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이집트의 여인들 >
99.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는 심각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들은 최근 몇 년 사이 부쩍 둘이서 만나는 시간이 잦아졌다.
그래서 현재 시국에서 회동을 가져도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앉은 탁자에는 파피루스지로 만든 카드 뭉치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이전에 마르쿠스가 사신으로 왔을 때 알려준 카드게임을 여전히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마르쿠스가 처음에 만들어준 보드게임은 체스였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가 순식간에 규칙을 터득하고 자연스럽게 포크나 핀을 구사하자 아르시노에는 한 판도 따낼 수가 없게 됐다.
백 번을 해도 백 번 다 질 정도로 실력 차이가 나니 기물을 떼고 해도 재미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마르쿠스는 실력만이 아니라 운도 작용하는 카드게임을 만들어주었다.
적당히 현대에서 즐겼던 인터넷 게임을 모방해 대충 만들어준 거였는데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는 놀랍도록 카드게임에 몰두했다.
마르쿠스가 돌아간 뒤에도 두 사람은 새로운 카드를 만들기까지 하며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아르시노에는 마치 세상의 운명을 건 일대 승부라도 하는 듯, 진지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자신이 뽑을 카드 위에 손을 가져갔다.
"호루스 신, 세라피스 신이시여 제발······."
한 차례 기도까지 하고 카드를 뒤집어본 그녀의 눈이 확 일그러졌다.
그리고는 카드를 휙 던져버리고 탁자를 쿵쿵 내리쳤다.
"에이, 씨! 왜 오시리스의 수호자가 안 나오는 거냐고! 한 장만 나왔으면 내가 이겼는데!"
"넌 언제나 그렇게 도박성 전략만 사용하니까 승률이 낮지. 확률 계산도 못 하니? 운이 좋으면 몇 번 이길지 몰라도 판수가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확률에 따라 승패가 정해지는 거라고."
"아···짜증나. 이렇게 운이 안 따라줄 수가 있나. 그러고 보니 마르쿠스 님이 예전에 나한테 이런 상황에서 진 다음에 중얼거렸던 말이 있었는데······."
"운빨망겜인가 하는 의미 불명의 단어?"
아르시노에가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거. 근데 그 단어가 무슨 뜻인지 알아?"
"상황을 추론해 보면 운이 너무 없었다, 운에 좌우되는 승부다. 뭐 이런 게 아니었을까? 로마의 관용어구 같은 거였겠지."
"아, 그렇구나. 로마에서는 운에 좌우되는 승부를 그런 식으로 부르는구나."
아르시노에는 다음번에 써먹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눈앞에 어질러진 카드를 정리했다.
터무니없는 오해라는 걸 지적해줄 사람은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클레오파트라가 아직도 분한 듯 씩씩거리는 그녀를 향해 피식 웃었다.
"그래도 넌 다른 사람들보다는 잘하는 거야. 우리의 친애하는 언니이자 현 파라오께서는 아예 전략이란 걸 세울 줄 몰랐으니까."
"하, 그러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세우면서 자신 있다고 뻐겼겠지. 이집트의 파라오라는 사람이 천박하게 모, 몸으로 해결을 하려고 하다니······."
"글쎄? 난 저번에도 말했지만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다고 보는데. 물론 어디까지나 그분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게 목적이라면."
카드를 정리한 클레오파트라가 탁자 위에 놓인 잔에 음료수를 가득 따랐다.
과일 음료를 쭉 들이마신 아르시노에가 불만족스럽게 혀를 찼다.
"뭐야, 몸을 바치고 협상안을 얻어내는 방식이 가치가 있다고? 다름 아닌 이집트의 파라오가?"
"파라오든 아니든 필요하다면 당연히 그 이상의 행동도 해야지. 물론 절대적인 확신을 장담하고 바보처럼 굴면 안 되겠지만."
"···그러니까, 언니는 그 바보 같은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이 진짜로 있다고 보는 거야?"
"실패할 확률이 훨씬 더 높다고 보지만 무조건 좌절할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 않겠어? 그분이 아버지보다 언니가 밀어주기 괜찮은 상대라고 판단하면 얼마든지 동침할 수도 있겠지. 어차피 언니도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사람이니 협약쯤이야 적당히 말장난을 해서 넘어가면 그만이야."
아르시노에의 앙증맞은 속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물론 클레오파트라의 말이 옳았지만 그냥 왠지 모르게 듣기에 거북했다.
베레니케 같은 천박한 사람이 마르쿠스의 선택을 받을 리가 없다고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런 반응을 보이면 왠지 자신이 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반론을 제기했다.
"과연 마르쿠스 님이 우리의 현명하고 자애로운 언니를 좋은 교섭 상대라고 볼까? 아니라는 데에 내 전 재산을 걸 수 있을 것 같은데?"
"모르지. 로마가 이집트를 꿀꺽하려고 일부러 무능한 암군을 앉힐 수도 있잖아? 로마의 중요한 곡창지대인 이집트가 엉망이 되어버리면 그들이 개입할 명문이 생길 테니까. 일부러 이 나라를 파탄 직전까지 몰아간 뒤에 구세주처럼 등장하는 거지. 실제로 비슷한 방식으로 편입한 나라가 몇 개 있는 걸로 아는데."
"그, 그분이 그렇게 비겁한 수를 쓸 리가······."
클레오파트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친절하고 인간적으로 대우 좀 해줬다고 완전히 푹 빠져버린 게 틀림없었다.
본인은 부정하고 있었지만 옆에서 보면 티가 너무 나서 모르는 척하기가 민망할 수준이었다.
"너 설마 그분을 무슨 친절한 왕실 어르신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거니? 그분은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야. 거기에 그토록 젊은 나이에 원로원을 대표하는 신분에 올라간 만큼 기득권에서도 최정상에 있는 사람이라고. 그토록 젊은 나이에 로마 권력의 중심까지 올라간 사람이 마냥 사람 좋은 위인일 거라 믿는 거야?
우리에게 친절했던 건 우리가 어린아이에 불과했기 때문이라는 걸 모르겠어? 물론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아. 기본적으로 착한 분이야. 부정 안 해. 하지만 한 나라의 정점에 서는 권력자란 자신의 감정보다는 정치적인 판단으로 움직여야 하는 법이야.
순수한 왕족이라는 건 좋을 대로 이용당하다가 뒤통수 맞기 딱 좋은 상대라는 말과 동의어라는 점을 명심해.
"
"···알아. 나도 안다고. 그런데 왜 그런 충고를 나한테 하는 거야? 그러는 언니야말로 나를 경쟁상대로 보지 않는 거 아니야?"
"네가 내 경쟁상대가 될지 그렇게 되지 못할지는 아직 한참 먼 미래인데 벌써부터 대립각을 세우면 서로 피곤할 뿐이잖아. 게다가 지금은 우리끼리 경쟁이니 뭐니 하기 전에 같이 살아남을 생각부터 해야 하는 상황이야. 만약 현 파라오가 극악의 확률을 뚫고 로마에게 인정받으면 어떻게 될까? 지금이야 우리가 어리니 가만히 놔둔다고 쳐도 시간이 더 흐른다면?"
굳이 다음 말을 듣지 않아도 이후의 상황은 훤히 예상이 됐다.
예전이었다면 키프로스를 통치하겠다고 이집트를 떠날 수라도 있었지 지금은 그것도 불가능했다.
특히 위험한 건 클레오파트라가 아닌 아르시노에였다.
클레오파트라가 아무리 총명하다고 해도 혈통 지상주의자인 베레니케는 그녀를 크게 위협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보다 진하게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피를 받은 아르시노에를 더 잠재적인 위협으로 취급할 것이다.
어쩌면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자를 보낼지도 모른다.
베레니케에게 그럴 마음이 없어도 주변의 간신들이 충동질할 가능성이 컸다.
아직 어린 아르시노에도 이런 기초적인 정치 구도쯤은 파악하고 있었다.
"나도 나름의 대책은 세워뒀어. 자비라고는 쥐뿔만큼도 없는 언니의 관대함에 기대서 살아남을 생각은 없다고."
"대책을 세워놨다고? 그게 뭔데?"
"로마에 이미 편지를 보내놨지. 물론 내가 보낸 건 비밀로. 그래도 크라수스 가문의 장남인 마르쿠스 님의 앞으로 가도록 확실히 조치해뒀으니 그분께서 받아보실 수는 있을 거야."
"뭐? 편지 내용이 뭔데?"
클레오파트라가 미심쩍은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아르시노에는 자신만만하게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분수도 모르는 할망구가 로마의 권력을 노리고 접근할 테니 조심하시라고 적어뒀지."
"지, 진짜로? 진짜로 그렇게 편지를 썼어?"
"물론."
클레오파트라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너 미쳤어? 네가 그런 내용을 썼다는 게 새어나가면 당장 목이 잘릴 거라는 생각은 못 했냐고!"
"내가 쓴 거라는 증거를 하나도 남기지 않았으니 괜찮아. 내가 그 정도도 모르는 바보인 줄 아는 거야? 그 편지를 읽어봐도 내가 썼다는 사실을 알 사람은 마르쿠스 님이나 언니 정도일걸."
"그래···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순간 클레오파트라는 그 말도 안 되는 내용의 편지를 받고 마르쿠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다.
당황할까, 아니면 웃어넘길까. 그것도 아니면 불쾌한 반응을 보이며 편지를 찢어버릴까.
베레니케나 아르시노에가 돌발행동을 보이는 건 클레오파트라에게 절대 나쁜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마르쿠스를 처음 봤을 때 아르시노에와는 다른 의미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충격적이었다.
이토록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은 처음이었던 까닭이다 클레오파트라는 누구보다도 강한 야심과 권력욕을 지니고 있는 여인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섣불리 밖으로 흘려 견제를 당하는 아둔한 일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누구보다 현명하서면서도 분수를 잘 아는 공주의 모습을 수행해왔다.
아예 다른 모습을 연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야망만을 철저히 숨겼을 뿐이다.
그리고 마르쿠스를 쭉 살펴본 그녀는 그가 혹시 자신과 동류가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명확한 근거가 있는 추론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르쿠스가 자신의 숨겨진 일면을 알아차렸다는 예감만큼은 사실일 거라 확신했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던 내면을 단 한 순간에 간파당한 것이다.
그녀는 마르쿠스도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 그럴 수 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빈약하기 짝이 없는 가설이었으나 검증해볼 가치는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르쿠스라는 사람을 더 잘 알아야 한다.
지금은 그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베레니케나 아르시노에가 마르쿠스의 다양한 반응을 끌어내 준다면 그만큼 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
그러니 지금은 그냥 지켜보고 있기만 하면 된다.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수면 아래에서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는 나일강의 악어처럼.
클레오파트라는 서두르지 않고 자신에게 올 때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
카이사르가 갈리아로 떠난 뒤 한동안 잠잠하던 로마는 다시금 소란스러운 나날을 맞이하고 있었다.
우선 클로디우스가 로마의 시민들에게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가격으로 곡물을 뿌려댔다.
재원은 그가 주도한 키프로스의 합병으로 얻은 재화의 일부였다.
당연히 헐값에 식량을 얻게 된 시민들은 클로디우스의 이름을 열광적으로 찬양했다.
그리고 이어서 갈리아에서 날아든 영웅적인 승전소식이 시민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원로원은 클로디우스와 카이사르의 인기에 대항하기 위해 마르쿠스의 공을 더욱 열심히 퍼트렸다.
로마인들에게 갈리아와 게르만은 과거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안겨준 이민족들이었다.
그런 자들을 상대로 민중파의 대표인 카이사르와 귀족파의 대표인 마르쿠스가 손을 잡고 맞섰다.
심지어 두 사람은 장인과 사위 관계였다.
이 구도만으로도 로마인들의 관심과 응원을 받기에는 충분했다.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은 갈리아에서 추가 군단 모집을 하면 기꺼이 달려가겠노라 외치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크라수스는 이런 들뜬 로마의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제어하고 있었다.
원로원이 마르쿠스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지 못하는 건 전적으로 크라수스가 든든히 자리를 지켜준 덕분이었다.
폼페이우스와 클로디우스에게 맞서 귀족파의 이권을 착실히 확보하면서 선거의 준비까지 완벽히 해냈다.
그가 주로 포섭한 인재들은 시민들과 기사 계급에게 골고루 지지를 받는 사람들이었다.
무조건 친귀족파 행보를 보이는 이들은 아니었으나, 민중들에게만 좋은 정치를 하는 이들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런 이들은 보통 안정적으로 정국을 운영하지 급진적인 변화는 일으키지 않는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는 대다수의 귀족들에게는 딱 맞는 인사였다.
결국 크라수스는 작년에는 민중파에게 빼앗겼던 집정관 두 석 중 하나를 되찾아 오는 데 성공했다.
법무관과 안찰관 역시 절반 가까이를 수성하며 귀족들의 찬사를 받았다.
"역시 크라수스 님입니다. 이렇게나 빨리 집정관 자리를 되찾아 오다니요."
"역시 폼페이우스는 정치력으로는 크라수스 님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듯합니다. 하하하!"
"고작 절반 정도의 자리를 얻었을 뿐이오. 이런 결과에 만족했다가는 내년 선거에서 참패를 할지도 모르오."
크라수스는 만족스러운 결과에도 경거망동하지 않고 묵직하게 중심을 지켰다.
이런 태도가 귀족파 의원들에게는 더더욱 신뢰를 불러일으켰다.
사실 이번에 당선된 후보들도 당연히 삼두의 입김이 닿은 사람들이었다.
집정관부터 법무관까지 대부분 양측 파벌의 온건파가 당선된 데에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의견이 강하게 작용했다.
카이사르와 마르쿠스가 자리를 비웠으니 현상유지만 하며 적당히 시간을 보내는 게 두 사람의 바람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소란스러운 로마의 분위기와 달리 정계는 의외로 안정감 있게 잘 흘러가고 있었다.
크라수스는 마르쿠스가 로마로 돌아올 내년 겨울까지 이 상태가 잘 유지되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불청객은 언제나 그런 시기에 찾아오는 법.
알렉산드리아에서 쫓겨난 프톨레마이오스 아울레테스가 오스티아 항구에 근접했다는 소식에 원로원이 한 차례 술렁였다.
양식 있는 의원들은 민중파, 귀족파를 가리지 않고 아울레테스에게 내심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그는 집권 시기부터 친로마파를 표방하며 로마에게 많은 이득을 안겨주었다.
그 대가로 로마의 친구라는 칭호를 받고 왕권을 보장받은 것이다.
그런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키프로스를 빼앗아가 아울레테스가 쫓겨나는 단초를 제공했다.
누가 봐도 이건 로마가 아울레테스를 배신한 거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원로원도 할 말은 있었다.
이건 원로원의 결정이 아닌 클로디우스가 민회를 선동해 얻어낸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의원들은 이건 전부 클로디우스의 탓이고 자신들은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잡아떼기로 결정했다.
어쨌거나 아울레테스가 로마로 들어오기 전에 그의 처우를 결정할 필요는 있었다.
강경파인 카토는 즉각 군대를 파병해 아울레테스를 복권하자고 주장했다.
"이번 기회에 이집트에 로마의 군대를 상주시키고 실질적인 속주화 작업에 들어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일강 유역의 곡창지대가 온전히 우리의 땅이 된다면 더 이상 클로디우스가 밀값을 무기로 시민들의 환심을 사는 게 불가능할 겁니다."
그의 의견은 여러 의원들에게 지지를 받았으나, 조금 더 신중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키케로였다.
"단순히 그렇게 볼 문제가 아닙니다. 아울레테스는 기득권층의 권력 다툼에 밀려 퇴진한 게 아닙니다. 알렉산드리아와 이집트 주민들의 신뢰를 잃었기에 떨려난 겁니다.
여기서 외세인 우리가 섣부르게 개입한다면 이집트가 사력을 다해 저항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제압이야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각지에서 소소한 반란이 일어나는 건 어떻게 할 수 없겠죠. 이집트는 동방의 그 어떤 국가보다도 자존심이 높습니다. 안정화된 상태로 흡수하려면 우리에게 그만한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
"프톨레마이오스 아울레테스는 로마의 친구이고 로마는 친우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이보다 좋은 명분이 있습니까?"
"이집트, 하다못해 알렉산드리아의 주민들이 아울레테스를 다시 받아들일 계기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양측 다 일리가 있는 의견이라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집트는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곡창지대인지라 그 중요성은 귀족들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았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고 정계에서 은퇴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약조를 지키려면 아울레테스를 도와야 하지만, 추가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역시 찝찝하다.
이 와중에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제창한 의견이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크라수스 가문에게 이 중임을 맡기자는 말을 꺼냈다.
"아울레테스와 원로원 사이에 다리를 놓은 사람은 마르쿠스였습니다. 게다가 지금 우리는 그의 의견을 많이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그가 갈리아에 있으니 일단 크라수스 님께서 아울레테스를 달래고 대응책을 생각해주시는 게 어떨까요? 저는 크라수스가의 의견에 기꺼이 따를 용의가 있습니다."
처음 이 문제를 가지고 온 사람은 마르쿠스였으니 크라수스 가문이 책임지고 해결하라는 뜻이었다.
그의 의견은 귀족파와 민중파를 가리지 않고 큰 호응을 얻었다.
크라수스는 난감하기 그지없었으나 원로원의 뜻이 이러니 마냥 반대할 수도 없었다.
골치 아픈 짐을 떠안은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저택에 돌아왔다.
아울레테스가 로마에 들어오기로 예정된 날짜는 앞으로 사흘 뒤였다.
어떻게 해야 고민하던 찰나, 다나에가 돌돌 말린 두루마리를 가지고 와 크라수스에게 바쳤다.
"갈리아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오오! 마르쿠스가 보낸 것이냐?"
크라수스는 재빠르게 두루마리를 펼쳐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발신인은 예상대로 마르쿠스였다.
서신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 번째는 이집트의 파라오가 로마로 망명해 오면 어떤 식으로 대처하면 좋을지 기술되어 있었다.
크라수스가 가장 바라고 있던 조언이었다.
"역시 내 아들이야. 가려운 곳을 제대로 긁어줄 줄 안단 말이야."
흐뭇하게 마지막까지 내용을 읽어가던 크라수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르쿠스가 요청한 두 번째 사항 때문이었다.
크라수스로서는 그 문장에 적힌 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최종 실험을 할 예정이니 셉티무스에게 전에 말한 그 물건을 보내달라고 전해 달라고?"
군사 물품과 관련된 개발은 크라수스도 마르쿠스가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지 못했다.
그냥 새로운 갑옷과 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말은 들은 정도에 불과했다.
어쨌든 최종 실험이라면 이제 전쟁도, 개발도 막바지에 들어갔다는 의미이리라.
문득 이전에 아들이 건넸던 약속을 떠올렸다.
마르쿠스는 무슨 일이 있어도 크라수스가 개선식을 치르게 해주겠다고 맹세했다.
처음에는 아들이 기운 없는 자신을 위로해주려나 보다 하고 웃어넘겼다.
그런데 갈리아에서 들려오는 승전보를 보니 어쩌면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내가 동방에 원정을 가고 마르쿠스가 보좌를 해준다면······.'
머릿속에 곧바로 그럴듯한 그림이 그려졌다.
폼페이우스나 카이사르에 비해 결코 모자람이 없는 군공을 올린 자신. 그리고 그 옆에서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함께 마차를 몰고 있는 마르쿠스의 모습까지.
반쯤 접어두고 있었던 개선식에 대한 열망이 이제 60을 바라보고 있는 노구의 가슴속에 다시 한번 야망의 불씨를 지폈다.
< 99. 이집트의 여인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