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사위와 장인의 각본 >
79.
3월의 노나이(7일) 나흘 전, 카이사르는 삼두 연합의 핵심정책인 농지법안을 완성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가져온 법안의 초고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내용이 너무나도 방대하고 세세해 두루마리 100장을 넘어갈 정도였기 때문이다.
카이사르가 사람을 시켜 법안의 복사본을 원로원 의원들에게 나눠주었다.
산더미만한 두루마리를 받아든 비불루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이 긴 내용을 어느 세월에 다 읽고 있다는 말입니까. 이걸 다 읽기만 해도 오늘 회의가 끝날 것 같은데. 나는 반대······."
"그러실 줄 알고 요약문을 작성해놓았습니다."
두루마리 위에는 따로 핵심만을 추려놓은 양피지 한 장이 올려져 있었다.
비불루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을 다물었다.
카토와 키케로는 엄청난 속도로 법안을 읽어 내려가며 이어지는 카이사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농지법이 제출되었다고 해서 걱정하시는 의원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법안을 설명하기에 앞서 확실히 못을 박고자 합니다.
이 법안에는 원로원을 도발하거나 자극할만한 내용은 담겨 있지 않습니다. 제 명예를 걸고 이 부분만큼은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지극히 합리적이고, 공평한 법안으로 완성되었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저의 생각일 뿐 여러분들의 의견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해서 저는 건설적인 토론을 원합니다. 반대하는 분들에게는 반대의 근거를 듣고 법안을 더욱 완벽하게 보완하고 싶습니다.
"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손을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카이사르가 발언을 허가하자 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산더미처럼 쌓인 두루마리를 가리켰다.
"집정관, 이것 보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법안의 내용이 너무 길고 복잡합니다. 요약문이 있다고는 하나 법안의 세부조항까지는 적혀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까지 법안이 세세하고 길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토지를 다루는 법안은 그만큼 신중하고 모든 경우의 수를 다뤄야 합니다. 예전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법은 너무나 급진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포괄적인 내용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는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생깁니다. 저는 일체 그럴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고심하고 또 고심했습니다. 이 기나긴 내용은 그 결과물이라고 판단하면 될 것입니다."
귀족파 의원들은 서로 시선만 교환할 뿐 적극적으로 발언에 나서지 못했다.
얼마 전 카이사르가 통과시킨 집정관 통달 때문에 모든 발언이 기록되고 있었던 까닭이다.
반대 의견을 내더라도 그럴듯한 말을 해야지, 아니라면 비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카이사르는 누구도 추가 발언을 하지 않자 목청을 가다듬고 목소리에 한층 더 힘을 실었다.
"현재 로마의 인구는 곧 100만을 돌파할 거라고 예상됩니다. 도시 하나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사는 건 대단한 일입니다.
세계 그 어디를 가도 로마와 같은 도시는 찾아볼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인구 중에는 곡물법에 의존해 겨우겨우 살아가는 빈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100만의 인구가 로마에 몰려 있다는 뜻은 이탈리아의 많은 땅이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이들을 농지로 돌려보내면 무료 곡물을 배급하는 양도 줄어들 것이고, 그만큼 예산을 아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
법안을 읽고 있던 카토가 처음으로 발언을 요청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집정관, 당신이 입안한 이 법안의 취지는 어디까지나 빈민을 감소시켜 로마의 세수를 확보하는 게 목적이란 말입니까?"
"그 외에도 사회 안전망을 더 확실히 구축하려는 뜻도 있습니다. 혹시 영광스러운 우리 로마의 퇴역병중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내가 그걸 어찌 알겠습니까."
"혹시 아시는 분 없으십니까?"
카이사르가 좌중을 둘러보았으나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귀족파 의원들이 당황하자 마르쿠스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들었다.
"대략 50만에 가깝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확하네.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있다고 생각하니 다행이로군."
카이사르의 확인이 떨어지자 의석 곳곳에서 당황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50만?"
"그렇게나 많다고?"
"말이 퇴역병이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면 그냥 부랑자에 가깝지 않나. 그 숫자가 50만이나 된다고?"
카이사르는 일부러 술렁이는 의사당의 분위기를 제지하지 않고 가만히 놔뒀다.
사태의 심각성을 좀 느껴보라는 의미에서였다.
어느 정도 소요가 가라앉자 그는 만족스러운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이 법안의 필요성을 느끼신 분들이 계시리라 믿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그라쿠스 형제의 법과는 다릅니다.
저는 원로원의 사유재산을 침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사유재산은 보장받아야 한다는 게 로마의 기본 이념이기 때문입니다. 이 법안의 기본 골자는 공유지를 분배하는 것입니다. 세부적인 내용을 보고 싶으신 분들은 9번째 두루마리를 봐주시길 바랍니다.
"
한순간 회의장을 두루마리를 뒤적거리고 쫙 펼치는 소리가 가득 메웠다.
"제 법안의 합리성을 증명하는 부분은 바로 이 대목입니다. 로마의 가장 비옥한 캄파니아 공유지는 비록 국유지이기는 해도 이번 분배에서 제외하기로 했습니다. 이미 이곳은 사실상의 사유지처럼 가문 대대로 임대되고 있으니까요. 이런 토지를 강제로 분배하는 건 로마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가 되겠지요."
법안을 읽어본 일부 의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카이사르의 말대로 캄파니아 지방은 사실상 원로원 의원들이 점유하고 있는 토지나 마찬가지였다.
이 비옥한 땅의 국유지를 마치 사유지처럼 점령한 그들은 엄청난 규모의 대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과거 그라쿠스 형제는 이 캄파니아 지방의 국유지를 철저하게 몰수하려 했다.
원로원 입장에서는 사유지를 강탈당한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는 이렇게 원로원을 자극하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했다.
"국유지의 임차권도 제한적으로 양도할 수 있도록 할 생각입니다. 과거 그라쿠스 형제는 이 부분을 아예 불가능하도록 규정했으나 비현실적인 법안입니다.
20년간 농사를 지었다면 타인에게 양도할 권한을 가지는 게 보다 합리적일 것입니다. 일가족 전체가 보유할 수 있는 국유지의 한 도는 1000유겔룸(250헥타르)로 라티푼디움을 경영하기에 결코 부족하지 않은 넓이입니다.
이 상한지를 초과한 농토는 나라에서 적법한 대금을 치르고 회수해 분배할 것입니다. 땅값을 깎으려는 그 어떤 시도도 없을 것입니다. 그 증거로 토지의 매입가를 결정하는 건 원로원의 재무관들이 담당할 겁니다. 올해의 담당자는 총명하고 사려 깊은 쿠리오와 카시우스가 되겠군요.
"
두 사람 모두 친원로원파로 분류되는 청년들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토지법이 통과되면 어떤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는지 간결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기존의 국유지를 배분하는 것은 3만 명 이상의 빈민을 농지로 보낼 수 있습니다.
거기에 상한지를 초과한 농토를 구입한 후 분배한다면 추가로 전장에서 공을 세운 퇴역병들 5만 명에게 합당한 보상을 줄 수 있습니다. 최근에 급격히 늘어난 세액과 폼페이우스가 동방에서 국고로 환수한 보상금을 이용한다면 예산도 충분합니다.
"
예산을 핑계로 거부하려던 비불루스가 이를 악물고 혀를 찼다.
짜증나게도 카이사르의 법안은 공격할만한 거리가 별로 없었다.
조금 더 급진적인 법안을 들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온건하고 상식적인 수준의 내용만을 담았다.
카토는 토지의 분배 과정을 감시할 위원회를 어떻게 구성하는지 따져보았다.
분명히 이 대목에서 카이사르가 농간을 부렸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마저 카토의 예상과는 달랐다.
토지의 분배를 담당할 사람들은 원로원과 기사계급에서 선정되고 그 권한은 원로원에게 있다는 게 명시되어 있었다.
다만 기사계급의 대표인 크라수스 가문은 고정적으로 참가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건 원로원에게 있어서 오히려 좋은 조항이었다.
크라수스 가문은 기사계급의 대표이면서 원로원 귀족파의 핵심구성원이었으니까.
키케로는 이 항목조차 카이사르가 원로원을 배려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 모든 과정에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배제된다는 조항도 눈에 띄었다.
카이사르는 약삭빠르게도 본인이 비판받을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원천 차단한 것이다.
일단 로마 최고의 법률가인 키케로는 이 농지법에 중대한 하자는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공격할 내용을 찾기 위해 요약본과 법안을 미친 듯이 훑어보고 있는 카토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렇다고 이 농지법이 통과되도록 놔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다급하게 발언권을 요청한 뒤 입을 열었다.
"집정관, 당신의 뜻은 알겠다만 이 법안에 담긴 내용은 너무나 심오해 오늘내일 중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니 논의를 나중으로 미루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저는 결코 이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강압적인 태도를 취할 마음이 없습니다. 이 법안은 진심으로 로마의 미래를 위해 통과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법안 내용을 충분히 숙지할 수 있도록 다음 회의는 일주일 뒤에 개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건설적인 토론이 오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하겠습니다.
"
카이사르는 자신의 모든 발언을 기록하고 있는 속기관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본 뒤 회의를 해산했다.
그는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를 지나치며 의례적으로 묵례를 하고는 그대로 의사당을 나갔다.
반대로 귀족파 의원들은 회의가 끝났음에도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카토와 비불루스는 자신의 동료들을 모두 불러 모아 대책 회의에 들어갔다.
키케로는 귀족파의 핵심으로 분류 되지는 않았으나 이번 회의에는 참석했다.
그만큼 원로원은 이번 법안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얼핏 듣기로는 충분히 합리적인 법안이었는데 꼭 그렇게까지 반대를 해야 합니까?"
"당연히 반대해야지요!"
카토가 분개한 표정으로 으르렁거렸다.
"지금 메텔루스처럼 혼란스러운 심정을 느끼는 의원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게 바로 카이사르가 노리는 수입니다. 지극히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수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홀린 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숨통을 끊으려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얄팍한 수에 절대 놀아나서는 안 됩니다."
마르쿠스가 조심스럽게 카토의 말을 받았다.
"제 생각도 비슷합니다. 카이사르 님이 아무 노림수도 없이, 로마의 국익만을 위해 이런 법안을 발의하진 않았을 겁니다. 설령 정말로 로마의 국익을 위해서라고 해도 동시에 원로원의 권위를 떨어트리는 노림수가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충분히 그럴만한 능력을 지니신 분이니까요."
"내 말이 바로 그걸세! 마르쿠스, 자네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네. 여러분, 마르쿠스의 말이 옳습니다. 카이사르는 분명히 로마의 국익을 위한다는 핑계로 우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대책을 마련해야 해요. 비불루스, 거부권을 행사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건 어려울 것 같은데요···카이사르는 지금 정식으로 법안을 발의한 게 아닙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법안 내용을 우리에게 밝히고 토론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자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무턱대고 거부권을 행사하면 그냥 발목잡기로밖에 보이지 않을 겁니다."
비불루스의 대답에 카토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그러면 일단 이 법안에서 이치에 맞지 않는 점을 찾아보도록 하죠. 그걸 빌미로 삼아 반대표를 던지면 될 겁니다."
"이 말도 안 되는 분량의 법안을 다 읽어보자고요?"
"그냥 읽어보는 게 아니라 문장 한 줄과 단어 한 개조차 놓치지 않고 다 읽어봐야 합니다. 카이사르도 인간인 이상 분명히 어딘가에서 실수를 해놓은 부분이 있을 겁니다. 그것만 찾으면 우리도 명분을 잃지 않으면서 이 법안을 쉽게 무력화할 수 있어요."
다소 자신이 없어 보이는 메텔루스가 침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 그런 부분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저놈의 집정관 통달 때문에 무조건 반대만을 외치면 우리에게 올 표가 달아날 텐데요."
"카이사르는 분명히 이 농지법을 염두에 두고 그 집정관 통달을 시행한 겁니다. 그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저자의 심계는 상상 이상으로 깊어요. 어떤 행동은 반드시 그 뒤에 추가로 다른 행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농지법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해요. 이게 어떤 다른 법안과 연결되어 우리의 목을 조를지 알 수 없습니다."
카토의 열변에 이어서 비불루스도 결연하게 각오를 다졌다.
"우리가 예측하지 못하게 사안이 돌아가도 최후에는 제가 거부권을 행사하겠습니다. 시민들에게 욕을 먹든 다시는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게 되든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원로원의 미래는 우리가 지켜야 합니다!"
그렇게 귀족파 의원들이 카이사르를 막아야 한다고 우후죽순 의견을 내놓는 와중, 마르쿠스가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여러분들께서 원로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애쓰시고 계시는 데 제가 앞장서지 못해 송구할 뿐입니다. 지금 벌려놓은 사업이 너무 많아 시간을 내기 어려운지라······."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자네가 원로원을 위해 애써주고 있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카토가 손을 휙휙 저으며 소리쳤다. 급기야 마르쿠스에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린 그가 귀족파 의원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라도 마르쿠스가 지금 원로원을 위해 헌신하는 수준이 부족하다고 느끼시는 분 계십니까?"
비불루스가 피식 웃었다.
"있다면 그자는 양심에 구멍이 숭숭 뚫린 자겠죠. 오히려 집정관인 제가 부끄럽습니다. 저렇게 열심히 안찰관직을 수행하는 청년이 있는데 저는 카이사르의 의도에 휘말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자, 마르쿠스. 들었다시피 자네를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네.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자네를 이끌어줘야 하는 것이지 결코 그 반대가 아니야. 그러니 자네는 아무런 부담 가지지 말고 지금처럼 안찰관직을 잘 수행하면 되네. 그게 곧 원로원을 향한 지지로 돌아올 테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지금보다 더욱 정진해 역대 최고의 안찰관이었다는 칭송을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절로 신뢰가 가는 마르쿠스의 목소리에 의원들이 하나같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카이사르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와중에도 믿을만한 구석이 있으니 든든했다.
마치 커다란 배에 올라탄 것처럼 안정감이 느껴졌다.
그 거대한 배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직 귀족파에 없었다.
※※※※
안찰관으로서의 업무에 원로원 회의까지 겹치자 마르쿠스의 피로도는 거의 한계에 달했다.
만약 집에 돌아갔을 때 율리아와 두 쌍둥이가 그를 반겨주지 않았다면 진즉 뻗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아장아장 기어 다니는 딸과 아들을 보면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오늘 회의는 어땠나요?"
마르쿠스의 토가 자락을 받아든 율리아가 생긋 웃으며 물었다.
두 아이를 낳은 뒤 그녀는 눈에 띄게 마르쿠스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더는 '마르쿠스 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고, 사소한 행동과 말투에서도 이전보다 더욱 깊은 애정과 신뢰가 느껴졌다.
"언제나 똑같지, 뭐. 장인어른이 발의한 농지법에 우왕좌왕하는 게 그대로 느껴졌어."
"저도 초안을 봤지만 흠잡을 구석이 없던데···그래도 역시 반대했겠죠?"
"당연하지. 법안을 읽어볼 시간을 달라고는 했지만 그들은 결국 반대할 이유를 찾기 위한 시간을 벌고 싶었을 뿐이야. 사실 조금 기대하는 마음도 있어. 어떤 기상천외한 이유를 들고나와서 반대할지 궁금하거든. 사실 반드시 그래야만 해. 안 그러면 카토가 또다시 장광설로 의사 진행 자체를 막으려고 할 테니까."
"그분의 연설이 정말로 그렇게 지루한가요?"
"당신도 8시간 동안 쉬지 않고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봐. 그건 그냥 지옥이야. 다시는 그런 경험을 겪고 싶지 않아."
1년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 마르쿠스가 몸서리를 쳤다.
율리아가 남편의 처음 보는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두 아이를 낳았음에도 오히려 더욱 아름다워진 미소였다.
마르쿠스는 남아있던 일말의 피로까지 싹 씻겨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마르쿠스, 법안을 합리적으로 만든 취지는 알겠는데 이번 건 좀 위험했어요. 만약 제가 원로원에 있었다면 망설이지 않고 이 법안을 통과시켰을 걸요?"
"괜찮아. 원로원에는 당신 같은 사람이 없으니까."
"키케로 님이 있잖아요."
"그 사람이 귀족파의 영수였다면 나와 장인어른도 조금 다른 수단을 썼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잖아? 그리고 추가로 장인어른에게 뭔가 노림수가 있을 테니 무조건 거절해야 한다고 바람을 좀 넣었어."
"용의주도하시네요."
"칭찬으로 받아들일게."
마르쿠스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침상에 풀썩 누웠다.
살짝 눈을 감으니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율리아의 말처럼 카이사르와 마르쿠스는 이 농지법을 통과시킬 마음이 전혀 없었다.
꼬투리를 잡지 못하도록 합리적으로 만든 건 오히려 통과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피로로 곯아떨어지기 직전, 마르쿠스가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이대로 통과되면 곤란하고말고."
아직 본게임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마르쿠스의 입가에 걸린 희미한 미소가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 79. 사위와 장인의 각본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