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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여신제 스캔들 (68/326)

  < 67. 여신제 스캔들 >

  딸의 임신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크라수스와 별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냉정한 정치가이기 이전에 그 역시 한 명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그는 관저 밖까지 나가 인사차 방문한 마르쿠스와 율리아를 맞이했다.

  율리아가 가마에서 내릴 때는 어찌나 호들갑을 떨면서 부축해줬는지 그녀가 핀잔을 주었다.

  "장인이랑 사위가 어떻게 나란히 이렇게 걱정이 많을까요. 누가 보면 제가 아니라 사위가 친아들인 줄 알겠어요."

  "하나뿐인 딸이 아이를 가졌는데 당연히 신경을 써야지. 오히려 이렇게 하지 않는 게 아버지 실격일 거다."

  "제가 볼 땐 아무리 봐도 과잉보호인데 말이죠."

  "하아···예전엔 눈만 마주쳐도 쪼르르 달려와 안기던 아이였는데······."

  카이사르의 한탄을 대충 한 귀로 흘린 마르쿠스와 율리아는 관저 내부로 들어갔다.

  최고 사제의 관저답게 저택은 넓으면서도 고풍스럽기 그지없었다.

  안에서는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의 인솔 하에 집안의 노예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베스타 여사제들도 장식물의 위치와 축제에 쓸 물품들을 꼼꼼히 정비하며 돌아다녔다.

  마르쿠스는 먼저 율리아와 함께 아우렐리아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집안의 가장은 카이사르지만 그도 어머니인 아우렐리아의 의견에는 전적으로 따랐다.

  젊은 시절 남편을 여의었으면서도 재혼하지 않고 정성을 쏟아준 어머니를 존경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카이사르 가문의 가장 웃어른은 아우렐리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품 있게 나이가 든 카이사르 가문의 안주인은 오랜만에 방문한 손녀와 손녀사위를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마르쿠스는 준비해온 선물을 건네고 율리아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자리를 피해주었다.

  율리아가 아버지와 할머니와 회포를 푸는 동안 마르쿠스는 베스타 여사제들과 안면을 텄다.

  베스타 여사제들은 여성이면서도 일반적인 여성들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이름 그대로 불과 화로를 관장한다고 알려진 베스타 여신을 섬기는 사제들이다.

  베스타 신전에 비치된 화로는 특히 신성하게 여겨졌으며 여사제들의 임무는 이 불꽃이 꺼지지 않게 보호하는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베스타 신전의 화로불이 꺼질 때 재앙이 찾아온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역할은 굉장히 중요했다.

  베스타 여사제들은 10살 미만에 엄격한 선발을 거쳐 뽑히는데 30년 동안 정절을 맹세해야 했다.

  이후로도 공부와 종교의식에 매진해야 하고 시민들의 하소연과 유언장 수탁을 맡기도 했다.

  이렇게 엄격한 삶을 사는 만큼 그들이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엄청났다.

  여사제들은 공식행사 때 무장한 군인들의 호위를 받았으며, 수많은 분쟁이 발생했을 때 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과거 독재자 술라마저 베스타 여사제들의 탄원을 무시하지 못했다.

  게다가 여사제들은 로마 여성들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재산권과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사제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혼인하지 않고 은퇴생활을 즐기는 이들이 많았다.

  이런 여사제들을 성적으로 희롱하는 건 국가반역죄로 여겨졌으며 로마시민이라 할지라도 극형을 면치 못했다.

  마르쿠스가 수석 사제인 리키니아를 향해 공손히 예를 표했다.

  "사제님들을 뵙습니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입니다."

  "반갑습니다. 부족하지만 베스탈리스를 이끌고 있는 리키니아입니다."

  리키니아는 미인이었다.

  은퇴를 얼마 남기지 않은 나이였으나, 아직도 고운 미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수석 사제를 맡을 만큼의 품위와 지성도

  사실 까다로운 선별과정을 거치는 만큼 베스타 여사제들은 대부분 미색이 출중했다.

  그녀들이 수많은 남성의 존경과 동경의 대상이 되는 데에는 이런 이유도 분명 영향을 끼쳤다.

  "여신제 준비에 어려움은 없으십니까? 재정적인 지원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 일손이 딸린다면 가문의 사람들을 보내 준비를 도와드리는 것도 가능합니다."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원로원에 추가예산을 편성해 달라고 했는데 답신이 너무 늦더군요. 덕분에 예산과 사람이 전부 부족한 상황입니다. 염치없지만 도움을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원로원은 지금 다른 문제를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으니까요. 여신제에까지 신경을 쓰긴 무리일 겁니다."

  "보나 여신제가 여성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아 조금 속상하네요."

  리키니아는 원로원을 향한 야속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보나 여신이 로마의 여성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 존재인지 남성들은 잘 알지 못했다.

  물론 마르쿠스도 지식으로만 알고 있을 뿐 이해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원로원이 사제님들을 무시하는 건 절대 아닐 겁니다."

  "모르겠네요. 작년 여신제 때도 원로원은 별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으니까요."

  "아, 그건 그때도 일이 제법 있었기 때문에······."

  작년 이맘때쯤이면 카틸리나의 임기 시작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다.

  신경이 곤두설 대로 곤두선 원로원이 여신제 준비에 적극적인 협조를 해줬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건 원로원의 사정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행사를 책임져야 하는 리키니아로서는 2년 연속 시국 핑계만 대는 원로원이 짜증 날뿐이었다.

  "신심이 그토록 엷은 분들이니 고난이 계속 찾아오는 것이겠죠. 그런 때일수록 신들께 겸손한 자세로 나아가야 하거늘······."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십시오. 부족한 몸이지만 저라도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사회가 많이 불안정해 의식을 잘 치를 수 있을지 걱정했거든요. 크라수스 가문에서 도와주신다면 정말 큰 힘이 될 겁니다. 마르쿠스 님께 신들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리키니아가 우아하게 고개를 숙이자 옆에 있는 어린 여사제들도 그녀를 따라 고개를 꾸벅 숙였다.

  "로마의 시민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여신제를 성공적으로 치르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환한 미소를 보이는 리키니아와 여사제들을 본 마르쿠스는 마음 한구석이 걸렸다.

  이번 보나 여신제에서 대형 사건이 터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을 믿지는 않더라도 자신의 직분을 다하는 사람들이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건 그다지 유쾌한 광경은 아니었다.

  그래서 마르쿠스는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마디 충고를 건넸다.

  "말씀하셨다시피 지금 혼란이 막 수습되는 시기라 어떤 변고가 일어날지 모릅니다. 혹시 사고가 일어나더라도 사제님들의 잘못이 아니니 너무 자책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저희들의 덕이 모자란 탓이겠지요.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성심껏 준비를 마칠 생각입니다."

  "그리고 방비를 철저히 하시길 추천 드립니다. 금남의 구역이다 보니 여신제를 엿보고 싶어 하는 남성은 상당히 많습니다.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틈타 몰래 잠입하려는 불경한 생각을 가진 자들이 나올 수 있으니까요."

  "설마 그런 신성모독을 저지를 자가···생각해보니 절대 없다고는 단언할 수 없겠네요. 소중한 조언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요. 지원금은 돌아가는 대로 일을 거들어드릴 사람들 손에 들려 보내겠습니다. 전원 여성들로 보낼 테니 의식이 끝난 뒤 뒷정리까지 도와드릴 수 있을 겁니다."

  사전작업을 전부 끝마친 마르쿠스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율리아와 카이사르를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가문의 사람들을 보내 도움을 주기로 했으니 굳이 율리아를 남겨둘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르쿠스는 다나에를 불러 돈을 맡기는 한편 은밀하게 몇 가지 명령을 내렸다.

  "이번에 네가 해줘야 할 역할은 이 정도란다. 얼마나 중요한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지?"

  "네. 그런데 정말로 그런 황당한 일이 일어날까요?"

  "9할 이상으로 보고 있단다. 그러니까 널 보내는 거고."

  "마님을 어떻게든 집으로 데려오신 이유가 이해가 가네요. 알겠습니다. 도련님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볼게요."

  다나에가 눈을 빛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번 임무를 잘 해내면 보상을 기대해 봐도 되겠죠?"

  "그래, 그래. 중요한 일을 해줬으니 당연히 상응하는 보답을 해줘야지."

  "알겠습니다. 반드시 좋은 보고를 듣게 해드릴게요."

  오랜만에 맡은 큰 임무로 잔뜩 신이 난 다나에는 통통 튀는 발걸음으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나에는 노예 출신이기는 해도 크라수스 가문의 해방노예다.

  보나 여신제에 참석하는 데는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거기에 베스타 여사제들에게 거액의 지원금을 쥐어주었으니 설령 누군가 문제를 제기해도 리키니아가 알아서 해결해줄 것이다.

  '그 정도 액수면 아마 앞으로 2년은 예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지.'

  이 세상에 예산이 넘쳐흘러 고민하지 않는 조직은 정말 극소수에 불과하다.

  수많은 후원금을 받고 있는 로마의 신전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르쿠스의 눈에는 리키니아의 감격한 얼굴이 벌써부터 눈에 선하게 보이는듯했다..

  꽤나 거액을 지출했지만 베스타 여사제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비용이라고 생각하면 아깝지는 않았다.

  그녀들은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는 없었지만, 누군가의 영향력을 극대화해주는 것은 가능했다.

  당장 다음 달부터 시작될 마르쿠스의 정계활동에 커다란 밑거름이 되어 주리라.

  '자, 이제 남은 건 그자가 예상대로 움직여주느냐 하는 건데.'

  산뜻하게 포도주로 목을 축인 마르쿠스는 창밖으로 보이는 팔라티노 언덕의 야경을 내다보았다.

  고요하기 그지없는 바깥의 분위기는 마치 현재 로마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 했다.

  폼페이우스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는 로마의 정계는 폭풍전야의 고요함에 휩싸여 있었다.

  리키니아의 한탄처럼 원로들은 현재 다른 그 어떤 문제에도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로마 시민들도 원로원과 폼페이우스가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심정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원로들과 시민들의 관심을 잠깐이지만 송두리째 돌아가게 하는 사건이 터졌다.

  ※※※※

  로마에 수많은 명문 가문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클라우디우스 씨족은 코르넬리우스 씨족과 맞먹는 로마 최고의 귀족이었다.

  클라우디우스 씨족은 고대 로마 초창기부터 말기까지 언제나 뛰어난 인물들을 배출해왔다.

  이 클라우디우스 씨족에 속하는 풀크루스 가문은 33세의 청년을 가장으로 두고 있었다.

  젊은 풀크루스는 학식이 뛰어나고 호탕한 사내였으나 다소 성격이 급하다는 게 흠이었다.

  그는 술라의 손녀인 폼페이아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혼담을 넣기도 전에 폼페이아는 이미 카이사르의 후처가 된 상태였다.

  절망스러운 결과였으나 풀크루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폼페이아에게 구애를 했고, 폼페이아도 그것을 썩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마침 폼페이아도 가문에서 겉도는 느낌 때문에 외로움을 타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래도 그녀는 여지만을 남길 뿐 완전히 풀크루스를 허락하지는 않았다.

  애가 탄 풀크루스는 누구의 방해도 없이 그녀와 단 둘이 만날 수 있는 틈을 보았으나 쉽지 않았다.

  폼페이아는 최고 사제이자 법무관인 카이사르의 아내라 언제나 노예들을 대동하고 다녔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주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날이 단 하루 있었다.

  바로 보나 여신제였다.

  집안의 남자들은 노예까지 포함해 전원 밖으로 나갔고, 여자 노예들은 의식의 진행을 돕느라 폼페이아의 곁을 지킬 여유가 없었다.

  이때가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판단한 풀크루스는 여장을 하고 여신제에 몰래 잠입하기로 했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계획이었으나 사랑에 눈이 먼 풀크루스는 뒷감당을 고려하지 않았다.

  폼페이아의 여자 노예를 매수한 그는 두꺼운 옷과 가발로 변장했다.

  사전에 말을 맞춰둔 대로 풀크루스는 무사히 관저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제 몰래 폼페이아의 방으로 올라가 노예가 그녀를 데려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생각보다 더 빠르게 문제가 발생했다.

  베스타 여사제들이 예상보다 더 엄격하게 출입자들을 살펴보며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풀크루스는 황급히 위로 올라가려 했지만 무리였다.

  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소녀 사제가 풀크루스의 이상한 행동을 감지하고 근처로 다가왔다.

  "혹시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나요?"

  "······."

  풀크루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묵묵부답인 풀크루스를 살펴보는 소녀의 눈이 점점 의심으로 물들었다.

  몇 겹으로 칭칭 감싸놓은 옷은 다른 여인들과는 달리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화려한 차림을 보니 악사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다른 악사들과 비교해도 이질적인 부분이 있었다.

  치렁치렁한 머리로 얼굴을 가려서 이목구비를 확인하기도 힘들었다.

  "자매님? 실례지만 어느 가문에서 오셨는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쿨럭, 쿨럭."

  풀크루스는 기침을 하며 목이 쉬어서 말을 할 수 없다는 동작을 취했다.

  하지만 그 행동을 곧이곧대로 밀을 정도로 베스타 여사제는 어수룩하지 않았다.

  아직 어려도 선별된 날부터 끊임없이 교육을 받아온 소녀의 안목은 날카로웠다.

  그녀는 이미 풀크루스가 남자라는 걸 반쯤 확신했다.

  게다가 어린 베스타 여사제와 덩치가 큰 여인이 옥신각신하는 듯한 모습은 금세 주변의 눈길을 끌었다.

  리키니아가 엄숙한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

  "아이밀리아, 이제 곧 의식을 시작할 텐데 뭘 하고 있는 거니?"

  "아 수석 사제님, 이분이 조금 이상한 행동을 보이셔서 이유를 여쭤보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답을 하시지 않네요."

  "그래?"

  리키니아가 위엄이 깃든 시선으로 풀크루스를 올려다보았다.

  마르쿠스와 이야기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자매님, 어느 가문에서 오신 귀빈이신지 이름을 들려주시지요."

  "···쿨럭, 쿨럭."

  "감기기 심하게 걸리신 듯하군요. 그럼 그 치렁치렁한 머리를 좀 올려주시겠습니까? 얼굴이라도 확인할 수 있도록 협조 부탁드립니다."

  풀크루스는 우물쭈물 어찌할 바를 몰랐다.

  넘치는 객기로 잠시 마비되었던 이성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여기에서 정체가 탄로 난다면 그의 인생은 그걸로 끝이었다.

  명문 귀족이든 뭐든 종교 행사를 더럽힌 이상 정치적인 생명은 거의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금남의 종교행사에 남자가 침입한 것은 신성모독죄로 여겨지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신성모독을 했다고 법정에 서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베스타 여사제가 주관하는 행사를 더럽힌다는 건, 그들의 순결성을 해하는 거라 해석될 여지가 충분했다.

  현행범으로 잡히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풀크루스는 주변을 둘러싼 여인들을 밀치고 전력을 다해 도망쳤다.

  그러나 그가 빠져나가려는 순간 리키니아가 풀크루스의 가발을 잡고 뒤로 당겼다.

  가발이 벗겨지며 풀크루스의 맨얼굴이 아주 살짝 드러났다.

  실내가 어두웠기 때문에 누구인지 판별하기는 힘들었으나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이건 신성모독이야! 감히 보나 여신제의 의식에 남자가 몰래 숨어들다니!"

  리키니아의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를 접한 이들은 바싹 엎드려 여신의 자비를 빌었다.

  다른 베스타 사제들도 머리에 쓰고 있는 하얀 베일을 내리고 신들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기도했다.

  머리 끝까지 분노가 치밀어 오른 리키니아는 즉각 의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도망간 남자를 쫓아가세요. 그자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를 지었습니다. 베스타 여신과 보나 여신께 맹세하노니 당신의 충실한 종 리키니아가 반드시 그자가 정당한 죗값을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의식의 준비를 돕던 노예들은 물론 귀족 여성들까지 침입자를 찾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리키니아는 신들에게 올리는 기도를 끝내고 한발자국 늦게 걸음을 뗐다.

  그래도 그녀는 내심 의식이 시작하기 전에 범인을 적발해 다행이라고 여겼다.

  만약 정식으로 여신제가 시작한 뒤에 의식이 더럽혀졌다는 걸 알게 됐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때는 관리감독을 철저히 하지 못했던 베스타 여사제들도 비판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처벌까지는 받지 않았겠으나 평생 씻을 수 없는 치욕으로 기억됐을 가능성이 높다.

  리키니아는 사전에 보안을 철저하게 할 것을 당부한 마르쿠스에게 마음속으로 깊은 감사를 표했다.

  한 시름 돌린 리키니아와 달리 풀크루스는 공포와 초조함으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이런 무모한 계획을 짠 과거의 자신을 때려죽이고 싶을 정도로 후회가 막심했다.

  여기에서 붙들리면 베스타 여사제의 순결을 범했다는 죄목으로 법정에 설 확률이 높다.

  풀크루스는 크게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워낙 경황없이 도망쳐서 자신이 어느 쪽으로 왔는지도 파악이 안 됐다.

  그리고 곧 자신이 관저 외부가 아닌 내부로 왔다는 걸 깨달은 그의 표정이 참담함으로 물들었다.

  저 먼 곳에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필사적으로 도망갈 곳을 두리번거리던 찰나, 등 뒤에서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라우디우스 풀크루스님, 이리로 오시죠."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커다란 휘장의 뒤에서 손짓을 하고 있는 한 여인이 보였다.

  무심코 눈길이 갈 정도의 미녀였으나 궁지에 몰린 풀크루스는 그런 것조차 신경 쓰지 못했다..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도 의문이었으나 어쨌든 지금은 그녀를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여인은 허겁지겁 방으로 들어온 풀크루스를 그대로 잔뜩 쌓여있는 옷 꾸러미에 파묻어버렸다.

  미리 준비라도 해둔 것인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 어마어마하게 쌓여있는 옷은 풀크루스의 덩치를 완벽히 가리고도 남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여인들을 이끌고 온 리키니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풀크루스를 숨겨준 여인을 발견하고 빠른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여인이 풀크루스가 있는 곳을 실토한다면 그의 인생은 그걸로 끝이다.

  눈을 질끈 감은 그의 귓가에 리키니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 풀르쿠스를 다그칠 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자상하고 부드러운 어조였다.

  "다나에, 혹시 여기에 덩치가 커다란 사내가 나타나지 않았나요? 어설픈 여장을 하고 있었을 거예요."

  "아···그분 역시 남자였군요. 방금 전 허겁지겁 달려오는 걸 봤어요. 저와 눈이 마주치더니 곧장 겁에 질린 얼굴로 저쪽으로 달려가던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얼굴을 똑똑히 봐둘 걸 그랬네요."

  "그랬군요. 다나에 양도 그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는 못한 모양이네요. 이럴 줄 알았다면 아까 전 얼굴을 잘 봐뒀어야 했는데······."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는 리키니아의 뒤에서 누군가가 쭈뼛쭈뼛 손을 들었다.

  평상시 폼페이아를 모시고 있는 노예였다.

  "저기···사제님, 확실하지 않아서 말씀드리지 못하고 있었는데요······."

  "혹시 침입자의 신상에 대해 짐작이 가는 게 있으신가요? 틀려도 좋으니 말해보세요."

  "예. 저는 폼페이아 마님을 줄곧 모셨기 때문에 그런 비슷한 얼굴을 여러 번 본 기억이 있습니다. 폼페이아 님을 여러 번 찾아오셨던 클라우디우스 풀크루스라는 귀족분과 굉장히 닮은꼴이었어요."

  "클라우디우스 풀크루스······."

  상상외로 거물인 귀족이 거론되자 리키나아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여기저기서 풀크루스와 침입자가 쏙 닮았다는 말들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사태가 예상보다 커질 것 같자 리키니아는 순간 고뇌에 빠졌다.

  이 소문이 퍼진다면 민회는 물론 원로원까지 발칵 뒤집힐 것이다.

  안 그래도 불안정한 현 로마의 상황이 한층 더 시끄러워질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이유가 뭐가 됐든 신성모독죄를 저지른 자는 용서할 수 없다.

  "지금 당장 베스타 신전으로 돌아가 정식으로 풀크루스 가문에 협조 요구서를 보내겠습니다. 만약 죄가 사실로 드러날 경우 클라우디우스 씨족이라고 해도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리키니아는 단호하게 선언한 뒤 사람들을 이끌고 최고 사제의 관저를 나섰다.

  사람들이 전부 물러가자 다나에는 풀크루스가 숨어있는 옷 꾸러미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기요, 이제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 나오셔도 될 것 같은데요."

  "······."

  풀크루스의 눈빛은 이미 반쯤 죽어있었다.

  안에서 대화를 다 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나에는 살짝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풀죽어 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말도 안 되는 대형사고를 친 분치고는 굉장히 빠르게 의기소침해 지시네요."

  "···너도 들었잖아. 내 이름이 까발려졌는데 더 이상 뭘 어떻게 해."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풀크루스의 목소리는 절망에 잠겨 있었다.

  차라리 자수를 해서 국외 추방 정도로 끝내달라고 할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희망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기적 같이 동아줄이 내려올 때가 있다.

  풀크루스에게는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아직 완전히 끝난 거 아니에요. 풀크루스 님을 도와주려는 분이 계시거든요."

  침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물론 공짜는 아니에요. 이쪽의 요구사항, 한번 들어보실래요?"

  마르쿠스의 제안을 가지고 온 대행인.

  다나에가 이미 답이 정해진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 67. 여신제 스캔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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