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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베레니케 (106/326)

  < 105. 베레니케 >

  105.

  마르쿠스가 이끄는 로마의 대선단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이집트에 도착했다.

  병사들의 사기는 드높았다.

  갈리아에서 2년을 보내고 겨울 훈련까지 끝마친 12군단은 이제 역전의 용사와도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새롭게 편성된 2개 군단도 들뜬 기대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원로원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한 덕분에 마르쿠스의 군사적인 명성은 거의 카이사르에 비교될 정도였다.

  위대한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은 존재만으로도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는 법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수비병들은 감히 로마군단이 상륙하는 걸 방해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시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베레니케의 폭정에 질려버린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은 로마군에게 적대감을 표출하지 않았다.

  단순한 침략군이었다면 목숨을 걸고 맞서 싸웠겠지만, 로마군은 아울레테스를 앞세우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은 자신들이 쫓아낸 선왕을 기꺼이 맞아들였다.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첫발을 디딘 아울레테스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크게 숨을 들이켰다.

  "고향의 공기라는 게 이리도 상쾌할 줄은 몰랐군."

  산책이라도 나온 듯 여유롭게 그의 옆에 선 마르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저도 동방 원정을 끝내고 로마에 돌아왔을 때 비슷한 심정이었으니까요."

  "자네가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하는 건 이번이 두 번째인가?"

  "그렇군요. 처음 왔을 때 파라오께서 보낸 환영단이 항구를 가득 채우고 있던 게 생각나는군요. 그런데 지금은······."

  마르쿠스가 항구를 슥 둘러보며 피식 웃었다.

  "아무도 없네요. 알렉산드리아는 로마의 방문을 환영하지 않나 봅니다."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손님을 접대하는 법도 잊어버린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고민 중인가 보죠. 알렉산드리아의 궁전은 튼튼하니 농성을 한다면 몇 주 정도야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베레니케가 멍청하긴 해도 그 아이를 따르는 신하들은 그 정도로 머저리는 아닐세. 승산이 없는 싸움을 명령한다고 그걸 넙죽 따를 리가 없어."

  아울레테스가 저 멀리 보이는 궁전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고민하고 있다면 자네를 어떻게 꼬드겨야 할지 효과적인 수단을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일 걸세. 뭐, 사실 그 아이 생각이라고 해봐야 훤히 보이네. 가진 거라고는 신들의 축복을 받은 외모밖에 없으니 그걸로 자네를 어떻게 해보려 하겠지."

  "그렇게 예쁩니까?"

  "자랑은 아니지만 내 딸들은 전부 알렉산드리아에서 손으로 꼽히는 미모를 지니고 있네. 베레니케 그 아이는 이제 내 딸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남자라면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고는 해두지. 물론 자네라면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보네. 그토록 아름다운 아내와 시종을 함께 두고 있으니."

  마르쿠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와 다나에를 항상 곁에 두고 있었던 마르쿠스는 미녀에 대한 내성이 상당히 높았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 추파를 던진다고 해도 넘어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뒤로 도열한 군단을 쭉 둘러보았다.

  그들은 지금이라도 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왕궁으로 밀고 들어갈 준비가 끝나있었다.

  "일단 연락병을 보낸 뒤 오늘 하루 정도는 기다려 보죠. 그리고 내일까지 연락이 없다면 이집트는 로마의 방문을 무시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파라오님. 저쪽에서 사자가 온다면 협상의 대표로는 제가 나가겠습니다. 부디 이 점은 양해해 주시길."

  "···믿고 있겠네."

  아울레테스에겐 어차피 마르쿠스의 말을 따른다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심 불안한 마음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만약 마르쿠스가 베레니케의 유혹에 넘어가면 아울레테스의 목숨은 그날로 끝인 까닭이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협상 따위는 하지 말고 바로 공격을 시작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너무 초조한 모습을 보여도 파라오로서의 위신에 손상이 간다.

  마르쿠스는 떨떠름한 기색을 다 떨쳐내지 못한 아울레테스를 달래주기 위해 병사들에게 그를 극진히 모시라 명령을 내렸다.

  로마군은 드넓은 알렉산드리아 외곽에 야영지를 세우고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렸다.

  알렉산드리아 왕궁은 발칵 뒤집혔다.

  대비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코앞에 로마군단이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베레니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깍지를 꼈다.

  그녀 앞에 무릎을 꿇은 신하가 로마군에서 온 전갈의 내용을 세세하게 보고했다.

  "보고하겠습니다. 로마군을 이끄는 사령관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입니다. 이전에 알렉산드리아에 온 적이 있었던 원로원의 대표와 동일인물입니다.

  그가 이끄는 3개 군단은 이미 완전 무장을 마친 상태입니다. 공성 무기까지 조립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여차할 시 이 궁전을 무너뜨릴 마음까지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내일까지 이쪽에서 회신하지 않을 시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행동에 들어가겠다고 합니다.

  "

  장내가 경악과 혼란으로 술렁였다.

  로마군의 강력함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서 베레니케밖에는 없었다.

  그런 그녀마저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데 다른 신하들의 심정이야 오죽하겠는가.

  그것도 1개 군단이 아닌 무려 3개 군단이 자신들에게 칼끝을 겨누고 있다고 생각하자 심장이 벌렁거렸다.

  베레니케를 섬기는 환관 중 한 명이 고개를 저었다.

  "로마는 결국 아울레테스의 편을 들기로 한 것인가······"

  왕좌에서 쫓겨난 아울레테스의 분노가 얼마나 깊을지는 대략 예상이 됐다.

  만약 그가 복권된다면 여기에 있는 고위 관료 중 태반은 죽은 목숨이다.

  특히 베레니케의 경우 절대로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

  안 그래도 예민해져 있던 그녀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로마가 편을 들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 내가 이집트의 파라오다. 흥, 마르쿠스라고? 그놈도 남자인 이상 별수 있겠느냐. 이미 계획은 다 세워두었으니까 실행만 하면 될 뿐이다."

  오기 어린 베레니케의 호통에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들도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베레니케가 분발해주길 응원해야 하는 처지였다.

  반란을 주도한 신하들은 항복하자는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그래 봐야 참수형을 당할 게 너무나 뻔했기 때문이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닌 자들이 차례로 의견을 피력했다.

  "일단 로마군을 달래는 작업부터 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항구에 그들을 맞이할 사람들을 배치해 뒀어야 했는데 책임자는 뭘 한 겁니까?"

  "그들이 예상보다 너무 빠르게 온지라 미처 대처할 틈이 없던 겁니다. 어쨌든 내일까지 답을 보내야 한다고 하니 이쪽도 사절을 파견하도록 하죠."

  베레니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로마군의 전갈을 가지고 온 신하에게 시선을 주었다.

  "로마군에게 전해라. 정식으로 사절을 보내 이 알렉산드리아 궁전에 초대하겠다고. 당장 내일이라도 성문을 열 테니 마르쿠스 그자가 궁으로 들어와 나와 회담을 가지자고 해. 그러면 불만 없겠지?"

  그러나 신하는 베레니케의 말을 전하러 나가지 않고 자리에서 우물쭈물 거렸다.

  그 모습에 짜증이 난 베레니케가 왕좌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신속하게 움직이지 않고 뭘 하는 게냐?"

  "그···저기, 파라오시여. 로마군을 이끄는 마르쿠스라는 자는 아마 궁전으로 들어오지 않을 겁니다."

  "뭐? 어째서?"

  "서신에는 성문을 열고 파라오께서 직접 자신의 진지로 오라는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협상을 할 마음이 없다고 받아들이겠다고······."

  "이 오만방자한 로마놈이! 감히 파라오를 자신의 멋대로 오라 가라 명령해?"

  동방의 국가에서 왕이 상대방의 진지를 방문하는 행위는 곧 완전히 항복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신이 이집트의 파라오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찬 베레니케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굴욕이었다.

  회의 중 한마디도 하지 않던 클레오파트라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로마는 일부러 파라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겁니다. 여기서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면 역시 현 파라오보다는 선왕이 더 다루기 쉽다며 결심을 굳히지 않을까요?

  클레오파트라의 조언을 들은 베레니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동생의 말대로 지금은 자존심을 잠시 접어둬야 할 때였다.

  지금 잠깐 숙여주는 척한다고 영원히 계속 그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좋아. 그러면 날이 밝는 대로 내가 직접 로마 놈들의 진영으로 가주지. 가서 놈들이 늙어빠진 선왕보다는 나를 택하게 만들 것이야."

  "저도 함께 갈까요?"

  아무리 상대방의 진영에 간다고 해도 이집트의 파라오가 수행원도 데리고 가지 않을 수는 없다.

  파라오의 동생들이라면 수행원으로서의 격은 충분히 맞는다.

  클레오파트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베레니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됐다. 너와 아르시노에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궁에 머물고 있도록. 로마군을 만나러 갈 때는 환관들을 대동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베레니케는 클레오파트라가 자신보다 훨씬 총명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동생이 무언가 수작을 부릴 여지는 주고 싶지 않았다.

  환관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베레니케를 뒤로하고 클레오파트라아와 아르시노에는 알현실을 나왔다.

  베레니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아르시노에가 조소를 흘렸다.

  "우리 친애하는 파라오께서는 여전히 헛된 노력을 하고 계시네. 그런데 방금 어째서 로마 진영까지 함께 가겠다고 한 거야?"

  "그냥 나름대로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어차피 거절당할 줄은 알고 있었지만."

  "뭘 확인해 보고 싶었는데?"

  "아버지의 분노가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마르쿠스 님이 그런 아버지를 어떻게 다룰 마음이신지 확인을 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어. 분명히 아버지가 왕좌에 다시 앉으시면 알렉산드리아에는 대규모 숙청의 바람이 불 거야. 그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미리 가늠을 해봐야 대비를 하지 않겠니?"

  아르시노에가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우리까지 숙청될 수 있다고? 아버지가 설마 딸들을 전부 죽이기라도 하시겠어?"

  "우리가 다 죽어도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남동생이 남아 있잖니. 후계자가 끊길 일은 없어. 우리도 일단 형식적으로는 베레니케의 집권을 지지했다는 사실을 잊지 마. 물론 억지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증거를 충분히 많이 남겨놓긴 했지만, 아버지가 분노로 이성을 상실하셨다면 피바람을 불러일으킬 가능성도 낮지는 않아."

  "그래도 설마···만약 아버지가 그런다고 해도 마르쿠스 님이 언니나 내가 처형되도록 놔두지는 않을 거야. 저번에 내가 보낸 편지에 다정하게 답장도 해주셨으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일단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그리고 베레니케의 옆에서 회담을 쭉 지켜보면 마르쿠스 님의 성향을 더 잘 알 수 있을 거라고 봤는데···그럴 기회는 이미 물 건너갔으니 다른 쪽으로 준비해야지. 너도 빨리 지금까지 베레니케의 강요 때문에 억지로 명령을 따랐다는 증거를 모아둬. 반역자의 공범으로 목이 잘리고 싶지 않다면."

  아르시노에는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하면서도 클레오파트라의 충고대로 자료를 정리하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은 클레오파트라는 창가로 나가 로마군의 진영이 있는 방향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신의 후예라 자처하는 이집트의 왕족들이라 해도 로마라는 거대한 풍랑 앞에서는 한 척의 조각배에 지나지 않았다.

  흐름에 순응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려고 한다면 파도를 맞고 침몰할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히 시류에 편승해 목숨을 부지하기만 하는 삶을 살 마음은 없었다.

  어떻게든 흐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진정한 파라오로서 이 땅 위에 군림할 것이다.

  지금은 한낱 미몽에 불과하겠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현실로 만들고 말리라.

  미처 다 억누르지 못한 야망의 불꽃이 그녀의 눈동자 위에 진하게 피어올랐다.

  이내 고개를 휙휙 저은 그녀는 평상시대로의 천진한 표정으로 돌아와 자신의 침소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

  베레니케의 연락을 받은 마르쿠스는 군단을 정비해 그녀를 맞이할 준비에 들어갔다.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3개 군단의 중심에 앉아 있는 그는 흡사 이 땅의 지배자와도 같은 느낌을 풍겼다.

  이내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지자 궁전의 성문이 열리고 파라오의 행렬이 모습을 드러냈다.

  위압적으로 쭉 늘어선 로마군단의 위용에 수행원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마르쿠스의 눈에 살짝 긴장한 듯한 베레니케 4세의 얼굴이 보였다.

  아울레테스의 말대로 외견만 보면 굉장히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오뚝한 콧날에 티 한 점 없는 매끄러운 피부, 거기에 요염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도발적인 눈매까지.

  엄격한 훈련을 받은 병사들도 은근슬쩍 여왕의 얼굴을 힐끗힐끗 바라볼 정도였다.

  평소의 베레니케였다면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남자들의 시선에 우월감을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나름 진지했다.

  자신이 어떻게든 유혹해야 할 남성을 조금이라도 더 잘 알기 위해 모든 감각을 집중해 그를 살폈다.

  선이 굵고 남자답게 잘생긴 외모가 우선 눈에 확 들어왔다.

  아르시노에나 클레오파트라가 왜 그렇게 종종 따라다녔는지 이해가 갔다.

  '이럴 줄 알았다면 저번에 사절로 왔을 때 어떻게든 관계를 맺어보는 거였는데.'

  그녀는 철저하게 사람의 내면이 아닌 외면을 보았다.

  미남은 총애했고, 추남은 절대로 곁에 두는 법이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놀라울 정도의 일관성이었다.

  마르쿠스 정도라면 베레니케로서도 진심으로 유혹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게다가 근처에 아울레테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게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이 마주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지자 마르쿠스가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여기까지 왕림해 주시니 크나큰 영광입니다."

  예상보다도 더 부드럽고 친근한 목소리였다.

  한결 더 마음의 부담이 덜해진 베레니케가 생긋 미소를 지었다.

  이집트식 눈 화장 때문인지 마치 교태를 부리는 듯 보였다.

  "명성이 자자한 로마의 젊은 영웅을 보게 되니 저도 기쁘군요. 이 만남이 유익한 결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서로에게 있어서 최상의 결과가 나올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럼 들어가시죠."

  마르쿠스가 손짓하자 베레니케는 당당히 사령관의 막사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호위들 대부분은 막사 밖에 세워두고 오직 두 명의 환관만을 대동했다.

  마르쿠스도 호위를 맡은 스파르타쿠스만을 안쪽으로 들였다.

  자신을 향한 시선의 수가 확 줄어들자 베레니케는 도발적으로 몸을 감싼 아마포를 벗었다.

  그러자 속살이 다 비쳐 보일 정도로 얇은 옷감만을 걸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스파르타쿠스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마르쿠스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묘한 미소를 지으며 베레니케의 몸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런 시선을 느끼지 못할 베레니케가 아니었다.

  그녀는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얇은 옷감을 손가락으로 살살 어루만졌다.

  "알렉산드리아는 날씨가 덥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많지 않은 곳에서는 최대한 가벼운 복장을 선호한답니다."

  "이해합니다. 사실 저도 좀 덥다고 느끼고 있었으니까요."

  "감사합니다. 로마의 남성들은 이해심이 깊네요."

  "하하, 그중에서도 저는 조금 더 배려심이 있는 편이랍니다."

  누가 봐도 여인의 호의를 얻기 위해 입에 발린 소리를 늘어놓는 모양새였다.

  특히 아닌 척하면서도 몸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는 눈길이 그대로 느껴졌다.

  베레니케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궁전에 있는 여동생들을 비웃었다.

  '뭐? 여자에게 쉽게 넘어갈 사람은 아니라고? 그건 너희 꼬맹이들한테나 그렇겠지. 역시 남자는 쉽다니까? 조금만 들이대도 금세 넘어오거든.'

  베레니케는 아예 작정하고 추파를 던졌다.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자 가슴골이 한층 더 강조되었다.

  단순한 남자들은 이러면 곧바로 반응이 온다.

  그녀의 예상대로 마르쿠스는 계속해서 힐끔힐끔 베레니케의 가슴 쪽에 시선을 주었다.

  이미 주도권을 쥐었다고 확신한 그녀가 매혹적인 어조로 물었다.

  "마르쿠스 님께서는 저와 어떤 협의를 맺고 싶은 건가요?"

  "흠, 우선 로마는 선대 파라오의 왕권을 보장하겠다는 협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 자신의 정당한 왕권이 침해되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희 원로원은 이 일의 진상을 파악하고 중재를 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선왕께서 어떤 거짓말로 원로원을 현혹하려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정당한 왕위승계였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과 신하들은 모두가 선왕의 무능력한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어요. 그래서 정당한 계승자인 저에게 다음 차례가 돌아온 것이죠."

  "그렇군요."

  마르쿠스가 순진한 웃음을 흘리며 맞장구쳤다.

  동시에 살짝 곤란하다는 어조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3개 군단까지 끌고 온 이상 저도 단순히 그냥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제가 여왕님의 자리를 보장해 준다면 어떤 이득을 볼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는 온몸과 마음으로 마르쿠스 님에게 감사를 표하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아직 부군이 없는 몸이랍니다."

  원 역사에서 베레니케 4세는 망국의 왕족들과 결혼해 그들의 권위를 흡수한 바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베레니케는 조금 더 원대한 계획을 꿈꾸고 있었다.

  그녀는 마르쿠스를 유혹해 그의 아이를 가질 속셈이었다.

  장차 로마 최고의 권력자가 될 게 확실한 자의 아이라면 엄청난 위상을 가질 터.

  이집트는 물론 로마에까지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마르쿠스는 감탄했다는 듯 가볍게 손뼉을 치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파라오께서는 저와 결혼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저는 이미 로마에 아내가 있는데 말입니다."

  "문제 될 게 있나요? 영웅적인 남성이라면 아내가 한 명이든 두 명이든 신경 쓰지 말아야지요.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파라오를 자신의 여자로 삼는 거랍니다. 그 가치가 어느 정도일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파라오라···확실히 존귀한 자리이기는 하죠."

  "고작 그 정도가 아닙니다. 나 베레니케는 아문-라의 화신이며 이시스의 환생이에요. 당신은 살아있는 신을 취할 수 있는 거라고요. 그리고 우리의 사이에서 나온 아들은 온 이집트와 로마의 정점에 설 거예요."

  어디부터 토를 달아야 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망상이었다.

  마르쿠스는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유지한 채로 결론을 내렸다.

  이 여자는 바보다.

  지금까지 생각이 짧은 사람을 보면 바보라고 칭했었는데 그런 표현을 함부로 쓰면 안 될 것 같은 생각마저 들게 하는 바보였다.

  현실감각은 부족하고, 자신의 객관적인 위치파악조차 되지 않으며 협상을 하려고 하는 상대 국가의 관습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이집트가 자부심 강한 민족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로마도 그에 뒤지지 않았다.

  로마 시민들은 기본적으로 결혼한 남자가 로마 시민이 아닌 다른 여성과 놀아나는 걸 뭐라고 하지 않았다.

  문화가 개방적이라서가 아니다.

  로마 시민이 아닌 자들과 로마 시민을 동등한 개체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몸을 섞는 정도로는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물론 일반 시민들의 경우는 타국의 여인들과 결혼을 하기도 했고 애를 낳아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속주 동화책 중 하나로 권장되는 면도 있었다.

  그러나 로마 시민을 아내로 맞이한 사람이 타국의 여인과 바람을 피우고 결혼까지 올린다?

  그 즉시 사회적으로 매장될 각오를 해야 한다.

  공직자라면 로마의 위신을 떨어트렸다는 비판과 함께 고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베레니케는 그런 간단한 사실조차 몰랐던 것일까.

  마르쿠스는 그렇게 여기진 않았다. 아마 지식으로는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녀는 파라오인 자신이 로마 시민보다 수백 배는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자신을 아내로 삼는 건 로마인에게 수치가 아닌 영광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여겼고 모두가 그렇게 동감할 거라 확신했다.

  아직 파라오와 결혼한 로마인이 없었으니 어떻게 생각하든 본인의 자유이긴 하다.

  물론 실제로 그랬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는 마르쿠스는 그럴 마음이 먼지만큼도 없었다.

  마르쿠스는 자신이 완전히 넘어왔다고 믿고 계획을 줄줄 설명하는 베레니케를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파라오의 자리에서 떨려난다고 해도 이용가치가 있을 테니 살려두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왠지 그럴 가치조차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상쾌한 바보라면 이용거리가 하나쯤은 있을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다시 머릿속을 스쳤다.

  베레니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장밋빛 미래에 취해 살짝 눈을 감고 포도주를 마셨다.

  그 짧은 순간 마르쿠스의 눈에 기광이 스쳤다.

  취할 것인가, 아니면 버릴 것인가.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선택의 기로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베레니케가 눈을 뜨자 마르쿠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요염한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우리 좀 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주변을 물릴까요?"

  < 105. 베레니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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