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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완벽한 승리 (98/326)

  < 97. 완벽한 승리 >

  97

  게르만 전사들은 치욕적인 결투의 패배를 씻으려는 듯 초장부터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양측 간의 거리가 워낙 가까웠는지라 로마군이 투창을 던질 새도 없이 전투가 시작됐다.

  "기죽지 마라. 놈들은 우리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로마 놈들의 머리통을 모조리 쪼개놓자!"

  아리오비스투스는 기세 좋게 소리쳤다. 불안했지만 아직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었다.

  일대일 결투에서 처참하게 패했어도 게르만군은 여전히 유리한 요소를 몇 가지 점하고 있었다.

  우선 수적으로도 2배가량 더 많았고 기병들의 수도 더 많았다.

  이상한 장비를 착용한 적의 궁기병에게 휘둘리긴 했어도 여전히 게르만의 기병은 6천 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 로마군의 기병은 5천이 채 되지 않았다.

  그뿐인가, 게르만 전사들은 절대로 질 수 없다는 각오로 무장하고 있었다.

  게르만 전사들은 다른 민족과 달리 전장에 여자들도 데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스스로 배수진을 쳐서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목숨을 걸고 싸우게 하려는 노림수였다.

  이번에도 그 의도는 훌륭히 적중했다.

  게르만 전사들은 자신의 가족은 자신이 지킨다는 투지로 무장하고 있었다.

  아리오비스투스는 군을 크게 넷으로 나누었다.

  좌익과 중앙, 우익을 일렬로 쭉 세우고 6천의 기병을 좌익의 뒤에 배치했다.

  배치만 봐도 의도가 훤히 보였다. 우익과 중앙이 버티는 사이 좌익을 허물고 기마병과 함께 로마군의 후방을 타격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아리오비스투스는 중앙에서 전황을 살피며 적재적소에 병사들을 투입할 것이다.

  정석적이면서도 기본에 충실한 포진이었다.

  게르만족을 맞이하는 로마군의 대형은 헬베티족과 싸웠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8개 군단을 가로로 길게 배치하고 로마 전통의 3열 대형을 갖췄다.

  물론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마르쿠스는 아리오비스투스가 어떤 포진을 갖출지 사전에 전부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전에 카이사르에게 부탁해 군단의 배치를 조금 손봤다.

  마르쿠스는 현재 최고정예인 자신의 12군단을 반으로 쪼갰다.

  게르만군은 로마군의 우익을 치기 위해 자신들의 좌익에 힘을 집중한 상태였다.

  즉, 상대적으로 우익은 전력이 취약했다.

  마르쿠스는 절반으로 나눈 군단을 상대방의 우익을 공략하기 위해 좌익에 배치했다.

  공격대를 이끌 사람은 당연히 스파르타쿠스였다.

  결투를 승리로 장식한 그는 명령받은 대로 자연스럽게 로마군의 좌익에 합류해 병사들을 지휘했다.

  나머지 절반은 상대방의 공격이 가장 거셀 우익에서 버티는 역할을 맡았다.

  마르쿠스는 신형 갑옷을 갖춰 입은 병사들을 엄선해 직접 그들을 지휘하며 수비를 굳혔다.

  군단을 절반으로 나눠 우익과 좌익에 배치했기 때문에 모자라는 수는 11군단에서 지원을 받기로 했다.

  특히 사전에 눈여겨보고 있던 보레누스와 풀로의 백인대를 일부러 우익에 배치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인 기병의 지휘는 안토니우스에게 일임했다.

  "게르만 기병은 지휘관의 능력은 떨어질지 몰라도 개개인의 강함은 절대 얕볼 수준이 아니야. 그걸 명심하고 지휘를 하도록."

  "맡겨주십시오. 최대한 신속하고 확실하게 처리해보겠습니다."

  동방에서 장교로 착실하게 경험을 쌓은 그는 회전에서 기병을 어떤 식으로 운용해야 할지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반면 게르만 기병대는 개개인의 전투력은 강할지 몰라도 집단으로서의 기동력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안토니우스는 로마 궁기병과 갈리아 기병대를 이끌고 우익을 타격하기 위해 오는 게르만 기병대와 맞섰다.

  "간격을 유지해라! 절대로 정면에서 싸워주지 마라."

  피피피핑!

  수백 발의 화살이 쏘아져 나갔다. 쉬-익 하는 파공금이 공기를 찢고 게르만 기병들을 향해 날아갔다.

  전력으로 말을 몰아 달려온 기병 수십 명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굴러떨어졌다.

  촤라라락. 다시 화살을 장전한 궁수들의 손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퍼버버벅!

  수십 명의 기병이 또다시 쓰러졌다.

  이 당시의 게르만족은 로마군이나 동방의 왕국들에 비해 방어구가 빈약한 축에 속했다.

  물론 나름대로 갑옷을 갖춰 입긴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등자로 몸을 고정하고 발사하는 로마군의 합성궁을 막아낼 수 없었다.

  쐐액! 퍼억!

  또 한 명의 기병이 가슴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커흑!"

  "기죽지 마라! 계속 돌격해서 밀어붙여라!"

  궁기병의 스웜 전술에 처음 당했을 때와 달리 게르만 기병들은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어설프게 멈춰 서거나 방향을 틀면 오히려 살아있는 과녁판이 되기 딱 좋다.

  게르만 기병 지휘관은 방패로 흉부와 얼굴을 가린 채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저 궁기병들부터 처리하고 적의 후방을 타격한다! 계속해서 달려라!"

  일반 기병으로 궁기병을 상대할 때는 이게 정답이었다.

  비슷한 속도를 가진 기병을 상대로는 마음먹은 대로 치고 빠지기를 하는 게 불가능하다.

  기병들이 작정하고 돌진하면 궁기병들로서도 도망가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런 기초적인 사실을 모를 안토니우스가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갈리아 기병대를 로마 궁기병들과 조금 떨어져서 배치해 두었다.

  로마 궁기병을 노리고 직선으로 달려오는 게르만 기병대의 측면을 타격하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

  안토니우스의 신호를 받은 갈리아 기병대가 돌진하는 게르만 기병들의 좌측을 향해 돌진했다.

  이대로 로마 궁기병을 향해 돌진하면 게르만 기병대는 커다란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기병대장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어차피 기병끼리 난전으로 얽히면 궁기병도 사격을 계속하지는 못할 터.

  오히려 갈리아 기병대를 먼저 치고 다음 궁기병대를 각개격파하는 게 효율적일 것 같았다.

  "전군, 우회하라! 로마 놈들보다 갈리아 놈들을 먼저 치겠다."

  그러나 게르만 기병대의 행동을 미리 예측이라도 한 듯 갈리아 기병대는 유유히 말머리를 돌려 다시 뒤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속도를 줄이고 방향을 틀려고 했던 게르만 기병대는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 돼버렸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향해 접근한 로마 궁기병은 또다시 화살을 퍼부어댔다.

  쒜에엑! 퍼버버벅!

  "크아악!"

  "아악!"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부하들의 모습에 기병대장이 이를 갈았다.

  그들이 다시 태세를 정비하고 돌격을 하려고 했을 때 로마 궁기병들은 뒤로 물러나며 연신 활시위를 당겼다.

  지휘란 곧 경험이다.

  이런 사태를 겪어본 적이 없는 게르만 기병대장은 적절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적들처럼 이쪽도 기병대를 둘로 나눠서 대처해야 하는가.

  아니면 갈리아 기병에게 측면을 공격당할 각오를 하고서 계속해서 정면으로 돌격해야 하는가.

  전장에서 순간의 망설임은 곧 엄청난 피해로 직결된다.

  지휘관이 갈팡질팡하는 동안 게르만 기병들은 쏟아지는 화살 세례에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으아아아! 이 비겁한 개자식들아! 전사라면 정정당당하게 도망치지 말고 맞서라!"

  아무리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로마군은 당연히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전장에서 비겁하다는 말은 곧 너희의 전략은 너무나도 뛰어나다는 극찬과 다름이 없다.

  안토니우스는 냉정하게 게르만 기병의 수와 사기를 깎아내고 결정타를 날릴 준비를 마쳤다.

  아리오비스투스는 예상과 달리 기병대가 허무하게 무너지기 시작하자 입이 바싹 마르는 심정이었다.

  로마군의 우익을 무너뜨리기 위해 전력을 집중한 좌익도 왠지 모르게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뭣들 하는 것이냐! 아군이 버티는 동안 어떻게든 로마군의 우익을 돌파해야 한다! 더욱 밀어붙여라. 로마군이 숨 돌릴 틈을 주지 말란 말이다!"

  열심히 소리치며 부하들을 독려했으나. 가지고 있는 능력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이미 아리오비스투스의 의도를 알고 있던 마르쿠스는 철저하게 방어를 굳히고 섣불리 치고 나가지 않았다.

  신형 갑옷으로 무장하고 방패를 단단히 거머쥔 로마군의 방어벽을 뚫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르만 전사들이 아무리 열심히 도끼를 내리찍어 봐도 로마군의 우익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열심히 무기를 휘두르던 게르만 전사들이 틈을 보이면 한 번씩 반격해 숫자를 줄여놓기도 했다.

  마르쿠스는 게르만 전사들이 조급해하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백인대장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며 명령을 내렸다.

  "보레누스! 그쪽으로 가는 적들의 공격이 더 거세질 거다. 불안해하지 말고 지금처럼 침착하게 반격해라. 풀로, 보레누스의 백인대가 버틸 수 있도록 지원해라!"

  마르쿠스가 눈여겨보고 있던 보레누스와 풀로는 한층 더 탐이 날 정도로 멋진 활약을 보였다.

  보레누스는 능숙하게 부하들을 지휘하며 게르만 전사들이 조금이라도 파고들 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상대방의 공세에 따라 대형을 유지하기도, 바꾸기도 하면서 착실하게 방어전을 수행해나갔다.

  지휘력만이 아니라 개인의 용맹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하아압!"

  보레누스는 덮쳐오는 게르만 전사의 도끼를 방패로 가볍게 흘려낸 뒤 심장에 그대로 글라디우스를 박아 넣었다.

  타고난 신력이나 감각이 아닌 철저하게 훈련으로 습득한 기술이었다.

  반대로 풀로는 어지간한 게르만 전사가 우습게 보일 정도로 타고난 풍채가 건장했다.

  정면에서 달려드는 적을 몇 번이나 가뿐하게 힘으로 찍어누르고도 지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상반된 두 백인대장이 서로 보완하며 지휘를 하니 상승효과가 엄청났다.

  신형 갑옷을 입은 12군단에 두 사람이 이끄는 백인대가 더해지니 누구도 뚫지 못하는 난공불락의 방벽이 완성됐다.

  '역시 저 둘은 내가 가져야겠어. 어떤 수를 써서라도 12군단으로 데려와야지.'

  달려드는 게르만 전사의 명치에 호쾌하게 검을 꽂는 풀로의 모습을 바라보는 마르쿠스가 입맛을 다셨다.

  그의 머릿속에서 최전방 돌격을 맡는 스파르타쿠스와 보레누스, 풀로의 조합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적들의 사기를 부수는 개전의 첨병으로 이보다 막강한 백인대가 없을 듯싶었다.

  우익의 전선이 계산대로 고착 상태에 들어가자 마르쿠스는 한숨 돌리고 전체적인 전황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좌익의 돌격대를 맡은 스파르타쿠스는 이번에도 눈부신 활약을 보이며 적을 몰아치고 있었다.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기병대는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적의 기병대를 완전히 무력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당연히 이 모든 상황은 중앙에서 병력을 지휘하는 카이사르의 귀에 들어가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처럼 사전에 이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 회전에 들어가는 유형의 지휘관이 아니었다.

  오히려 약간 불리해 보여도 승기가 보인다면 과감하게 싸움을 거는 유형의 장수였다.

  일단 양군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회전만 성립된다면 누구보다도 뛰어난 지휘를 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휘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할 체계가 갖춰진 군대를 맡은 카이사르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야전 지휘관이었다.

  그는 한순간에 복잡하게 돌아가는 전황을 전부 꿰뚫어 보고 군단장들에게 최적의 지시를 하달했다.

  "마르쿠스, 우익은 지금처럼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버티고 있게. 그리고 퀸투스, 좌익의 군단이 치고 나가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중앙군과 호흡을 맞춰야 하니 조금만 진군 속도를 늦추라고 전해라. 마지막으로 중앙군은 조금씩 뒤로 물러나며 적을 끌어들인다. 내가 직접 지휘를 할 테니 백인대장들은 전선이 무너지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카이사르의 명령을 하달받은 군단장은 즉시 휘하의 대대장과 백인대장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로마군의 중앙은 아주 천천히 아래쪽으로 볼록한 초승달 모양으로 바뀌었다.

  게르만의 중앙군은 자신들이 너무 깊이 들어가고 있다는 자각도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반면 로마군의 우익은 전혀 미동 없이 버티고 있었고, 좌익은 역으로 게르만을 압도하며 서서히 포위망을 완성해나갔다.

  카이사르는 시시각각 변하는 전장의 상황을 주시하며 중앙과 좌익의 간격을 조절했다.

  아리오비스투스가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게르만군은 로마군이 펼친 그물에 걸린 뒤였다.

  너무 깊숙하게 들어간 게르만 전사들은 대형도 무너졌고, 몸을 운신할 공간도 좁아졌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앞으로 치고 나간 로마군의 좌익에게 후방과 측면을 노출하는 상황이 됐다.

  마침 적절하게 적의 기병대를 무력화하고 돌아온 안토니우스의 기병대가 전장에 합류했다.

  마르쿠스는 사전에 그에게 갈리아 기병대를 좌측으로 보내고, 궁기병들은 로마군의 우익을 공격하는 게르만의 좌익을 타격하라고 지시를 내렸었다.

  이를 잊지 않은 안토니우스는 충실하게 명령을 따랐다.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좌익의 병사들이 게르만의 중앙군에게 맹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적군이 덫에 걸렸다. 모두 사정없이 짓밟아라!"

  이미 적을 무너뜨리고 기세가 오른 로마군은 한층 더 거세게 몰아붙였다.

  "우오오오오!"

  대열이 흐트러진 게르만의 중앙군을 로마군이라는 거센 파도가 휩쓸었다.

  게르만 전사들은 너무 밀집된 상태라 무기를 휘두르는 것 조차 쉽지 않았다.

  해일처럼 밀려든 로마군은 상대를 검으로 쑤시고 방패로 쓰러진 자들을 내리찍었다.

  그 와중에 맹렬하게 달려온 갈리아 기병대가 게르만의 후방을 강타했다.

  우익을 제외한 삼면에서 공격을 받은 게르만 병사들은 삽시간에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했다.

  "어, 어이! 밀지마! 앞으로 오지 말고 뒤로 가서 공간을 확보해!"

  "뒤에는 갈리아 기병 놈들이 있다고! 앞으로 전진해서 공간을 뚫어!"

  "멍청한 새끼야, 앞에는 로마군이 있다고!"

  "그럼 좌측이든 우측이든 아무 곳으로라도 좀 가봐!"

  측면과 후방에서 가해지는 공세에 밀린 게르만족은 점차 살길을 찾아 계속해서 중앙으로 밀집했다.

  로마군의 우익에 맹공세를 쏟아내던 정예 병력들도 상황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전장을 빙 돌아온 로마의 궁기병들이 후방과 측면에서 활을 쏘아대기 시작한 까닭이다.

  피피피핑!

  소름 끼치는 소리가 사위를 흔들 때마다 등과 어깨에 화살을 맞은 전사들이 쓰러져갔다.

  본래 보병이 궁기병을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더 우월한 사거리를 지닌 활로 견제를 하거나, 방패와 갑옷으로 방어를 굳혀 궁기병들의 화살이 바닥날 때까지 버티는 것이다.

  그러나 게르만 보병들은 두 가지 수단 중 그 어떠한 것도 취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쏟아지는 화살을 견디지 못한 일부 보병들이 궁기병들에게 돌격을 감행했으나, 치고 빠지는 스웜 전술에 철저히 농락당하며 벌집이 됐을 뿐이다.

  앞에 버티고 선 로마군을 뚫지도 못하고, 뒤와 옆에서는 궁기병의 화살이 끝도 없이 쏟아지고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게르만의 정예병력도 결국 속절없이 중앙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든 게르만의 병력이 중앙으로 압축되자 결국 전사들은 도끼를 휘두를 수도 없을 정도로 간격이 좁아지고 말았다.

  한니발의 칸나이 회전이 연상될 정도로 아름다운 망치와 모루 전술의 완성이었다.

  빽빽하게 밀집된 게르만 병력과 달리 로마군은 자유롭게 무기를 휘두를 간격을 유지한 채로 포위망을 완성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수적 우위 따위는 아무런 의미조차 지니지 못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인원수가 아군의 행동을 제약하는 족쇄가 됐다.

  게르만군은 제대로 무기조차 휘두르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학살당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고립된 게르만 전사들의 눈에 공포가 어렸다.

  어쩌다가 이렇게 몰려버린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으으으, 뭐야 이게···왜 사방에 로마 놈들밖에 없는 거냐고."

  자신들은 무기조차 휘두를 수 없을 정도로 따닥따닥 붙어있는데 적군은 투창과 검을 빼 들고 천천히 다가온다.

  이 공포는 언어로 형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불행히도 지금 이들에게는 명령을 내릴 총사령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갈리아 기병대와 로마 궁기병에게 공격을 받은 아리오비스투스가 휘하의 병사들을 이끌고 뒤로 물러 나버렸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 잠깐 몸을 피했던 것이지만, 그러는 사이 아군 본대가 적에게 포위당하는 걸 눈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저, 전사들이! 아군 전사들이 로마군에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나도 보고 있다"

  부하들은 차마 학살당하고 있다는 표현을 쓰지 못했다.

  잔뜩 굳어진 얼굴을 하고 있던 아리오비스투스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지금껏 그를 따랐던 용맹한 부하들이, 14년간 갈리아를 주름잡으며 키워왔던 세력이 눈앞에서 일방적으로 도륙당하고 있었다.

  "족장님, 여기 계시면 위험합니다. 피, 피하셔야 합니다!"

  아리오비스투스는 우두커니 선 채로 부하들이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 계속 있으면 그도 같은 꼴이 될 수밖에 없다.

  "라인강 동쪽으로······."

  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초라한 목소리가 혼잣말처럼 새어 나왔다.

  아리오비스투스가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스파르타쿠스에게 죽은 헤르문트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돌아가자."

  이건 아니었다.

  이런 패배는 그가 그려왔던 전쟁이 아니었다.

  "허허, 허허허허."

  비틀거리며 등을 돌린 그는 허탈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를 발견한 갈리아 기병대 몇몇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리오비스투스는 훌쩍 말에 올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했다.

  그는 퇴각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이미 그런 말을 들을 만한 군대가 그에게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무작정 동쪽으로 말을 몰고  또 몰았다.

  지휘관을 잃은 게르만 전사들의 대다수는 살해당하고 무기를 버리고 항복한 자들은 포로로 잡혔다.

  이내 카이사르는 기병대를 이끌고 도망친 아리오비스투스를 쫓아 직접 말을 몰았다.

  마르쿠스도 카이사르의 옆에서 추격전에 참가했다.

  기병대의 뒤를 이어 보병대도 절반은 시신과 부상자를 수습하기 위해 남고, 나머지 절반은 추격을 시작했다.

  전장에 따라 나온 게르만 여인들은 거의 전원이 포로로 잡혔다.

  아리오비스투스의 두 아내와 딸 역시 전부 붙잡혔다.

  라인강까지 열심히 도망치는데 성공한 아리오비스투스였으나 애석하게도 나룻배는커녕 뗏목조차도 눈에 띄지 않았다.

  원래 역사와는 달리 게르만 주력 부대가 궤멸해버린 탓에 도망칠 기회를 잡지 못한 것이다.

  "여기 있었군."

  어떻게든 강을 건너보려 몸부림치는 아리오비스투스의 앞에 카이사르가 이끄는 기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이사르······!"

  아리오비스투스가 증오심 가득한 눈빛으로 카이사르를 쏘아보았다.

  카이사르가 눈짓하자 그의 옆에 있던 마르쿠스가 어색한 게르만어로 말했다.

  "항복하라. 아니면 헛되이 죽을 뿐이다."

  "항복하라고? 이 아리오비스투스가? 네놈들 개선식의 제물이 되라는 거냐?"

  로마의 관습을 잘 알고 있는 아리오비스투스는 항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았다.

  개처럼 목줄에 묶인 뒤 개선식에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구경거리 신세가 되라는 것이다.

  "웃기지 마라! 나는 긍지 높은 게르만의 전사다!"

  도주를 포기한 아리오비스투스가 도끼를 휘두르며 카이사르에게 돌진했다. 그러나 그의 옆을 지키고 있는 궁기병들이 일제히 활을 꺼내 시위를 당겼다.

  퍼퍼퍼퍽!

  연달아 네 발의 화살이 몸에 꽂히며 아리오비스투스의 몸이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땅에 허물어졌다.

  동시에 그의 몸 위로 갈리아 기병대의 수십 개의 창날이 쏟아졌다.

  지금까지 게르만족들에게 당한 울분을 풀겠다는 복수심이 진하게 묻어나왔다.

  게르만에서도 손에 꼽히는 세력을 지니고 있던 수에비족의 족장 중 한 명인 아리오비스투스.

  그의 최후는 명성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초라했다.

  부하들을 전부 버린 채 도주하는 현장에서 잡혀 온몸을 수십 자루의 창에 찔리고 숨이 끊겼다.

  그에 대한 원한이 어찌나 강했던지 갈리아 기병대는 시체를 발로 짓밟기까지 했다.

  이내 10년 이상을 착취당한 원한을 푼 갈리아 유력자들이 카이사르와 마르쿠스를 둘러싸고 손을 높이 들어 칭송의 말을 올렸다.

  "위대한 로마군의 총사령관 카이사르에게 신들의 영광을!"

  "위대한 로마 원로원의 대표인 마르쿠스 크라수스에게 신들의 축복을!"

  카이사르는 담담히 손을 들어 갈리아인들의 찬사를 받아들였다.

  이는 곧 라인강 서쪽의 유역이 로마의 지배 아래로 들어왔다는 의미이자, 알자스의 막대한 천연광물이 마르쿠스의 손아래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뜻했다.

  < 97. 완벽한 승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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