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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이집트의 운명 (86/326)

  < 85. 이집트의 운명 >

  85.

  "클레오파트라······."

  마르쿠스의 눈앞에 있는 어린 공주는 예상대로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7세였다.

  지금까지 몇 명이나 역사에 기록된 위인을 만났지만 이번 조우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스파르타쿠스, 키케로, 폼페이우스, 그리고 카이사르 같은 사람들은 모두 그들이 역사의 전면에 설 때가 가까워졌을 때 만났다.

  그래서 그들 대부분은 마르쿠스가 상상하던 역사 속의 인물들과 비슷한 이미지였다.

  그런 점에서 아직 어리디어린 클레오파트라의 모습은 굉장히 생소하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나중에 옥타비아누스나 아그리파를 만난다면 비슷한 기분이려나.'

  클레오파트라는 총기 넘치는 눈동자로 가만히 마르쿠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퍼뜩 자신이 아직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정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로마 원로원을 대표해 사절로 온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입니다.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자 안찰관직을 맡고 있습니다."

  "안찰관이라면 도시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직 아닌가요? 로마의 관직은 나이가 차야 한다고 들었는데 나이보다 굉장히 젊게 보이시네요."

  "아아, 최근에 법이 개정되면서 나이 제한이 많이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로마에 대해 굉장히 잘 아시는군요."

  "현재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가 로마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그러니 당연히 공부해야지요."

  아직 9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텐데 굉장히 똑 부러지는 대답이 돌아왔다.

  마르쿠스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그럼 혹시 라틴어도 하실 수 있습니까?"

  "안타깝지만 아직 거기까지는 배우지 못했답니다. 지금은 일단 그리스어와 이집트어, 그리고 페르시아어를 할 수 있어요. 아라비아어와 아람어는 이제 막 배우기 시작했고요."

  "9살의 나이에 이미 3개 국어를 할 수 있다니 놀라운 재능이시군요."

  "우연히 빠르게 익히는 방법을 발견했을 뿐이랍니다. 교육을 맡은 교사들의 칭찬이 자자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능력 또한 좋았던 거겠죠."

  역사상 클레오파트라는 이십 대 초반에 8개 국어 이상을 할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정도라면 9살의 나이에 이미 3개 국어에 능통했어도 이상할 게 없다.

  클레오파트라의 말에서도 은연한 자부심이 묻어나왔다.

  똑똑하더라도 아직 어린 티가 나는 그 모습이 조금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무리 가르치는 사람이 뛰어나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재능이 부족하다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법입니다. 공주님께서는 타고난 재능이 있으신 겁니다."

  "그러면 절충해서 재능에 노력이 더해졌다고 치죠. 하지만 저 아이는······."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의 여동생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르시노에는 잔뜩 성이 난 표정으로 클레오파트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두 눈동자는 오롯이 언니의 모습만을 담고 있었다.

  이제 마르쿠스는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다.

  친언니를 보는 시선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경멸과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동생의 그런 눈빛을 가볍게 받아넘기며 말했다.

  "너는 일단 로마에서 오신 귀빈께 사죄부터 드리는 게 어떻겠니? 무례를 범했으면 잘못을 인정할 줄도 알아야지."

  "사죄하라고? 위대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순수 혈통을 잇는 내가? 역시 순수하지 못한 피를 받은 사람은 나와 생각하는 방식부터가 다르네."

  "아무리 네 머리에 든 지식이 일천하다고 해도 생각이라는 건 할 수 있지 않니? 파라오께서 로마에서 온 사절단을 맞이하기 위해 얼마나 세심한 준비를 하셨는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런데 네가 사절단의 대표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소리치고 시종들을 동원해 강제로 압박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아시면 파라오께서 뭐라고 하실까?"

  클레오파트라는 아버님이라는 말 대신 '파라오'라는 말을 강조했다.

  아르시노에의 행동이 개인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선을 넘었다는 걸 은연중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10살도 되지 않은 자매의 대화라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살벌하고 각박했다.

  마르쿠스는 이 짧은 대화만으로도 두 사람의 사이가 어째서 나쁜지는 알 수 있었다.

  '혈통 어쩌고 하는 거 보니까 부모 중 한 사람이 다른가 보군. 둘 다 현 파라오의 딸이라고는 했으니 이복자매인가?'

  그러면 사이가 원수지간에 가까워 보이는 건 충분히 이해가 됐다.

  왕족이란 형제자매이기 이전에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경쟁자다.

  거기에 모친이 다르다면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는 건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아마도 아르시노에나 클레오파트라는 그런 생각을 옆에 있는 환관에게 끊임없이 주입 당했을 것이다.

  이집트에서 왕족의 가정교사 겸 보호자의 지위를 맡는 환관은 그 위세가 대단했다.

  자신이 모시는 왕족이 파라오가 된다면 그들은 대시 종장의 지위를 손에 넣을 수도 있다.

  즉, 자연스레 환관들끼리 암투가 생기며 다른 왕족을 배제하려는 경향이 강해지는 것이다.

  아르시노에가 클레오파트라에게 보이는 적의의 상당수는 그녀의 보호자의 영향일 터.

  그 증거로 클레오파트라는 동생과 동생의 보호자를 번갈아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네가 정 사과할 생각이 없다면 마음대로 하려무나. 대신 나는 파라오께 오늘 있었던 일을 말씀드려야겠다. 귀빈께서 관대한 마음으로 앙심을 품지는 않으셨지만, 적어도 그런 일이 벌어질 뻔했다는 건 파라오께서도 아셔야 하니까."

  "치사하게 일러바치겠다는 거야?"

  "잘못을 했으면 뉘우쳐야지. 네가 나중에 또 비슷한 실례를 저지르지 말란 법이 어디 있니? 네 경솔한 행동으로 타국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책임질 수는 있겠어? 네 가정교사는 그런 것도 안 가르치고 뭐 했니?"

  결국 꺾인 사람은 아르시노에였다. 그녀의 가정교사조차 여기서는 일단 사과를 하는 게 좋겠다는 조언을 건넸기 때문이다.

  그녀는 클레오파트라보다 총명하지는 못했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마르쿠스가 왕족은 아니어도 그에 따르는 신분이 있다는 사실쯤은 클레오파트라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녀의 앞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는 게 싫었을 뿐이다.

  그래도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겠다는 말을 하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암만 자존심을 세워봐야 아직 두 자매는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에 불과한 것을.

  "로마에서 온 손님···미처 알지 못하고 실례를 저질렀으니 관대히 넘어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르시노에는 그렇게 말하더니 마르쿠스에게 조금 더 가까이 와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혹시 파라오께서 오늘 있었던 일을 묻는다면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해주면 안 될까요?"

  전형적으로 사고를 친 뒤 부모님에게 혼나기 무서워하는 어린아이의 반응이었다.

  마르쿠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경사스러운 취지로 온 곳에서 쓸데없이 분란을 일으킬 마음은 없습니다. 정중하게 사과도 받았으니 앞으로는 공주님들과도 사이좋은 관계를 맺었으면 좋겠군요. 스파르타쿠스, 혹시 지금 그걸 가지고 있나?"

  "아, 예. 귀중품이라 방 안에 놔두기도 그래서 제가 들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면 공주님들께 우호의 의미로 하나씩 선물로 드리도록."

  스파르타쿠스가 품속에 넣고 다니는 주머니에서 설탕으로 만든 과자를 꺼냈다.

  아직 완성된 제품은 아니었으나 설탕을 접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정신을 쏙 빼놓기에는 충분한 맛을 가지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설탕 과자를 받아든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는 조심스레 맛을 보았다.

  "···뭐, 뭐야 이거? 엄청나게 달아! 꿀보다도 더 달잖아?"

  "···맛있어······."

  예나 지금이나 어린 아이들은 달콤한 음식에 사족을 못 쓰는 법이다.

  특히 이런 음식을 아예 처음 접해보는 경우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아르시노에는 언제 도도한 모습을 보였냐는 듯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마르쿠스를 바라보았다.

  "흠···흠흠, 처음 맛보는 맛이라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으음······."

  "그러면 하나 더 드시겠습니까?"

  "저, 정말로요? 감사합니다!"

  과자를 하나 더 받고 잔뜩 신이 난 아르시노에를 부럽게 바라보던 클레오파트라는 자신도 조심스레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저도 하나만 더 주시면 안 될까요?"

  "물론이죠."

  역시 아이들과 친해지는 데는 먹을 게 효과가 가장 좋다.

  과자의 단맛에 마음이 풀어진 두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흉흉한 분위기를 거두었다.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는 이후 마르쿠스의 옆에서 쉬지 않고 재잘거리며 수다를 떨었다.

  아르시노에는 아예 이집트에도 설탕을 수출해 달라고 조르기까지 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설탕의 어마어마한 가격에 더 관심을 보였다.

  15세기 무렵만 해도 설탕은 1kg로 소 2마리를 살 수 있을 정도의 가격이었다.

  마르쿠스는 딱 그 정도의 가격을 받을 수 있도록 공급량을 조절할 계획이었다.

  사실상 지금은 시장독점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 더 비싸게 받을 수도 있었지만, 사람들의 구매력을 고려하면 지금 수준이 딱 좋다고 판단했다.

  이번 회담에서 이집트의 상류층에게 설탕 맛을 보여주는 것도 마르쿠스가 사전에 짜둔 계획의 일부였다.

  아마 내일이 오기 전에 프톨레마이오스 12세에게 설탕에 관한 사실이 전해질 것이다.

  그러면 연회가 끝난 뒤 곧바로 설탕 수출에 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

  딱 한 가지 예상외가 있었다면 아르시노에의 수다가 해가 지기까지 멈출 줄을 몰랐다는 것이다.

  결국 보다 못한 클레오파트라가 동생을 질질 끌고 갈 때까지 그녀는 마르쿠스의 옆에서 재잘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멀어지는 클레오파트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스파르타쿠스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공주님들은 주군이 퍽이나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애들에게 사랑받는 건 트라야누스와 소피아만으로도 충분해. 그 이상은 피곤하다고."

  특히 여자아이들의 목소리는 워낙 고음이라 몇 시간이나 이야기를 들어줬더니 머리가 다 울릴 지경이었다.

  스파르타쿠스는 여전히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보아하니 저 두 분은 설탕 과자에 완전히 넘어가신 듯하더군요. 아마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내내 놀러 오지 않을까요?"

  "쯧···효과적인 홍보를 위해서 선물한 거였는데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이 생겼군."

  "그래도 왕족과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듣자 하니 이집트는 남매끼리 결혼을 해서 공동 통치하는 경우가 많다는군요. 그러면 차후 저 두 공주님 중 한 명이 이집트의 통치자가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내가 알기로는 저 두 명 외에도 장녀가 한 명 더 있을 거야. 물론 그쪽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만."

  이집트의 왕족과 친분을 유지하는 게 길이 될지 화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자신의 밑으로 둘 수 있다면야 쓸모가 있겠지만, 왕가의 자존심을 고려하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는 총명함만큼이나 야망과 권력욕도 대단한 여인이라 기록되어 있다.

  직접 대화를 나눠보니 역사의 기록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아르시노에는 딱 그 나이 때의 철없는 소녀에 불과했으나 클레오파트라는 달랐다.

  고작 9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임에도 사리 분별이 정확했고, 기어오르려는 동생을 은근하면서도 확실히 찍어 누르려는 기색도 엿보였다.

  전략적인 제휴 관계를 맺는다면 몰라도 장기 말로 쓰기에는 너무 똑똑한 사람이다.

  적당히 이용만 할 거라면 차라리 아르시노에를 밀어주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뭐, 일단 지금은 양쪽 다 간을 봐두는 게 좋겠지. 누구를 차기 파라오로 앉힐지는 그때 상황을 보고 결정하면 되는 거니까.'

  아직은 순수한 아이들일지 몰라도 10년만 지나면 조금 전의 천진난만함은 편린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리라.

  권력을 노리는 왕족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마르쿠스는 공주들에게 나눠주었던 설탕 과자를 하나 입으로 가져갔다.

  고막이 아플 정도로 시끄럽게 조잘거리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아른거려서일까.

  혀에 스며드는 달콤한 맛 너머로 왠지 모를 씁쓸한 뒷맛이 감도는 듯한 느낌이었다.

  ※※※※

  마르쿠스는 다음 날 파라오가 직접 주최한 화려한 연회에 초대받았다.

  연회장은 알렉산드리아의 구도를 그대로 담아놓은 축소판과도 같았다.

  그리스풍의 옷을 입은 지배층들과 이집트 전통 복식을 입은 악사와 무희들이 확연히 구분되어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로마의 군단병들에게까지 아낌없이 음식과 술, 그리고 여인들을 베풀어주었다.

  그의 노림수는 쉽게 짐작이 됐다.

  로마와의 친분을 과시해 자신의 뒤에 로마가 있음을 알렉산드리아의 지배층에게 과시하려는 것이다.

  거액의 돈을 받은 이상 마르쿠스도 적당히 그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쿠리오는 이미 향긋한 술과 맛있는 음식, 관능적인 여인들의 춤사위에 넘어간 지 오래였다.

  카시우스는 유학파답게 마케도니아계 지배층과 유창한 마케도니아어로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마르쿠스가 외진 곳에 자리를 잡고 조용히 연회를 만끽하려 했으나 그만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두 사람은 쪼르르 달려와 이집트에는 언제까지 머물 것이냐, 설탕 과자는 몇 개나 남아 있느냐, 로마인들은 평소에 무슨 음식을 먹느냐 하는 시시콜콜한 질문들을 끝도 없이 늘어놓았다.

  마르쿠스는 파라오와의 면담 시간이 되고 나서야 두 공주에게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가 파라오가 기다리는 방으로 들어가자 묘하게 자극적인 향이 코끝을 찔러왔다.

  마르쿠스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제들이 향로를 챙챙 두드리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다.

  바닥부터 벽, 장식들까지 모두 금으로 만들어진 공간은 눈부실 정도로 반짝이는 빛을 발했다.

  그들이 섬기는 태양신 아문-라의 위광을 그대로 형상화한 듯한 공간이었다.

  대시 종장으로 보이는 자가 황금색 지팡이로 땅바닥을 쿵쿵 두드렸다.

  "이시스와 프타의 자손이자 이집트의 주인, 위대한 아문-라의 화신이며 사초와 벌의 주인이신 위대한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에게 경의를 표하시오!"

  흰색 아마포에 잔주름을 넣어 만든 옷을 입은 중년의 남성이 화려한 왕좌에 앉아 있었다.

  머리에는 거대한 장식을 이고 있었고, 목이며 팔, 허리와 다리에 이르기까지 보석과 금으로 치장되지 않은 부위가 없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그리스 복장을 하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파라오를 칭하며 파라오의 복장을 한다.

  마르쿠스는 저런 옷을 입고 움직일 수는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며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이집트의 파라오께 예를 표하겠습니다. 로마 원로원을 대표해 온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입니다."

  "마르쿠스 크라수스, 이집트에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네."

  프톨레마이오스가 친근함을 듬뿍 담아 인사를 받았다.

  "알렉산드리아에 머물며 불편한 점은 없었나? 혹시라도 있었다면 내 즉시 시정하라고 부하들에게 일러두겠네."

  "파라오께서 베푸신 호의 덕분에 누구도 불편을 겪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저와 함께 온 의원들도 파라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만족했다니 다행이로군. 혹시라도 내 딸아이들이 자네에게 뭔가 실례를 한 건 아닌가 걱정했다네."

  "···두 분께서 무슨 말을 하셨던 겁니까?"

  "별말 안 했네. 어제 갑자기 찾아와서는 설탕 과자라는 게 어떻다는 둥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하더군. 그리고 자네가 언제 로마로 돌아갈 예정인지 꼭 물어봐 달라고 했네. 아무래도 자네와 좀 더 놀고 싶은 게 아닐까 싶은데."

  마르쿠스가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좋게 봐주신 데에는 감사하지만 본국에 중요한 할 일이 있어 오래 머물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런가? 그거 아쉽군. 일단 자리에 앉게. 그다음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하지."

  프톨레마이오스는 친절하게도 등받이가 없는 의자를 가져다 두었다.

  토가를 입으면 등받이가 있는 의자는 거치적거려 앉지 못하는 로마인을 배려한 것이었다.

  마르쿠스가 감사를 표하며 의자에 앉아 프톨레마이오스가 슬쩍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로마 원로원은 내가 이집트의 정당한 지배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고 했는데···만약 이집트에서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가 나타나면 어떻게 되는 건가?"

  "파라오께서 왕의 위엄을 보이시어 토벌하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로마는 친우의 나라에 내정간섭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로마에서 인정한 내 권위를 무시한다는 건 원로원의 결의를 부정한다는 뜻 아닌가?"

  "만약 그런 세력이 파라오를 해하려고 한다면 당연히 도와드릴 겁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이 있다고 저희가 군대를 끌고 온다면 이는 결의를 빌미로 동맹국의 주권을 유린하는 행위가 되겠지요. 저희는 그렇게 무도한 자들이 아닙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안심하는 듯하면서도 어딘가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마르쿠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혹시 그런 자들이 이집트에 있는 겁니까?"

  "아니···직접적으로 그러는 말을 하는 자들이 있는 건 아니네. 다만 멤피스에 있는 사제들은 무엄하게도 나를 잘 따르지 않아서 말일세. 혹여나 나중에 분쟁의 씨앗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지."

  "파라오의 강대한 종복들이 능히 처리할 수 있다고 믿지만, 혹시 만에 하나의 경우가 벌어져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로마는 친우의 어려움을 모르는 척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확실히 보장을 해주니 안심이 되는군. 좀 더 적극적으로 그자들을 압박해도 되겠어. 아, 그리고 자네가 개점하고 싶다고 한 은행 말인데···은행업을 하는 걸 허락하겠지만 조건이 하나 있네."

  마르쿠스가 조건을 들어보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를 알렉산드리아에 초대한 것도 이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네. 그 은행을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이름으로 운영하면 안 되겠나?"

  "설마 은행의 소유권을 넘기라···뭐, 그런 말씀이십니까?"

  "아니, 내가 로마 원로원의 재산을 넘볼 리가 있겠나. 그저 나도 그 은행이라는 것에 한발 걸치게 해달라는 요구일세. 에우고라스가 뒤늦게 말하기를 저게 엄청난 수익사업이 될 것 같다고 하더군. 정말로 그렇다면 알렉산드리아의 금융을 꽉 틀어쥘 수도 있지 않겠나. 당연히 알렉산드리 아의 주인인 나도 거기에 참여해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보네.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권위가 더해진다면 자네에게도 결코 나쁠 일은 없지 않겠나. 알렉산드리아에서 사업하는데 왕가의 이름을 쓸 수 있다는 게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모르진 않겠지?"

  "당연히 압니다. 헤아릴 수 없는 신뢰와 막강한 권위가 깃들겠죠. 사업 방향에 대해 과도한 개입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에 동의하신다면 저도 기꺼이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은행 사업에 참여하고자 하는 건 멤피스 사제들의 영향력을 완전히 끊어내기 위해서였다.

  알렉산드리아는 분명 부유한 도시였으나 사제들의 관리하에 있는 역대 파라오들의 재산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것을 마음대로 끌어쓸 수 없는 이상 프톨레마이오스에게는 세수 외에도 다른 자금원이 필요했다.

  그러던 차에 에우고라스가 기적처럼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가져온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 놀라운 제도를 구상한 마르쿠스라는 청년에게 깊은 관심이 생겼다.

  모든 정보망을 동원해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감탄이 나왔다.

  왕정 국가의 사람들은 공화정의 사람들과는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달랐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마르쿠스라는 청년을 직접 보고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두 눈으로 직접 본 뒤 확신이 더욱더 깊어졌다.

  거의 20년을 파라오로 살아온 그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자는 제왕의 기질을 타고났다.

  죽일 수 없다면 절대 반목하지 말고 자신의 편으로 삼아야 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어차피 처음부터 지중해 세계를 호령하고 싶은 야망 따위는 없었다.

  이집트에서 자신의 절대왕권을 확실히 구축해놓기만 하면 그만이다.

  결심을 굳힌 파라오의 입가가 얇은 호선을 그렸다.

  < 85. 이집트의 운명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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