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클레오파트라 >
84.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로마 사절단은 원로원 의원 셋과 그들을 호위하는 군대로 구성되었다.
사절단의 대표인 마르쿠스가 젊은 의원이었기에 동행하는 두 의원도 젊은 신참으로 정해졌다.
공화정을 수호하는 청년들의 일원이었던 쿠리오와 올해 막 원로원에 들어온 카시우스였다.
마르쿠스는 정규 호위병 외에도 언제나처럼 스파르타쿠스를 대동했다.
업무와 관련된 사람들은 데려오지 않았다.
어차피 은행을 바로 개점할 것도 아니고 이번에는 이야기만 나눠볼 뿐이기 때문이다.
마르쿠스는 이번 방문을 자신에게 주는 휴가로 여기고 있었다.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으니 한 달 정도는 이집트의 이국적인 정취를 만끽하며 휴식을 취할 것이다.
지금의 로마 정국은 마르쿠스가 없어도 얼추 돌아가도록 안정세를 찾은 상태였다.
원로원은 권토중래를 꿈꾸며 몸을 사렸고,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합리적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건강 핑계를 대고 있던 크라수스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음 선거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원로원파의 전략은 올해는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내년의 선거에서 대승을 거두는 것이었다.
집정관, 법무관, 호민관 등의 요직이 최대한 많이 자기 파벌에서 나오도록 해야 한다.
이제 후보등록일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원로원파도 카이사르의 발목을 잡는 건 그만두었다. 대신 자파 후보들을 내세우는 데 주력하며 시민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귀족파는 이런 중요한 시국에 크라수스가 복귀한 것을 호재로 받아들였다.
크라수스는 자신의 정치력을 극한까지 발휘해 명망 있는 후보들을 내세웠다.
귀족파는 역시 크라수스라며 환호를 보냈으나, 그들이 원하는 대로 선거가 흘러갈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하리라.
"오오, 저게 그 유명한 파로스의 등대인가?"
호들갑스러운 쿠리오의 감탄사가 마르쿠스를 상념에서 깨웠다.
시선을 돌려보니 갑판에 올라와 있는 모두가 경이로운 눈빛으로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의 눈길이 향한 곳에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거대한 흰색 탑이 우뚝 서 있었다.
새하얀 석회암으로 지어진 탑의 높이는 약 100미터 이상으로 추정되었다.
등대의 꼭대기에는 항시 불이 타올랐고, 낮에는 거대한 거울이 빛을 반사해 아름답게 빛났다.
이집트의 우월한 건축기술을 증명하는 건 피라미드만이 아니었다.
마르쿠스는 저 위에 올라가 알렉산드리아의 전경을 둘러보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마르쿠스가 다가온 걸 눈치챈 쿠리오가 은근히 기대하는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집트의 환영식은 꽤 열정적이라는데 들어보셨습니까? 여인들의 복식이 로마와는 많이 다르다고 하더군요."
"더운 지역이니까. 그러니 당연히 로마보다 복장이 얇아지는 거겠지."
"그렇죠. 엄숙한 사람들은 너무 외설적이라고 비판한다지만 더운 지역인데 꽁꽁 싸매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여기에서는 왕족들도 몸이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는다고 하니 그들의 문화를 존중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
"자네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 같은데. 타문화를 존중할 생각에 흥이라도 오른 건가?"
마르쿠스가 피식 웃으며 묻자 쿠리오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시우스가 근엄한 목소리로 한마디 충고를 건넸다.
"우리는 로마 원로원을 대표하는 사절로 왔네. 그러니 아무리 흥이 올라도 장중함을 잃지 말고 위엄을 지키도록 해야 할 걸세."
"당연히 그래야지. 하지만 자네처럼 너무 굳어 있으면 오히려 이집트 고관들이 로마는 흥취를 모르는 딱딱한 나라라는 오해를 할지도 모르지 않나."
"음란과 방종으로 물든 곳이라는 오해를 받는 것보다는 그게 낫네."
"그 정도로 풀어질 마음은 없네. 그래도 즐길 건 즐겨야지."
마르쿠스는 쿠리오와 카시우스가 아웅다웅하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고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항구가 가까워지자 알렉산드리아의 도시 풍경이 조금이나마 눈에 들어왔다.
고저 차이가 크지 않은 지형이라 한눈에 알렉산드리아의 전경을 눈에 담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도 마르쿠스는 알렉산드리아가 고대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인구만으로 따져도 100만에 달하는 로마보다도 더욱 많은 수의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름을 따 건설된 이 도시의 역사는 고작 3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얼마나 빠른 속도로 도시가 발전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조금 더 시선을 돌리자 상당한 수의 인원이 항구에 진을 치고 있는 게 보였다.
'파라오가 보낸 환영단인가 보군.'
호화로운 장식을 주렁주렁 단 의장병들과 악사들, 무희들의 모습은 절로 눈이 돌아갈 정도로 화려했다.
성심을 다해 사신들을 환영하려는 마음보다는 자신들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마르쿠스가 탄 배가 항구에 정박하자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무희들이 춤을 췄다.
배에서 내린 마르쿠스는 상상 이상으로 소란스러운 환영식에 혀를 내둘렀다.
쿠리오는 살결이 다 비칠 정도의 얇은 옷을 입은 무희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카시우스도 필사적으로 근엄한 표정을 짓고는 있었으나, 남자인지라 살짝살짝 시선이 돌아가는 게 느껴졌다.
율리아와 다나에, 셀리니 같은 미녀들을 항상 접하고 산 마르쿠스조차 살짝 혹할 정도로 강렬한 자극이었다.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성대한 환영 인사 정말 고맙네. 책임자는 누구인가?"
그리스식의 중갑을 입고 화려한 자줏빛의 튜닉을 걸친 근위병이 마르쿠스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얼마 전에 보았던 에우고라스처럼 전형적인 마케도니아 혈통의 외모를 갖춘 자였다.
"환영합니다, 로마에서 온 귀빈 여러분. 파라오께서 최상의 예를 다해 손님들을 맞이하라 명하셨습니다."
"파라오의 호의와 우정에 깊이 감사하는 바일세. 우리가 언제쯤 파라오를 접견할 수 있겠나?"
"성대한 연회의 준비를 이미 해두었습니다. 그래도 파라오께서는 손님들이 배를 타고 오시느라 피곤하실 테니 먼저 여독을 풀기를 원할 거라 생각하셨습니다. 궁에 최고로 안락하고 호화로운 숙소를 마련해 두었으니 우선 거기서 쉬시는 게 어떨까요."
"황송한 배려 고맙게 받아들이지. 안내해 주게나."
"예."
근위대장이 신호를 보내자 마부들이 화려한 마차 세 대를 끌고 천천히 다가왔다.
"의원님들께서 오르실 마차입니다. 타시지요. 궁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래, 잘 부탁하네."
마르쿠스와 카시우스, 쿠리오가 각각 마차에 오르자 말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컹거리는 흔들림과 함께 마차가 앞으로 나아갔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고대 마차의 승차감이었다.
쓴웃음을 짓고 있자니 바로 옆에서 쿠리오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 참, 익숙해진다는 게 참으로 무섭군요. 십 년 전만 해도 이런 마차가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텐데 이제는 불편해서 타는 게 고역이라는 생각이 들다니 말입니다."
"원래 편한 것에 길들면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거라네."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몸으로 경험을 얻으니 확실히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은 로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보군요."
쿠리오가 사절단을 구경하기 위해 나온 이집트 시민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거리에서 보이는 시민들 중 대다수는 딱 봐도 토착 이집트인이 아니었다.
로마 사절단을 향해 외치는 말들도 마케도니아 억양이 섞인 그리스어였다.
"소문에 의하면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이집트어를 전혀 하지 못한다는군. 사실상 껍데기만 이집트일 뿐 헬레니즘 왕조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게 편할 걸세. 그래도 살아있는 신을 왕으로 섬긴다는 자부심은 원래 이집트에 가까워 보이긴 하는군. 아마 그래서 로마의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게 아닐까?"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드높은 자존심이 자신들이 보호국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걸 수도 있겠어요."
"아무리 과거에 찬란한 문화를 써 내려갔다고 한들 가장 중요한 건 현재의 실력인데···지배층이라도 정신을 제대로 차리고 있길 바랄 수밖에."
마르쿠스는 불만 가득해 보이는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한창때는 꽤 덥다고 해도 5월의 알렉산드리아는 화창한 날씨를 자랑했다.
태양이 조금 뜨겁긴 해도 습도가 낮고 산들바람이 솔솔 불어와 딱히 덥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궁으로 가는 길은 대리석 재질로 포장되어 있어 상당한 고급스러움을 자랑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로마 사절단이 왕궁의 건물 하나를 통째로 사용하도록 조치해두었다.
심지어 파라오의 개인 공간을 제외한 어느 곳이든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된다는 허가까지 내려졌다.
파라오와의 접견은 나흘 뒤로 정해졌다.
카시우스와 쿠리오는 주로 왕궁 내부를 돌아다니며 배 여행의 피로를 풀고, 알렉산드리아의 문화생활을 즐겼다.
반면 마르쿠스는 스파르타쿠스를 대동하고 알렉산드리아 시내를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알렉산드리아는 놀라운 도시였다.
잘 갖춰진 상하수도와 정교한 건축물, 섬과 본토를 잇는 길이가 1km에 달하는 헵타스티디온이라는 제방까지.
그중에서도 압권은 왕실 구역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 박물관과 도서관이었다.
무세이온이라는 박물관은 헬레니즘 시대의 가장 유명한 학문 연구기관으로 당대의 최고 학자들이 모여 연구와 강의를 했다.
도서관은 브루치옴과 세라피움이라는 두 개의 건물로 나뉘어 있는데 장서 보유 수가 수십만 권을 가뿐하게 넘어섰다.
이렇게나 많은 책이 보관되어 있는 이유는 이집트가 국가주도로 서적을 수집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은 소지품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소문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방문객이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지 않은 책을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그 책을 제출해야 했다.
그러면 곧장 복사본이 만들어지고 책의 원소유자에게는 원본이 아닌 복사본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은 세상 모든 지식이 이곳에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마르쿠스가 가지고 있는 현대의 지식들은 예외였다.
"로마와 비슷하게 발전되어 있으면서도 느낌이 많이 다르군요. 하지만 뭐랄까···조금 경직된 느낌입니다."
도시를 반쯤 돌아본 스파르타쿠스가 내뱉은 감상은 의외로 굉장히 날카로웠다.
마르쿠스도 정확히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알렉산드리아는 크게 다섯 개의 지구로 나뉘어 있었는데 철저하게 계층이 구분되어 있었다.
이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마케도니아 혈통의 특권층은 자신들의 구역에 외지인이 들어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부유한 로마 상인들은 역시 그들만의 구역에서 따로 살았다.
100만이 훌쩍 넘는 이 대도시에서 알렉산드리아 시민권을 보유한 특권층은 전체의 1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시민권이 아닌 거주권을 받고 이 도시에서 살아갈 뿐이었다.
"생각보다도 더 계급 고착화가 심해. 마케도니아인 혈통이 아니면 아예 출세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잖아?"
알렉산드리아는 기본적으로 로마의 신참자 같은 세력이 나올 수가 없는 사회였다.
마케도니아 혈통이 아니라면 공공부문은 물론 민간부문에서조차 최고위에 오를 수 없었다.
그나마 마케도니아계의 그리스 혈통만이 능력에 따라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을 뿐이었다.
이집트 원주민들에 대한 차별은 심각하다 못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심했다.
순수 이집트 혈통은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우스운 점은 그토록 원주민을 핍박하면서도 정작 마케도니아인들은 이집트의 문화를 엄청나게 많이 흡수했다는 점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사람들도 혈통만 마케도니아일 뿐이지 그들의 행동양식은 이집트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비합리적이고 강압적인 사회구조는 정책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거리에서 시민들에게 물어보니 알렉산드리아는 빈민들을 위한 구제책이 전무했다.
"로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곡물을 나눠준다고? 에끼, 거짓말하지 마쇼! 세상에 그런 곳이 어디 있어!"
곡물배급제를 물어본 마르쿠스가 도리어 시민들에게 허풍쟁이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이곳에는 많은 로마 상인들이 있을 텐데 어째서 이런 소문이 퍼지지 않았을까.
해답은 간단했다.
계층이 다른 시민들끼리는 절망적일 정도로 교류가 없는 것이다.
스파르타쿠스는 이틀에 걸쳐 도시를 어느 정도 다 둘러보자 처음보다 명백히 실망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놀랍도록 정교하고 독창적인 도시지만 아쉽게도 사회의 수준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통치자들이 무능력하니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인구 100만이 넘는 대도시에서 빈민들을 통제할 수 있는 정책이 하나도 없다는 건 솔직히 좀 충격이 컸어."
"동방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부족한 걸까요?"
"긍휼? 말도 안 되는 소리. 로마의 통치자들에게도 그런 건 없어."
"예? 하지만 로마는 가난한 사람들이 죽지 않을 정도의 곡물을 무상으로 주지 않습니까. 검투사 경기는 무료로 입장시켜주기도 하고요."
"배부른 개는 절대로 주인에게 불만을 품지 않는 법이니까. 로마의 빈민 구제는 철저하게 정치공학적인 측면에서 나온 제도야. 하지만 그걸 나쁘다고 할 마음은 없어. 실제로 빈민들은 그 덕에 굶어 죽지 않고 있으니까. 반면 알렉산드리아는 착실하게 빈민들의 분노를 누적시키고 있지.
분노란 감정은 전염성이 강해서 분명 언젠가는 큰 화가 될 거야.
"
마르쿠스는 높은 등대 위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전경을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처음 도시에 왔을 때 들떴던 마음은 이미 상당 부분 식은 지 오래였다.
이런 훌륭한 도시가 무능한 통치자들의 손에서 계속해서 망가지고만 있다는 게 가슴이 아팠다.
그는 지금 보이는 이 광경을 철저한 반면교사로 삼기로 했다.
로마도 언제 이런 식으로 성장 동력을 잃어버리고 천천히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는지 알 수 없다.
'간만에 휴식을 취하러 온 것에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나도 완전히 일 중독자 다 됐군.'
영화로웠던 도시가 쇠락해 가는 광경을 보고 있으니 괜히 감상적인 기분이 들었던 것이리라.
마르쿠스는 스파르타쿠스와 함께 다시 왕궁으로 돌아왔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여는 연회까지는 아직 하루가 더 남아 있었다.
마르쿠스는 왕궁에서 경치가 좋은 건물을 이곳저곳 구경하며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왕족과 대시 종장들이 거하는 곳답게 왕궁 내부에는 무척 많은 건물들이 있었고, 경치가 훌륭한 곳도 많았다.
마르쿠스는 그중에서도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원이 마음에 들었다.
"이곳은 왕족분들께서도 종종 찾으시는 곳입니다. 부산스러운 항구가 아닌 자연 그대로의 바다를 볼 수 있어 경관이 아주 수려하죠."
안내를 맡은 시종이 키오스산의 최고급 포도주를 따라주며 자랑스럽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본래는 절대 외지인이 들어올 수 없는 장소입니다. 파라오께서 여러분들을 얼마나 환영하고 있는지 헤아려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이오. 내일 파라오를 뵙는다면 내가 직접 감사를 표할 예정이오."
마르쿠스가 포도주를 입으로 가져가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포도주 맛도 기가 막힐 정도로 좋았다.
절로 기분이 좋아진 마르쿠스는 포도주를 한 잔 더 마시기 위해 빈 잔을 시종에게 건넸다.
바로 그때, 어린 소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울렸다.
"거기, 너는 감히 누구이기에 이곳에 멋대로 들어온 게냐."
마르쿠스가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슬쩍 고개를 돌렸다.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인가?"
"의자에서 내려와 예를 표해라! 무엄한 자 같으니!"
"저 아이는 누구인데 나한테 명령하는 거요?"
안절부절못하는 시종이 재빠르게 귓가에 속삭였다.
"위대하신 파라오의 핏줄 아르시노에 4세 공주님이십니다."
"아, 공주로군."
현 파라오의 소생 중에는 클레오파트라 외에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마르쿠스는 일단 자세를 바로 했다.
물론 그렇다고 고갤 숙여 예를 표한 건 아니고 턱을 괸 걸 풀고 몸을 온전히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날카로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직 7살에서 8살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클레오파트라의 동생이겠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혈통답게 금발벽안에 피부는 하얀색이었다.
얼굴은 누가 봐도 귀엽다는 평을 할 정도는 됐으나, 날카로운 눈매가 어린 소녀임에도 권위적인 느낌을 풍겼다.
그녀는 작디작은 온몸에 화려한 보석과 장신구를 잔뜩 두르고 있었는데 마르쿠스의 눈에는 묘하게 웃기게 보였다.
권위 있어 보이기는커녕 보석의 무게 때문에 넘어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마르쿠스의 미묘한 표정을 본 아르시노에가 잔뜩 분개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무엄하기 짝이 없는 자 같으니! 당장 엎드려 몸을 낮추지 못하겠느냐. 내 신분을 시종에게 들었을 텐데 잘도 그런 뻣뻣한 태도를 보이는구나."
"죄송하게 됐습니다만, 공주님."
마르쿠스가 상냥하면서도 훈계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로마 원로원의 대표는 절대 타국의 왕에게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하물며 왕족에게는 말할 것도 없지요. 고귀하신 분에게 예의는 갖추겠으나 딱 거기까지입니다. 그 이상의 예우는 바라시면 안 됩니다."
"무, 무례하구나! 나는 순수한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공주라니까? 아, 아니면 혹시 그대도 왕족인가? 로마라는 곳에서 사절단이 온다고 들었는데 그곳의 왕자인가 보군."
"공주님, 로마는 공화정이라 왕족이 없습니다. 개인 교사가 알려주지 않던가요?"
"왕족이 아니라고? 그러면 당연히 나에게 예를 표해야 하지 않겠느냐! 썩 무릎을 꿇거라!"
아르시노에는 마르쿠스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8살밖에 되지 않은 공주에게 왕정과 공화정의 차이란 너무나도 난해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신의 자손이라 교육받았던 그녀다. 왕족이 아닌 자가 자신의 앞에서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웬 흰 포댓자루 같은 웃기지도 않은 옷을 걸친 외지인이 자신 앞에서 건방을 떨고 있다.
그녀는 즉시 자신의 시종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 오만불손한 자를 당장 무릎 꿇려라!"
난감해진 시종들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중 지체가 높아 보이는 한 남성이 아르시노에를 제지했다.
남성임에도 연지와 분지를 바르고 목소리가 높은 거로 봐서는 말로만 듣던 환관임이 틀림없었다.
"공주님, 저들은 파라오께서 극진히 예를 다해 모시라고 하신 손님입니다. 비록 왕족은 아니지만 왕과 다름없는 지위로 오신 분이니 과한 요구를 하시면 아니 됩니다."
"왕족이 아닌데 왕이나 다름없다니?"
"다음 수업시간에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세상에는 그런 나라가 있는 법이랍니다."
"이상한 나라가 다 있구나······."
"그 이상한 나라가 현재 세계를 이끌어나가는 나라란다. 너는 아직 공부를 더 해야겠구나."
아르시노에의 뒤편에서 또 다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뚱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아르시노에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휙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길이 향한 곳에는 숱이 적고 아르시노에보다 좀 더 밝은 머리카락 색을 가진 소녀가 서 있었다.
보석이 박힌 목걸이와 팔찌를 차고 있었지만, 아르시노에처럼 과하지는 않았다.
나이는 아르시노에와 비슷해 보였으나 분위기는 훨씬 더 성숙해 보였다.
총기로 반짝이는 눈동자와 멀리서도 눈에 들어오는 도도한 콧대가 굉장히 인상적인 소녀였다.
기다란 속눈썹과 적당히 도톰한 입술, 선이 가늘고 매끈한 얼굴은 장래 눈부신 미녀가 될 거라는 확실한 보증수표와도 같았다.
소녀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자신을 노려보는 아르시노에를 지나쳐 마르쿠스의 앞에 섰다.
"멀리서 찾아오신 귀빈께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동생이 아직 배움이 부족해 그런 것이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주셨으면 합니다."
"용서할 것도 말 것도 없습니다. 애초에 화가 나지 않았으니까요. 한데 공주님께서는 존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마르쿠스는 이름을 듣지 않아도 소녀의 정체가 충분히 짐작됐지만 일단 예의를 차려 물었다.
소녀는 활짝 웃고는 마주 예를 표하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입니다."
< 84. 클레오파트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