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남쪽에서 온 사신 >
83.
이집트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국가 중 하나다.
로마가 건국되기 수천 년 전부터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이집트는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곡창지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 당시 북아프리카는 현대와는 달리 사막화가 완전히 진행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집트는 그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고고한 자존심을 가진 국가로 이들의 왕인 파라오는 살아있는 신으로서 추앙받았다.
그러나 로마 시대의 이집트는 과거의 영광만 남은, 지고 있는 해에 가까웠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세 개로 분열된 제국 중 안티고노스와 셀레우코스 왕조는 이미 로마에게 병합됐다.
마지막 남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도 옛 전성기의 힘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전성기에는 소아시아 인근까지 진출한 최강의 강대국 중 하나였으나. 지금은 로마의 보호국이 되어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상태였던 것이다.
이는 소수에 불과한 이민족 특권층이 현지인을 배제하고 나라를 운영하는 기형적인 지배구조가 큰 영향을 미쳤다.
지중해 최고수준을 자랑하는 부는 그대로였으나 스스로를 보호할 군사력이 그에 미치지 못했다.
로마는 이런 이집트를 호시탐탐 병합하고자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이집트는 세계에서 가장 자존심이 강한 국가였다.
그렇기에 어설픈 병합은 이집트 국민들의 반발만 초래할 뿐이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중심이 될 파라오가 아직 건재한 이상 섣부른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로마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이집트의 쇠락은 점점 더 가속을 밟고 있다는 점도 한몫을 했다.
현재 이집트의 파라오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였는데 이자 역시 그리 능력 있는 왕이 아니었다.
파라오를 신으로 모시는 이집트에서는 종교를 주관하는 신관들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했다.
이들에게 신으로 인정받지 못한 파라오는 진정한 파라오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아울레테스는 이런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본질은 외부에서 들어온 이민족이었다.
그들이 삼은 수도 알렉산드리아 역시 이집트 원주민들은 이질적으로 생각하는 장소였다.
이집트의 최고 신관들 역시 알렉산드리아가 아닌 멤피스에 거주했다.
아울레테스는 자연스레 종교계를 푸대접했고, 신관들은 이런 아울레테스의 행동에 분개했다.
신관들과 한 번 사이가 엇나간 아울레테스는 결국 이집트 내부에서 지지 세력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신으로 추앙받는 파라오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그의 왕권은 위태롭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로마의 인정을 받고 그들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아울레테스는 사절단을 꾸려 로마로 사절을 보냈다.
그들이 로마에 도착한 건 케레스 여신의 감사제가 끝난 4월 초순이었다.
이집트 사절단은 아울레테스가 살아있는 동안 이집트의 정당한 파라오라는 사실을 보장해 달라고 청원을 올렸다.
그러나 이 시기의 원로원은 이집트의 요구에 일일이 반응해줄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곤란하니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시오."
이게 원로원에서 공식적으로 돌아온 대답이었다.
결과를 얻기 전까지는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오지 말라는 파라오의 엄명 때문에 사절단은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됐다.
이집트의 재무대신이자 사절단의 우두머리인 에우고라스는 현재 국정을 담당하고 있는 비불루스와 만나려 했다.
그러나 비불루스는 카이사르에게 연달아 맛본 굴욕으로 크게 의기소침한 상태였다.
자택에 틀어박혀 제대로 회의에 나오지도 않는 그가 에우고라스를 만나줄 리가 없었다.
"나는 바쁘니 다른 사람을 만나보시오."
입구에서 축객령을 당한 에오고라스는 당황했다.
혹시 로마가 아울레테스를 쳐내려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권력자들을 만날 수조차 없다면 뇌물로 바칠 돈이 아무리 많은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에우고라스는 한 달가량을 더 기다리며 원로원과 접촉을 했지만, 전부 실패로 끝났다.
그는 결국 노선을 바꾸기로 했다.
다수의 평의원이 아닌 소수의 권력자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기로 한 것이다.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은 역시나 폼페이우스였다.
동방 세계를 완전히 평정한 그의 명성은 이집트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드높았다.
"현 이집트 파라오의 종신 통치를 확실히 보장해 달라고?"
에우고라스의 제안에 폼페이우스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가 딱히 현 이집트의 지배층을 싫어해서가 아니었다.
운이 없게도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았다.
폼페이우스는 지금 옛 부하들이 새로 분배받은 농지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모든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는 원래부터 이런 정치적 술수와는 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재산도 로마에서 한 손에 꼽힐 정도로 많았기에 에우고라스가 가져온 뇌물도 통하지 않았다.
"일단 생각해 보겠으니 지금은 물러가게.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확답을 주도록 하지."
에우고라스가 다음으로 찾아간 사람은 로마 최고의 대부호 크라수스였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있는 그가 이집트 사절을 만나줄 리가 없었다.
에우고라스는 이번에도 저택 입구에서 등을 돌려야만 했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에우고라스는 이 시기에 카이사르와 접촉해야 했다.
그러나 마르쿠스의 위생개선 사업에 관심을 보인 카이사르는 그와 연계되는 법안을 마련하고자 고심 중이었다.
에우고라스는 5월이 될 때까지도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제 슬슬 그의 목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됐다.
다급해진 에우고라스는 누구라도 좋으니 이 상황을 해결해줄 수 있는 이를 물색했다.
그러던 와중 부하 하나가 쓸 만한 정보를 물어왔다.
"재무대신님, 현재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크게 셋이라고 합니다."
"그중 둘은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겠지. 마지막 한 명은 누구냐. 크라수스? 아니면 키케로?"
"마르쿠스라는 안찰관이라고 합니다. 그 크라수스 가문의 장자로 지금 로마에서 떠오르고 있는 태양과도 같다는군요. 민중들의 절대적인 인기를 얻고 있고, 원로원에서도 신임이 두텁다고 합니다."
"뭐야, 그런 실권자의 정보가 어째서 우리에게는 없었지?"
에우고라스가 눈을 부라리며 사절단을 둘러보았다.
협상하러 오기 전에 그 나라의 정치 상황을 분석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현재 정계에서 가장 돋보이고 있는 인물의 정보가 누락되어 있는 건 심각한 문제였다.
사절단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에우고라스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무슨 정보 수집을 이따위로······.
"
사실 이건 사절단으로서도 억울한 면이 있었다.
마르쿠스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건 금융개혁 이후였다.
거기에 안찰관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폭발적으로 명성이 높아졌다.
이집트에서 로마와의 협상을 준비하기 위해 정보를 모으던 시기는 마르쿠스의 이름이 그리 널리 퍼지지 않았던 때였다.
물론 에우고라스는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노화를 억누른 그는 정보를 가져온 부하에게 재차 물었다.
"그래, 그 마르쿠스라는 자가 크라수스 가문의 후계자라고? 그런데 안찰관? 내가 알기로 안찰관은 그렇게까지 고위직은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혹시 법무관을 잘못 들은 것 아니냐?"
"아닙니다. 안찰관이 맞다고 합니다. 아직 젊은 정치인인데 그 능력이 대단하다고 거리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비불루스가 아니라 마르쿠스가 집정관이라고 착각하는 시민들마저 있을 정도라는군요."
"그 정도인가? 만나볼 만한 가치가 있겠군."
에우고라스는 정중하게 격식을 차려 마르쿠스에게 서신을 보냈다.
마르쿠스는 다른 권력자들과 달리 곧바로 에우고라스의 말을 들어보겠다는 답변을 보냈다.
이틀 뒤, 에우고라스는 마르쿠스를 만나기 위해 다시 크라수스 저택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입구에서 거절당하는 일 없이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마르쿠스는 간단하게 저택을 안내한 뒤 그를 응접실로 데려갔다.
"한 달이 넘게 로마에서 머무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상심이 크셨겠군요."
마르쿠스가 위로를 건네며 에우고라스의 인상을 살폈다.
현 이집트의 지배계층이 그렇듯 이집트 원주민들과는 완전히 다른 하얀 피부에 푸른색 눈.
전형적인 그리스 출신이라 할 수 있는 외모였다.
에우고라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조금 더 간단할 줄 알았습니다. 로마의 권력자들에게 이리 문전박대를 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요."
"시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지금 로마의 정계는 민중파와 귀족파의 힘겨루기가 한창이라 다른 사안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거든요."
"저희가 이집트에서 출발할 때는 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는 보고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뒤늦게 알았을 때는 충격이 컸지만, 동시에 안도감도 들었습니다. 원로원이 하도 반응을 보이지 않아 설마 현 파라오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게 아닌가 오해를 할 뻔했으니까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집트는 로마의 소중한 동맹인데요. 동맹국이 혼란스러워지면 로마에도 좋을 게 없습니다. 어쩌면 제가 재무대신님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안색이 밝아진 에우고라스가 반사적으로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파라오께서 흡족해하실만한 답을 들고 가야 합니다. 마르쿠스 님께서 힘을 써주시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저야 일개 안찰관에 불과할 뿐이니 직접 힘을 쓸 수는 없죠. 하지만 힘을 쓸 수 있는 사람들께 부탁을 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그분들은 제 부탁을 절대로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삼두 연합의 존재를 모르는 에우고라스는 마르쿠스가 원로원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거라 착각했다.
"좋습니다. 원로원의 결의만 받을 수 있다면 파라오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그러면 우선 서로 간의 조건을 확인해봐야겠군요, 로마는 현 파라오이신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이집트의 유일무이한 지배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 드릴 겁니다. 그리고 로마의 친구라는 사실 또한 원로원의 이름으로 보장하도록 하죠."
"그 정도만 해주신다면 저희는 더 바랄 게 없습니다."
로마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건 곧, 로마의 막대한 힘이 파라오의 권위를 뒷받침해준다는 뜻이다.
사제들이 아무리 설쳐봐야 로마의 힘을 등에 업은 파라오에게는 미치지 못한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유사시에 로마의 힘을 빌릴 수 있는 보장을 받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재무대신 에우고라스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패를 제시했다.
"로마가 보여주는 호의에 감사하는 의미로 대량의 재화를 가지고 왔습니다. 6천 탈렌툼 정도면 어떻겠습니까?"
6천 탈렌툼이면 1억 4천만 세스테르티우스가 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그 정도의 액수를 왕권 유지비로 망설임 없이 지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집트가 얼마나 부유한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탐이 날 정도의 거금이긴 했으나 마르쿠스가 이 돈을 받아버리면 문제가 일어날 소지가 있었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이가 권력에 취해 뇌물을 탐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직접 받지만 않으면 된다.
그는 이 돈을 카이사르를 경유해 삼두 연합이 비밀리에 나눠 가지는 방안을 구상했다.
"6천 탈렌툼은 분명 거금이긴 하지만 로마의 최고 권력자들을 움직이는 데는 충분치 않을 겁니다. 저 6천을 한 명이 전부 가지는 게 아니라 고루고루 분배해야 하니까요. 그러니 8천 탈렌툼은 받아야 할 것 같군요."
"8천은 너무 많습니다. 7천이 어떨까요?"
"협상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저는 8천이 필요하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통보해 드린 겁니다."
에우고라스는 뭐라고 반론을 하려는 순간 마르쿠스의 무심한 눈빛을 마주쳤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한기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재무대신으로서 숱한 권력자들을 만나온 그의 직감이 반박하지 말라고 전력으로 소리치는 듯했다.
에우고라스는 자신의 직감을 믿기로 했다.
"8천 탈렌툼을 지불하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거금인지라 일시불로 납부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점을 헤아려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6천은 결의가 성립하는 즉시. 그리고 나머지는 2년에 걸쳐서 분할상환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일시금으로 지불한 6천 탈렌툼 중 3천만 원로원에게 건네주십시오."
"그렇다면 불만 없습니다. 제시하신 모든 조건에 동의하겠습니다. 8천 탈렌툼 중 3천만 원로원에 납부하면 되는 거로군요."
"아, 그리고 저는 어디까지 중개인에 불과하니 나머지 돈을 받는 사람의 명의는 제가 아닌 다른 이가 될 겁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겠지만 돈이 오가는 과정에서 제 이름이 언급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모든 협약은 무효가 되고 뒷일이 어떻게 될지는 저도 보장해드릴 수 없습니다."
"이해했습니다. 제가 모시는 파라오의 이름을 걸고 비밀스러운 거래를 약속드리겠습니다."
마르쿠스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서에는 마르쿠스의 이름이나 뇌물을 연상시킬만한 어떠한 표현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에우고라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단숨에 서명했다.
"자, 그러면 이제 재무대신님의 용건은 끝났을 테니 제가 원하는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거래는 끝난 게 아니었습니까?"
"아, 긴장하지 마세요. 추가로 대가를 요구하려는 건 아니니까요. 파라오 님의 권위를 보장하는 협상은 끝났습니다. 저는 그것과는 다른 사안을 논의하려는 겁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알렉산드리아에서 사업을 하려는데 그 권리를 보장받고 싶습니다."
"사업이요? 어떤 종류의 사업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금융업과 관련된 일입니다. 만약 이 제안을 들어주신다면 앞서 나눠 받기로 한 2천 탈렌툼은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에우고라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작 사업에 관한 허가를 받기 위해 2천 탈렌툼의 거금을 포기한다는 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마르쿠스도 그렇게 생각했다.
진짜로 수중에 2천 탈렌툼이 들어온다면 포기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순순히 2천을 내놓을 거라고는 조금도 믿지 않았다.
분명 온갖 핑계를 대면서 시간을 질질 끌고 돈을 내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거면 차라리 깔끔하게 불확실한 돈을 포기하고 다른 곳에서 이득을 취하는 게 확실한 방법이다.
그리고 알렉산드라이에도 은행 지점을 세우고 금융업을 전개할 수 있다면, 2천 탈렌툼의 몇 배가 되는 돈을 끌어모을 수 있다.
장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면 별로 아깝지 않았다.
협상액을 6천에서 8천으로 올린 것도 처음부터 이를 위한 포석이었다.
마르쿠스의 속내를 짐작하지 못한 에우고라스는 2천 탈렌툼을 아낄 수 있다는 생각에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무리 없이 요구를 들어 드릴 수 있겠지만 일단 설명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만약 이집트의 안보에 위해가 가는 사업이라면 허락할 수 없으니까요."
"전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로마는 물론 거의 모든 속주에서도 실행할 사업이니까요. 이집트에도 득이 되고, 저에게도 득이 될 일입니다."
재무대신이라고는 해도 에우고라스는 은행이 얼마나 거대한 파급력을 가지고 올지 예상할 수 없었다.
은행이란 개념 자체가 에우고라스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것이었던 까닭이다.
그래도 로마와 속주의 대도시들에서 전부 시행하는 최신 제도라고 하니 문제가 될 소지는 없어 보였다.
그래도 만에 하나란 게 있으니 에우고라스는 한 가지 사항만을 확실하게 하기로 했다.
"로마나 다른 속주에서 하는 조건과 완벽하게 동일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타국이라고 더욱 폭리를 취하는 방식으로 운영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 조항을 추가해도 문제없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지요. 저는 상도덕을 아는 사람입니다."
에우고라스와 마르쿠스는 상호 모두 만족하는 형태로 협약을 체결했다.
마르쿠스는 즉각 삼두 연합과 카이사르를 설득해 이집트 파라오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결의문을 작성하게 했다.
명분은 로마의 식량 수급을 책임지는 이집트 정권의 안정이었다.
카이사르가 법안을 발의했고 원로원도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이집트의 안정은 민생과 직결되는 문제라 근거 없이 반대했다가는 또다시 역풍을 맞을 게 훤했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마르쿠스는 3천 탈렌툼을 로마의 국고에 납부하겠다고 밝혔다.
남은 3천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마르쿠스가 사이좋게 1천씩 나눠 가졌다.
그런데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예상치 못한 제안을 보내왔다.
로마가 보인 호의에 너무나 감사하며 이 결의를 이끈 마르쿠스에게 직접 감사를 표하고 싶다고 초대장을 보내온 것이다.
은행 사업에 관한 일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말도 비밀리에 덧붙였다.
안 그래도 할 일이 태산 같았던 마르쿠스는 초대를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래도 결정을 내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 하는 일에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이집트의 전략적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이 기회에 이집트에 기반을 마련해 둘 수 있다면 몇 개월 손해 보는 것쯤이야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현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딸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유명한 인물이라 후대에는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은 그녀를 칭하는 고유명사처럼 굳어졌다.
그녀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지구의 전 표면이 바뀌었을 거라는 어구는 현대인이라면 한 번쯤 다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했다.
'어디 진짜로 그랬는지 한 번 확인해 보기로 할까?'
내년 로마 정국을 결정할 선거가 열리는 7월까지는 어떻게든 돌아올 수 있을 테니 치명적인 문제가 일어날 일도 없을 터.
마르쿠스는 원로원의 대표 자격으로 이집트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로마에서 불어온 새로운 바람이 잠시 방향을 틀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향했다.
< 83. 남쪽에서 온 사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