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갈리아 전쟁 개시(이미지와 지도 추가) >
92.
마르쿠스는 약속대로 12군단의 백인대장들과 전열에 서는 병사들에게 신형갑옷과 무기를 제공했다.
강철판갑의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신형 글라디우스도 실제로 사용해보니 위력이 엄청났다.
전투를 하다 보면 당연히 서로의 무기가 충돌할 때가 많다.
그런데 마르쿠스가 나눠준 글라디우스와 부딪친 기존의 무기는 태반이 날이 나가거나 부러졌다.
기존 로마군이 사용하는 무기가 이럴진대 야만족들의 무기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병사들은 커다란 짐을 하나 벗어버린 기분으로 얼굴이 환해졌다.
"군단장님, 기존에 보였던 무례한 태도를 사죄드립니다. 군단장님께서 저희를 이토록 신경 쓰고 계신 줄 몰랐습니다."
선임 백인대장 루키우스가 먼저 정중하게 사과를 올렸다.
그의 뜻은 곧 백인대장 전체의 뜻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르쿠스는 루키우스의 사죄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상대방을 나무라지 않으면서 자신의 그릇을 들어내는 화술을 발휘했다.
"너무 미안해할 거 없네. 경험이 부족해 보이는 군단장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건 오히려 선임 백인대장인 자네의 임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능력이 부족한 군단장은 군단 전체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릴 수 위험이 있으니까. 나는 아직 전장의 경험이 많지 않으니 최대한 자네의 의견을 많이 들어볼 계획일세. 앞으로 내게 많은 힘이 되어주게나."
"예. 군단장님을 보좌하는데 제 모든 능력을 아낌없이 바치겠습니다."
"저희도 군단장님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겠습니다!"
"전면전이 벌어지면 장비의 차이만큼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없죠. 군단장님은 이미 로마의 역사에 새겨질 위대한 공을 세우신 겁니다."
다른 백인대장들도 루키우스의 뒤를 따라 마르쿠스를 치켜세웠다.
마르쿠스는 그들 틈에 앉아 기분 좋게 웃으며 덕담을 주고받았다.
몇 시간 전과는 완전히 다른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렇게 칭찬에 취한 모습과는 달리 마르쿠스의 본심은 전혀 들뜬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냉정한 시선으로 백인대장들을 관찰하며 그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12군단에 이토록 많은 투자를 하는 건 단순히 자신에게 맡겨진 군단이라서가 아니었다.
마르쿠스는 12군단을 철저하게 사병화할 계획이었다.
갈리아에서 최소 2년은 목숨을 걸고 경험을 쌓을 군사들의 가치는 절대 낮지 않았다.
거기에 처음부터 마르쿠스의 지휘를 따르며 이후로 계속 호흡을 맞춰갈 자들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앞으로도 쭉 데려갈 자들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자신의 군단이라고 해도 신병기의 일부를 건네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번 갈리아 원정은 마르쿠스의 원대한 계획을 위한 최종조정의 성격도 띠고 있었다.
전장에서 직접 군대를 지휘하며 실전 경험을 쌓고, 새롭게 양산하는 강철이 기존 무기에 비해 얼마나 효율적인지 실전에서 데이터를 검증해 볼 예정이었다.
만약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가 나온다면 기존의 계획을 대폭 수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방심은 금물이었다.
오만과 방심은 언제나 패망으로 이어지는 선봉이다.
마르쿠스는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군단을 수습해 다른 군단처럼 방어진을 세우는 공사에 합류했다.
그렇게 보름이 지나자 헬베티족의 사절이 다시 찾아왔다.
새롭게 편성한 2개 군단이 합류하자 카이사르 군 전체 전력은 이제 7개 군단까지 불어났다.
거기에 보조병 역할을 수행하는 1개 군단까지 더해지면 실질적으로는 8개 군단의 전력이라 할 수 있었다.
새롭게 합류한 자들 가운데서는 마르쿠스가 익히 아는 얼굴도 보였다.
마르쿠스의 편지를 받자마자 전출을 낸 안토니우스가 마침내 갈리아에 도착한 것이다.
카이사르는 안토니우스를 마르쿠스가 이끄는 12군단의 기병장교로 임명했다.
방어진도 완벽했고 기다리던 정규군단도 전부 갖춰졌으니 이제 더 망설일 것이 없었다.
카이사르는 단호하게 헬베티족의 요구를 거절했다.
"오랜 시간 회의를 해보았지만 결국 자네들에게 속주 통과를 허락할 수 없게 됐네. 만약 론강을 건너온다면 로마에 대한 선전포고로 간주하고 대응할 걸세."
"비열한···처음부터 시간을 끌기 위해 우리를 속인 게 아닌가! 이게 로마의 방식인가!"
속았다는 걸 깨달은 헬베티족의 사절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자신들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고 주장한 강경파가 다리를 세워서 도강을 시도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로마군의 방어진을 본 이들은 절대 뚫을 수 없다는 걸 직감하고 바로 발길을 돌렸다.
헬베티족에게 남은 선택지는 이제 서쪽을 가로질러 원래 목적지로 가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갈리아의 최고 유력 부족인 하이두이족에게 중재를 신청했다.
하이두이 부족은 로마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부족이었으며, 유력자들은 로마 시민권까지 가지고 있는 친로마파 갈리아인이었다.
헬베티족과 가까웠던 하이두이족의 유력자 둠노릭스가 자신의 부족을 설득했다.
결국 족장 디비키아쿠스는 괜한 분쟁을 피하려는 마음에 세콰니족을 설득해 헬베티족을 통과시키기로 했다.
하이두이족에게 이런 연락을 받은 카이사르는 즉각 군단을 이끌고 국경선에 진을 쳤다.
상식적으로 35만이 넘는 인구가 이동하는데 주변과 마찰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헬베티족이 세콰니족의 영토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곧바로 사소한 충돌이 일어났다.
헬베티족은 이를 구실로 세콰니족의 영토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세콰니족의 거센 항의를 받은 하이두이족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카이사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헬베티족이 로마 속주 인근에 자리를 잡으면 로마에게도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부디 원군을 파병해 주십시오."
자신들끼리의 다툼에 외부세력을 끌어들이는 건 갈리아의 유구한 전통 중 하나였다.
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는 카이사르는 즉각 군단을 이끌고 갈리아로 진군했다.
속주 방어를 넘어 외부로 군대를 진군시켜야 할 때는 원로원의 허가가 필요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원로원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자네가 있는데 걱정할 게 뭐가 있겠는가. 이는 빠른 판단이 요구되는 사안이었고, 자네가 내 말에 거짓이 없다는 걸 원로원에 증명해주면 되는 일인데."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카이사르 님께서는 하이두이족을 믿으십니까?"
"그럴 리가. 아무리 로마에 우호적이라고 해도 갈리아의 부족은 신뢰할 수 있는 동맹이 될 수 없네. 우리가 틈을 보이면 언제라도 뒤통수를 칠 자들이라는 사실을 전제해 두고 계획을 짜야 해. 자네도 이 사실을 명심해두게."
카이사르의 상황판단은 적절했다. 그는 가끔 지나치게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도 사안의 본질을 혼동하는 일은 없었다.
로마군이 마침내 세콰니족과 하이두이족의 영토 경계선인 아라르 강에 당도했다.
하이두이족의 주도로 끌어모은 갈리아 동맹군 기병 4천이 로마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과 합류한 카이사르는 즉시 척후병을 풀어 헬베티족의 동향을 감시했다.
반나절 뒤 기지로 돌아온 척후병이 즉각 보고를 올렸다.
"헬베티족은 현재 강을 건너서 반대편으로 이동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켜보았을 때는 약 4분의 1이 건너간 것으로 보였습니다. 지금도 계속 강을 건너고 있으니 아마 내일 중으로 도강이 완료될 겁니다."
"그래, 수고했다. 이건 우리에게 상당한 호재로군. 적들이 분단된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겠지. 마르쿠스, 자네의 군단을 포함한 4개 군단으로 기습작전을 펼칠 테니 준비를 끝내두게."
"예. 즉시 시행하겠습니다."
사실상의 첫 전투 지휘를 맡은 마르쿠스의 가슴이 흥분으로 뛰었다.
저항이 전무했던 동방에서의 점령전과는 다르다.
이제 진짜 전쟁을 치를 순간이 온 것이다.
한밤중에 군단을 이끌고 숙영지를 떠난 마르쿠스는 전장의 공기라는 걸 피부로 체감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뿜어내는 살기와 긴장감에 심장이 고동치고 입술이 바싹 말라왔다.
2만 5천에 달하는 로마군이 강기슭에 도달했을 때 헬베티족의 4분의 3은 이미 강을 건너간 뒤였다.
상대를 각개격파하기에 이보다 좋은 상황은 없었다.
카이사르는 즉각 공격명령을 내렸다.
"저들은 로마에 잠재적인 위협이 될 적들이다! 한 놈도 봐주지 말고 모조리 쓸어버려라!"
"와아아아아!"
지축을 울리는 함성과 함께 로마군단이 우르르 앞으로 쏟아져 나갔다.
한참 도강작업을 하려던 헬베티족은 때아닌 기습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로, 로마군이다! 로마군의 기습이다!"
"도강작업을 중단해라! 대열을 갖추고······!"
퍼억!
명령을 내리던 지휘관의 얼굴에 스파르타쿠스가 던진 투창이 박혀 들었다.
대열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헬베티족은 로마군의 기습에 제대로 된 대응조차 할 수 없었다.
비전투인원과 전투인원이 어지럽게 섞여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싸우는 데 방해만 됐다.
반면 정교하게 대열을 형성한 채 밀고 들어오는 로마군은 성난 파도처럼 헬베티족을 휩쓸어나갔다.
이번 전투는 전투라기보다는 섬멸전에 가까웠다.
강 건너편에 있는 헬베티족은 동포들이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강기슭에 남아있던 헬베티족의 대부분은 사망했고 남은 자들은 포로로 잡혔다.
예상보다도 더 싱겁게 끝난 첫 전투에 마르쿠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앞으로의 전쟁을 위한 예열로는 딱 좋았다.
군단의 피해도 거의 없는 수준이었고, 상대방의 피해는 수만에 달했다.
안 그래도 높았던 로마군의 사기는 끝을 모르고 계속 올라가기만 했다.
이 여세를 몰아 카이사르는 공병들에게 다리의 건설을 명했다.
헬베티족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공병들은 단 하루 만에 군대가 넘어갈 수 있는 다리를 완성했다.
이를 지켜본 헬베티족의 사기는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떨어졌다.
상대군과 자신들의 역량 차이가 말도 못 할 정도로 난다는 걸 눈으로 확인한 까닭이다.
궁지에 몰린 헬베티족은 다시 한번 로마군에 사절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저번에 잔뜩 욕지거리를 내뱉고 갔던 사신이 어색한 표정으로 다시 로마군의 진지를 찾았다.
카이사르는 마르쿠스를 대동하고 총사령관의 막사에서 사절을 맞이했다.
"그래, 이제 와서 강화를 제의하고 싶다고?"
"예, 총독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저희는 로마가 지정하는 곳으로 이주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이쯤에서 싸움을 멈췄으면 합니다. 그리고 다른 갈리아 부족들이 저희를 적대하지 않도록 설득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하이두이족과 세콰니족의 호의를 무시하고 먼저 약탈을 한 건 자네들이 아닌가? 그래놓고 그들에게 자신들을 적대하지 말라는 건 좀 뻔뻔한 요구 같은데?"
"무, 물론 세콰니족의 영토를 약탈한 대가는 지불하겠습니다. 저희가 자리를 잡고 생활이 안정되면 이자를 붙여서 보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저희에게 남은 물자가 그리 많지 않은지라······."
자신도 모르게 중대 정보를 누설해버린 사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상대방의 군량이 여유롭지 않다는 걸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사실로 확인한 카이사르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좋아. 그러면 내 자네들의 딱한 사정을 가엽게 여겨 관대한 제안을 하도록 하지. 하이두이족과 세콰니족에 대한 피해 보상을 2년 안에 완료하도록 하게. 그리고 자네들이 이주할 지역은 갈리아의 부족장들과 협의해 정하도록 하지. 마지막으로 부족을 이끄는 유력자들의 자제를 로마에 볼모로 제공하게.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지킨다면 헬베티족에 대한 적대 행위를 모두 중단하겠네."
사절은 잠시 말이 없었다.
한눈에 봐도 기분이 팍 상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마르쿠스는 이게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합리적인 제안이지만, 헬베티족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라는 걸 잘 알았다.
헬베티족에게 있어 볼모의 제공이란 상대방의 수족이 되겠다는 맹세와 다름없었던 까닭이다.
마르쿠스의 예상대로 사절은 입술을 꽉 깨물고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다른 건 몰라도 볼모의 제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건 저희를 모욕하는 행위란 말입니다."
"로마가 요구하는 볼모는 자네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네. 로마는 상대방의 유력자들을 절대 소홀히 다루지 않거든. 인질의 개념보다는 우호를 위해 본국에 방문한 손님으로 대우한다는 말일세."
"그래도 안 됩니다. 로마는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부족의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다른 갈리아 부족 역시 저희가 로마에게 굴복하고 복종을 맹세했다고 여길 텐데 이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폭거입니다."
"폭거? 멋대로 로마의 국경선과 다른 부족의 영역을 들쑤신 자들에게 볼모와 피해보상만을 요구하는 게 폭거라고? 자네들의 사고방식은 나와는 많이 다른 것 같군. 정 그렇다면 이쪽도 끝까지 갈 수밖에 없는데···어떤가? 계속해볼 생각인가?"
헬베티족 사절이 책상을 쿵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에게 볼모를 잡아두는 관습은 있어도 보내는 관습은 없소! 끝까지 갈 수밖에 없다고? 좋소! 어디 한 번 끝까지 가봅시다!"
사절은 씩씩거리며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는 카이사르에게 마르쿠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문화의 차이라는 게 이런 식으로 드러나는군요. 헬베티족에게는 카이사르 님의 요구가 절대복종을 요구하는 걸로 들렸나 봅니다."
로마가 갈리아 부족의 볼모를 대하는 방식은 카이사르의 말대로 인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로마는 오히려 갈리아에서 온 볼모들에게 문명 생활의 달콤함을 마음껏 주입했다.
누릴 수 있는 모든 사치를 누리게 해주고, 은근슬쩍 로마의 문화를 따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렇게 완전히 로마화 된 유력자들을 돌려보내 해당 부족들을 친로마파로 만드는 게 그들의 방식이었다.
카이사르는 헬베티족에게도 이런 수단을 쓰려고 했으나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교섭이 결렬됐다.
이제 남은 건 전면전뿐이었다,
"36만의 헬베티족 중 거의 4분의 1에 달하는 자들이 무력화됐으니 이제 남은 건 27만 정도겠지. 그중에서 싸울 수 있는 장정들의 수는 대략 6만 이상 남았을 것이고. 우리 군단의 수는 거의 5만이니 장비와 훈련상태까지 포함하면 전력은 이쪽이 오히려 우위라고 봐도 무방할 걸세. 도움이 될지 안 될지 미묘한 갈리아 동맹군을 제외해도 상황이 이런데 숙이고 들어오지 않는 건 솔직히 의외로군."
"성인 남성이 아니라고 해도 아예 싸우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요. 조금 더 인원을 짜내면 어떻게든 승부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게 허튼 생각이었다는 걸 깨닫게 해줘야겠지."
카이사르는 자신들의 전력이 우위라고 판단해도 섣부르게 싸움을 걸지 않았다.
하이두이족의 영토를 통과하는 헬베티족과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계속해서 압박감을 가했다.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적이 먼저 싸움을 걸게 하려는 작전이었다.
흠잡을 데가 없는 계획이었으나 딱 한 가지 불안한 점은 바로 군량의 확보였다.
갈리아는 로마에게 있어서는 타지였기 때문에 보급이 그리 쉽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맹인 하이두이족에게 군량의 보급을 요청했다.
그러나 마르쿠스는 하이두이족이 군량을 제때 제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안정적인 보급선의 확보다.
이게 이뤄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무적의 군대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전쟁에서 이기기란 불가능하다.
마르쿠스는 혹시라도 생길지 모르는 변수를 사전에 차단하기로 했다.
하이두이족의 군량 제공이 늦어질 우려가 있으니 사전에 대비를 해야 한다고 카이사르에게 조언한 뒤, 예비 군단을 활용해 하이두이족만이 아닌 다른 부족들에게도 군량을 사들였다.
덕분에 예상대로 하이두이족의 군량 제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로마군은 식량 압박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지휘관 회의에서 마르쿠스의 공을 크게 치하했지만. 하이두이족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다만 은연중에 너희들의 행동은 이미 다 예상하고 있다는 경고를 흘렸다.
이때부터 하이두이족의 움직임은 이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빠릿빠릿해졌다.
어딘지 모르게 적과 대충대충 싸우던 기병대도 정신을 차렸다.
카이사르는 로마군의 본대로는 헬베티족의 뒤에 바짝 붙고, 갈리아 기병대로는 측면을 돌아다니게 하며 끊임없이 압박을 가했다.
군량은 점점 떨어지고 전방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적들이 포위를 좁혀오는 상황이다.
헬베티족의 인내심은 완전히 한계에 달했다.
결국 일전을 벌이기로 각오한 그들은 마침내 군대를 돌려 로마군과 거리를 좁혀왔다.
카이사르는 망설이지 않고 헬베티족이 건 싸움을 받아들였다.
"기병을 산개해 적들의 주의를 끄는 동안 보병들은 언덕 위의 고지를 점령한다. 전 군단은 대열을 갖추고 전투 경험이 없는 신병들은 물자를 방어하도록!"
총사령관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로마군은 포진과 배치를 끝냈다.
무서울 정도의 신속성이었다.
5개 군단이 로마군의 전통에 따른 3열로 쭉 늘어서고 새로 편성된 2개 군단은 배후에 배치됐다.
수송부대는 언덕의 정상에서 다른 부대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도록 자리를 잡았다.
마르쿠스의 군단은 일렬로 늘어선 로마군의 가장 우익을 맡았다.
군단의 배치를 막 끝낸 마르쿠스의 눈에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적군이 보였다.
비전투 인원까지 상당수 가세했는지 숫자는 10만을 훌쩍 넘어 보였다.
그야말로 인산인해, 로마군을 향해 덮쳐오는 사람의 파도였다.
그 생생한 위협과 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진정한 전장에 던져진 마르쿠스의 몸에 가벼운 소름이 일었다.
그의 귓가에 카이사르의 우렁찬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전군! 적이 사정거리에 들어오는 즉시 공격을 개시하라! 대열을 지키며 군단장과 백인대장의 명령에 충실히 따라 전투에 임하라! 적들의 수가 많다고는 하나 훈련되지 않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지휘관과 너희 자신을 믿어라! 나를 따르는 한 너희들에게 패배란 없다. 로마 인빅타!"
"우오오오! 로마 인빅타!"
카이사르의 외침에 호응하듯 로마군은 패배하지 않는다는 함성이 천둥처럼 사위를 울렸다.
전장의 공포는 어느새 승리를 향한 갈망과 흥분으로 변했다.
닥쳐오는 헬베티족을 바라보는 병사들의 눈이 투지로 번뜩였다.
전열에 선 병사들의 투창이 공기를 찢고 바로 뒤편에 선 궁수들이 쏘아낸 화살이 공중을 수놓았다.
마르쿠스의 군단도 우렁찬 함성을 내지르며 검을 빼 들고 돌격을 개시했다.
마침내 본격적인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 92. 갈리아 전쟁 개시(이미지와 지도 추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