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안토니우스 >
원로원은 폼페이우스를 길들이기 위해 무한 대기 전략을 취하고 있었으나 모든 게 멈춰있지는 않았다.
카틸리나와 엮여 탄핵 된 호민관 두 명이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을 대신할 사람을 뽑아야 했다.
보궐 선거일은 폼페이우스의 연설 일주일 뒤로 잡혔다.
임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자격을 잃은 자를 대신할 사람을 뽑는 건 그리 흔치 않은 일이 아니었다.
원로원은 고작 호민관 두 명을 뽑는 이 선거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주목하고 있는 대상은 어디까지나 폼페이우스였다.
그런데 원로원의 관심을 폼페이우스에게서 돌려버릴 정도의 커다란 사건이 터졌다.
소란의 주인공은 보나 여신제에 여장을 하고 침입했다는 의혹을 받았던 클라우디우스 풀크루스였다.
그는 호민관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밝히며 원로원을 충격의 도가니에 빠트렸다.
얼마 전에 로마 시내를 뒤흔들었던 자가 또다시 논란의 중심에 선 것이다.
처음에 원로원은 풀크루스가 그냥 헛소리를 한다고만 여겼다.
평민을 위한 자리인 호민관에 로마 최고 귀족인 클라우디우스 씨족이 어떻게 출마한다는 말인가.
원로원은 풀크루스가 그냥 관심을 받고 싶어서 그러나 보다 하며 무시했다.
그러나 풀크루스는 마르쿠스의 조언대로 평민의 양자가 되는 방식으로 귀족의 지위를 버렸다.
이 전대미문의 방법에 원로원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건 원로원을 우롱하는 행위입니다!"
"로마에서도 가장 순수한 최고 명문 귀족의 혈통이 평민이 된다니요. 이건 모든 귀족을 능멸하는 겁니다."
"얼마 전에 우리에게 고발당한 걸 이런 식으로나마 앙갚음하려는 게 아닐까요? 설마 진짜로 호민관에 나가려고요······."
"어차피 신분이 뒤바뀌는 입양은 최고 사제의 허가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카이사르라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허락하지는 않겠지요. 카이사르도 어쨌든 로마에서 손꼽히는 명문 율리우스 씨족이 아닙니까."
"그럼요. 그냥 단순한 소요로 끝날 겁니다."
원로원은 제아무리 카이사르라도 이런 행위는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 기대했다.
물론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기대를 깔끔하게 배신하고 풀크루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는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하기 바로 직전 풀크루스가 평민이 되는 걸 허락해주었다.
풀크루스는 이제 귀족의 이름을 버리고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라는 평민식 이름을 사용했다.
이 일련의 과정 때문에 원로원은 클로디우스가 카이사르의 하수인이라 착각했다.
정황상 그렇게밖에 보일 수 없긴 했다.
카이사르가 보나 여신제에 침입한 클로디우스의 행위를 덮어줬고, 클로디우스가 보은하기 위해 이런 일을 벌였다면 모든 게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원래 역사에서도 카이사르와 클로디우스는 그런 느낌의 관계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원로원은 자신들과 가까운 후보를 내세워 클로디우스의 당선을 막으려 했다.
별장에 칩거한 폼페이우스도 자신의 수족이 될 수 있는 사람을 물색해 후보로 세웠다.
호민관 보궐 선거는 때아닌 삼파전의 양상으로 흘러갔다.
이중 가장 무게감이 떨어지는 인물은 원래 카이사르였다.
최고 사제에 법무관, 민중 파의 대표라는 직함은 분명 화려했지만, 원로원과 폼페이우스에 비하면 아무래도 밀리는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클로디우스는 그런 게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화제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었다.
로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클라우디우스 씨족이 평민의 편이 되기 위해 귀족 지위를 포기했다.
이런 서사를 가진 후보는 지금까지 없었다.
거기에 얼마 전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사실도 그의 인기에 힘을 더했다.
귀족들에게 억울한 탄압을 당했다는 인식이 자연스레 유권자들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은 까닭이다.
클로디우스는 자신의 인기를 굳히기 위해 막대한 돈을 뿌리기까지 했다.
마르쿠스에게 후원받은 돈이었으나 원로원은 원래 명문가인 클로디우스가 사비를 털었다고만 여겼다.
시민들은 새로 나타난 유명한 신인 정치가에게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주었다.
결국 선거는 클로디우스의 독보적인 1위로 결과가 나왔다.
원로원이 내세운 후보는 간신히 2위로 당선돼 체면치레를 했다.
폼페이우스가 기대했던 후보는 안타깝게 3위에 그쳤다.
시민들이 폼페이우스를 지지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보궐 선거를 앞두고 너무 급하게 후보를 냈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시민들이 폼페이우스가 지지하는 후보라는 걸 인식할 시간이 부족했다.
두 번째는 후보가 가지는 존재감의 부재였다.
유세 시간이 짧은 이상 후보의 지명도가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클로디우스가 그렇게 당선된 좋은 예였다.
문제는 폼페이우스는 자신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후보를 구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후보의 존재감이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후보가 3위라도 한 게 폼페이우스의 인기를 역으로 증명해주는 사실이었다.
이 결과에 크게 상심한 폼페이우스는 개선식 때까지 별장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원로원 입장에서는 폼페이우스라는 짐을 덜었더니 생각지도 못한 장애물이 하나 더 튀어나온 셈이다.
어쩐지 불안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리고 클로디우스는 그런 원로원의 걱정이 기우가 아니었음을 곧바로 증명하기 시작했다.
클로디우스가 마르쿠스에게 처음으로 받은 명령은 동방 속주 안을 가결하는 것이었다.
실력을 보기 위한 테스트의 의미도 있어서 구체적인 방법은 지시하지 않았다.
단, 폼페이우스가 요청한 사항 중 속주편성안 외에는 절대 건드리지 말라는 엄명을 내려놓았다.
토지 분배는 나중에 유용한 카드로 사용할 예정이기도 했고, 폼페이우스는 조금 더 고생을 해주는 게 이득이었던 까닭이다.
물론 충고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행동했으니 한 번쯤 따끔한 맛을 보라는 마음도 있었다.
클로디우스는 마르쿠스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다.
그는 민회가 열릴 때마다 원로원을 거침없이 비판했다.
호민관 임기가 끝나도 원로원에 들어갈 마음 따위는 없었기에 발언의 강도가 상상 이상이었다.
"시민 여러분! 지금 로마는 유례없는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통과되어야 할 법안들은 산더미처럼 계류된 채 쌓여가고만 있습니다. 어째서인지 아십니까? 원로원과 폼페이우스가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힘 싸움을 벌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피해는 선량한 시민들만 일방적으로 입고 있습니다."
클로디우스가 사전에 심어둔 바람잡이 한 명이 번쩍 손을 들며 준비해온 질문을 던졌다.
"원로원은 그래도 최근 여러 가지 개혁 법안을 통과시키지 않았습니까?"
"그건 시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임시적인 조치였을 뿐입니다. 채무자들의 부채를 줄여주기로 했던 자원이 어디에서 오기로 했는지 아십니까? 동방 속주입니다. 그곳에서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개혁 법안이 통과됐다고 해도 집행할 예산이 책정되지 않습니다. 그저 말뿐인 공약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클로디우스의 선동에 시민들이 술렁였다.
폼페이우스가 동방 속주가 어쩌고 할 때는 솔직히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들의 이익과 결부시켜 설명해주니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 이해가 됐다.
부채 감면을 약속받았지만 아직 수혜를 누리지는 못한 시민들이 특히 다급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 실제로 작년에 약속한 개혁이 실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겁니까?"
"일단 실행이 한없이 늦어질 거라는 건 확실합니다. 예산이 없으니 집행을 할 수가 있을 리가 없죠. 우리는 지금 원로원과 폼페이우스 간의 권력 싸움에 희생양이 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제안합니다. 민회에서 의결하면 원로원의 인준을 필요치 않은 호르텐시우스 법에 의거해 속주편성안을 가결해야 합니다!
기득권층의 권력다툼에 시민들의 이익이 볼모로 잡히는 일은 이제 더이상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저 클로디우스가 온 힘을 다해 여러분의 권익을 지키는 방패가 되겠습니다!
"
클로디우스의 열정적인 선언에 민중들은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답했다.
포로 로마눔 광장에서 뻗어 나간 함성에 저 멀리 있는 원로원 의원들의 귀가 다 먹먹할 정도였다.
가까운 성문을 지키는 보초들도 깜짝 놀랐다.
시민들은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편을 들어줄 호민관의 등장을 진심으로 반겼다.
클로디우스는 즉각 동방 속주의 편성안을 가결한다는 법안을 만들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카토는 이마를 짚으며 한탄했다.
"우리가 미치광이 한 명을 만들어 버린 것인가······."
올해 집정관직을 수행하는 칼푸르니아누스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어설프게 벌집을 쑤셨으니 이리되는 걸세. 폼페이우스 문제만 해도 벅찬데 저런 광인이 호민관이 됐으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는군."
"클로디우스를 이용해 카이사르를 최고 사제직에서 내려오게 하자는 건 모두가 동의한 사안 아닙니까!"
"그래. 그러니 자네만을 탓하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성급한 결정을 반성하는 걸세."
"이렇게 걱정만 할 게 아니라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있던 키케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현재 원로원 의원들 가운데 가장 초조한 이는 다름 아닌 그였다.
키케로가 한 마지막 증언 때문에 클로디우스가 하마터면 유죄를 받을 뻔했기 때문이다.
마르쿠스가 사전에 기사 배심원을 동원해 평민 배심원을 매수하지 않았다면, 클로디우스는 유죄 판결을 받았으리라.
이 사실을 안 클로디우스는 키케로에게 맹렬한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키케로 역시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저 정신 나간 호민관이 대체 어떤 억지를 써서 자신을 공격할지 예측이 가지 않았다.
기존에 호민관을 제어하는 수단인 원로원의 인사권은 클로디우스에게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라쿠스 형제만큼 소동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클로디우스를 고발하자고 한 다른 의원들은 그의 분노가 자신에게 향하지 않는 걸 내심 다행으로 여겼다.
호민관 한 명이 원로원 전체를 흔들 수는 없겠지만, 자폭을 각오하면 한 명 정도는 충분히 끌어내릴 수 있다.
의원 중 그 누구도 정신병자가 휘두른 칼에 찔려 죽는 억울한 최후를 원하지 않았다.
집정관 칼푸르니아누스가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일단 민회에서 속주 편성안을 가결하는 법안이 통과되는 건 확정으로 보이는군. 저건 어쩔 수 없다고 넘어가야겠어."
카토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게 다 카이사르의 농간이라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카이사르는 지금 히스파니아로 떠났는데."
"그자는 자신이 총독으로 떠나 있는 동안 로마를 어지럽힐 대리인으로 클로디우스를 고른 겁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도 의심스럽습니다.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 모종의 합의를 맺고 클로디우스를 이용해 폼페이우스의 요구를 통과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아닐까요?"
다른 의원들은 그럴듯하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키케로가 반론을 제기했다.
"현재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봅니다. 우선 두 사람이 동맹을 맺는다면 주도권은 카이사르가 아니라 폼페이우스에게 있어야 합니다.
둘의 위치는 물론 인지도도 차이가 크게 나니까요. 게다가 폼페이우스는 이번 호민관 선거에서 스스로 후보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클로디우스와 표를 나눠 가지고 둘 다 떨어질 수도 있었는데 글쎄요···만약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손을 잡았다면 후보를 단일화했을 겁니다.
"
"클로디우스의 당선을 확신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압도적인 1등으로 당선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호민관 한 명으로는 이 이상 뭘 할 수 없습니다. 동방 속주안은 시민들의 이익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가결이 된 겁니다. 폼페이우스의 옛 부하들에게 토지를 배분해준다? 이걸 시민들이 찬성할 이유가 없죠. 카이사르도, 폼페이우스도 이걸 모르진 않을 겁니다. 특히 카이사르라면 더더욱."
논리 정연한 키케로의 반박에 카토도 한발 물러섰다.
그래도 음모론을 접어두었을 뿐, 카이사르를 견제해야 한다는 의견은 굽히지 않았다.
"지금 저 광경을 지켜보는 모두가 명심해야 할 겁니다. 카이사르가 속주 총독을 마치고 돌아오면 당연히 집정관직에 입후보하겠지요?
만약 그가 집정관이 된다면 저 미친 호민관이 민회를 좌지우지하고, 카이사르가 원로원에서 우리를 압박할 겁니다. 폼페이우스를 꺾었다고 기고만장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진정한 적은 저 클로디우스를 뒤에서 움직이는 카이사르입니다.
"
이번에는 다른 의원들도 이견을 제기하지 않았다.
확실히 카이사르는 요새 점점 더 반원로원 행보를 보였다.
크라수스가 그를 제어하는 것도 슬슬 한계에 달한 모양새였다.
그래도 원로원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위기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폼페이우스도 성공적으로 누르고 있는 원로원들에게 카이사르는 그저 귀찮은 적에 지나지 않았다.
제대로 주의를 기울여 대처하면 질 리가 없다.
카이사르를 누구보다 견제하는 카토마저도 지금은 그렇게 낙관하고 있었다.
※※※※
클로디우스는 마르쿠스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해 원로원을 괴롭혔다.
가끔 너무 막 나갈 때가 있었지만, 그럴 때는 마르쿠스가 제지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클로디우스가 선을 넘는 행동을 하기만 기다리던 원로원은 번번이 기회를 놓치기만 했다.
이제 그들은 클로디우스가 단순히 젊은 혈기만으로 움직이는 자는 아니라고 인정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은 클로디우스는 폼페이우스가 가장 원하는 토지문제는 건드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밀약을 맺었다는 카토의 음모론은 이로써 완전히 폐기되었다.
원로원이 클로디우스의 행동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동안, 마르쿠스는 차분히 커리어를 쌓아나갔다.
당국의 재정을 감사하고 회계를 처리하는 게 재무관이 맡는 주 업무다.
마르쿠스는 가문의 전문 인력들을 동원해 빠르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해나갔다.
덤으로 최근 부쩍 자주 열리는 공화정을 수호하는 청년 모임의 회장 역할도 맡았다.
클로디우스의 문제로 골치를 앓는 키케로가 모임을 주최할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임이 열리는 장소는 이제 키케로의 저택이 아닌 마르쿠스의 응접실이었다.
평소처럼 모임에 참석한 청년들은 오늘도 열띤 토론을 이어나갔다.
주제는 '폼페이우스는 과연 독재관을 노리고 있는가?' 였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지금은 아니더라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쿠리오와 데키무스는 폼페이우스에게는 그런 야망이 없다고 반박했다.
한 마디씩 의견을 내놓은 모두의 시선이 마르쿠스에게 쏠렸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폼페이우스 님에게 그런 야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도 친분을 유지하는 사이지만 폼페이우스 님은 야심보다는 개인의 명예와 영광을 중시하니까요. 만약 정말로 독재관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면 군대를 해산하지 않았을 겁니다."
브루투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렇다면 이번 원로원의 결정에 무고한 폼페이우스 님이 희생당했다고 보시는 건가요?"
"꼭 그렇다고만은 볼 수 없습니다. 원로원의 여러 의원님들도 폼페이우스 님이 정말로 독재를 하려고 한다고 생각해서 견제하는 게 아닐 테니까요."
"역시 그렇군요.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습니다. 매정하게 보이지만, 이 역시 공화정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요."
총명한 브루투스는 마르쿠스의 말을 곧바로 이해했다. 심지어 그러면서도 원로원의 선택을 두둔하기까지 했다.
카시우스도 마찬가지였다.
공화정을 위해서라면 억울한 피해자 한두 명쯤 생겨도 어쩔 수 없다는 신념이 절로 느껴졌다.
마르쿠스는 희석한 포도주가 담긴 잔으로 입을 가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저 두 사람은 희생당하는 사람이 자신이어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그래서 맹목적인 신념을 지닌 이들은 무서운 법이다.
'하긴 그러니까 아들처럼 대해주고 두 번이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을 칼로 찔렀겠지.'
브루투스와 몇 번 카이사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뜻밖에도 그는 카이사르에게 호의를 품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사생아라는 헛소문은 짜증 나지만, 카이사르 자체를 싫어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외삼촌이 되는 카토와는 달랐다.
심지어 카이사르가 지금은 원로원과 대립해도 나중에는 화해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듯 보였다.
즉, 브루투스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사적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암살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은 현대에서도 냉전 시대까지는 흔한 일이었으니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다시 한번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되새기는 기회가 됐다.
카이사르처럼 암살당하는 일은 마르쿠스에게도 언젠가 닥칠 수 있는 미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막강한 권력을 가진 이가 목숨을 잃는 가장 흔한 경우가 암살이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쿠스가 옆에 있다고 해도 평생을 호위병 뒤에 숨어 암살을 걱정하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독재자는 암살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은 열혈청년들을 앞에 두니 그런 생각이 더 강해졌다.
'권력을 잡으면서도 공화주의자들에게 공분을 사지 않고, 암살의 위험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라······.'
그렇게 형편 좋은 방법이 있을까 싶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선결되어야 할 조건들이 너무나도 까다로웠고 지금의 마르쿠스로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토론회가 끝나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데키무스는 자리를 떴지만 쿠리오는 자리에 남았다.
사전에 따로 부탁할 게 있다는 말을 남겼던 그는 둘만 남았는데도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보다 못한 마르쿠스가 먼저 물었다.
"부탁할 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 예. 저기···이런 부탁을 하는 게 굉장히 면목이 없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마르쿠스 님은 거뜬히 해결하실 능력이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염치불구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마르쿠스가 계속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쿠리오가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
"저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있습니다. 그도 저와 같은 평민 귀족 출신인데 안타깝게도 친구가 어릴 때 부친께서 마리우스파에게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그래서 타고난 재능을 낭비하며 방황하고 여러 가지 사고도 치며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가족도 부양해야 하다 보니 여기저기서 빚도 끌어 썼고요. 뒤늦게 철이 들긴 했지만 이미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어 갚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
"이번에 입안한 개인회생 제도를 이용하면 되지 않을까?"
"그 제도는 현재 지속적인 소득이 있어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안타깝게도 현재 빚에 의존해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정치폭력단에서 돈을 받아왔다는데 이제는 그런 일에서 손을 떼고 싶다고······."
"옳은 결정을 했네. 그래서, 쿠리오 자네는 내가 그 친구의 빚을 갚아주거나 보증을 서주길 원하는 건가?"
"설마요!"
쿠리오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로 염치없는 부탁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사실 제가 도와주고 싶지만, 저도 만만치 않게 빚을 진 상태라 나설 수가 없어서요.
친구는 현재 그리스로 도피성 유학을 가려고 합니다. 마르쿠스 님께서 괜찮으시다면 배편과 유학비의 후원을 해주실 수 없을까요? 정말로 능력 있는 친구니 충분히 나중에 갚을 수 있을 겁니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제가 언젠가는 반드시 대신 갚겠습니다.
"
쿠리오는 뛰어난 언변과 학식으로 원로원 의원들에게서 주목받는 공화정의 희망 중 한 명이었다.
마르쿠스는 그런 쿠리오가 이토록 고평가하는 친구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정말로 그렇게 뛰어난 젊은이라면 배편과 후원금쯤이야 얼마든지 마련해줄 수 있지. 그런데 그런 젊은이라면 내가 한 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것 같은데···이름이 뭐지?"
"아, 학식이나 언변이 출중한 친구는 아닙니다. 다만 굉장히 용맹하고 군사적 재능도 뛰어난 친구입니다. 정치폭력단에 있을 때는 적은 숫자로도 2배가 많은 상대조직을 종종 때려눕혔다고 하니까요."
친우가 가진 장점을 쭉 설명하던 쿠리오가 마침내 그의 이름을 밝혔다.
"안토니우스라는 친구입니다. 마르쿠스 님의 장인이신 카이사르 님과는 먼 친척 관계라고 알고 있습니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는 순간적으로 탄성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안 그래도 접촉할 기회를 보고 있던 사람 중 한 명의 이름이 나온 까닭이다.
가까운 시기에 연줄을 만들려고 했는데 이 시점에서 그 이름이 언급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예상치 못한 기회를 잡은 마르쿠스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 71. 안토니우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