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불카누스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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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가 갈리아라고 칭하는 지역은 실로 광대하다.
갈리아 키살피나라고 불리는 북부 이탈리아를 제외해도 현대의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전체 면적과 스위스, 네덜란드의 상당수 지역, 그리고 독일의 영토 중 라인강 서쪽에 해당하는 부분이 모두 포함된다.
이 드넓은 땅에는 당연히 그만큼 수많은 부족들이 난립해 있었고, 인구도 많았다.
정확한 추산은 불가능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확실하게 500만에서 600만 이상이라는데 의견이 일치한다.
하이두이족이나 네르비족처럼 십만이 훌쩍 넘는 대부족이 도처에 널려 있었고, 자잘한 군소 부족들까지 포함하면 100개에 달하는 부족이 각지에 퍼져 있었다.
로마인들은 이 갈리아에 사는 부족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눴다.
첫 번째가 흔히 장발의 갈리아인이라는 뜻의 갈리아 코마타, 두 번째가 아키테인인 아퀴타니, 세 번째가 벨기에인인 벨가이다.
공화정 시기의 갈리아 지역은 대부분 개간되지 않은 땅으로 농토보다는 숲과 늪이 더 많았다.
하지만 훗날 유럽 최대 곡창지대가 되는 지역답게 기후가 온난하고 식수가 풍부해 누가 보아도 사람이 살기에 좋은 땅이었다.
반대로 갈리아 동쪽에 위치한 게르만은 기후와 토지가 적합하지 않아 쉽게 식량을 조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게르만은 식량이 부족할 때마다 빈번하게 라인강을 넘어 갈리아 지역을 약탈했다.
갈리아 부족들이 하나로 단결한다면 게르만이 쉽게 넘볼 수 없었을 테지만, 갈리아는 절대 하나로 단결하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게르만족에게 시달리는 다른 부족을 공격해 자신들의 세력을 늘리려는 성향이 있었다.
그리고 세력 경쟁에서 밀린 다른 갈리아 부족은 게르만에게 부탁해 권토중래를 꾀했다.
상황이 이러니 게르만족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갈리아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특히 카이사르에 의해 로마인의 친구라는 칭호를 받은 아리오비스투스의 위세는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본래 로마의 친구라는 칭호는 '너는 로마의 통제 아래에 있으니 앞으로는 경거망동하지 마라'라는 의미다.
그러나 아리오비스투스는 이 칭호를 로마가 자신의 힘을 인정한 거라고 여겼다.
두려움이 없어진 그는 계속해서 갈리아인을 공격했고, 결국 견디지 못한 갈리아 민족들이 서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처음 이들을 끌어들인 세콰니족마저 아리오비스투스의 기세에 눌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었다.
오늘날의 스위스에 살고 있는 헬베티족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사는 영역은 원래부터 알프스 산맥과 로마 속주에 둘러싸인 형태라 영토 확장에 어려움을 겪었다.
여기에 강력한 게르만족의 일파인 수에비족까지 마주하게 되자 기존 영역을 지키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결국 그들은 갈리아 서쪽의 브르타뉴 지방을 침략해 그 지역을 차지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이 지역은 무주공산이 아니었다. 산토니족과 픽토네스족이 오래전부터 상주하고 있던 곳이다.
헬베티족은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착실하게 침략준비를 마쳤다.
각오를 다지기 위해 원래 거주하던 12개 도시와 400개의 마을을 모두 불태우기까지 했다.
마침내 준비가 끝난 그들은 인근의 소수 부족들을 규합해 대이동을 개시했다.
비전투 인원까지 포함한 전체 인원수는 무려 35만 이상.
싸울 수 있는 장정들의 수만 9만이 넘었다.
이 소식을 전달받은 카이사르와 마르쿠스가 임지에 도착했을 때 헬베티족은 이미 로마 속주의 인근까지 도착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던 마르쿠스는 이미 군단 소집을 끝내놓은 상황이었다.
카이사르는 이걸로도 충분치 않다고 판단하고 즉각 명령을 내렸다.
"사태가 급박하니 2개 군단을 추가 편성해야겠어. 군단이 편성되는 즉시 북쪽으로 올라오라는 지시를 내리도록."
"원로원의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사태가 급박할 시에는 사령관이 임의로 판단하고 사후에 허가를 받을 수 있네. 지금이 바로 그런 긴급 상황이야."
카이사르는 새로 군단이 편성되는 걸 기다리지 않고 이미 준비된 4개 군단을 이끌고 론강 유역으로 향했다.
마르쿠스도 자신의 사비로 편성한 1개 군단을 데리고 카이사르의 뒤를 따랐다.
도합 5개 군단, 3만이 넘는 로마군의 모습을 확인한 헬베티족은 일순 혼란에 빠졌다.
전투 가능한 인원수로만 따져도 3배가 넘었으나 상대방은 로마의 정규군단이었다.
맞상대를 한다면 얼마만큼의 피해가 있을지 예측이 가지 않았다.
게다가 헬베티족의 목적은 로마군과 싸우는 게 아니라 갈리아 서쪽으로의 이주였다.
다급해진 그들은 일단 카이사르에게 사절을 보내 중재를 요청했다.
"우리의 목적은 그저 수에비족을 피해 동쪽으로 이주하는 것입니다. 자비로운 로마의 총독이시여, 절대로 소란을 벌이지 않을 테니 속주를 통과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저희는 이곳을 경유해 남쪽으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글쎄···자네들이 가려는 곳은 이미 임자가 있는 땅으로 알고 있는데? 산토니족이나 픽토네스족이 자네들에게 제발 같이 와서 함께 살아달라고 사정이라도 했나?"
"그건 아닙니다만······."
"그러면 그들을 공격해 거주지를 빼앗을 생각인가 보군."
"부족들끼리의 다툼은 원래 있어왔던 일 아닙니까. 로마는 지금까지 이런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싸움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원래 거주하고 있던 부족들을 아예 쫓아내고 자신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건 이야기가 다르지 않겠나. 자네들에게 쫓겨난 부족이 다른 곳으로 밀려나게 되면 자연히 거기서도 혼란이 생길 것이고, 이 연쇄가 갈리아 전역으로 퍼질 우려가 있네."
사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로마의 속주를 통과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서쪽을 그대로 가로지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거리상으로는 짧았으나 이 경로에는 갈리아 굴지의 강자인 하이두이족과 세콰니족이 있었다.
"총독님의 대답은 거절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본래라면 그래야 하겠지만 이번만큼은 자네들의 딱한 사정을 한번 고려해보겠네. 하지만 총독이라고 해도 이런 중대한 문제를 홀로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 회의를 열어 결정할 테니 보름만 기다렸다가 다시 오게나."
"감사합니다. 그러면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며 물러가 보겠습니다."
헬베티족의 사절이 막사를 빠져나가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르쿠스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전군에게 명령해 성채를 만들라고 명령할까요?"
"역시 자네는 이해가 빠르군. 굳이 설명할 수고를 덜게 되니 아주 편하단 말이야."
카이사르는 회의 따위는 할 생각도 없었다.
제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자국의 영토를 이민족의 군대가 활보하도록 허가를 내릴 리가 없다.
회의는 헬베티족이 쳐들어올 때를 대비할 시간을 벌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속내를 정확히 꿰뚫어 본 마르쿠스는 즉각 행동방침을 제안했다.
"강 전역을 따라 방책을 세우고 도랑을 파라고 명령하겠습니다. 2개 군단이 추가로 도착하는 대로 그들도 공사에 투입하죠."
"자네가 직접 지휘할 생각인가? 다른 군단장에게 맡겨도 될 텐데?"
"아직 새파랗게 젊은 군단장을 믿지 못하는 고참 백인대장들이 있으니까요. 하루라도 빨리 그들의 신뢰를 얻어야죠. 적어도 제가 맡은 12군단 정도는 확실히 제 사람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마르쿠스의 의도를 이해한 카이사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휘관이 부하들의 신뢰를 얻지 못한다면 그 전쟁의 결과는 뻔하다.
백인대장들이 군단장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로마군의 자랑인 유기적인 지휘체계에 혼선이 생길 수 있다.
"이 카이사르의 군단에서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네. 시간을 줄 테니 책임지고 자네의 군단을 확실히 통솔하게. 만약 전투 시작 전까지 부하들의 신뢰를 얻는 데 실패하면 12군단의 제 1대대 1백인대장에게 임시 군단장을 맡길 수밖에 없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물러가 보겠습니다."
카이사르의 허가를 받은 마르쿠스는 즉각 행동을 개시했다.
다른 군단의 군단장들에게 공사를 시작하라는 카이사르의 명령을 전달하고, 자신이 맡은 군단 전체를 소집했다.
마르쿠스는 군단의 일반병들에게는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고 자부했다.
지금까지 시민들을 위해 통과시킨 숱한 정책들과, 해적소탕과 동방 평정에 참여한 경력도 있었다.
거기에 마르쿠스를 따라 제1 대대의 2백인대장을 맡은 스파르타쿠스의 인기도 한몫을 했다.
대부분의 신병들은 스파르타쿠스의 전설적인 경기를 보며 성장한 세대다.
그들에게 있어서 스파르타쿠스는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자 살아있는 우상이었다.
스파르타쿠스가 크라수스 가문의 무사라는 사실을 모르는 로마인은 없었다.
스파르타쿠스를 흠모하는 병사들은 자연히 그가 모시는 주인인 마르쿠스에게도 호감을 가졌다.
그러나 군대에서 오래 복무한 백인대장들은 조금 달랐다.
그들은 스파르타쿠스의 공훈은 인정했다.
노예 반란 때도 적장을 베는 공을 세웠고, 동방에서도 시민관을 받은 그의 업적을 폄하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아직 새파랗게 젊은 마르쿠스가 군단을 지휘하는 데에는 불안감을 표했다.
물론 마르쿠스의 앞에서 그런 감정을 대놓고 드러내는 바보는 없었다.
옵티마테스의 대표이자 로마 최고의 부를 자랑하는 가문의 후계자다.
열심히 줄을 대서 출세하려고 하면 했지,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감정을 읽어내고 간파하는데 도가 튼 마르쿠스는 대다수 백인대장들이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걸 바로 알았다.
전장에서는 지휘관의 판단 하나가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판단력이 의심스러운 군단장의 명령에 따르느니 익숙한 자신들끼리 해나가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실제로 마르쿠스의 소집에 응한 백인대장들의 태도는 공손하기 그지없었으나 은연중 어떠한 벽을 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래서 군대 특유의 배타적인 문화란···쯧.'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마르쿠스에게 군단의 최고선임인 1대대 1백인대장 루키우스가 다가왔다.
보통 제 1대대의 1백인 대장은 모든 백인 대장들 가운데서도 최고의 능력을 지닌 자가 맡는다.
이 자리는 군단장이나 사령관이라고 해도 독단으로 정하지 못하고, 다른 백인 대장들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
그만큼 군단에서 신뢰받는 실세였고, 이 선임 백인 대장은 군단장과 함께 작전 회의에 참여할 권한까지 있었다.
즉, 마르쿠스가 군단의 신뢰를 얻기 위해 최우선으로 포섭해야 하는 상대였다.
"군단장님, 어째서 저희들만 따로 소집하신 겁니까? 다른 군단은 이미 방어를 갖추기 위한 공사에 투입된 것으로 아는데요."
"좋은 질문일세. 이제 본격적으로 전장에 나가기에 앞서 자네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과 보여주고 싶은 물건이 있거든."
병사들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백인 대장들의 표정에는 일말의 짜증이 어렸다.
정치판에 오래 몸담은 지휘관들 특유의 번지르르한 연설이 있을 거라는 게 뻔히 예측됐기 때문이다.
마르쿠스는 그런 백인 대장들의 분위기를 감지하고도 기분 좋게 활짝 웃어 보였다.
"여러분들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총지휘관인 카이사르 님께서는 나에게 12군단을 마음대로 통솔할 수 있는 재량권을 주셨네. 자네들의 연봉이 내 호주머니에서 나간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겠지?, 그래서 미리 일러두는데 나는 절대로 공을 세운 병사들을 인색하게 대하지 않는다네. 성과에 따른 확실한 보수와 다른 군단과는 차별화된 대우를 약속하지."
로마 최고의 부자인 마르쿠스가 확실한 보수를 약속하자 병사들의 입꼬리가 자연스레 위로 올라갔다.
백인대장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돈을 많이 준다는데 그 어느 누가 불만을 표하겠는가.
마르쿠스는 한결 밝아진 병사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성과를 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전쟁에서 살아남는 거라는 건 모두가 동의할 거라 믿네. 나는 일단 나를 따르는 병사들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걸 절대 용인하지 않을 걸세. 그러니 나는 내게 부여된 재량권을 이용해 자네들의 생존율을 극적으로 향상시킬 계획이라네. 내가 장담하는데 자네들은 곧 내 군단에 배정된 사실을 유피테르 신에게 감사하게 될 거야."
백인 대장 중 한 명이 번쩍 손을 들고 물었다.
"저희 군단은 후방에 배치되는 겁니까?"
마르쿠스는 카이사르의 사위이자 귀족파의 최고 중요 인물이니 위험한 전장에 내보낼 리는 없다.
그렇다면 자연히 그가 지휘하는 군단도 후방에서 자리를 지킬 확률이 높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마르쿠스의 말을 그렇게 이해했다.
"일리가 있는 추론이지만 그건 아니라네. 전장에 나와서 뒤에만 숨어있는 군단장을 자네들이 신뢰하고 따를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저희의 생존율을 올리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백 번의 말보다 한 번의 시범을 보이는 게 확실할 테니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겠네. 스파르타쿠스, 가져오도록."
마르쿠스가 신호를 보내자 스파르타쿠스가 두꺼운 강철판을 몇 개 가지고 앞으로 나왔다.
병사들은 물론 백인 대장들도 흥미로운 표정으로 처음 보는 강철판을 바라보았다.
"이게 바로 자네들의 생존율을 극적으로 높여줄 수 있는 비장의 무기라네. 이건 이렇게 어깨와 흉부를 보호하도록 갑옷에 부착할 수 있지."
마르쿠스는 자신의 옆에 십자 형태의 말뚝을 박고 거기에 로마군의 전통갑옷인 로리카 하마타를 입혔다. 그 뒤에 흉부와 어깨 부위에 강철 판갑을 가죽끈으로 엮어 부착해 놓았다.
마르쿠스는 이번 원정을 통해 자신이 만들어낸 강철의 품질을 재단해볼 계획이었다.
그래도 아직 통짜 판금 갑옷을 선보일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우회책을 마련한 것이다.
일반적인 로리카 하마타 위에 강철 판갑을 덧댄 모습은 제정 시기 로마군의 갑옷인 로리카 세그멘타타와 상당히 흡사해 보이기도 했다.
물론 허술한 고대시대의 제철 기술로 만든 판갑과는 방어력을 비교하는 게 무안할 수준으로 차이가 컸다.
마르쿠스는 갑옷 위에 덧댄 판금을 통통 두드리며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어조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한눈에 봐도 상당히 견고해 보이지 않나? 하지만 자네들의 상상 이상으로 이 갑옷은 단단하다네.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판금으로 보호된 부위는 그냥 적들의 공격을 맞아도 상관없을 정도지."
어차피 커다란 방패를 사용하는 로마군의 특성상 팔 부위는 거의 공격당할 일이 없다.
로마군이 가장 많이 피격당하는 부위는 공격하는 순간에 드러나는 어깨 부위와 얼굴, 그리고 몸에서 면적이 가장 큰 흉부였다.
이곳들만 완벽히 방어해도 사실상 전장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질 확률은 9할 이상 급감할 것이다.
마르쿠스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백인 대장을 직접 지목했다.
평소에도 은근히 마르쿠스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는 자였다.
"거기, 자네 이름이 라비우스라고 했었지? 자네가 직접 시범을 좀 보여주게."
"예? 제가요?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냥 자네가 가진 무기로 전력을 다해서 저 갑옷을 후려쳐보게. 만약 갑옷을 뚫어낼 수 있다면 내가 상금으로 100 데나리우스를 주도록 하지."
라비우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정말이십니까? 그냥 갑옷을 파손시키기만 하면 100 데나리우스를 주신다고요?"
"물론."
라비우스는 주저하지 않고 무기를 뽑았다. 아무리 갑옷이 단단해도 체중을 실어서 전력으로 무기를 내지르면 뚫리는 법이다.
꽁으로 100데나리우스를 벌게 된 그는 내심 횡재했다고 여기며 몸을 날렸다.
애용하는 글라디우스에 온 체중을 가득 싣고 혼신의 일격을 내질렀다.
깡!
"어엇!"
손목에 느껴지는 둔탁한 통증과 함께 라비우스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다른 병사들과 백인 대장 역시 입을 떡 벌렸다.
가끔 검으로 베도 로리카 하마타를 끊어내지 못할 때는 있다.
하지만 이렇듯 무력하게 검이 튕겨 나가지는 않았다.
라비우스가 애용하는 글라디우스는 흡사 거대한 바위라도 두들긴 듯 부러져 있었다.
반면 그가 후려친 갑옷은 파인자국조차 남지 않고 멀쩡했다.
"이, 이게 대체······"
"100 데나리우스는 포기인가?"
라비우스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투창을 꺼내 들었다.
전력으로 도움닫기를 한 뒤 세차게 던진 투창이 판갑의 흉부에 정확히 명중했다.
카앙!
이번에도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투창이 맥없이 튕겨 나갔다.
흉부에 덧댄 강철판은 조금의 흠집도 나지 않았다.
도리어 호쾌하게 날아간 투창의 날 부분만 박살이 나 있었다.
라비우스가 귀신에 홀린 표정으로 입을 떡 벌렸다.
"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대체 저 갑옷을 뭘로 만들었기에······."
"이제야 내 말이 좀 믿음이 가나? 자, 라비우스 외에도 저 갑옷을 부수는 사람이 나온다면 약속한 상금을 주도록 하겠네. 지원해볼 사람 있나?"
마르쿠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병사들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저도 해보겠습니다!"
"기회를 주십시오!"
수많은 병사들이 너도나도 시도해 보았으나 누구 하나 강철판을 뚫지 못했다.
마르쿠스는 그다음으로 강철로 만든 신형 글라디우스를 가지고 왔다.
처음엔 조금 더 날이 긴 스파타를 도입해볼까 했으나, 따로 훈련을 거치지 않고 익숙한 무기를 바꾸는 건 위험도가 크다고 판단했다.
마르쿠스는 강철 판갑을 분리한 뒤 로마군이 평상시 사용하는 로리카 하마타를 신형 글라디우스로 쭉 그었다.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로리카 하마타의 사슬이 종잇장처럼 퍽퍽 뜯겨나갔다.
철의 기본적인 강도 차이가 현격히 났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병사들과 백인 대장의 표정은 아까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특히 여러 번 전장에 나간 경험이 있는 백인 대장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경악과 충격으로 물들어 있었다.
병사들의 이런 반응을 만족스럽게 음미한 마르쿠스가 병사들과의 거리를 한 걸음 좁혔다.
"자, 이제 내 말을 믿어줄 수 있겠지?"
충격에서 먼저 벗어난 루키우스가 더듬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저, 저기 군단장님. 설마 저 갑옷을 이번에 저희가 착용할 수 있는 겁니까?"
"당연하지. 그게 아니라면 왜 이렇게 시범을 보였겠나. 군단 전원에게 줄 정도의 양은 확보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전열에 배치되는 장병들에게는 전원 신형 갑옷과 무기를 제공할 계획이라네."
대열해 있는 병사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퍼져 나왔다.
특히 최전열에 서는 군단병들은 대놓고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오오오! 마르쿠스 군단장 만세!"
"불카누스의 아들!
로마인들은 칼로 찌르고 투창으로 쑤셔도 부서지지 않는 갑옷은 어렸을 적 보았던 신화에만 나오는 무기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무구가 떡하니 현실에 나타났고, 자신들이 입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병사들의 눈에는 마르쿠스가 마치 신들의 무기를 만들었다는 대장간의 신 불카누스의 후예처럼 보였다.
전장에서 최고로 유능한 지휘관은 병사들의 목숨을 확실히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마르쿠스는 그 수단을 구체적인 형태로 군단병들의 앞에 제시했다.
칼에 정통으로 찔려도 죽지 않게 해주는 갑옷만큼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
일반 병사들은 물론 백인 대장들조차 마르쿠스에 대한 의심을 거두었다.
이토록 준비를 철저하게 하고 온 사람이 군단을 사지로 몰아넣을 리가 없는 까닭이다.
마르쿠스는 카이사르가 준 보름의 기간 중 단 하루 만에 군단의 마음을 완벽히 얻는 데 성공했다.
사기충천한 병사들의 함성을 듣는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 91. 불카누스의 아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