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각자의 노림수 >
95
카이사르는 군단 전체에 스며드는 게르만족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막 행동에 나서려던 찰나, 총사령관 막사를 방문한 마르쿠스가 한 가지 좋은 방안을 제시했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생각했던 구상에 마르쿠스의 제안을 결합해 실행하기로 했다.
그는 즉시 지휘관 회의를 소집했다.
본래 지휘관 회의에는 군단장들과 대대장, 그리고 제1대대 제 1백인대장만이 참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모든 병사들에게 카이사르의 말이 최대한 빠르게 전해질 수 있도록 참가자격이 없는 백인대장들도 모두 소집됐다.
백인대장들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우물쭈물하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
카이사르가 아무나 한 명을 지목해 물었다.
"최근에 군 내부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고 있다는 말이 내 귀에까지 들린다네. 병사들이 출병을 꺼리고 있다는 믿기지 않는 소문이 돌고 있던데 자네는 그 이유를 아나?"
"예? 아니, 저기······."
"적이 두렵다고 출병을 거부하다니 로마군에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 그런데 안타깝게도 여기 장교들 가운데에도 그런 있어서는 안 될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 있는 것 같더군."
"저, 적이 두려운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길이 험해서 군량을 수송하는 게 힘들지 않을까···그리고 길이나 숲이 험해 행군에도 지장이 있을 것 같아서 그렇다고 할까요······."
백인대장은 스스로 말해놓고도 자신의 의견이 어이가 없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카이사르가 평소와는 전혀 다른 엄한 목소리로 지휘관들을 꾸짖었다.
"이런 하찮은 핑계로 싸우지 않을 이유를 찾으며 자신을 기만하고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로마군의 백인대장이라는 자들이! 물론 우리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강대한 적이라면 두려워할 수 있다.
두려움을 모르는 건 만용이지 용기가 아니니까. 만약 상대가 두려워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적이라면 나는 화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한데, 그대들이 공포심을 품은 상대가 누구인가? 고작 북방의 야만족 따위가 무서워 싸우기도 전에 전의를 잃어버리다니 그야말로 위대한 선조들이 통탄할 일이다.
"
백인대장들은 물론 대대장들도 한마디 변명조차 하지 못했다.
카이사르는 부하들의 정신 상태를 꾸짖는 한편 상대방을 두려워할 게 없다는 격려도 잊지 않았다.
"로마는 예로부터 우리보다 체구가 장대한 게르만인들에게 이유 없는 두려움을 느껴왔었다. 그래서 꼴사나운 패배도 당한 적이 있지.
하지만 가장 최근에 싸웠던 전투는 어떠한가. 마리우스는 감히 로마로 쳐들어온 킴브리족과 테우토리 족을 완전히 전멸시켰다.
이제 이 두 부족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로마에 대항한 어리석은 선택이 부족의 전멸이라는 가혹한 대가로 돌아온 것이다.
자네들은 지금 우리 선조들에게 패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자들과 다를 게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 우리가 격퇴한 헬베티족만 하더라도 게르만족과 일진일퇴를 벌이며 치열하게 싸운 자들이다. 그런데 그런 헬베티족이 우리 로마군의 앞에서 어떻게 무너졌는지 다시 한번 잘 되새겨 보길 바란다.
게다가 우리 군에는 게르만 출신의 전사들과 싸워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용사가 있다. 게르만족이 정말로 두려운 상대가 맞는지 경험자인 그의 입으로 들어보겠다. 12군단의 백인대장 스파르타쿠스!
"
"예, 임페라토르께서 묻는 사항에 한 줌의 거짓도 없이 진실만을 말하겠습니다."
스파르타쿠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에게 쏠렸다.
헬베티족과의 전투에서 그의 신들린 활약을 지켜본 몇몇은 선망의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스파르타쿠스의 검투 시합을 본 적이 있는 백인대장들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헬베티족과의 전투를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그의 활약상은 이미 모든 군단에 퍼졌다.
그리고 스파르타쿠스의 위용을 익히 아는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싸웠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미 말을 맞춰둔 상태였지만 카이사르는 짐짓 엄중한 목소리로 추궁하듯 물었다.
"스파르타쿠스 자네는 수십 번이 넘는 검투 시합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지. 그중에서 게르만의 투사들과 싸운 적은 몇 번이나 있나?"
"정확한 숫자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최소 5번은 넘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때의 감상을 말해주게. 일대일 검투와 집단전은 차이가 크지만 게르만족과 싸울 때 대략적인 느낌만 공유해줘도 큰 도움이 될 테니까. 그리고 혹시 게르만의 투사 중 특히 기억에 남았던 상대라거나 위험했던 적이 있다면 그것도 말해주면 고맙겠군."
"예. 제가 상대한 게르만의 투사들은 전반적으로 다 기골이 장대하고 굳센 인상이었습니다. 실제로 다들 힘과 체력에 자신이 있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딱히 기억에 남은 상대가 있지는 않습니다. 게르만 투사들과의 싸움에서 10합 이상을 끌어본 기억이 없으니까요."
스파르타쿠스의 담담한 설명에 백인대장들이 감탄사를 흘렸다.
스파르타쿠스의 검투 기록은 기록으로 전부 남아있는 사실이었다.
여기에는 어떠한 허세도, 거짓도 없었다.
스파르타쿠스의 열렬한 신도인 젊은 백인대장이 옆의 동료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회의장에 낮게 깔렸다.
"사실이야. 나도 경기를 본 적이 있는데 딱 3합 만에 승부가 끝났거든. 덩치가 산만한 게르만 투사였는데 자기가 어떻게 졌는지도 모르고 기절해 버리더군. 오히려 더 그럴듯한 싸움을 보여준 건 갈리아 투사들이었어."
"뭐야, 그러면 게르만 놈들은 허우대만 멀쩡하고 속은 빈 포도 껍질 같은 놈들이란 소리잖아? 우리가 괜히 쫄은 거 아냐?"
"사실 임페라토르 말씀대로 우리가 가뿐하게 찍어 누른 헬베티족과 치열하게 싸운 놈들이잖아. 잘 생각해 보면 별거 아닌 놈들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카이사르는 백인대장들이 수군거리는 걸 일부러 제지하지 않았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지며 괜히 필요 이상으로 위축되어 있었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이내 카이사르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
"다들 평정을 되찾았나? 게르만은 다대다의 전투에서 우리에게 전멸을 당한 바 있고, 일대일의 대결에서도 우리 로마 검투사를 이기지 못했다.
덩치가 크고 힘이 좋은 건 분명 전투에 유리한 요소가 맞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건 갈고 닦은 기술과 승리를 향한 의지, 그리고 신들의 총애다.
여기 있는 그대들은 누구보다도 엄격한 훈련을 받았으며, 로마 군인으로서의 자부심도 출중하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헬베티족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며 신들의 가호를 받는다는 걸 증명했다.
"
카이사르는 잠시 말을 멈추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처음과는 달리 백인대장들의 얼굴에서 두려움의 감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전투를 꺼리는 마음을 없앤 정도에 불과했다.
카이사르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병사들의 사기를 한층 더 끌어 올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직 불안을 다 떨쳐내지 못하는 병사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내가 여기서 미리 선언하겠다. 아리오비스투스와 일전을 벌이기 전 나는 그에게 서로 가장 뛰어난 전사를 내세워 일대일 대결을 벌이자고 제안할 것이다. 게르만족은 자신들이 누구보다 뛰어난 전사라고 하지만, 그게 얼마나 허망한 거짓말이었는지 모두가 똑똑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카이사르의 말에 지휘관들은 완전히 기운을 되찾았다.
총사령관의 확신 어린 태도는 자연스레 부하들에게도 전염되는 법이다.
이날 카이사르의 연설은 하루도 되지 않아 모든 병사들의 귀에 들어갔다.
하루 전만 해도 축 처져 있던 병사들의 사기가 순식간에 반전됐다.
8개 군단 모두가 대표를 보내 자신들의 나약함을 사죄하고, 목숨을 걸고 싸우겠노라 맹세했다.
군단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오르자 카이사르는 즉각 행동을 개시했다.
브장송을 떠난 로마군단은 아리오비스투스가 있는 북동쪽을 향해 나아갔다.
행군로는 평탄했고 보급도 사전에 4개 부족에게 나눠서 공급받기로 했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다.
카이사르는 목적지를 향해 행군하는 도중 틈틈이 마르쿠스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정말로 지혜를 구하려는 목적보다는 자신의 생각이 옳은지 확인해 보려는 용도로 보였다.
마르쿠스로서도 갈리아 전기에 적히지 않은 카이사르의 속내를 들어볼 수 있으니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게다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의견을 내는 게 상황을 조정하기에 더 좋았다.
마르쿠스는 이 원정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목적을 달성하면서도 상황이 역사와 똑같이 흘러가도록 제어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건의 발단과 전개까지는 원 역사와 동일하게 흘러가도록 유도해야 한다.
실제 전투가 벌어진 뒤에는 이제 행동에 어느 정도 자율권이 생기지만, 그전까지는 최대한 조심해야 했다.
'멋대로 손을 댔다가 카이사르가 갈리아 제패에 실패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마르쿠스가 처음부터 끝까지 옆에 있을 수 있다면 몰라도 그가 최대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2년이다.
그러나 마르쿠스의 향후 계획을 위해서는 카이사르가 반드시 갈리아를 복속시켜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계획이 전부 비틀린다.
아니, 갈리아의 농지와 자원을 손에 넣지 못하면 계획이 어긋나는 걸 넘어 로마가 지속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두 번 세 번 주의를 기울여 일을 처리해야 한다.
'갈리아 전기라는 최고의 공략집을 가지고 있는데 굳이 역사를 틀어버릴 이유가 없기도 하고.'
적당히 역사대로 흘러가 주는 게 마르쿠스가 카이사르에게 생색을 내기도 편해진다.
물론 입어도 되지 않을 피해는 피하게 해줄 생각이었다.
애당초 마르쿠스는 갈리아 원정의 흐름에 지장이 가지 않을 정도의 소소한 변화를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것도 계획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지금 향하고 있는 지역의 개발이었다.
현재 아리오비스투스의 수에비족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은 브장송의 북동쪽 일대로 현대에는 알자스로 불리는 곳이었다.
갈리아 지역에서 독보적인 철광석 매장지역으로 이때는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마르쿠스가 이번 갈리아 원정에 따라온 가장 큰 목적이 바로 이 알자스와 로렌 지역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카이사르에게는 이미 이곳에서 나는 자원을 자기가 가지겠다는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아리오비스투스를 몰아내면 실질적으로 알자스에 지배권을 행사하는 자들은 세콰니족이 될 것이다.
그래서 마르쿠스는 브장송에 머무는 동안 이미 세콰니족과 협약을 끝마친 상태였다.
협정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그가 알자스 지역을 개발하는 대신 세콰니족은 책임지고 교역로의 안전을 보장한다.
그 대가로 세콰니족의 유력자들이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도록 마르쿠스가 힘을 써주기로 했다.
알자스에서 채취한 자원을 수송하는 임무도 세콰니족이 적절한 대금을 받고 맡기로 했다.
어차피 세콰니족의 기술로는 알자스에 묻힌 철을 캐내지도 못했다.
수에비족을 몰아내고 추가로 금전적인 이득까지 얻을 수 있다면 그들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 협약을 이행하기 위해서라도 마르쿠스는 아리오비스투스를 철저하게 박살 낼 생각이었다.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보여줘야 세콰니족이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르쿠스가 앞으로의 구상을 그리는 동안에도 로마군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덧 아리오비스투스의 군대와의 거리가 하루 정도로 좁혀지자 카이사르는 행군을 멈추고 숙영지를 건설하게 했다.
진지가 거의 다 건설됐을 즈음 아리오비스투스가 사절을 보내왔다.
이제와서 라는 생각이 절로 들 법하지만 카이사르는 일단 사절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뭐라고 하던가요?"
마르쿠스의 물음에 카이사르가 가볍게 웃으며 되물었다.
"뭐라고 했을 것 같은가?"
"자기 영역에 우리가 왔으니 이제 회담을 해도 좋다, 뭐 이런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요?"
"정확하군. 그래도 저쪽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어봐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닷새 뒤에 양군의 중앙에 위치한 구릉 위에서 회담하기로 했네. 호위병으로는 보병보다 기병이 좋겠다는 말을 굳이 덧붙이더군."
"속이 너무 빤히 보이네요."
로마군은 일반적으로 기병에 취약하다는 통념이 널리 퍼져 있었다.
반대로 게르만은 로마보다는 기마에 익숙한 자들이 훨씬 많았다.
물론 갈리아 기병대들이 카이사르의 지원군으로 와있지만, 갈리아인의 호위를 받으며 회담장으로 가는 로마 사령관이 있을 리가 없다.
아리오비스투스는 카이사르가 기마에 익숙하지 않은 병사들을 데리고 나올 거라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오비스투스가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게 있었다.
바로 마르쿠스가 만든 등자 덕분에 로마군의 기병 전력이 대폭 상승했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폼페이우스가 등자를 활용한 궁기병의 육성방안까지 마련해두었기에 로마 기병은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상태였다.
최근에 로마와 전쟁을 벌인 적이 없는 갈리아와 게르만은 이 변화를 제대로 눈치채지 못했다.
헬베티족과의 전투에서도 지형 문제로 기병을 적극적으로 운용하지 않았기에 이 정보는 그리 널리 퍼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아리오비스투스의 제안을 자신 있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괜찮다면 마르쿠스, 자네도 나와 함께 가지 않겠나? 물론 스파르타쿠스를 대동해서."
"안 그래도 부탁드리려고 했습니다. 저도 앞으로 싸우게 될 적군의 우두머리를 한번 보고 싶었으니까요."
"싸우게 될 적이라···회담이 좋게 끝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나 보군."
"카이사르 님께서는 그런 기대를 먼지만큼이라도 하고 계십니까?"
카이사르는 씁쓸한 미소로 마르쿠스의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했다.
두 사람 모두 어차피 전투는 할 수밖에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도 회담에 응한 이유는 일단 모양새라도 갖춰놔야 하기 때문이다.
로마는 어떻게든 상대방과 우호적으로 관계를 개선해보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런 인식을 자신의 부하들과 갈리아 부족들, 그리고 저 멀리 있는 원로원에게 심어줘야 했다.
철저하게 준비를 끝낸 카이사르와 마르쿠스는 회담하기로 한 날이 되자 기병대를 대동하고 구릉으로 접근했다.
양측은 일단 호위를 맡은 기병단을 구릉 아래에 대기시키고, 위에서 따로 회담을 하자고 합의를 한 상태였다.
카이사르와 아리오비스투스는 사전에 맺은 약속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그들은 모두 10기의 호위만을 대동한 채 구릉을 올랐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스파르타쿠스도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마르쿠스의 옆에 바짝 붙어 호위를 섰다.
정상에 당도한 마르쿠스는 드디어 아리오비스투스의 얼굴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누가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는 강인한 전사의 상이었다.
덥수룩한 수염과 풍성한 머리카락은 마치 사자의 갈기를 연상시켰다.
호전적이기로 유명한 수에비족을 이끄는 수장다운 위엄이 묻어나왔다.
아리오비스투스는 로마군의 말에 달린 등자를 보고 잠시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조소를 지었다.
얼마나 말에 익숙하지 않으면 저런 기구를 달았을까 싶었던 것이다.
내심 로마군에 대해 상당한 압박감을 가지고 있던 그는 부담을 한결 덜어낼 수 있었다.
자연스레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도 호탕해졌다.
게르만어에 능통한 통역이 아리오비스투스의 말을 그대로 번역해 들려주었다.
"말에 익숙하지 않다고 말해줬으면 걸어가기 조금 힘들다고 해도 기꺼이 말에서 내려서 왔을 텐데···손님들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괜한 요구를 한 것 같아 미안하군."
아리오비스투스가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지 이해한 카이사르는 태연하게 도발을 받아넘겼다.
"협상의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은 로마의 오랜 전통이다. 그러니 우리 로마군의 중무장 보병과 대면하고 싶어 하지 않는 그대들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게 당연하지. 너무 마음 쓰지 않아도 좋다."
"···우리는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겠지. 그러니 로마와 적대하는 길을 선택한 게 아닌가. 하지만 아직 돌이킬 기회는 남아있다. 우리는 언제나 우방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애써왔다.
하지만 이번에 수에비족은 로마의 친구인 하이두이족의 재산을 약탈하고 굴복을 요구했다. 이건 동맹인 로마 입장에서 절대 묵과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요구는 이전과 같다. 지금 잡아두고 있는 하이두이족의 인질을 석방하고 앞으로 갈리아 쪽으로는 영토 확장을 자제하라.
"
통역의 말을 전해 들은 아리오비스투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는 자신의 도낏자루를 손으로 툭툭 두드리며 반론했다.
"당신은 우리가 멋대로 갈리아를 침공한 것처럼 말하지만 이는 엄연히 사실과 다르다. 우리는 세콰니족의 부탁을 받고 정식으로 라인강을 넘어온 것이다.
그런데 도움을 청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감당이 안 되니 돌아가 달라? 로마는 갈리아의 이런 요구가 정말로 온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게다가 내가 로마와 적대하는 길을 선택했다고 하는데 글쎄···내가 여기서 당신을 죽이면 원로원은 오히려 기뻐하며 나와 우호 관계를 강화하려 하지 않을까?
"
이번에는 카이사르도 꽤 놀랐다.
아리오비스투스가 설마 자신과 원로원의 대립 관계를 알고 있을 거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로마 정계의 흐름까지 파악하고 있는 자라면 예상보다도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자다.
'여기서 처리해놓는 게 좋겠군.'
카이사르가 옆에 있는 마르쿠스를 힐끗 돌아보았다.
마르쿠스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처음부터 협상을 통해 일을 풀어나갈 마음 따위는 없었다.
회담을 결렬시킬 핑계를 찾고 있던 카이사르의 눈에 마침 좋은 광경이 들어왔다.
아리오비스투스를 호위하는 10기의 기병이 로마 기병들을 향해 돌팔매질을 시작한 것이다.
사소한 시비에 불과했으나 카이사르는 이걸 수에비족의 선제공격이라고 규정했다.
"회담을 청한 뒤에 무력 도발을 하다니. 신들이 분노할만한 파렴치한 행위다."
"무력 도발? 우습군. 로마군은 고작 돌멩이 몇 개를 맞았다고 징징 우는 소리를 내는 건가? 그런 나약한 자들이라면 애초에 우리와 협상을 맺을 자격이 없다."
로마군의 전력을 그리 대단치 않게 판단한 아리오비스투스는 카이사르의 의도를 간파했으면서도 거기에 넘어가 주기로 했다.
사실 그 역시 로마와 협상을 통해 지위를 보장받으려는 생각은 없었다.
지금 그가 세운 입지는 결코 공짜로 얻은 게 아니었던 까닭이다.
갈리아로 넘어온 지 어언 14년, 치열한 혈투에 혈투를 거듭하며 간신히 오른 자리다.
누가 뭐라고 해도 순순히 비켜줄 마음은 없었다.
게다가 여기에서 로마군을 쓰러뜨린다면 하이두이족과 세콰니족의 영토는 확실하게 수에비족의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아리오비스투스가 갈리아와 게르만의 왕을 자처해도 그 누구도 그의 위용을 부정할 수 없으리라.
양측이 싸울 생각이 확고해지자 자연히 호위를 서고 있던 10명의 기병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아리오비스투스는 순간 여기에서 카이사르를 공격할까 하는 충동이 들었으나 참았다.
우스꽝스러운 기구를 단 로마군의 자세가 의외로 안정되어 보이기도 했고, 회담을 하러 온 장소에서 적을 공격하는 건 불명예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말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말머리를 돌렸다.
"이제 서로 진영으로 돌아가면 남은 건 전쟁뿐이다. 우리에게 도전한 무모함을 후회하게 해주마."
"잠깐!"
살벌한 한 마디를 남기고 돌아가려는 아리오비스투스를 카이사르가 불러 세웠다.
슬쩍 뒤를 돌아본 그에게 통역이 유창한 게르만어로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상상도 하지 못한 제안을 들은 아리오비스투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정을 되찾은 아리오비스투스는 이내 커다란 조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 제정신인가? 좋다. 당연히 승낙이지. 우리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번에도 이해를 돕기 위해 구글 맵의 힘을 빌렸습니다.
이번에 나온 마르쿠스가 차지하고 싶어하는 지역은 저 위에 알자스입니다.
브장송에서 나온 로마군은 저 근처까지 가서 게르만족의 일파인 수에비족과 대치한 것이지요.
< 95. 각자의 노림수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