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대혼란 >
"원로원은 즉각 비열한 협잡을 멈추고 제대로 논의에 임하라!"
"빚에 짓눌리고 있는 시민들의 목소리에 진지하게 마주하라!"
원래 역사에서 카틸리나가 끌어모았던 사람들은 퇴역군인과 몰락한 자작농이 대다수였다.
빚조차 질 여력이 없는 무산자들은 카틸리나에게 협력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카틸리나의 지지자들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고자 했다.
몰락한 기사계급 출신인 유스투스가 이런 작업에 앞장섰다.
그는 굉장히 선동에 능했고 머리 회전도 빨랐다.
카틸리나는 유스투스의 의견을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사회 불만층을 흡수해나갔다.
분노라는 감정은 전염성이 강하다.
원로원에 불만이 많았던 사람들은 속속 카틸리나의 지지 세력에 포섭되었다.
현직 집정관이라는 무게감도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데 한몫을 했다.
술라의 옛 부하인 만리우스도 카틸리나의 옆에서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선동했다.
부채가 전부 탕감되고 빚이 사라지면 자신들이 무산자를 돌봐주겠다고 선언했다.
이뤄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헛소리였지만, 이성이 반쯤 마비된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카틸리나는 이제 더 상황을 제어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갈 데까지 가보자는 마음뿐이었다.
원로원 회의에 버젓이 참석한 그는 민회에 제의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법안을 발의했다.
문제는 법안의 내용이 이전보다도 한층 더 과격해졌다는 것이다.
"모든 로마인의 부채를 전액 삭감하고 법으로 정해진 것 이상의 이자를 받은 자들을 엄벌에 처할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벌금으로 지금까지 받은 이자를 그대로 채무자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이건 누가 봐도 원로원과 정면으로 싸우겠다는 선전포고였다.
실라누스가 입을 딱 벌리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쳤습니까, 카틸리나?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사태를 이 지경으로 키운 건 결국 원로원이 일을 똑바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있어요!"
"지금이라도 합리적인 방안을 논의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아니, 이미 이 법안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의지는 확고합니다. 일이 이렇게 됐는데 설득의 여지가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카틸리나는 지금까지의 소극적인 태도를 벗어던졌다.
확 달라진 그의 태도에 카토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완전히 미쳤군. 로마를 망하게 하려고 작정한 게 아닌 이상에야······."
안 그래도 카틸리나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키케로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작심하고 비판을 쏟아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게 어째서 온전히 원로원의 탓입니까! 당신이 제대로 합을 맞추지 못했기 때문에 일이 이 지경이 된 겁니다. 제대로 된 대본조차 숙지 못하고 연극에 오른 무능한 배우가 대본을 탓하고 있는 상황이란 말입니다!"
카틸리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입 조심하시오, 아르피눔 출신의 신참자! 나는 세르기우스 가문의 파트리키이자 현 로마의 집정관이오. 어딜 감히 신참자 따위가 나를 모욕한다는 말이오!"
"벌써 까먹은 것 같으니 사실을 말해주자면 당신은 이 년 전에 그 신참자에게 선거에서 패했지요. 그 결과 저는 작년에 이미 집정관직을 역임했고, 당신은 일 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 시골 촌구석에서 온 주제넘은 벼락출세자가 진심으로 나를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당신의 승리는 베레스의 자폭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라는 걸 모르겠소? 당신은 그저 운 좋게 시류를 잘 타고 그 자리까지 올라갔을 뿐이란 말이오!"
키케로는 즉각 반박하려고 했으나 평정을 유지하며 숨을 골랐다.
똑같이 악을 쓰며 싸워봐야 두 사람의 평판이 사이좋게 깎인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카틸리나와 달리 아직 잃을 게 많은 키케로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주기로 했다.
"이런 식의 감정싸움은 지금 상황을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습니다. 의원 여러분. 집정관의 말도 안 되는 법안은 토론할 가치도 없지만, 불만이 누적되고 있다는 건 분명한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태에 경각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작정 몰아치기보다는 신중하게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때입니다."
키케로의 호소에 다른 의원들 사이에서도 찬동의 말이 솟아났다.
하지만 약간 의견이 다른 사람도 있었다.
카토를 비롯한 강경파들은 이럴 때는 더욱 강하게 나가야 한다고 소리 높여 주장했다.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현명하고 사려 깊은 키케로 의원은 우리가 강하게 나가면 사회적 혼란이 더 가중될 거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일리가 있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폭도들의 눈치를 보며 질질 끌려다닌다는 인상을 줘도 안 됩니다.
아무리 의도가 좋고 훌륭하더라도 우리에겐 따라야 할 법과 질서가 있습니다! 화가 났으니 의견을 들어주라는 요구에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됩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 단호한 대처를 해야 원로원의 권위가 살아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안합니다. 실라누스 집정관은 즉각 거부권을 행사하십시오.
지금까지 숱한 위협이 있었지만 원로원은 언제나 승리했습니다. 우리의 질서를 어지럽히려는 저들에게 더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결의의 표명을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
카토의 열변에 키케로에게 동조하던 의원들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원로원은 지금까지 패배한 적이 없다!'
이 말이 그들의 심금을 울렸다.
확실히 원로원이 외부의 위협에 무릎을 꿇은 적은 지금까지 없었다.
권력을 장악하고 독재를 한 마리우스와 술라도 어쨌거나 원로원 내부의 인사였다.
원로원에게 여러 차례 무력감을 안겨준 폼페이우스도 엄연한 원로원 의원 중 한 명이었다.
상대방이 같은 원로원의 귀족이 아닌 이상 원로원은 외부의 위협에 굴한 적이 없었다.
당장 최대의 위기였던 그라쿠스 형제도 결국은 원로원의 아성을 넘지 못했다.
자신감이 상승한 의원들은 즉각 실라누스에게 단호한 결정을 내리라고 촉구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회의장을 가득 뒤덮었다.
결국 대세를 거스르지 못한 실라누스는 즉각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반발한 카틸리나는 자신의 법안을 민회로 돌리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는 순간까지 출구 없는 갑론을박이 이어지며 어떠한 해답도 도출되지 않았다.
키케로를 비롯한 신중파 의원들은 그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
원로원과 민회가 혼란으로 들썩이는 와중 카이사르는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거액의 부채를 진 채무자이기도 했으나, 처음부터 부채 탕감 따위와 자신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원로원 의원이면서 반 원로원파로 여겨지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래서 일련의 사건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커질 일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낀 카이사르는 키케로에게 카틸리나와 어떤 협약을 했었는지 상세히 물었다.
이미 다 들통 난 상황이라 키케로도 딱히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크라수스가 카틸리나와의 사이를 중재해 줬다는 말을 들은 카이사르는 뭔가 감이 잡히는 것 같았다.
키케로에게 대강 감사 인사를 하고 곧바로 크라수스의 저택으로 향했다.
딸 율리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게 의외였지만, 그만큼 비밀을 요하는 일이었다고 판단했다.
저택에 당도한 카이사르는 즉각 응접실로 안내받았다.
마르쿠스는 주변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홀로 카이사르를 맞이했다.
율리아는 아쉽게도 일이 있어 밖에 나가 있는 상태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법무관 당선 축하 연회를 한 이후 처음이지요?"
"그래. 최고 사제에 이어서 법무관 선거까지 자네에게 신세를 많이 졌네. 다시 감사 인사도 하고 밀린 이야기도 할 겸 이렇게 찾아왔네. 방해가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군."
"방해라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율리아도 있었으면 좋아했을 텐데 돌아오려면 꽤 시간이 걸릴 거라 아쉽네요."
"딸아이가 폐를 끼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다행일세. 결혼 생활이 힘들면 언제든 나에게 말을 하라고 했는데 연락이 없더군. 자네가 얼마나 잘해주고 있을지 익히 짐작이 가네."
카이사르의 속뜻을 짐작한 마르쿠스가 의미심장한 말로 응수했다.
"제가 잘해주는 것 이상으로 율리아도 저를 위해주고 있습니다. 이토록 남편을 위해 헌신하는 아내를 만난 저는 로마 최고의 행운아겠죠."
"딸을 그렇게까지 좋게 봐주니 아비 된 입장으로서도 기쁘네. 그나저나 최근 로마가 많이 시끄러운데 자네 사업은 지장 없나?"
"물론입니다. 부채 탕감이라는 황당한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전혀 없으니까요."
"그래.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커다란 혼란은 찾아올 수밖에 없어 보이네. 듣자하니 크라수스 가문이 카틸리나와 원로원 사이를 중재하려고 한 모양이던데."
마르쿠스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혼란이 길어지면 좋을 게 없으니까요. 나름대로 애를 써봤지만 카틸리나 님은 이 정국을 수습할 능력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나름대로 애를 썼다···내가 아는 자네의 능력이라면 더 효과적인 조언을 해줄 수 있었을 거라 보는데. 내 생각이 틀렸나?"
마르쿠스는 이번에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생각하라는 듯 미소까지 지어주었다.
카이사르가 미간을 좁히며 말끝을 흐렸다.
"자네 설마······."
"시대는 변화를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커다란 변화란 필연적으로 저항을 마주하게 되죠. 저에게는 그 저항을 뚫고 나갈 권력이 아직 없습니다."
"그런 권력을 지닐 수 있는 사람은 현재 로마에 없네. 독재관 정도가 되면 모를까, 집정관으로서도 어림도 없겠지."
"실제로 카틸리나 님이 보여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너무 급진적인 법안이라 실패했다? 아닙니다. 현재 원로원 의원의 대다수는 변화 자체를 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온건한 타협안이 올라왔어도 커다란 반대에 부딪혔을 겁니다."
카이사르도 이 의견에는 동감이었다. 현재 원로원 의원들은 상당수가 현금 유동성 문제를 겪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금융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기득권층은 개혁에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상식이지만, 금융과 관련된 문제에 관해서는 특히 더했다.
"그러니 강제적으로 문제를 키워서 혼란을 가중시키겠다···하지만 생각대로 잘 될까?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도 원로원에 엄청난 충격을 줬지만, 그래도 그들은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너무 급진적이었으니까요. 뜻은 좋았지만 협상의 기본 원리를 완전히 무시한 방법이었습니다. 일단은 원로원 의원들이 개혁안을 제대로 검토해볼 마음만이라도 들게 하면 됩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네만 내가 볼 때는 중대한 허점이 두 개가 있네."
마르쿠스는 별다른 말 없이 카이사르의 잔에 포도주를 채워주었다.
잔을 받아든 그가 말을 이었다.
"우선 지금의 혼란이 어떤 식으로 전개가 될지 알 수 없고, 이게 어떤 방향으로 결론이 날지 예측하기 힘들어졌네. 가령 폭동이 일어났을 때 단순히 찍어 누르려고 하면 내전으로 번질 수도 있어. 저들에게는 술라의 밑에 있던 퇴역병들과 지휘관까지 붙어있으니까."
"그렇겠죠. 명분도 없이 진압하는 건 힘들 겁니다. 아직 군대를 동원해야 할 정도로 저들이 궐기한 것도 아니고요."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이것이네. 채권자와 채무자들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 동시에 지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개혁안을 짜내야 하네.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짐작하고 있겠지?"
카이사르의 생각에 이건 결코 단기간에 해법을 구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상당한 시간과 연구를 통해 정밀한 법안을 만들어야 했다.
아무리 천재인 카이사르라고 해도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건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마르쿠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문제였다.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는 법안 따위는 구조적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제도라면 이야기가 다르죠. 충분히 가능합니다."
"설마 구상이 이미 머릿속에 있는 것인가?"
"대략적인 개념은 이미 잡아두었습니다. 로마의 현 실정에 맞게 세부적인 항목을 조정하고 검토하는 작업을 거쳐봐야죠."
금융 쪽은 전공으로 공부를 하기도 했고, 추가적인 지식을 얻을 수단도 얼마든지 있었다.
물론 현대의 복잡한 법과 제도를 그대로 도입할 마음은 없었다.
너무 현대적인 방식을 가지고 오면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니, 현 실정에 맞게 개량할 필요가 있었다.
카이사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자네···설마 카틸리나에게 돈을 빌려줄 때부터 이 모든 걸 구상했던 것인가? 이 혼란을 역으로 이용하려고?"
얼마 전의 율리아와 똑같은 반응이었다.
마르쿠스는 짐짓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거렸다.
"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전 어디까지나 로마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카틸리나 님에게 돈을 빌려드린 것뿐입니다. 그분이 선거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면 어떤 짓을 저지를지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최선을 다해 조언을 해주었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거죠.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 열심히 타개책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고요."
마르쿠스는 이렇게 혼란스러워질 거라고 예측했다거나, 자신이 주도했다는 말 따위는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두 사람이 주고받은 대화를 되새긴 카이사르는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자네 아주 마음에 드는군. 내가 사위 하나는 아주 제대로 두었어."
"저도 그렇습니다.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좋은 아내와 훌륭한 장인을 두었다고 느끼고 있으니까요."
카이사르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를 폼페이우스가 아니라 마르쿠스에게 보낸 판단이 옳았다는 걸 다시 한번 확신했다.
"자네가 생각하는 개혁안이 쉽게 받아들여지려면 혼란이 조금 더 거세지는 게 좋겠지?"
"그렇겠지만 저는 개입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혼란을 수습하는 데는 끼어들 수도 있겠지만요."
"아아, 걱정하지 말게. 안 그래도 자네가 빌려준 선거비에 대한 보상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거든. 이자 대신이라고 생각하고 내 호의를 받아주게나."
"선물을 주신다면야 고맙게 받아야죠."
두 사람은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주고받았다.
이후로도 두 사람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작금의 정치 상황, 앞으로 원로원의 주역이 될 키케로와 카토, 1년 안에 로마로 귀환하게 될 폼페이우스에 관한 내용이었다.
기다렸다가 율리아를 보고 가라고 했지만, 만족스러운 답을 얻은 카이사르는 곧바로 자신의 관저로 돌아갔다.
바깥까지 나가 그를 배웅한 마르쿠스의 곁을 시원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즐거운 마음으로 카이사르가 줄 선물이라는 걸 기다려 보기로 했다.
※※※※
카이사르는 자신의 말을 곧바로 행동으로 증명했다.
다음날 열린 원로원 회의는 시작부터 카틸리나를 향한 엄청난 비판과 비난으로 점철됐다.
의원들은 섣부르게 카틸리나와 밀약을 맺은 실라누스와 키케로까지 싸잡아서 비판했다.
그리고 카틸리나처럼 무능력한 자가 집정관까지 오른 현실에 한탄했다.
여기서 카이사르가 발언을 요청했다.
그는 카틸리나는 결코 무능한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지금까지 이 모든 게 카틸리나의 계획이었다는 음모론을 제시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카틸리나 집정관은 지지자들에게 마치 자신을 의심해달라는 태도를 끊임없이 보였습니다. 게다가 급한 건 자신일 텐데 본인은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든 책임을 원로원에 떠넘기는 듯한 모습까지 보였지요. 어째서라고 보십니까?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상상도 못 했던 관점에 의원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귀가 얇은 풀케르가 그럴듯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저도 카탈리나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긴 했습니다."
"이런 혼란을 일으켜서 어떤 득이 있는지 의심하는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하지만 카틸리나는 손해 볼 게 없습니다.
왜냐면 그는 원로원의 의지에 따르는 척해서 동방 속주 총독의 자리를 이미 얻었습니다. 이 법안이 통과되지 않아도 그는 풍요로운 동방 속주에서 돈을 박박 긁어모아 자신의 빚을 갚겠지요. 그리고 시민들의 분노는 카틸리나가 아니라 원로원을 향하게 했습니다.
"
"하지만 원로원과 이렇게까지 척을 진 이상 이후의 정계 활동은 불가능할 텐데요?"
"어차피 이런 사고를 친 이상 그가 원로원에서 배제되는 건 시간문제였습니다. 당선되기 위해 부채 탕감이라는 공약을 거는 사람을 어느 의원이 진지하게 믿어주겠습니까."
카틸리나는 즉각 모함이라고 항변했지만. 원로원의 분위기는 이미 카이사르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키케로와 카토마저 미심쩍은 시선으로 카틸리나를 쏘아보았다.
두 사람이 카이사르의 말을 완전히 믿지 않는 건 카틸리나가 그 정도의 계략을 꾸밀 능력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카틸리나의 농간이라면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생각해 보십시오. 원로원과 카틸리나가 밀약을 맺었다는 소문도 대체 어떻게 그렇게 빨리 퍼졌겠습니까. 하지만 모든 게 자작극이었다고 생각하면 이 의문도 단숨에 해소됩니다."
"이건 모함이야! 가만히 있으면 동방 속주로 편하게 가는 상황에서 내가 왜······."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한 카틸리나가 동방 속주로 간다는 사실이 정식으로 공표되면 어차피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선수를 친 거겠죠. 그런 뒤에 대중을 선동해서 분노가 자신이 아닌 원로원을 향하게 만들었습니다. 실제로도 성공하지 않았습니까."
카틸리나는 추가로 항변을 해보려 했으나 누구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추론이 그럴듯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의원들의 분노를 제대로 자극했기 때문이다.
카틸리나가 천하에 다시없을 무뢰배가 되어야 원로원의 분노도 정당성을 띠게 된다.
원로원 의원들이 카이사르의 의견이 옳다며 목에 핏대를 세우는 모습은 참으로 이색적이었다.
카틸리나에게 속았다고 느낀 원로원은 이제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집정관 실라누스는 민회에서 이 법안이 통과될 리도 없지만, 설령 통과된다고 해도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 선포했다.
그러면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할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민회에서 부채 탕감을 가결하면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원로원은 압도적인 박수갈채로 실라누스의 선언에 힘을 실어주었다.
카틸리나가 발의한 법안은 그 즉시 기각되었다.
그런데도 카틸리나는 지지자들의 요구에 힘입어 계속해서 과격한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집정관 실라누스와 원로원의 입김이 닿는 호민관들이 족족 거부권을 행사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원로원은 카틸리나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그 어떤 법안도 통과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확실히 했다.
원로원파인 호민관도 여기에 동참했기 때문에 민회에서도 법이 통과될 가능성조차 사라졌다.
시위하고 폭력사태를 일으켜도 원로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폭력에는 더욱더 강한 폭력으로 맞대응을 하기까지 했다.
카틸리나의 지지자들은 절망했다.
그리고 절망은 자연스럽게 사람을 극단적으로 만든다.
이제는 완전히 카틸리나의 심복이 된 유스투스가 최악의 방법을 제시했다.
"이렇게 된 이상 법의 통과를 방해하는 자들을 죽여 버리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얼마 전만 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는 핀잔이 따라왔겠지만,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다.
카틸리나 일파의 분노와 살의가 한계까지 치달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카틸리나의 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처구니없는 모함을 받으며 고립된 그의 가슴속에서 원로원을 향한 증오가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키케로는 카틸리나의 임기가 끝나는 즉시 그를 고발해 총독직을 수행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공언했다.
카토는 감찰관들을 모두 동원해 카틸리나의 원로원 의원직마저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기가 끝나면 카틸리나는 정치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뒤집어 엎어버리겠다는 생각이 끓어오르던 참이다.
이내 카틸리나의 입에서 살기 어린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그래···들키지만 않는다면 안 될 것도 없겠지."
막다른 골목에 몰려 희망이 없어진 무리들이 기어코 폭주를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 60. 대혼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