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이집트의 운명 >
86.
마르쿠스와 프톨레마이오스는 그 뒤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접견은 프톨레마이오스가 곤란에 처했을 때 정확히 어디까지 로마가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지, 마르쿠스가 은행으로 어떤 사업을 할 것인지, 설탕은 어느 정도나 수출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확인이 전부 끝난 뒤에 종료됐다.
마르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가 뭔가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걸 눈치챘다.
회담 중반부터 그의 표정과 어조가 미약하게 변하는 걸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끝까지 말을 꺼내지 않았으니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라는 뜻이리라.
마르쿠스는 거처로 돌아오고 나서도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지 않았다.
예상대로 밤이 깊어진 뒤 프톨레마이오스는 비밀리에 시종을 보냈다.
마르쿠스가 의외로 빨리 나타나자 프톨레마이오스는 또 한 번 감탄했다.
그리고 자신의 직감이 옳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렇게 빨리 오다니 놀랐네. 설마 내가 다시 부를 줄 알고 있었던 것인가?"
"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신 듯 보이셨으니까요."
"놀라운 통찰력이로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음이야. 역시 자네와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한 건 좋은 판단이었어."
"그렇군요. 파라오께서는 원로원의 대표가 아닌 마르쿠스 크라수스라는 개인과 나눌 이야기가 있으신 거로군요."
프톨레마이오스가 경탄이 담긴 표정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뭐든지 다 꿰뚫어 보는 것 같군. 선천적인 감인가?"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후천적으로 갈고 닦은 통찰력입니다."
"그런 거라면 더욱 대단하지 않나. 나는 20년간 옥좌에 있으면서 위험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판별하는 안목 정도밖에는 갖추지 못했는데 말일세."
"그건 왕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이 아닌가요?"
자신에게 위험이 될 자를 확실히 가려낼 수 있다면 정적이 될 자를 쉽게 골라낼 수 있다.
왕권을 안정화하는데 이보다 좋은 능력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는 그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내가 말한 안목은 그리 대단한 능력이 아니라네. 사실 안목이라는 건 허울 좋은 말이고 살아남기 위한 눈치에 가깝지.
자네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선대 파라오의 정당한 자손이 아니라네. 그래서 즉위할 때부터 잡음이 끊이질 않았지.
나처럼 기반이 없는 자는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도움에 기댈 수밖에 없었네. 정확히 말하면 외부의 압력에 저항하지 않는 길을 택했지. 로마에까지 밉보이면 내 얄팍한 기반 따위는 순식간에 날아갈 거라 생각했거든.
"
"선택의 여지가 없었군요."
"덕분에 나는 시민들에게 태평하게 피리나 불고 있는 사람이라며 아울레테스라는 조롱 섞인 칭호까지 받았지.
궁에도 믿을 만한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네. 대부분은 파라오라는 권력을 끼고 자신들의 위세를 높일 생각으로 가득 차 있거든. 게다가 난 멤피스의 사제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몸이니 주변의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네. 그렇게 20년을 사니 날카로워지는 건 생존본능밖에 없더군.
"
마르쿠스는 눈앞의 남자가 조금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라오라는 거창한 칭호와는 달리 실권은 그에 전혀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주민들도, 이집트 원주민들도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진정한 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왕좌에 앉아 있던 20년을 하루하루 불안함 마음으로 보냈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해서 왕좌에 앉아 있어야겠느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지키고 싶은 게 왕이라는 자리다.
마르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가 무슨 요구를 하고 싶은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로마 원로원의 결의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느끼십니까?"
"······."
정곡을 찔린 프톨레마이오스는 일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이게 바로 이집트가 처한 현실이었다.
살아있는 신이라 자부하는 파라오조차 로마 원로원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말은 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특히 현 파라오처럼 권력의 기반이 로마에 있는 자들은 더욱 그러했다.
과거 세계를 호령한 이집트의 파라오라 해봐야 지금은 로마의 신하에 지나지 않는다.
알렉산드리아와 이집트의 주민들은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으나 현실은 냉엄했다.
"이번에 나눈 대화는 그 어디로도 유출되지 않을 테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마르쿠스가 확실히 보장을 해주자 그제야 프톨레마이오스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대로일세. 이런 말을 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원로원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기는 조금 어려운 게 사실일세. 에우고라스가 로마에 갔을 때 겪었던 일들을 전부 들었네. 원로원은 이집트의 막대한 재산과 식량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지 않나. 언제라도 이집트를 병합하려는 기회를 엿보고 있음이 틀림없네. 페르가몬 왕국과 비티니아 왕국의 말로만 봐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지."
"두 왕국에 관해서는 저도 원로원을 변호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한 번 결의를 맺은 이상 현 파라오께서 왕위에 있는 동안은 이집트를 탐내지 않을 겁니다. 로마는 한 번 맺은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지는 않으니까요."
프톨레마이오스도 그 점은 동의했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그의 사후 이집트가 어떤 말로를 맞이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셀레우코스 왕조나 안티고노스 왕조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릴 가능성도 컸다.
영광스러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자신의 대에서 막을 내릴 수도 있는 상황이다.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죽어서도 선대 파라오들의 얼굴을 감히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페르가몬 왕국과 비티니아 왕국이 어떻게 로마의 속주가 됐는지 살펴보면 이는 결코 과한 걱정이 아니었다.
두 왕국 모두 처음에는 로마에게 자치권을 인정받았었다.
로마와 계약을 맺은 왕이 살아있을 때까지는 로마도 그들을 가만히 놔두었다.
그러나 왕이 승하하자 로마는 선왕이 작성했다는 유언서를 내세워 페르가몬과 비티니아를 속주로 합병해 버렸다.
정당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한 페르가몬의 왕자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제압되었고, 개선식에서 구경거리로 끌려다닌 뒤에 처형되었다.
비티니아 왕국은 마땅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속주가 됐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런 일이 이집트에도 일어날까 봐 불안해했다.
"원로원은 내 왕권이 강해지는 것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듯하네. 내가 지금까지 그들에게 상당한 양의 뇌물을 줬는데도 말이지. 자네는 원로원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모르겠지만······."
"그래서 이제 원로원이 아니라 강력한 실권을 쥔 개인을 포섭하실 생각이시군요. 나쁘지 않은 계획이긴 하지만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듯합니다."
"과대평가? 그렇지 않네. 아까 말하지 않았나. 나는 위협이 될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별할 수 있다고."
"흐음, 제가 파라오께 위협이 되지 않을 것 같다···그러니 포섭을 하고 싶으시다는 말씀입니까?"
프톨레마이오스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반대일세. 자네는 내가 판단하기 힘들 정도의 커다란 그릇을 가지고 있네. 만약 자네가 이집트인이었다면 나는 모든 수를 다 써서 자네를 누르려고 했겠지. 하지만 자네는 로마의 귀족이 아닌가. 게다가 언젠가는 분명히 원로원의 중심적인 인물이 되겠지. 지금 한창 위세를 떨치고 있는 저 폼페이우스처럼."
"과분한 평가에 그저 황송할 따름입니다."
"지금이야 아직 그런 위치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걸세. 어쨌든 내 입장에서는 불특정 다수에 신뢰도가 떨어지는 원로원보다는 그 중심에 설 확률이 높은 자네와 가까워지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네."
"제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하지 않을 리가 있나. 지금도 하고 있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가 되면 불안해할 필요가 없지 않겠나. 신뢰가 아닌 이득으로 묶인 관계가 되었으면 하네."
마르쿠스가 무심한 눈빛으로 프톨레마이오스를 쳐다보았다.
원로원 의원들의 앞에서는 보여주지 않았던 그의 진짜 모습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자신도 침을 삼켰다.
대화를 나눠보면 나눠볼수록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강해졌다.
그리고 그와 비례해 그의 도움을 얻을 수만 있다면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존속을 보장받을 수 있겠다는 확신도 강해졌다.
위험을 감수할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그는 마르쿠스가 대답을 꺼내기도 전에 몇 마디 말을 더 늘어놓았다.
"나는 자네가 로마의 고위직에 올랐을 때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줄 수 있네. 내 왕권을 보장해준 결의를 이끌어낸 은혜를 갚는 거라고 하면 누구도 의심하지 않겠지. 대신 자네는 원로원의 여론을 잘 조정해서 앞으로도 우리 왕가의 위치가 굳건할 수 있도록 힘을 좀 써주게나."
"지원이라면 어떤 형태의 지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우선 자네의 사업이 북아프리카에 확실히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후원을 해주겠네. 알렉산드리아만이 아니라 북아프리카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다면 내 지원이 반드시 필요할 걸세. 그리고 자네가 정말로 필요하다 싶을 때는 곡물을 싸게 공급해줄 수도 있네. 그리 빈번하게는 못하겠지만, 결정적일 때 큰 도움이 되지 않겠나. 예를 들면 시칠리아나 소아시아에 흉년이 들었을 때 자네가 주도해서 이집트에서 대량의 곡물을 싸게 들여온다면? 로마에서 자네의 인기가 한층 더 높아지지 않겠는가."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긴 하군요."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풍년과 흉년 주기는 이미 머릿속에 다 있으니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도 가능했다.
무엇보다 이집트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다면 차후 있을 계획이 훨씬 더 탄력을 받을 수 있다.
9할 9푼의 성공확률을 10할로 끌어올리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다만 눈앞의 일보다 조금 더 먼 미래를 고려하면 이집트를 지금 그대로 놔두는 건 재고해 봐야 한다.
고대의 이집트는 지중해 세계 그 어디보다도 비옥하고 부유한 땅이었다.
4윤작법으로 생산력을 끌어올려도 매해 범람하는 나일강의 은혜를 받은 이집트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 정도로 중요한 땅이기에 이집트는 역사에서 로마에게 패해 속주가 되었을 때조차 특별 취급을 받았다.
총독이 임명되는 게 아니라 로마의 황제가 직접 자신의 사유지로 삼은 것이다.
이집트가 지닌 엄청난 부는 로마 황제의 권력을 강화해주는 훌륭한 도구가 되었다.
어느 쪽도 포기하기엔 아깝다.
잠시 고민을 하던 마르쿠스는 어렵지 않게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눈앞의 이익도, 먼 미래의 이득도 포기할 수 없다면 전부 취하면 되는 것이다.
마르쿠스가 시원하게 웃으며 프톨레마이오스의 제안에 답을 들려주었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군요. 파라오께서 건네신 제안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오오, 그게 정말인가?"
"예. 하지만 서로 몇 가지 조건은 확실히 하도록 하죠. 계약은 원래 철저하게 해야 하니까요. 그래야 혹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느 쪽에게 귀책사유가 있는지도 확실히 판별할 수 있고요."
"그건 동감일세. 나도 확실하게 해두고 싶은 사항이 몇 가지 있고."
마르쿠스와 프톨레마이오스는 파피루스지에 자신들이 원하는 항목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기 시작했다.
양측이 합의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혹시라도 밖으로 새어나갔을 시를 대비해 마르쿠스의 이름을 직접 사용하지 않고 양측의 이름을 A와 B로 칭했다.
Ⅰ. 이 협약은 그 누구에게도 유출하지 않으며, 외부로 유출되었을 시 원인을 제공한 자가 모든 책임을 진다.
Ⅱ. A는 B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한다. 적극적인 협력이란 필요하면 원로원의 결의를 끌어내는 것을 포함한다. 그 대가로 B는 A가 요구할 시 왕가의 이름을 사업에 사용하는 것을 허가한다.
Ⅲ. A는 평상시보다 5할 인하된 가격으로 곡물을 매입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다. 이 권한은 10년에 한 번 행사할 수 있다.
Ⅳ. A는 B가 죽은 뒤에도 B의 피를 이어받은 후계자가 제대로 왕권을 확립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Ⅴ. 이집트가 로마에 먼저 적대적 행위를 보인다면 위의 사항은 전부 무효가 된다.
세세한 내용은 파피루스지 몇 장에 달했으나 핵심 내용은 저 다섯 가지였다.
프톨레마이오스는 4번 항목을 끌어낸 것만으로도 자신이 손해를 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협약이 무효가 될 수 있는 1번과 5번 항목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비밀계약인 이상 이걸 유출한 부주의한 자가 책임을 지는 게 당연했고, 이집트가 멸망하고 싶지 않은 이상 로마에게 먼저 적대행위를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양측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형태로 계약이 성립됐다.
마르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와 몇 마디 덕담을 주고받은 뒤 자리를 떠났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이 협의를 맺을 걸 후회할 리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가 천수를 누리고 사망할 때까지 문제가 일어날 일은 없을 테니까.
이집트에 온 목적은 이걸로 전부 달성했다.
거처로 돌아가는 마르쿠스의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
이집트에서 볼 일을 모두 끝마친 마르쿠스는 슬슬 귀환 일정을 잡았다.
적어도 본격적인 선거 유세가 시작되는 6월 중순까지는 로마로 돌아가야 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마르쿠스가 좀 더 머물렀으면 하는 눈치였으나 딱히 강요는 하지 않았다 그저 매일같이 화려한 연회를 열어 그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게 다였다.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는 거의 매일같이 마르쿠스의 거처를 찾아와 그를 귀찮게 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어떤 때에도 예의를 차렸지만 아르시노에는 놀아달라고 조르기 일쑤였다.
"마르쿠스, 로마의 영웅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줘요."
"어제 위대한 아프리카누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드렸지 않습니까."
"전 폼페이우스 님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해요. 이집트에서도 그분의 명성은 자자하거든요."
"하아···알겠습니다. 그러니까 폼페이우스 님은······."
아르시노에에게서는 처음에 보였던 권위적인 모습이나 까칠한 태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마르쿠스가 어딜 가든 따라다니며 과자를 달라고 졸랐다.
클레오파트라는 동생이 무례를 저지를까 봐 노심초사해하며 언제나 곁을 지켰다.
어린아이를 대하는데 그리 능숙하지 못한 마르쿠스에게는 고역이었다.
스파르타쿠스는 아르시노에가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일 거라고 추측했다.
"아마 처음에 보인 공격적인 태도도 어렸을 때부터 계속 축적된 외로움 때문이 아닐까요. 왕자님들과 공주님들은 서로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않으니 교류도 부족하고, 주변에는 다 아첨을 하는 자들밖에 없으니까요."
"일종의 심리적인 방어기제가 작용한 건가?"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주군의 생각이 맞을 겁니다."
일단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의 주변에는 지금까지 마르쿠스 같은 위치를 지닌 사람이 없었다. 필요 이상으로 숙이지 않고, 자신들도 존중할 필요가 있는 상대.
거기에 뭔가를 해달라고 조르면 어쩔 수 없다는 듯 다 들어주면서 어울려 준다.
지식도 출중하고 신기한 일들도 많이 알고 있어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지루할 틈도 없었다.
두 공주에게 마르쿠스는 처음으로 만난 신선한 외지인이자 최고의 놀이 상대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을 종종 따라붙는 어린아이들을 매정하게 내치는 건 인간적으로 불가능했다.
결국 마르쿠스는 나중에 자식들이 크면 놀아주는 걸 미리 연습한다는 셈 치고 마음을 비웠다.
아르시노에오와 클레오파트라에게 자신이 떠난 뒤에도 즐기라고 간단한 보드게임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때아닌 보모 역할을 하고 있으려니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로마까지의 항해 준비는 열흘 안에 끝났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이집트에서의 일정도 이걸로 전부 마무리됐다.
클레오파트라는 마르쿠스가 떠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숨기지 않았다.
아르시노에는 어울리지 않게 징징 짜며 일주일만 더 있으라는 부탁을 했다.
물론 그녀도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마르쿠스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 기회가 되면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나누었다.
그는 그렇게 로마로 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그다음부터 로마에 도착할 때까지 하루하루는 시위에서 떠난 활처럼 무서운 속도로 흘러갔다.
마르쿠스의 행보는 흘러가는 시간처럼 한순간도 멈춰있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계의 판도가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 86. 이집트의 운명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