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로마와 파라오 >
100.
마르쿠스의 서신에 따라 조치를 취한 크라수스는 정중히 아울레테스를 맞이할 준비를 끝마쳤다.
로마 원로원은 아직 입장을 확실히 정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아울레테스를 국빈으로 맞아들이기로 했다.
공화정에서 근위대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는 릭토르가 오스티아 항구까지 나가 아울레테스를 맞이했다.
그리고 아울레테스가 로마의 성벽으로 입성할 때는 현직 법무관이 직접 마중을 나갔다.
일단 아예 무시하기로 했으면 모를까, 정식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으니 그에 맞는 절차를 밟는 것이다.
이건 아울레테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로마의 체면을 위해서 하는 일이었다.
물론 형식적인 환영이었으니 성대한 행사는 개최되지 않았다.
아울레테스도 마음에 없는 환영식보다는 빨리 자신의 처우가 어떻게 결정될지 알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실 일국의 왕의 방문이라기에는 아울레테스의 행색부터가 너무 초라했다.
워낙 경황이 없이 탈출한지라 파라오로서의 위엄을 보여줄 만한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오지 못했다.
호위의 수도 고작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왕은커녕 갈리아의 어지간한 부족 유력자도 이보다는 더 화려한 행렬을 이끌고 온다.
원로원은 짐을 떠넘기려는 기색을 감추고 그를 크라수스에게 안내했다.
크라수스는 마르쿠스만은 못해도 탁월한 정치력을 갖춘 이였다.
골치 아픈 일을 떠맡은 감정을 내색하지 않고 아울레테스를 반갑게 환영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여기까지 오시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참으로 걱정이 많았는데 이리 정정하신 모습을 뵙게 되니 다행입니다."
크라수스는 넉살 좋게 마케도니아어로 인사를 건넸다.
프톨레마이오스의 파라오는 대대로 마케도니아 혈통이고 당연히 이들은 이집트어가 아닌 마케도니아어를 사용했다.
역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 중 현지 이집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클레오파트라뿐이었다.
당연히 아울레테스도 마케도니아어 외의 언어는 구사하지 못했다.
그래도 크라수스가 완벽한 마케도니아어를 구사하니 두 사람은 통역이 필요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친절한 응대 정말 고맙네. 저번에 사절로 온 마르쿠스 크라수스를 보고 정말 뛰어난 인재라 감탄을 한 적이 있었는데···이렇게 보니 그가 누구를 닮았는지 대번에 이해가 가는군."
"과찬이십니다. 전 제 그릇에 과분한 아이를 내려주신 신들께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마 최고의 부를 가진 가문의 수장답지 않게 겸손이 과한 게 아닌가. 자네의 명성은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익히 듣고 있었다네."
"하하, 그저 운이 좋아 번 돈으로 허명을 얻었을 뿐입니다. 일단 들어가서 마저 이야기를 나누시죠."
크라수스를 따라 저택에 발을 들인 아울레테스는 곧장 응접실로 안내됐다.
호위들은 모두 저택의 안뜰에서 대기하라고 이른 뒤 단둘이서만 응접실로 들어갔다.
크라수스도 사전에 포도주와 음식을 마련해두고 노예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그가 직접 아울레테스의 잔에 사모스산의 최고급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위대한 이집트의 파라오를 제 저택에 모시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파라오라···로마는 지금도 날 파라오로 여기고 있기는 한 건가?"
아울레테스의 조소에도 크라수스는 표정의 미동 없이 공손히 머리를 숙여 보였다.
"당연하지요. 파라오께서는 로마의 친우로 인정받은 군주가 아니십니까."
"그러면 지금 내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대역 죄인은 로마의 적이기도 하겠군?"
"예, 그거야 뭐······."
"나를 아직 파라오로 인정하고 있다니 묻겠네. 내 왕권을 보장해주겠다고 하고 키프로스 섬을 합병한 건 대체 어떤 의도인가? 나는 로마가 내 입지를 흔들기 위해 그런 행동을 했다고밖에 해석할 수가 없는데."
아울레테스는 자신도 모르게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지금 상황에서 아쉬운 사람은 그였으나, 아직도 로마가 자신을 파라오로 인정한다면 이 정도 불만은 터트려도 용인해줘야 한다.
아울레테스의 분노는 그만큼 정당했고 논리적이었다.
크라수스가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면목 없다는 미소를 지었다.
"키프로스의 병합은 원로원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파라오께서도 아시겠지만 로마는 공화정입니다. 민회에서 시민들이 법을 가결한다면 원로원이라도 그걸 뒤집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민회에서 한 골치 아픈 호민관이 키프로스의 병합을 추진하는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저희도 조금 곤혹스럽습니다."
"곤혹스러워질 게 있나? 내가 듣기로는 키프로스에 축적된 재화는 전부 로마의 금고로 들어갔다는데. 원로원의 입장에서는 손 안 대고 코를 푼 격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키프로스는 선왕의 유언에서 로마의 땅이 된 땅이라 여길 병합하는 건 법리적으로 문제가 없긴 합니다. 물론 파라오께 큰 심려를 끼쳐 드린 건 인정합니다. 원로원은 저에게 이 일의 뒤처리를 맡겼으니 제가 확실히 약조 드리겠습니다. 로마는 친우의 어려움을 모른 척하지 않을 겁니다."
아울레테스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원로원에게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크라수스가 보증을 해줬으니 가장 큰 문제는 해결됐다고 해도 될 것이다.
파라오의 자리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키프로스쯤이야 돌려받지 않아도 감내할 수 있다.
일단 원로원이 아직까지 그의 편이라는 걸 확인했으니 한층 마음이 놓였다.
"반역도들도 내가 로마로 갔다는 걸 모르지 않을 터. 그쪽에서 사신을 보낸다고 하지는 않았나?"
"예. 다음 달 정도에 도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쪽은 정당한 왕권교체였다고 주장할 걸세. 그리고 자신도 프톨레마이오스의 왕가니 로마가 협력을 어긴 게 아니라고 주장하겠지."
"정확한 예상입니다. 저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살짝 불안감을 느낀 아울레테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마음을 짐작한 크라수스가 한발 앞서서 확고하게 못을 박았다.
"걱정 마십시오. 크라수스 가문은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습니다. 사실 제 아들이 갈리아로 파견 가지 않았다면 이런 일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시기가 좋지 않게 꼬였던 거로군."
"예. 물론 최근에 갈리아에서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아들도 파라오께 우선 송구하다는 말을 전해 달라 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하는군요."
"허허···파라오의 자리에서 쫓겨났는데 이게 어떻게 나에게 기회가 된다는 말인가? 오히려 우스운 모양만 보인 꼴이지."
아울레테스가 퉁명스런 어조로 받아쳤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여전히 표정에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마르쿠스에게 들은 답을 그대로 들려주었다.
"생각해보십시오. 파라오의 약점은 원래 기반이 빈약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권력을 탐하려는 무도한 자들이 끊임없이 틈을 엿보고 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번에 기회가 오니 그들은 여지없이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파라오의 따님을 앞세워 왕좌를 찬탈하려는 시도를 했지요."
"그래. 평소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자들이 전면에 나섰더군. 가진 세력이 만만치 않고 명분도 없어서 지금까지 손보지 못했거늘 그게 이렇게 화근이 되어버렸어."
"지금까지는 그러지 못했죠. 하지만 이제 명분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자들을 모두 숙청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는 건가?"
크라수스는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아울레테스는 길게 숨을 들이쉬며 턱을 쓰다듬었다.
크라수스의 말대로만 할 수 있다면 확실히 이번 사태를 기회로 삼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는 아무리 거슬렸어도 알렉산드리아의 유력 귀족들을 쳐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울레테스는 숙청의 명분은 물론이고 그럴 힘조차 가지지 못한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귀족들은 감히 무엄하게도 공주를 내세워 파라오의 자리를 위협했다.
숙청의 이유로는 차고 넘쳤다.
거기에 부족한 무력도 로마의 힘을 빌리면 해결할 수 있다.
아울레테스는 무의식적으로 입맛을 다시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런데 과연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이 순순히 나의 귀환을 환영해줄까?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들은 나와 로마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네."
"예. 그러니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지금 바로 군사를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이집트의 저항이 너무 거세면 로마에서도 무리하게 군단을 소집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을 테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그냥 기다리면 됩니다. 지금 파라오를 참칭하는 베레니케 4세의 국정 수행능력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녀는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로 너무 과분한 자리에 앉게 됐습니다. 2년, 아니 1년만 있어도 밑바닥이 드러날 겁니다. 그러면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은 자연히 이전의 군주가 훨씬 더 나았다는 생각을 품게 되겠지요."
"그렇게 쉽게 일이 풀리겠는가?"
베레니케의 능력은 아울레테스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자신의 딸이기는 해도 머릿속이 허영으로 가득한 안쓰러운 아이였다.
그래도 1년에서 2년 안에 커다란 문제를 일으켜 전 국민의 신임을 잃을 거라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괜히 시간이 질질 끌리면 이도 저도 아닌 결과가 나올 위험이 컸다.
물론 이건 크라수스도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르쿠스는 서신에서 길어도 2년 안에 베레니케의 인지도가 바닥을 기어 다닐 거라고 확신했다.
크라수스는 아들이 그렇다면 그런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자신 있게 대답했다.
"확실합니다. 로마에서 2년만 버티고 계시면 됩니다. 그러면 이전보다 더욱 강한 왕권을 쥔 채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정말로 믿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내년 겨울에는 마르쿠스가 로마로 돌아올 테니 그 아이도 최선을 다해 파라오를 도와드릴 겁니다."
"좋아. 만약 역도들을 모두 쓸어버리는데 도움을 준다면 난 이 빚을 절대 잊지 않겠네."
크라수스는 공손히 예를 표했다.
중대한 이야기가 모두 끝났다고 판단한 그가 짝 소리가 나게 손뼉을 쳤다.
노예들이 안으로 들어와 아울레테스와 크라수스의 시중을 들었다.
한결 마음이 편해진 아울레테스는 여유롭게 포도주의 향을 음미했다.
그리고는 여자 노예의 가슴골에 머리를 기대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로마에 머무는 동안 신세 좀 지겠네. 물론 이자는 몇 배로 얹어서 계산해줄 테니 기대하고 있게나."
흡족한 대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물론입니다, 이집트의 유일한 파라오시여."
※※※※
아울레테스가 로마에서 유유자적 머무는 동안 마르쿠스는 갈리아에서의 마지막 해를 앞두고 갈리아 전역의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시대의 지도는 간단한 지형지물과 각 부족들이 거주하는 대략적인 위치만 표시된 게 다였다.
마르쿠스는 이것보다 수백 배는 정확한 현대식의 지도를 완벽히 암기하고 있었다.
덕분에 어설픈 고대 지도를 봐도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보정이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역시 몇 번을 생각해 봐도 벨가이는 한 번 손을 봐놓긴 해야겠어."
마르쿠스는 자신이 차지한 알자스-로렌 지방을 위협하는 갖가지 경우의 수를 모두 고려해보았다.
우선 라인강 동쪽의 게르만족이 다시 넘어오는 경우가 있겠지만, 이건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수에비족이 원래 역사보다 훨씬 더 처절한 패배를 겪었기 때문에 게르만은 당분간 사태를 관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세콰니족이 배신을 할 가능성도 낮아 보였다.
충성의 대가로 유력자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뿌렸고, 철광석을 운송하는 비용도 후하게 쳐주겠다고 협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금 갈리아는 로마의 압도적인 무력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원래 역사보다도 훨씬 더 쉽게 헬베티족과 수에비족을 격퇴한 덕분이었다.
그러니 동쪽과 서쪽은 일단 안심해도 좋은 상황이었다.
로마의 속주와 붙어있는 남쪽은 처음부터 논외였으니 남은 건 북쪽뿐이다.
그런데 이 북쪽에 거주하는 벨가이족들이 상당한 골칫거리였다.
현대의 벨기에인에 해당하는 벨가이족들은 갈리아에서도 가장 호전적인 부족이었던 까닭이다.
이들은 서서히 개발 중인 갈리아 중남부와 멀찍이 떨어져 있었고, 바로 옆에는 라인 강 동쪽의 게르만인과 접하고 있었다.
자연히 그들은 문명적인 삶에서 멀어져 생존을 위한 투쟁을 일과로 삼았다.
이들은 로마가 군단을 철수시키지 않은 게 갈리아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의도라고 여겼다.
갈리아 부족들 가운데서도 이대로 가면 친로마파 부족들이 득세할 거라고 걱정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벌써부터 이들이 불온한 연합을 형성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려오는 형국이었다.
'가만히 놔둔다면 분명히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겠지. 그러면 알자스 지역이 가장 먼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어.'
방어를 단단히 굳히고 있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호시탐탐 남쪽으로 진격할 기회를 노리는 자들을 앞에 두고 마음 편하게 광산개발을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했다.
마르쿠스는 갈리아에서 보내는 마지막 해를 벨가이족을 평정하는 데 사용해야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이건 필요하다면 역사의 흐름을 틀어서라도 확실히 매듭을 지어놔야 할 문제라고 판단했다.
다행히도 원 역사에서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 2년 차에 맞닥뜨리는 적은 바로 이 벨가이인들이었다.
적극적으로 역사를 수정하는 게 아니라 적절한 판을 깔아주는 정도로도 충분했다.
결심을 굳힌 마르쿠스는 카이사르에게 벨가이인들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안 그래도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던 카이사르는 즉각 1개 군단의 추가 편성을 명령했다.
로마의 여론을 의식한 원로원도 이번에는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았다.
순조롭게 9개 군단을 거느리게 된 카이사르는 병력이 갖춰지자 즉각 행동을 개시했다.
이번에는 친로마파 갈리아 부족들도 앞다퉈서 지원군과 군량 보급을 책임지겠다고 나섰다.
로마와 적대하는 것보다는 지금처럼 관계를 유지하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갈리아의 용병들까지 포함해 도합 6만의 병사를 거느리게 된 카이사르는 거침없이 벨가이인의 영토에 진입했다.
언제나 상대의 예상보다 반 박자 빠르게 움직이는 신속성이야말로 카이사르군의 가장 큰 무기였다.
엔 강 상류에 거주하고 있는 벨가이 부족 중 하나인 레미족은 엄청난 동요에 빠졌다.
아직 벨가이 연합군이 소집되지도 않았는데 로마군이 코앞까지 도달한 것이다.
처음부터 연합에 회의적이었던 레미족은 주저 없이 로마군에 사절을 보냈다.
"저희는 로마와 싸울 마음이 없습니다. 군량을 보급하고 벨가이 족의 상세한 정보를 드릴 테니 제발 아량을 베풀어주십시오."
스스로 볼모까지 바쳐가며 요구하는 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카이사르는 레미족의 유력자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약속하고 그들의 귀순을 환영했다.
레미족이 제공한 정보로 적의 수와 병종들, 그리고 연합한 부족들이 어느 지역에 있는지도 전부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마르쿠스는 카이사르에게 다시 한번 속공을 제안했다.
아직 적이 하나로 뭉치기 전에 먼저 치고나가 연합을 와해시키자는 의도였다.
레미족이 빠져도 벨가이 연합군은 무려 12개의 부족에서 29만에 가까운 병력을 끌어모은 상태였다.
이들이 온전히 하나로 집결하면 제아무리 용맹한 로마군이라도 상당한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거대한 숫자가 모이면 그 자체만으로도 사기가 오르는 법이다.
적에게는 절대 기세를 탈 기회를 줘서는 안 된다는 게 카이사르의 지론이었다.
그는 마르쿠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적의 영토로 먼저 진격하기로 했다.
또 한 번의 허를 찔린 벨가이 부족은 부랴부랴 군대를 소집해 로마군에게 맞섰다.
반쯤 어거지로 긁어모은 병력이었으나 그 수는 여전히 20만이 넘었다.
이들은 로마군과 맞서기 전에 우선 배신자인 레미족부터 처단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벨가이인들은 호전적이기는 해도 결코 바보는 아니었다.
로마군을 상대로 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부족들끼리의 단합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배신자 레미족을 놔두면 부족 연합의 결속에 심각한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마르쿠스는 벨가이 연합이 레미족의 도읍을 공격할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사전에 대기시켜놓은 로마군의 군단은 레미족의 전사들과 함께 방책을 튼튼히 보수하고, 도랑을 파놓았다.
그 뒤에는 합성궁을 장비한 궁병들이 철통같이 경비를 섰다.
뒤늦게 레미족의 도읍을 공격해보려던 벨가이 연합은 손해만 본채 군을 물렸다.
총력전을 하면 어떻게든 도시를 함락시킬 수 있을 테지만, 그런 뒤에 로마군과 연달아 싸울 자신은 도저히 없었던 까닭이다.
잠깐 혼선을 빚은 그들은 이내 다시 의견통합을 하고 먼저 로마군을 치기로 결의했다.
물론 카이사르는 20만이 넘는 대군과 정면에서 싸워줄 마음이 없었다.
로마군과 벨가이 연합의 사이에는 넓은 습지대와 강이 있었는데 카이사르는 이 지형을 최대한 활용했다.
아무리 벨가이 연합의 수가 많다고 해도 늪과 강을 지나서 로마군의 진지에 돌격하는 건 무리였다.
그런 건 전투가 아니라 자살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쿠스는 이제 느긋하게 진지에서 대기하며 벨가이 연합을 소모시키자고 주장했다.
"적들은 허겁지겁 군대를 끌어모아 전장으로 나온 터라 보급로가 안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20만이 넘는 대군을 먹이려면 어마어마한 군량이 필요할 텐데 대부분의 부족들은 자신들의 영역에서 멀리 떨어진 상태입니다. 반면 우리는 이미 군량을 충분히 비축해두었습니다. 시간은 절대적으로 우리의 편입니다."
"내 생각도 자네와 같네."
카이사르는 마르쿠스의 전략을 채택함과 동시에 기병대를 뒤로 빼내 벨가이 연합의 영토를 공격하게 했다.
이번에도 기병대의 지휘는 안토니우스가 맡았다.
로마 궁기병과 갈리아 기병대를 거느린 그는 벨가이 연합에 속한 부족들의 영토를 철저히 파괴하며 돌아다녔다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달려온 수비군은 로마 궁기병의 스웜 전술에 유린당할 뿐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벨가이 연합은 일단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후방에서 자신들의 영토가 유린당하고, 군량도 부족한데 로마군과 대치하고 있는 것은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런 움직임은 속속들이 로마 진영에 보고되고 있었다.
12군단의 막사에서 정보를 취합하고 있던 마르쿠스는 기다리던 소식을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드디어 왔구나!'
벨가이 연합군의 분위기가 어수선하다는 첩보는 어차피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라 대충 넘겼다.
그가 학수고대하고 있던 것은 로마에 요청했던 최종 실험을 위한 장비였다.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려 급한 대로 먼저 군단을 이끌고 왔는데 어떻게든 시간에 맞출 수 있게 됐다.
두근두근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강철판을 이용한 신형 갑옷을 도입할 때와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이건 노예 반란 이후 지금까지 어마어마한 시간을 들여 완성한 노력의 결집체였다.
12군단에 도착한 물품이 무엇인지는 다른 군단의 병사들도, 심지어 카이사르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전투에서 실험해볼 신형 무기가 있다는 보고만을 올렸을 뿐이다.
신형 갑옷과 글라디우스를 이미 본 카이사르는 이번에도 그런 물건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였다.
마르쿠스는 엄청난 경호를 받으며 실려 온 수레를 흐뭇한 미소를 띤 채 바라보았다.
그 안에서 빛나는 강철의 광채는 절대적인 승리를 약속하는 계시와도 같았다.
그는 수레의 점검을 끝마친 스파르타쿠스에게 명령을 내렸다.
"12군단의 모든 대대장과 백인대장들을 집결시켜. 지금 즉시."
< 100. 로마와 파라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