해서 배치됐다.

  그런데 원로원과 정면에서 대립한 카틸리나가 그런 자리에 내정된 것이다.

  모종의 거래가 오가지 않았다면 설명이 불가능하다.

  여기저기서 카틸리나와 원로원을 성토하는 소리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로마 시내 곳곳에서 폭력 사태가 잇따라 일어났다.

  카틸리나의 사저는 성난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여 출입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됐다.

  집정관의 호위들도 성난 군중의 기세에 압도당해 그들을 해산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거의 폭동에 준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나 누구도 이들을 말리지 못했다.

  "카틸리나! 정말로 지지자들을 농락한 것인가!"

  "집정관에 취임하려는 욕심으로 우리를 이용한 것인가!"

  "즉각 해명하라!"

  "해명해라, 카틸리나!"

  덜컥 겁이 난 카틸리나는 사저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집이 완전히 둘러싸인 탓에 외부와 상의를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원로원도 예상외의 사태에 당황해 섣불리 행동하지 못했다.

  물론 카틸리나가 잘못 돼도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을 했기에 굼뜨게 움직인 측면도 있었다.

  카틸리나가 만약 이 문제를 다룰만한 능력이 있었다면 이쯤에서 자신만의 비전을 제시했어야 한다.

  지금까지 충분히 고민할 만한 시간이 주어졌었고, 집정관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원로원을 압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데 실패했다.

  궁지에 몰린 카틸리나는 결국 지금 당장 살기 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원로원과 야합이 깨지면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었으나 그런 생각을 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지금 당장 분노한 시민들에게 맞아죽게 생겼는데 실라누스와의 협약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결연한 표정으로 집 밖에 나온 그는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지지자들 앞에서 확실하게 선언했다.

  "제가 원로원과 짜고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한 오해입니다! 이건 저를 음해하기 위해 원로원에서 퍼트린 헛소문에 불과합니다.

  제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저는 이 법안을 당장 민회에 제의하겠습니다. 그리고 민회에서 부결된다고 하더라도 굴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임기를 수행하는 기간 안에 반드시 부채 탕감을 실현하겠습니다! 대의를 방해하는 원로원을 이겨내기 위해 저에게 힘을 몰아주십시오, 여러분!

  "

  어차피 여기서 분노한 지지자들의 비위를 맞춰주지 않는다면 맞아 죽을 판이다.

  카틸리나는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자신은 할 만큼 했다.

  일이 이렇게 된 건 그동안 마땅한 해결책을 제시 못 한 원로원의 잘못이 아닌가.

  그러니 이 사태를 수습할 책임도 원로원에게 있는 것이다.

  자기합리화에 들어간 카틸리나는 이제 거리낄 것이 없었다.

  현직 집정관이 시민들을 선동해 원로원에게 대항한다는 어처구니없는 광경이 로마에서 버젓이 펼쳐지고 있었다.

  카틸리나가 당선됐을 때 우려했던 상황이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 더 심각했다.

  이제는 단순히 채무자와 채권자만의 갈등이 아니었다.

  그간의 토론회나 의견수렴 활동으로 시민들도 부채를 중요한 사회 문제로 인식하게 됐다.

  부채 전액 탕감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은 옳지 않다고 여길 뿐, 이걸 해결하긴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무엇보다 카틸리나는 등을 떠밀려 나왔을 뿐이지만 그의 뒤에 있는 사람들의 분노는 한층 더 강해졌다.

  뒤틀린 경제 체제로 수십 년에 걸쳐 쌓여온 울분과 비탄을 폭발시킬 무대가 드디어 갖춰진 것이다.

  현실에서 눈을 돌려온 원로원이 개혁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되는 때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 59. 끓어오르는 분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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