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평민이 되어라 >
"솔직히 의심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정말로 놀랐어요. 베스타 여사제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공간에 여장을 하고 침입하다니요."
"···그러고 보니 넌 내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지. 대체 뭐냐, 너 누구야?"
"아, 자기소개가 아직 이었군요. 크라수스 가문에서 리키니우스 씨족의 이름을 받은 해방노예, 다나에라고 합니다."
"크라수스 가문? 거기 장남이 카이사르의 사위인 걸로 아는데 어째서 나를 도와주겠다는 거지?"
풀크루스의 목소리엔 짙은 의심이 배어있었다.
그가 저지른 일은 카이사르에게 엄청난 정치적 부담을 안길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편을 들어준다는 것인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나에는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풀크루스 님의 정체가 드러나는 게 카이사르 님께 더 부담이 가지 않을까요? 누군지 모를 정체불명의 침입자로 사건이 마무리 되는 게 양측 모두에게 더 좋을 것 같은데요."
"그, 그런가···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군."
"솔직히 제 생각엔 이런 대형 사고를 치신 분을 감싸도 별 이득은 없다고 생각하는데···도련님의 판단은 언제나 틀린 적이 없으시니 제 생각이 틀린 거겠죠."
다나에의 신랄한 일침에 풀크루스의 얼굴이 휴지조각마냥 일그러졌다.
그래도 워낙 저지른 일이 컸는지라 마땅히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해방노예 치고는 화법이 꽤나 당차구나."
"어쨌든 저도 자유민이니까요. 도련님께서도 당당히 나가도 된다고 하셨고요. 전 제가 섬기는 분의 말을 무엇보다 우선하거든요."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나는 목줄을 잡힌 상황이 아니더냐. 그런데 한 가지만 묻자. 내가 잠입할 거라는 걸 대체 어떻게 안 거지?"
"그거야 저도 모르죠. 저야 도련님께서 내린 명령을 충실히 수행할 뿐이니까요."
다나에는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풀크루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아니, 어떻게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난 내가 여기 올 거라는 걸 가족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사전에 매수해둔 노예가 계획을 불었다고 해도 카이사르가 아닌 사위에게 말한다는 건 아귀가 맞지 않아. 넌 이런 게 납득이 된다는 거냐?"
"안 될 게 뭐가 있겠어요. 도련님을 옆에서 모시다보면 이런 일 정도로는 놀라지도 않아요. 기껏 해봐야 아, 역시 도련님이다. 라는 감상이 들 정도라고 해야 할까요?"
풀크루스는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심정이었다.
자신은 귀신에 홀린 것만 같은데 이게 별로 놀랍지도 않은 일이라고 한다.
다나에가 모신다는 마르쿠스라는 자의 정체가 그저 궁금할 따름이었다.
물론 최근 명성을 떨치고 있는 마르쿠스라는 이름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카틸리나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이후 금융개혁안까지 입안한 희대의 천재.
거기에 공화정을 사랑하는 마음 또한 따를 자가 없다는 비현실적인 인물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니 고작 그 정도가 아닌 듯 보였다.
물론 다나에가 자신의 주인을 턱없이 과대평가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노예들 중에는 주인을 실제보다 훨씬 더 우러러보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니까.
"그래···어쨌거나 정리하자면 그 대단한 마르쿠스가 내가 여신제에 여장하고 잠입할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내가 잡히지 않게 도와주기 위해 널 보냈다 이건가?"
"예. 그리고 만약 풀크루스 님의 얼굴이 다른 사람에게 목격된다면 뒤처리를 도와주겠다는 말도 전하라고 하셨어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공짜는 아니에요."
"···진짜로 이게 수습이 가능한가?"
"어차피 목격한 사람은 노예 몇 명이고 베스타 여사제님들은 풀크루스 님을 직접 본 게 아니잖아요. 충분히 발뺌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물론 풀크루스 님이 저희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의 얘기지만요."
"그래. 그쪽을 믿어보지. 제안을 말해봐라."
풀크루스에게는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르쿠스는 풀크루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풀크루스가 그를 고깝게 볼 이유는 전혀 없었다.
아니, 냉정을 찾고 생각해 보니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말로 이 상황을 무사히 넘길 수만 있다면 무릎을 꿇고 감사 인사를 하는 게 마땅했다.
마르쿠스가 무슨 제안을 하더라도 받아들인다는 것 외의 선택지는 없었다.
풀크루스는 전 재산을 바치라고 해도 기꺼이 내놓을 의향이 있었다.
그가 다나에의 눈을 직시했다.
얼마나 심각한 요구를 한다고 하더라도 놀라지 않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다나에의 입에서 흘러나온 요구사항을 들은 순간 풀크루스의 눈이 저절로 휘둥그레졌다.
"재판 결과 무죄가 나온다면 도련님의 클리엔테스가 되세요."
"···그리고, 또?"
"네?"
"그 외에도 원하는 게 있을 것 아냐. 한꺼번에 말하라고."
"그게 다인데요?"
예상보다도 훨씬 가벼운 수준의 제안이었다.
풀크루스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로 고작 그게 다라고? 이 클라우디우스 풀크루스에게 그런 어마어마한 빚을 지우면서 요구하는 게 고작 그 정도라는 말인가?"
"아, 제일 중요한 건 이거에요. 절대로 도련님과 풀크루스 님의 관계가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안 돼요. 공식적으로 두 분은 아무런 접점도 없는 사이인 거죠. 풀크루스 님이 도련님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면 안 된다는 거예요."
"굳이 관계를 비밀로 한다는 건 나를 통해 뭔가를 꾸미려는 거로군. 그래, 그 정도는 돼야 나도 납득이 가능하지."
풀크루스는 다소 다혈질기가 있긴 해도 절대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그가 단순한 바보에 불과했다면 마르쿠스가 이용하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 이견은 없는 걸로 알겠습니다."
"잠깐. 정말로 내 대답만 듣고 끝낸다고? 내가 마르쿠스의 클리엔테스가 된다고 해도 뭘 시킬 건지 언질은 줘야지."
"저도 도련님이 풀크루스 님에게 무엇을 시킬지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재판이 끝나면 풀크루스 님께서 자연스레 마르쿠스 님을 찾고 싶은 마음이 들 거라고 하셨어요. 그때 설명을 드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하긴 무죄를 받으면 당연히 감사 인사를 하러 가야지. 다른 사람의 눈에 띄면 안 된다고 했으니 비밀리에 가야겠지만. 어쨌든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하자는 거로군."
풀크루스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혼자서 결론을 내렸다.
"그럼 계약은 성립된 걸로 알겠습니다."
"잠깐,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어떻게 나가지? 관저 안에 아직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당연히 다 준비를 했습니다. 여기 옷 꾸러미 안에 들어가 계세요. 친절하게 수레에 담아 모셔드릴 테니까요."
풀크루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나에의 말에 따랐다.
크라수스 가문의 사람들이 끄는 수레에 실린 그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관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풀크루스에게 있어서는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파란만장한 하루였다.
※※※※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풀크루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능청스럽게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보나 여신제에서 있었던 일이 알려지자 로마는 완전히 뒤집어졌다.
로마인들은 신성모독 행위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여성들의 분노는 엄청났다.
출산을 관장하는 여신이 모독당했으니 그 자리에 있던 여성들은 전부 저주받은 아이를 낳게 될 거라는 말이 떠돌았다.
마르쿠스가 율리아를 사전에 집으로 데려온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아내가 그런 미신에 마음 졸이며 분노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으면 했다.
물론 율리아를 제외한 다른 시민들의 분개는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이 신성모독이 종교의 최고 책임자의 관저에서 일어났다는 게 더욱 많은 사람들을 분노케 했다.
시민들은 원로원과 폼페이우스의 대립구도조차 까맣게 잊고 이 사건에 몰두했다.
대체 어떤 무뢰배가 신성한 의식을 더럽혔는지 색출해내라는 요구가 매일같이 빗발쳤다.
원로원은 이 사태를 기회라고 생각했다.
종교계의 최고 책임자인 카이사르를 정당하게 탄핵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카토를 선두로 한 반카이사르파는 이건 최고 사제의 직무 태만이라고 소리 높여 주장했다.
세간에는 침입자가 클라우디우스 풀크루스로 추정되며, 카이사르의 아내 폼페이아를 노리고 이런 일을 저지른 것 같다는 소문이 퍼졌다.
카이사르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즉각 폼페이아와 이혼해버렸다.
시민들은 항상 남의 여자를 뺏던 카이사르가 처음으로 자신의 여자를 빼앗겼다며 고소해했다.
이 와중에 베스타 신전에서도 풀크루스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나섰다.
수석 여사제 리키니아는 풀크루스에게 당일 현장에 있지 않았다는 증거제시를 요구했다.
풀크루스는 당연히 사실 무근의 헛소문이며 자신은 결백하다고 주장했다.
필요하다면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밝히겠다며 떳떳한 태도를 보였다.
용의자가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나오니 시민들도 무작정 그를 욕할 수만은 없게 됐다.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실각시키기 위해 즉각 재판을 열었다.
피고인은 당연히 클라우디우스 풀크루스, 죄목은 베스타 여사제의 순결성을 해친 신성모독죄였다.
그들의 전략은 명쾌했다.
풀크루스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폼페이아를 공범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카이사르는 자연히 아내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는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법적인 책임을 무는 건 무리라도 최고 사제직에서 내려오라는 압박쯤은 충분히 넣을 수 있었다 풀크루스가 원로원에 명망이 높았다면 이런 전략을 쓰긴 꺼려졌겠지만, 다행히 상당수 의원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클라우디우스 씨족은 명문이긴 하나 명문인 만큼 정적 또한 많았던 것이다.
카이사르의 정적들이 얼마나 많은 지는 거론할 필요조차 없었다.
원로원은 이 재판을 폼페이우스가 오기 전에 재빠르게 끝내버리기로 했다.
이 승리를 발판으로 삼아 한층 더 기세를 올려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원로원의 이런 의도로 불필요한 절차를 모두 생략하고 하루 만에 배심원 평결까지 끝내자는 요구를 했다.
그리고 풀크루스가 당당하다면 이 요구에 응해보라는 압박을 가했다.
놀랍게도 풀크루스는 바라던 바라며 당당히 응수했다.
결국 재판이 열리는 당일 판결까지 나오는 사상초유의 법정이 개최됐다.
시민들은 하루 만에 끝나는 이색적인 재판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풀크루스를 규탄하는 원로원측의 첫 주자는 카토였다.
그는 연단 위에 올라가 카랑카랑 목소리로 풀크루스를 당장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풀크루스가 행한 일은 단순한 신성모독이 아닙니다! 그는 베스타 여사제들이 주관하는 의식을 오염시킨 것입니다.
성스러워야 할 베스타 여사제들의 행사가 풀크루스의 더러운 욕망으로 덧칠 됐다는 겁니다. 이건 명백하게 베스타 여사제들의 성스러움, 즉 순결성을 해하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로마법에서는 이런 자들에게 극형을 선고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피고 클라우디우스 풀크루스는 저지른 죄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의 공범인 폼페이아는 평생 재혼을 금지하고, 자신의 행위를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최고 사제인 카이사르 역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함이 옳습니다!
"
카토의 선동에 넘어간 시민들 중 일부가 풀크루스를 즉각 처형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풀크루스 측은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풀크루스의 변호사는 단호하게 자신들에게 걸린 혐의를 전부 부정했다.
"현명하고 사려 깊은 배심원단과 시민 여러분, 이건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재판입니다. 로마는 전통적으로 신성모독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성모독을 한 자는 신에게 심판받을 뿐, 우리가 먼저 나서서 처벌하지는 않습니다. 그건 위대한 신들께서 하실 일을 우리가 주제넘게 가로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들께서 자비롭게 그자를 심판하지 않더라도 신성모독을 일으킨 자는 사회적으로 매장당합니다. 귀족이라면 선거에서 참패하고, 평민이라면 이웃에게 외면당합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문제입니다. 로마법 어디를 뒤져봐도 신성모독 행위를 한 자를 이런 식으로 법정에 세우라는 조문은 없습니다.
"
풀크루스측의 열변에 시민들이 술렁였다.
동요하는 분위기를 직감한 풀크루스측의 어조에 한층 더 자신감이 깃들었다.
"원로원측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건 일반적인 신성모독이 아니라 베스타 여사제들의 순결성을 해치려고 한 악질적인 행위라고요.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당연히 그자는 극형에 처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침입자는 의식이 시작하기 전에 발각됐다고 합니다. 즉, 준비 단계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해석에 따라 논란이 될 여지가 충분히 남아있습니다.
게다가 가장 결정적인 것은 피고 클라우디우스 풀크루스가 침입자라는 확실한 증거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겁니다! 피고는 당일 현장에 없었다고 확실히 말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이 법정에 끌려나올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
변호인측의 연설이 끝나자 시민들은 당황했다. 지금 말에 의하면 풀크루스는 누가 봐도 억울하게 기소당한 피해자로 보였던 까닭이다.
그래도 원로원은 풀크루스측이 이런 식의 반론을 하리라고는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카토는 곧바로 증인신문으로 들어갈 것을 재판장에게 요청했다.
먼저 증인으로 나온 사람은 베스타 수석 여사제 리키니아였다.
그녀가 증인석에 서자 배심원단과 시민들이 경의를 표했다.
카토도 평소와는 달리 정중하게 질문을 시작했다.
"증인께서는 여신제 당일 여장을 하고 들어온 침입자를 적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본 그 자의 얼굴이 저 풀크루스와 일치하지 않습니까?"
리키니아는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서있는 풀크루스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나 풀크루스는 그때와는 달리 머리 모양이 완전히 달라진 터라 인상이 묘하게 달라보였다.
리키니아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지만 당시 침입자는 화장을 하고 있었고 얼굴을 자세히는 보지 못해 확답을 드리긴 어렵습니다. 닮긴 했지만 그저 닮은 사람일 뿐인 가능성은 있으니까요."
카토는 포기하지 않고 다른 증인들을 수차례 소환했다. 폼페이아의 노예들도 마찬가지로 확신은 하지 못하겠다고 답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입을 잘못 놀리면 주인까지 같이 처벌 받을 수 있었으니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카토는 최고 신관인 카이사르에게도 증언을 요청했다.
"카이사르, 당신은 추문이 일자마자 아내 폼페이아와 이혼했습니다. 이건 폼페이아가 심각한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인지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전혀 아닙니다."
"그러면 어째서 아내와 이혼했다는 말입니까."
카이사르는 아주 엄숙한 표정으로 뻔뻔하기 그지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카이사르의 아내 되는 사람은 의심조차 받아서는 안 됩니다."
시민들은 카이사르의 말에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웃음을 터트렸다.
분위기가 이상해진 걸 파악한 원로원측은 카이사르에게 더는 한 마디의 증언도 요구하지 않았다.
카토는 헛기침을 해 주위를 환기시키고는 많은 사람들이 한결 같이 인상이 비슷하다고 한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모든 정황증거가 침입자는 풀크루스라는 걸 가리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풀크루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는 여신제 당일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별장에 있다가 이틀 뒤 로마로 돌아왔다고 항변했다.
그는 자신의 일정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명의 노예를 동원했다.
물론 노예들, 그것도 피고에게 속한 노예들의 증언은 큰 신빙성을 지니지는 못한다.
여기서 마르쿠스가 매수한 시민들이 추가로 풀크루스를 별장 근처에서 보았노라 증언했다.
그들은 풀크루스의 별장이 위치한 인근에서 살아가는 농민들이었다.
양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으나 이대로 가면 풀크루스 측이 승리할 가능성이 더 높아보였다.
다급해진 원로원측은 비장의 한 수를 던졌다.
전직 집정관인 키케로가 증인석에 섰다.
원래 그는 이 재판에서 중립을 지킬 생각이었으나 원로원의 끈질긴 설득에 결국 마음을 돌렸다.
"풀크루스가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별장에 있었다는 증언은 위증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는 여신제 당일 아침 풀크루스를 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로마에 있었는데 어떻게 반나절 만에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별장까지 이동한다는 말입니까."
키케로의 증언에 법정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풀크루스는 처음으로 당황하며 키케로야말로 위증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양측의 증언이 완전히 엇갈린 이상 이제 신뢰도의 싸움이 된다.
하지만 전직 집정관이자 명성이 하늘을 찌르는 키케로와, 일반 시민과 노예로 이루어진 풀크루스의 증인은 균형이 전혀 맞지 않았다.
풀크루스는 이대로 배심원 평결에 들어가면 위험하다고 느꼈지만 뾰족한 수단이 없었다.
결국 그가 어찌할 새도 없이 56명의 배심원은 평결에 들어갔다.
원로원은 승리를 확신했고 풀크루스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
풀크루스의 무죄에 40표, 유죄에 16표가 나와 버린 것이다.
배심원들은 단순 정황증거와 증언만으로 극형을 언도하는 건 균형이 맞지 않는다고 밝혔다.
무죄를 언도받은 풀크루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분개하는 원로원 의원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풀크루스가 배심원을 매수했다며 분노를 터트리고 있었다.
물론 누구도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음모론이었다.
이번 사건의 배심원단은 그 어느 때보다 공정하게 선임됐다.
풀크루스는 재판 당일에서야 누가 배심원인지 알 수 있었다.
매수를 하려고 해도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설마 마르쿠스 그 사람이 사전에 배심원단을 전부 구워삶은 건가?'
마르쿠스는 사전에 아무런 걱정 말고 재판에 들어가라는 말을 했었다.
무죄가 나올 거라는 절대적인 확신이 있었으니 그런 말을 했을 터.
풀크루스는 자신의 파트로네스가 될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빚을 졌다는 걸 재차 실감했다.
원래 역사에서도 궁지에 몰린 풀크루스를 카이사르와 크라수스 가문이 도와주었다는 설이 있지만, 이번에는 도움의 수준이 차원이 달랐다.
덕분에 역사와는 달리 풀크루스는 카이사르보다는 마르쿠스에게 더 마음이 기울었다.
물론 달라지지 않은 점도 있었다.
원로원과 키케로를 향한 복수심과 증오였다.
풀크루스는 원로원이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아 클라우디우스 씨족과 카이사르를 압박하려 했다는 걸 잘 알았다.
그는 은혜든 원수든 배 이상으로 갚아줘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결국 재판이 끝나자마자 풀크루스는 정체를 숨기고 몰래 마르쿠스를 찾아갔다.
재판에 대한 감사인사와 복수를 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마르쿠스는 즉시 풀크루스가 원하는 대로 계책을 말해주었다.
"호민관이 되라고? 아니, 되라고요?"
"예. 풀크루스 님이 원로원에 복수를 하고 싶다고 해봐야 집정관이라도 되지 않으면 무리입니다. 하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나 오래 걸리죠. 그런데 발상을 뒤집어서 호민관이 된다면? 당장 내년부터라도 원로원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호민관의 권한은 집정관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군 통수권과 원로원의 수장이라는 점만 뺀다면 유사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저 두 가지가 집정관의 핵심이었으나 풀크루스에게는 전혀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호민관이 가지는 입법권과 사법권, 그리고 법안에 대한 거부권만 있으면 풀크루스가 원하는 모든 걸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 명문 클라우디우스 씨족이고 호민관은 평민만 출마가 가능할 텐데요."
"그것도 간단히 해결이 가능합니다. 평민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세요. 평민도 귀족이 될 수 있는데 귀족이 평민이 되지 말란 법이 어디 있습니까. 로마법에 그런 걸 제한하는 조문은 없어요."
"그런 말도 안 되는···아니, 말이 안 되지는 않는군요. 그런데···정말로 가능한 겁니까?"
"물론입니다. 종교계의 최고 책임자의 허락만 떨어진다면 가능합니다. 그리고 카이사르 님은 제가 부탁하면 흔쾌히 수락해 주실 거고요."
사실 이건 3년 뒤 풀크루스와 카이사르가 그대로 사용하는 방법을 마르쿠스가 가로챈 것이다.
풀크루스에게도 결코 손해는 아니었다.
3년이나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오히려 이득이라 할 수 있었다.
"제가 호민관이 된다면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실 겁니까?"
"너무 과한 행동만 자제하시면 됩니다. 호민관은 연임을 제한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 자리에 오랫동안 남아있는 게 원로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견제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사실 저는 좀 다혈질적인 면이 있어서 가끔씩 생각 없이 돌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기미가 보인다 싶으면 제지해 주십시오.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리고 제가 원하는 법안을 지정하는 시기에 민회에 입안해주시면 됩니다. 물론 저와 관계가 있다는 티를 내서는 안 됩니다. 오늘부로는 이렇게 둘이 만나는 일도 없을 겁니다. 모든 지시는 제3자를 시켜 전달할 겁니다. 선거비도 제 밑에 있는 상인을 통해 조달해 드릴 테니 매해 호민관 선거에 나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저를 도와주신 것에 절대 후회를 느끼지 않도록 완벽히 호민관직을 수행하겠습니다."
마르쿠스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년부터 명예로운 경력을 시작한다고는 해도 가장 밑바닥인 재무관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호민관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로마에서 호민관이 가지는 힘은 상상 이상으로 막강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호민관은 이후 원로원으로 들어갈 것을 고려하기에 권한을 남용하지 못한다.
하지만 풀크루스처럼 호민관 이상은 올라갈 생각이 없다면 원로원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1년 내내 거부권을 남발해 로마의 국정을 마비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기반이 깔렸다.
이제 부족한 건 단 하나의 작은 조각뿐이다.
그리고 그 부족한 한 조각을 채워줄 이가 마침내 도착했다.
기원전 62년의 마지막 날.
10개 군단을 이끈 폼페이우스가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브룬디시움 항구에 상륙한 것이다.
< 68. 평민이 되어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