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 강철의 군단 (102/326)

  < 101. 강철의 군단 >

  101.

  12군단의 군단장 막사 안, 마르쿠스의 소집을 받은 백인대장들은 주의 깊게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군단장님, 그러면 군단장님께서 가지고 오신 새로운 갑옷과 무기를 장비할 수 있는 건 한 개 백인대 밖에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리고 그걸 다른 군단에까지 비밀로 해야 하고요?"

  루키우스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다른 백인대장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마르쿠스가 이전에 도입한 신형 갑옷과 무기는 전열의 병사들에게 모두 돌릴 정도의 양이 됐었다.

  그러니 백인대장들을 전부 불러 모아 시범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작 하나의 백인대만 무장시킬 거라고 한다.

  그 정도면 굳이 모든 대대장과 백인대장들에게 주의를 시킬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었다.

  무엇보다 다른 군단에까지 철저하게 비밀로 해야 한다는 게 선뜻 납득이 되지 않았다.

  마르쿠스가 이번에는 약간의 부연설명을 붙여 다시 말했다.

  "비밀을 엄수하라는 이유는 아군을 속이기 위해서가 아닐세. 이번에 도입할 갑옷과 무기가 로마에 지금까지 없었던 유형이기 때문이지.

  전투를 앞두고 갑자기 우리 군단만 이질적인 걸 인식하게 되면 괜한 혼란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자네들을 전부 불러모은 건 비밀을 유지하라는 말을 해주기 위해서였네. 물론 그것뿐만은 아니고 기존의 대형에서 약간 손을 봐야 할 부분이 있으니 미리 익숙해지라는 뜻이기도 하고.

  "

  "기존 대형을 바꿔야 하는 정도의 변화가 생긴다는 겁니까? 고작 일개의 백인대에게 새로운 무장을 장비한 것뿐인데요?"

  "자네 말대로 군단 전체가 대형을 바꿀 필요는 없네. 하지만 싸움의 방식은 확실히 변화가 생길 거야. 선봉을 맡은 백인대가 먼저 적진을 휘저어 놓으면 혼란에 빠진 적들을 군단병들이 맡아줘야 하거든."

  루키우스는 이해가 갈 듯 말 듯 한 표정이었다.

  설명을 들어도 뭔가 그럴싸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백인대 하나만을 적에게 먼저 돌진시킨다고요? 자살행위 아닙니까?"

  "그건 절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네."

  "물론 군단장님이 저번에 가지고 오신 갑옷의 성능은 엄청나긴 했습니다. 하지만 고작 백인대 하나만으로는 아무리 방패로 몸을 가린다고 해도 결국 빈틈이 생겨서 적의 공격에 노출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지금 자네들이 입고 있는 갑옷 정도로는 그렇겠지. 이번에도 내가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게 훨씬 더 말이 잘 통할 것 같군. 자, 자네들의 눈으로 한 번 보게."

  마르쿠스가 천으로 가려놓은 갑옷의 실물을 공개하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 세상에······."

  "우와······."

  "저런 걸 입고 싸운다고? 가능한가?"

  전신 판금 갑옷을 처음으로 본 고대인들의 감상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다.

  놀라움과 의문, 감동과 의심이 섞인 다양한 감상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그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빈틈없이 강철로 뒤덮은 형태의 갑옷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는 지금까지 상상도 못했다.

  기술적인 문제도 그렇지만, 그런 갑옷을 입고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키우스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판금 갑옷을 바라보며 물었다.

  "군단장님, 물론 저 갑옷을 입으면 어떤 공격에도 꿈쩍하지 않을 것 같긴 하지만···저걸 입고 싸울 수는 있을까요? 어마어마하게 무거워서 체력이 금방 바닥날 것 같은데요."

  마르쿠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보통은 그런 반응을 보이겠지. 하지만 이 갑옷은 의외로 그렇게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무겁지는 않네. 자네가 한 번 입어보겠나?"

  중세의 판금 갑옷에 대한 편견 중 하나는 바로 무겁고 움직이기 불편할 거라는 인식이었다.

  그러나 실제 고도의 기술로 만들어진 판금 갑옷은 생각만큼 무겁지 않았다.

  판금 갑옷의 무게는 25kg 정도에 불과하다.

  설계구조 상 이 무게가 전신으로 고루 분산되었기 때문에 다른 금속제 갑옷보다 신체에 부담이 오히려 덜했다.

  넘어지면 일어나지 못한다거나, 혼자 말도 못 탄다는 건 전혀 근거가 없는 헛소문에 불과했다.

  실제로 갑옷을 입어본 루키우스는 의외로 착용감이 좋아 당황스러웠다.

  팔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다리 부위를 움직여 봐도 거슬린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갑옷 하나하나가 독립된 방어구나 마찬가지였고, 관절 부위가 잘 맞물려 움직이기 편하게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철의 두께가 얇은가 보군요. 그런데 이러면 또 방어력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듭니다."

  "그럼 그것도 한 번 실험해 보자고."

  마르쿠스는 루키우스에게 갑옷을 벗게 하고 활과 화살을 가져오게 했다.

  갑옷을 고정한 뒤 실력 있는 궁수에게 화살을 쏴보라고 일렀다.

  궁수는 20미터 거리 정도에서 힘껏 시위를 당겼다.

  실력 있는 궁수에게 20미터 거리라면 코앞에서 사격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핑!

  한줄기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빠직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부러진 나무 조각이 핑그르르 허공을 날았다.

  20미터 앞에서 초근접 사격을 했는데도 갑옷에 타격을 주기는커녕 화살이 부러져서 튕겨 나간 것이다.

  "오오오!"

  이어지는 백인대장들의 탄성이 막사를 가득 채웠다.

  애초에 활로 판금 갑옷을 뚫으려면 중세시대의 롱보우 정도는 가져와서 수천 발의 화살을 퍼부어야 한다.

  그래도 갑옷을 관통한다기보다는 물리적인 충격과 심리적인 압박감을 가하는 정도의 효과가 다였다.

  백인대장들은 무식하게 두꺼운 강철로 만든 게 아닌 갑옷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단단한지 의문을 표했다.

  "이 갑옷의 방어력의 비결은 강철의 두께가 아니야. 정교하게 계산된 갑옷의 경사와 설계, 무엇보다 열처리가 가장 중요하거든. 어설프게 모양만 흉내 내봐야 절대로 이런 방어력을 낼 수는 없어."

  마르쿠스가 설명을 해줘도 이해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일단 뭔가 굉장하다는 공감대만큼은 형성됐다.

  판금 갑옷에 이어 롱소드까지 휘둘러본 루키우스는 어째서 마르쿠스가 대형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다고 했는지 이해했다.

  판금 갑옷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전의 로마군이 쓰는 방어구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방어력이 높았다.

  즉, 더 이상 무거운 방패를 들고 다닐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한 손으로 무기를 휘두를 필요가 없었다.

  롱소드 같은 긴 무기를 사용하면 자연히 공격 범위가 넓어지고, 기존의 밀집대형을 취하는 건 불가능하다.

  당연히 이 갑옷과 무기에 어울리는 대열을 새로 짤 필요가 있었다.

  "이 장비로 무장한 백인대가 적을 향해 돌격한다면···맞상대하는 적들이 불쌍하군요. 그런데 이건 아군에게 숨긴다고 숨겨질 물건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전투가 시작하면 모두가 이 갑옷의 존재를 눈치챌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당연하지. 그래서 바로 다음 전투에서는 이 갑옷을 장비한 백인대를 투입하지 않을 거야. 어차피 병사들도 이 갑옷과 무기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잖아? 실전에 투입하기 전에 적응 기간을 줘야지."

  어차피 벨가이 연합과의 전쟁에서 진정한 고비는 지금이 아닌 다음 전투에 찾아온다.

  후퇴하려는 적을 쫓아가 기습하는데 굳이 판금 갑옷과 롱소드를 장비한 병사들을 내보낼 필요는 없었다.

  마르쿠스는 다른 군단병에게 판금 갑옷을 장비한 병사들이 싸우는 광경을 직접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물론 전투가 끝나면 병사들의 입을 통해 소문이 퍼지겠지만, 소문과 현실은 전혀 다른 법이다.

  실제로 백인대장들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판금 갑옷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지 않았던가.

  마르쿠스의 설명을 완전히 이해한 백인대장들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들은 저 갑옷을 입은 아군이 적군을 누비는 광경이 어떨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아마도 적군에게는 다시없는 악몽이, 아군에게는 용기백배할 수 있는 희망찬 풍경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12군단의 대대장과 백인대장들은 조금이라도 빨리 전투에 돌입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기다려지는 전장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

  야음을 틈타 적들이 몰래 후퇴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카이사르는 공세로 전환할 시기가 왔음을 직감했다.

  남아있는 기병들을 먼저 보내 적의 후위를 타격하며 발을 묶어두라는 명령을 내리고, 중무장 보병을 출격시켰다.

  벨가이 연합의 후위는 로마군의 기습을 맞아 용감히 응전하였다.

  그런데 막상 앞서가던 전열이 로마군이 쫓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전의를 상실해버렸다.

  처음부터 통합된 군세가 아니었던 부족 연합군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에 빠졌다.

  전사들은 사방으로 달아나며 서로 밀치고 넘어뜨리는 등 자중지란을 일으켰다.

  로마군 병사들에게 죽은 수와 우왕좌왕하다가 압사당한 사람들의 수가 비슷할 정도였다.

  결국 20만이 넘는 벨가이 연합군은 전투다운 전투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완전히 와해됐다.

  카이사르는 뿔뿔이 흩어진 그들을 하나하나 각개격파하며 착실히 영토를 늘려나갔다.

  연합군을 구성하는데 중대한 역할을 한 수에시오네스족이 가장 먼저 백기를 들었다.

  족장 갈바는 자신의 두 아들까지 볼모로 내놓으며 무조건 항복 의사를 밝혔다.

  이어서 벨가이족 최강이라는 벨로바키족도 화평을 요청해 왔다.

  로마와의 전쟁을 주장한 강경파들은 이미 브리타니아로 도주한 뒤였다.

  카이사르는 하이두이족과 레미족의 설득에 못 이기는 척 화해를 받아들여 동맹 부족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하이두이족과 레미족도 당연히 카이사르의 배려를 눈치챘다.

  로마를 향한 그들의 호의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한층 더 깊어졌다.

  차곡차곡 벨가이 부족들의 항복을 받아낸 로마군의 다음 목적지는 네르비족이었다.

  마르쿠스는 이 네르비족이 로마에게 엄청난 위협을 가할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네르비족은 갈리아 북동부 지역에서 따를 자가 없는 용맹을 지녔다고 칭송받는 부족이었다.

  뛰어난 보병들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그들은 용맹함만큼이나 호전적인 성격을 자랑했다.

  동원할 수 있는 남성 전사의 수만 해도 5만이 넘었다.

  거기에 아직도 로마군과 싸울 생각을 하는 10개의 부족이 네르비족에 힘을 보탰다.

  도합 7만이 넘는 전사들이 숨을 죽이고 로마군이 자신들의 영역으로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처음에는 사비스강 인근의 평지에 진지를 구축하려고 했다.

  강을 끼고 있으니 식수를 구하기도 쉽고, 근처에는 숲이 우거져 있어 숙영지를 건설할 재료를 확보하기도 쉬웠던 까닭이다.

  그러나 로마군 내부에는 네르비족에게 정보를 흘리는 갈리아 첩자가 있었다.

  로마군의 접근을 알아챈 네르비족은 강 뒤의 숲에서 매복하며 공격할 틈을 엿보는 중이었다.

  원 역사에서 카이사르는 이 사실을 기습공격을 당한 뒤에야 알아차렸다.

  갈리아 전쟁기에는 뛰어난 임기응변과 로마군의 전투력 덕분에 전투를 승리하긴 했어도 결코 피해가 적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려 군단장 중 한 명이 사망하고 상당수의 장교가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기습공격에 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도 알려져 로마군이 완전 무적은 아니라는 인식이 갈리아 부족 사이에 퍼지는 계기가 됐다.

  마르쿠스는 그런 일이 반복되도록 놔둘 마음이 없었다.

  카이사르와 독대를 신청한 그는 첩자의 존재를 역으로 이용하자는 계략을 꾸몄다.

  "···그러니까 적의 장단에 넘어가 주는 연기를 하자 이 말인가?"

  "예. 적들은 우리가 그들의 매복을 알아차린 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걸 최대한 활용해야죠."

  "선제 기습공격을 하는 건 어떤가?"

  "적들은 숲에 숨어 있으니 우리가 강을 건너 숲으로 공격해 들어가도 도망가 버릴 겁니다. 그것보다는 적을 끌어내서 섬멸하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카이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여기서 네르비족을 섬멸할 수 있다면 남은 벨가이 부족도 저항을 포기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면 적을 어떻게 끌어내면 좋겠나? 자네의 구상을 한번 말해보게."

  "예. 제가 조사한 바로는 네르비족은 로마군의 수송대가 접근하는 걸 공격 신호로 삼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진지를 건설하기 위해 흩어지고 수송대가 노출된 틈을 노려보겠다는 계획이겠지요."

  "제법 머리를 잘 굴렸군. 아무것도 모르고 당했다면 피해가 상당했겠어."

  마르쿠스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부 알고 있죠."

  "그래. 자네 말대로 그물에 걸린 고기 연기를 해보도록 하지. 건져 올린 게 물고기가 아니라 거대한 고래였다는 걸 알았을 때 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군."

  카이사르가 흐뭇한 눈으로 마르쿠스를 바라보았다.

  처음 갈리아에 올 때만 하더라도 예상치 못했지만, 지금 마르쿠스는 카이사르에게 없어서는 안 될 전략가였다.

  내년에 그를 로마로 돌려보내야 하는 게 아쉽기 그지없을 정도였다.

  '사위가 아니라 친아들이었다면 더 바랄 게 없었을 텐데···살다 살다 크라수스가 부러워질 줄은 몰랐군.'

  카이사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전장에 서면 누구보다 신속하고 냉철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사적인 감정을 털어버린 그는 지체하지 않고 지휘관 회의를 소집해 명령을 하달했다.

  사전에 계획한 대로 로마군은 네르비족의 매복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사비스 강가로 접근했다.

  매복 중인 네르비족은 갈리아 첩자의 정보가 사실이었음을 확신하고 쾌재를 불렀다.

  정예병력인 12군단이 보급로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고 뒤로 빠졌다는 말 역시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대충 둘러봐도 12군단의 군기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군은 네르비족의 시야를 방해하기 위해 방책을 먼저 설치하고 숙영지를 건설하는 척 연기를 했다.

  식수를 확보하는 역할은 기습을 받아도 바로 도망갈 수 있는 기병들이 맡았다.

  애초에 그들은 물을 뜰 마음도 없었다.

  극소수의 병사들은 도망갈 준비를 마치고 나무를 베려는 사람처럼 도끼를 짊어지고 숲으로 접근했다.

  강 건너편에서 보기에는 영락없이 아무것도 모르고 숙영지를 건설하는 바보들로 보였다.

  마침내 로마군의 수송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네르비족은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뿌우우우!

  공격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청명한 하늘 가득 울려 퍼지며 네르비족과 동맹 부족들이 일제히 숲에서 튀어나왔다.

  "우와아아아아! 로마 놈들을 죽여라!"

  "놈들은 우리의 기습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 최대한 신속하게 놈들의 진지를 함락시키자!"

  강가의 인근에 있던 로마군은 당황한 듯 비명을 지르며 전력으로 아군 진영을 향해 달아났다.

  "으아아! 적들이다! 적들이 숨어 있었다!"

  허둥지둥하는 로마군의 모습에 의기양양해진 벨가이 부족들은 도주하는 로마군을 따라 돌진했다.

  무기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황급히 진지로 돌아오고 있는 로마군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저 방책을 뛰어넘기만 하면 하얗게 질린 로마군의 표정이 드러날 터.

  "자, 모두 죽여버리······어?"

  기세 좋게 로마군이 건설 중인 진지까지 접근한 벨가이인들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분명히 무장을 갖출 여유도, 질서정연하게 집결할 틈도 없었을 텐데 어째서인지 로마군은 완전 무장을 갖춘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파악을 못 하고 있던 벨가이인들의 머릿속에 이내 속았다는 세 글자가 스쳐 지나갔다.

  카이사르가 역으로 당황하는 벨가이인들을 검으로 겨누며 목청을 높였다.

  "놈들은 덫에 빠진 쥐다. 모조리 섬멸하라!"

  카이사르의 옆에 있는 나팔수가 공격을 알리는 신호를 보냈다.

  로마군의 거친 함성과 발을 구르는 소리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공기를 타고 쭉쭉 퍼져 나가는 나팔 소리는 마르쿠스가 있는 12군단에까지 들렸다.

  군량 보급로를 확보하겠다는 말은 당연히 첩자를 속이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12군단은 뒤를 빙 돌아서 네르비족이 매복하고 있는 숲의 측면으로 돌아들어 왔다.

  로마군의 본대만 주시하고 있던 네르비족은 12군단이 코앞까지 접근한 뒤에야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본대가 공세로 전환한다는 나팔소리를 들은 마르쿠스의 12군단은 당당히 네르비족의 측면을 향해 나아갔다.

  고작 1개 군단의 병력에 불과했으나 네르비족의 태반은 전방의 로마군에게 몰려간 상태였다.

  12군단에 맞서서 진용을 갖출 수 있었던 전사들의 수는 1만 5천 정도에 불과했다.

  그래도 12군단에 비하면 2배가 훌쩍 넘는 인원이다.

  벨가이 지휘관은 대수롭지 않게 도끼로 마르쿠스의 군대를 겨누며 소리쳤다.

  "놈들이 옆에서 파고들지 못하게 막아라. 어차피 소수에 불과한 놈들이다.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를 견제하려는 속셈일 것이다. 당황하지 마라!"

  다소 허를 찔리긴 했어도 숫자에서 압도적인 건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벨가이 전사들은 흉흉한 살기를 내뿜으며 12군단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적의 숫자를 확인한 마르쿠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라면 실험하기에 딱 좋은 숫자다.

  그가 신호를 보내자 전방을 방패로 가리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옆으로 물러나며 공간을 만들었다.

  그 사이로 후방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판금 갑옷과 롱소드로 무장한 백인대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이 정예병력을 이끄는 백인대장은 당연히 스파르타쿠스였다.

  스파르타쿠스는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유유히 벨가이 전사들을 향해 접근했다.

  그가 이끄는 백인대도 마찬가지로 뒤를 따랐다.

  강철로 몸을 뒤덮은 적의 등장에 벨가이 전사들은 흠칫 몸을 굳혔다.

  언제나 무예를 연마하는 네르비족조차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평소에 듣던 로마군과는 너무나도 다른 무장을 갖춘 적의 존재에 가슴 한쪽이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뭐야, 저거? 로마군 맞아? 로마군이 저런 갑옷을 썼나?"

  "모르겠는데···아니, 그보다 저 갑옷 저거 다 철로 만든 거야?"

  "하! 멍청한 로마 놈들. 저렇게 덕지덕지 철을 짊어지고 어디 무기나 휘두를 수 있겠어? 어차피 도끼로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찍으면 죽는 건 똑같을 텐데."

  조소를 흘린 네르비족 병사 하나가 스파르타쿠스를 향해 투척용 손도끼를 던졌다.

  핑그르르 회전한 손도끼는 정확히 스파르타쿠스의 몸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휘이잉! 터엉!

  스파르타쿠스가 귀찮다는 듯 팔등으로 날아오는 도끼의 옆면을 후려쳤다.

  허무하게 튕겨 나간 도끼가 땅바닥에 너부러졌다.

  "······!"

  "뭐, 뭐야? 맨손으로 쳐냈다고?"

  도끼를 날린 전사가 입을 떡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스파르타쿠스가 기다란 롱소드를 꺼내 자세를 고쳐 잡았다.

  스르릉.

  매끄럽게 빠져나오는 검소리가 한층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투척용 도끼를 맨손으로 쳐내버리는 비현실적인 광경을 보고 동요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당장이라도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들려던 벨가이 전사들은 눈만 끔뻑거리며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마르쿠스는 여유롭게 말을 몰아 군단의 앞으로 나섰다.

  전투를 앞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온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제군들, 이건 전쟁이 아니다. 군신 마르스께서 어리석은 적들에게 내리는 심판이다. 우리 로마군은 마르스의 심판을 이행하는 대행자인 것이다."

  무기를 잡은 로마군의 손아귀에 힘이 실리고 입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들은 확신했다.

  마르쿠스의 말대로 이 싸움은 전투가 아닌 학살이자 유린이 되리라.

  그의 입에서 마지막으로 나직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그러니 가서 모조리 죽여라."

  이 명령이 도화선이 되어 12군단의 병사들이 거센 함성을 터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미 적들의 코앞까지 다가가 있던 스파르타쿠스의 백인대가 롱소드를 뽑아 들고 벨가이족의 진영에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 101. 강철의 군단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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