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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결전. 게르만 (97/326)

  < 96. 결전. 게르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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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담이 결렬되자 카이사르의 군단은 곧바로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리오비스투스는 앞서 보였던 자신감과 달리 전투를 서두르지 않았다.

  "수에비족은 여전히 진영에서 나오지 않고 있나?"

  "예. 기병대를 옆으로 돌려서 우리 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려는 움직임만 보이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신중한 자로군. 회담장에서 보인 태도를 봐서는 바로 총공격을 감행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그게 연기였나?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는데······."

  상대가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을 보이니 제아무리 카이사르라도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해답을 알고 있는 마르쿠스는 적당히 출처세탁을 해서 정보를 알려주었다.

  "저들은 싸우기 전에 언제나 점을 치는 관습이 있는데 점괘가 좋지 않게 나왔다고 합니다. 지금 뜨는 달은 불길하니 달의 모양이 바뀔 때까지 기다리라는 계시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래? 종교적인 이유였다면 이 불합리한 움직임도 이해가 되는군. 아무리 용맹한 전사들이라고 해도 그런 관습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지. 좋아, 저들의 점괘를 역으로 이용하도록 하세. 달의 모양이 불길하다면 더더욱 이때 싸우도록 유도해야 적군의 사기가 꺾이는 법."

  적들의 기묘한 행동에 별다른 노림수가 없다는 걸 간파했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카이사르는 즉시 기병을 풀어서 보급로를 끊으려는 게르만 기병들을 요격했다.

  동시에 군단 전체를 움직여 적진의 바로 앞에 진지를 짓는 도발 행위를 선보였다.

  그럼에도 게르만의 본대는 자신들의 기지에 틀어박힌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리오비스투스의 계획은 훤히 예상됐다.

  기병대를 이용해 보급로에 타격을 주는 전략으로 달이 바뀔 때까지 시간을 끌려고 하는 것이다.

  로마군의 기병은 빈약하기로 정평이 나있었고, 갈리아 병사들은 게르만 병사들에게 내심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아리오비스투스의 판단은 주어진 정보만을 고려했을 때는 최선이라 할 수 있었다.

  문제는 현실은 그가 아는 정보와는 괴리가 너무 컸다는 점이다.

  로마 궁기병들과 갈리아 기병들을 처음 맞닥뜨린 게르만 기병들은 자신감에 가득 차 돌격했다.

  그러나 로마군은 게르만족의 예상대로 싸워주지 않았다.

  철저하게 거리를 유지하며 화살 세례를 퍼부은 로마 기병은 치고 빠지기만을 계속 반복했다.

  갈리아 기병들은 접근을 허용했을 시 로마 기병들이 몸을 뺄 수 있도록 지켜주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었다.

  본래 기병전에서 스웜 전술은 효율성이 떨어지지만, 이 지역은 로마군의 진지가 더 가까웠기 때문에 게르만 기병들이 필요 이상으로 파고들 수가 없었다.

  거기에 게르만 기병들은 방어구가 빈약해 화살 세례를 맞으면서 갈리아 기병들을 돌파할만한 힘이 부족했다.

  로마군도 적의 기병대를 전멸시킬 정도의 타격은 주지 못했으나 게르만 병사들은 심리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로마군의 기병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라고 했잖아! 그런데 저 활 쏘는 놈들은 대체 뭐야!"

  "말에 얹은 이상한 받침대 때문인지 몰라도 로마 놈들의 기마술은 우리보다 아래가 아니던데? 오히려 말에 탄 안정감은 저쪽이 훨씬 좋아 보였다고."

  자신들이 완전히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순식간에 게르만 병사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안 그래도 점괘 때문에 기지에서 꼼짝 못 하고 있는 전사들의 사기는 갈수록 낮아졌다.

  아리오비스투스는 쉽사리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지금 싸우면 불길한 점괘를 믿는 전사들이 제힘을 발휘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이대로 달이 바뀔 때까지 기지에 틀어박혀 있으면 패배로 끝날 것이다.

  그가 시행하려고 했던 보급로 차단 작전도 이미 카이사르가 그대로 써먹고 있었다.

  믿었던 기병 전력에서 압도를 못 하고 역으로 밀리니 숨통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로마군은 날이면 날마다 수에비족의 기지 앞에서 도발적인 언행을 일삼고 있었다.

  언제라도 싸울 수 있도록 횡진을 펼친 로마군은 카이사르가 암기시킨 게르만어를 목청껏 외쳐댔다.

  조잡하기 그지없는 발음이어도 게르만 전사들은 무슨 의미인지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리오비스투와 그의 부하들은 싸우기를 무서워하는 겁쟁이들이다!"

  "패배가 두려워 핑계를 대며 기지에 숨어 나오지 않는구나!"

  아리오비스투스와 게르만 전사들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그들이 언제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병사들은 점괘고 뭐고 당장 싸우러 나가자는 쪽과 그래도 신중하자는 쪽으로 양분됐다.

  한참을 고민한 아리오비스투스는 결국 싸울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달이 바뀔 때까지 매일같이 저런 도발을 참아야 하면 병사들의 사기가 얼마나 떨어질지 짐작이 되지 않았던 까닭이다.

  결전은 이튿날 뒤로 결정됐다.

  로마군이 매일같이 도발을 퍼부은 지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아리오비스투스는 미리 부하들의 대열을 짜두고 언제라도 습격할 수 있게 준비를 끝내두었다.

  기습을 가하려던 찰나 그는 이전에 카이사르가 건넨 제안을 자신이 받아들였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전면전이 벌어지기 전에 가장 뛰어난 전사를 뽑아 단기로 승부를 겨루자고 했었지. 그런데 그놈은 어째서 그런 제안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일대일 대결은 게르만에게 더 유리했다.

  로마군의 강점은 정교하면서도 유기적인 군단의 움직임에서 나온다.

  그러나 일대일 대결에서는 이런 강점을 활용할 여지가 없다.

  게다가 게르만 전사들의 강력함은 모르는 자들이 없을 정도로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이기면 좋고 설령 진다고 해도 원래 패배하는 게 당연하니 손해가 없다는 판단일까.'

  어쩌면 군기를 어긴 자를 처벌하기 위해 결투라는 수단을 활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속 시원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으나,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어쨌거나 아리오비스투스는 자신의 전사가 로마군에게 일대일로 질 리가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로마군단이 근처까지 접근하자 마침내 수에비족의 기지에 출전 명령이 떨어졌다.

  "용감한 게르만의 전사들이여, 지금부터 버러지 같은 로마놈들에게 우리의 힘을 똑똑히 보여주자!"

  그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전사들이 발을 구르며 포효를 터트렸다.

  "우오오오오! 로마 놈들을 박살 내버리자!"

  50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춘 양군은 사전에 약속한 대로 자신들의 대표를 앞으로 내세웠다.

  아리오비스투스는 수에비족 최고의 전사인 헤르문트를 지명했다.

  "해야 할 일은 알고 있겠지? 할 수 있는 최대한 잔혹하게 로마 놈을 쳐 죽여라."

  "예."

  아리오비스투스의 머릿속에 헤르문트의 패배란 들어있지 않았다. 그저 최대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둬서 전투 전의 사기를 끌어 올릴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로마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르쿠스는 장비를 갖추고 앞으로 나가려는 스파르타쿠스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상대가 너무 강하면 가차 없이 죽여.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알고 있지?"

  "알겠습니다."

  스파르타쿠스가 무기를 뽑아 들고 천천히 걸어나갔다.

  그의 걸음에 맞춰 로마군은 방패로 바닥을 쿵쿵 내려찍으며 전설의 검투사 이름을 연호했다.

  "스파르타쿠스!"

  "오오오오! 무적의 검투사!"

  전장이 아닌 원형경기장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였다.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을 고래고래 외치는 로마군의 함성은 게르만 전사들의 귀에까지 들렸다.

  "···스파르타쿠스?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아리오비스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마의 정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그의 귀에는 익숙한 이름이었던 까닭이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나 이제 와서 싸움을 무를 수는 없었다.

  헤르문트가 등에 멘 도낏자루에 손을 올렸다.

  그의 허리춤에는 예비용 손도끼가 몇 개나 추가로 꽂혀 있었다.

  반면 스파르타쿠스는 평소에 입는 갑옷과 스파타, 글라디우스만으로 무장했다.

  방패조차 들지 않은 자신만만한 모습에 헤르문트가 이를 갈았다.

  "꼴랑 검 한 자루 들고나와 싸워보겠다고? 주제도 모르는 로마 놈이."

  끓어오르는 분노와는 반대로 침착하게 방패로 몸을 가리고 도끼를 잡은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그는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고 평정심을 잃을 정도로 허술한 전사가 아니다.

  헤르문트가 방패로 빈틈없이 몸을 가리고 스파르타쿠스에게 달려들었을 때다.

  휘잉!

  소름 끼치는 파공음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수십 번의 사선을 넘어온 본능이 경고를 보내왔다.

  하얀 섬광이 그의 눈에 잔상처럼 새겨졌다.

  순간적으로 방패를 들어 검이 그리는 궤적을 완벽히 막아섰다.

  쩌저저적!

  섬뜩한 소리와 함께 단단한 방패가 단숨에 쪼개지고 있었다.

  헤르문트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며 땅바닥을 굴렀다.

  그 찰나의 판단이 목숨을 구했다. 단 한 번의 참격에 동강 나버린 방패 조각이 헤르문트의 발바닥 옆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아리오비스투스가 눈을 부릅떴지만, 당사자인 헤르문트는 더 놀랐다.

  스파르타쿠스는 쓰러진 상대방을 향해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일어서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로마군의 진지에서 환호성과 야유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굴욕감에 얼굴을 일그러트린 헤르문트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켜 돌진했다.

  스파르타쿠스가 슬쩍 몸을 돌리며 사선으로 그어오는 도끼를 베어냈다.

  부러진 도끼날이 빙글빙글 돌며 허공을 수놓았다.

  상대방의 검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날카롭다는 건 이미 파악한 사실이다.

  헤르문트는 당황하지 않고 허리춤에 찬 손도끼를 꺼내 휘둘렀다.

  그러면서도 스파르타쿠스의 손에 들린 스파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방의 무기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시야가 좁아진 게 실수였다.

  스파르타쿠스가 검을 쥔 반대 손으로 헤르문트의 손목을 쳐 냈다.

  도끼를 놓친 헤르문트의 팔이 뒤로 훅 튕겨 나갔다.

  다급해진 헤르문트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적절한 판단이었다.

  그의 코끝을 스파르타쿠스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코를 타고 붉은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큭!"

  헤르문트는 자세가 흐트러진 상황에서도 반격의 실마리를 찾으려 애썼다.

  빠각!

  그러나 헤르문트가 예비용 도끼를 뽑기도 전에 경쾌한 타격음이 터져 나왔다.

  오른쪽 다리가 있던 자리를 스파르타쿠스의 발끝이 쓸고 지나간 것이다.

  헤르문트의 몸이 기울어지며 중심을 잃었다.

  뻐버벅!

  이어서 헤르문트의 복부에서 가죽 북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정교한 연타였다.

  단순히 강하기만 한 게 아니라 연결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간결했다.

  풀썩.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게 된 헤르문트의 무릎이 꺾였다.

  수에비족의 진영에서는 안타까운 비명이, 로마군의 진영에서는 열광적인 탄성이 흘러나왔다.

  "저거라고, 저거! 내가 저거를 로마에서 직접 봤다니까?"

  "나도 봤어! 카푸아 대표단이랑 할 때 경기잖아. 그때도 갈리아 검투사가 저 주먹을 맞고 입에 게거품을 물고 기절했지 아마?"

  잔뜩 흥분한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고 무기로 땅을 쿵쿵 내리찍었다.

  승패는 거의 결정 났지만 스파르타쿠스는 일부러 마무리하지 않았다.

  최대한 사기를 끌어 올리라는 마르쿠스의 명령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래 패배한 상대에게 모욕을 주는 건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건 시합이 아닌 전쟁이다.

  아군의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적에게 얼마든지 굴욕적인 행위를 할 각오가 서 있었다.

  스파르타쿠스는 로마군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고작 이 정도인가? 게르만족 전사의 명성은 전부 허구였던 모양이로군."

  지루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까지 하자 로마군 진영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라틴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수에비족도 스파르타쿠스가 대략 어떤 말을 하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분노로 손이 부들부들 떨렸으나,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수에비족 최고의 전사였다.

  아리오비스투스는 눈앞의 광경을 똑똑히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헤르문트, 일어나라! 일어나서 게르만 전사의 긍지를 보여라!"

  족장의 일갈이 효과가 있던 것일까.

  헤르문트가 비틀거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일반적인 결투였다면 이미 패배를 인정했을 정도의 격차였다.

  그러나 이건 단순한 결투가 아니었다.

  자신이 속한 군의 명예와 사기를 어깨에 짊어지고 임하는 일생일대의 대결이다.

  게르만족은 전장의 뒤편에 아녀자들을 세워두는 일종의 배수진을 치고 있었다.

  여인들의 필사적인 애원과 응원이 절대로 물러날 수 없다는 절박함과 책임감을 느끼게 했다.

  "으아아아!"

  거칠게 울부짖으며 달려나가는 헤르문트를 바라보던 아리오비스투스는 이게 마지막이 되리라는 걸 예감했다.

  그리고 그제야 스파르타쿠스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깨달았다.

  작년이었던가.

  로마 정계의 동향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한 가지 이색적인 첩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

  원로원의 새로운 얼굴로 급부상한 마르쿠스 크라수스라는 젊은이를 주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옆에는 로마 최강의 검투사가 언제나 호위로 붙어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 호위의 이름이 바로 스파르타쿠스였다.

  당시에는 마르쿠스라는 이름에 더 주목하고 있었는지라 눈치채는 게 늦었다.

  '빌어먹을, 그딴 놈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냐.'

  스파르타쿠스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은 곧 마르쿠스라는 원로원의 거물도 이 자리에 있다는 뜻이다.

  즉, 이 싸움에서 카이사르를 쓰러뜨리고 원로원과 협상을 하려던 계획도 실현 불가능할 가능성이 컸다.

  카이사르에 이어 원로원의 핵심인물까지 죽는다면 로마가 아리오비스투스와 협상을 할 리가 없는 까닭이다.

  로마와 사생 결단을 낼 마음까지는 없었던 그의 머릿속이 어지럽게 헝클어졌다.

  그런 아리오비스투스의 상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전방에서 들려온 불길한 소리에 다시 시선을 돌려야만 했던 것이다.

  채애앵! 하는 맑은 금속성과 함께 피가 튀고, 헤르문트의 마지막 도끼가 하늘을 날았다.

  가지고 있던 모든 무기가 전부 사라졌어도 헤르문트의 투지는 꺼지지 않았다. 재빠르게 몸을 날려 근처에 떨어져 있던 손도끼를 주워들고 그대로 스파르타쿠스의 머리를 찍어 왔다.

  아리오비스투스는 보았다. 스파르타쿠스의 손이 그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사선으로 후려치는 검격으로 도끼의 날을 잘라버리고, 다음 일격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쩌어억!

  헤르문트의 가슴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파육음이 진한 여운을 남겼다.

  헤르문트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안타까움은 있었어도 억울함은 없었다.

  패배의 원인은 단순한 무기 차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기에서만이 아니라 근본적인 실력에서도 밀렸다.

  이런 강자의 손에 패해 죽는 건 굴욕은 아니었다.

  다만 생애 최강의 상대를 부족의 존망을 건 대전에서 마주쳤다는 게 안타까울 뿐.

  "스파르타···쿠스······."

  이름이라도 기억해둬서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마지막으로 헤르문트의 몸이 쓰러졌다.

  긴 세월 아리오비스투스를 보좌했던 전사의 육체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쿠웅!

  커다란 육신이 허물어지는 소리가 게르만 전사들의 귓전을 울렸다.

  그 광경을 보는 모두가 이건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로마군의 함성에 이게 꿈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아리오비스투스는 헤르문트의 주검을 내려다보며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상대방의 기병 전력을 오판하고, 일대일 대결의 결과조차 예상과 정반대로 나왔다.

  어쩌면 이 전쟁에서 생애 최악의 대패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반대로 로마군은 이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라도 한 듯한 분위기였다.

  고대 전쟁에서 장수들의 일대일 대결의 승패는 사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작 그 정도가 아니었다.

  스파르타쿠스의 승리는 로마군이 가지고 있던 게르만 전사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완벽하게 씻겨나갔다는 걸 의미했다.

  반대로 게르만 전사들은 자신 있던 일대일 대결에서조차 패배한 것이다.

  스파르타쿠스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주먹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의 수하이자, 위대한 군단장 마르쿠스의 백인대장인 나 스파르타쿠스가 적장을 베었다!"

  야수와 같은 그의 포효에 로마군이 일제히 소리를 질러 화답했다.

  "우아아아아아!"

  카이사르는 이 이상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충만한 군의 사기를 그대로 적에게 부딪쳤다.

  그가 검으로 수에비족의 대군을 겨누며 목청을 높였다.

  "보라, 용맹한 로마군이여! 제아무리 강인한 게르만 전사들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적은 아니다. 적의 허명을 두려워 말라. 나와 함께하는 한 군신 마르스의 가호는 언제나 우리의 머리 위에서 빛날 것이다!"

  동시에 마르쿠스도 글라디우스를 뽑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임페라토르의 명을 따르라! 게르만 놈들을 쓸어버리자!"

  수만이 넘는 병사들의 함성과 땅을 박차는 소리가 평원을 뒤흔들었다.

  아리오비스투스도 어떻게든 병사들을 독려하며 돌격명령을 내렸다.

  4만이 넘는 로마군에 비해 게르만 전사들의 수는 10만에 가까웠다.

  병력 차이는 2배에 달했다.

  수적으로 우세하다는 자신감 덕분에 사기가 떨어졌어도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지는 않았다.

  정교한 대열을 유지하며 다가오는 로마군을 향해 게르만 전사들이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마침내 양측이 충돌하며 뿌연 흙먼지가 하늘을 날아 격전의 서막을 알렸다.

  로마군이 휘두른 글라디우스에 하늘 가득 붉은 선혈의 꽃이 피어났다.

  게르만 전사들이 휘두르는 도끼가 방패와 격돌하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울렸다.

  전장을 울리는 살기의 함성이 가득 퍼져나가는 가운데, 생명을 불사르는 전장의 광기는 점점 더 흉포함을 더해가고 있었다.

  < 96. 결전. 게르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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