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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로마의 신하 (107/326)

  < 106. 로마의 신하 >

  106.

  주변을 물리고 둘이서만 대화를 하자는 말의 의미를 이해 못 할 마르쿠스가 아니었다.

  베레니케의 끈적끈적한 시선에서는 숨길 수 없는 욕망과 야망이 흘러나왔다.

  마르쿠스는 마음속으로 수십 번이나 베레니케의 가치를 저울질했다.

  살려둘 것인가, 죽일 것인가.

  살려둔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용할 것인가.

  이미 차갑게 가라앉은 마르쿠스의 가슴은 베레니케의 요염한 자태를 보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사실 그도 신체 강건한 남성인지라 당연히 일정 수준의 욕정은 있었다.

  저런 미녀가 대놓고 유혹하는데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그건 어딘가 문제가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적당히 어울려주면서 즐길 수 있는 만큼 즐겨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만약 갈리아에서 로마에 들르지 않고 바로 이집트로 왔다면 유혹에 넘어가는 척 어울려 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르쿠스의 머릿속에는 아직 어린 딸과 아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아이들과 아내를 두고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몸을 섞는 선택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베레니케는 마르쿠스의 이상형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그는 스파르타쿠스에게 작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스파르타쿠스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바로 자리를 떠났다.

  베레니케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자 마르쿠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잔에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자리를 정리해 두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준비되는 대로 파라오를 모실 테니 잠시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그렇군요. 따로 준비까지 하시다니 세심하시네요. 저는 그냥 사령관님의 침소에 함께 머물러도 되는데 말이죠."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엔 무료하니 잠시 이야기나 나눠 볼까요? 최근에 동방의 대국 파르티아에서 상당히 커다란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베레니케가 금시초문이라는 듯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아무리 이집트와 파르티아가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그 정도의 대사건이 보고가 되지 않았을 리 없다.

  마르쿠스가 미소를 거두지 않고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왕좌를 차지하고 있던 프라아테스가 그의 아들 오로데스와 미트리다테스에게 살해당한 사건을 말하는 겁니다. 지금의 파르티아는 오로데스가, 메디아는 미트리다테스가 나눠서 다스리기로 했다죠?"

  "아아, 맞아요. 기억이 나네요. 그런 보고를 들은 적이 있어요."

  파르티아의 왕은 왕 중 왕이라는 뜻의 샤한샤를 자칭하며 군림했으나, 실제로 왕권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왕좌를 둘러싼 암투가 끊이지 않았고 실제로 여러 명의 왕들이 암살당해 생을 마감했다.

  폼페이우스와 협약을 맺었던 프라아테스도 마찬가지였다.

  13년이나 파르티아를 통치하던 그는 결국 두 아들에게 살해당하며 허무하게 왕좌를 빼앗겼다.

  오로데스 2세와 미트리다테스 3세는 일단 협력해서 파르티아를 다스리기로 했지만, 그런 협약이 제대로 지켜질 리가 만무했다.

  파르티아는 언제라도 내전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이 심상치 않은 국면은 로마에서도 깊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만약 파르티아의 정세가 급변하면 동방 속주의 안정에 위협이 될 수도 있는 까닭이다.

  마르쿠스는 사전에 미트리다테스 3세 쪽에 연줄을 만들어 두었기에 빠르고 신속하게 정보를 전달받고 있었다.

  그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이집트 역시 동방의 정세에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베레니케가 이 사건을 알고 있는 건 선왕이 후대에게 살해당하고 자리를 빼앗겼다는 사실관계 때문이었다.

  자신도 그렇게 아울레테스를 죽여 버렸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아직도 그녀의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파르티아는 강대한 국가죠. 이집트가 파르티아와 직접 싸울 일은 없겠지만, 동방의 판도가 흔들린다면 이집트 역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파르티아가 지금처럼 확장할 수 있었던 것도 셀레우코스 왕조가 이집트를 신경 쓰는 탓에 전력이 분산되었던 탓이기도 하고요."

  "무, 물론 저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답니다. 그러니까 왕이 바뀐 것도 상세히 보고받았죠."

  "역시 그랬군요. 지금 파르티아의 내전은 그럼 어떻게 될 거라고 보십니까. 오로데스를 지지하는 귀족 중에는 수레나스라는 굉장한 명장이 있으니 역시 오로데스가 유리하려나요?"

  "그, 글쎄요···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요?"

  베레니케가 어물쩍 시선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는 듯한 그 모습에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진짜로 심각하긴 하군.'

  반응을 보아하니 수레나스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는 게 확실했다.

  아니, 오로데스와 미트리다테스를 확실히 구분하고 있는지부터 의문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로 머리가 청순하니 마르쿠스도 그녀를 죽이지 않을 마음이 든 것이다.

  만약 이보다 조금만 덜 단순했다면 주저 없이 그녀를 숙청했으리라.

  베레니케에게는 다행히도 어느새 막사로 돌아온 스파르타쿠스가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보고를 받은 마르쿠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베레니케에게 손을 내밀었다.

  "복잡한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슬슬 가실까요?"

  "예. 단둘이서 진솔한 이야기를 좀 더 나눠 보도록 해요."

  방해되는 이 없이 단둘이 남게 된다면 그다음부터는 베레니케의 독무대다.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마르쿠스를 따라 준비된 침소로 향했다.

  마르쿠스가 준비한 장소는 꽤 널찍하면서도 아늑해 보였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방이 두 개로 나뉘어 있었다는 점이다.

  한 침대 위에서 잘 거라면 굳이 방이 두 개일 필요가 없는데 어째서 이런 구조로 공간을 구분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베레니케는 마르쿠스를 유혹해서 자신의 남자로 만들기만 하면 그뿐이다.

  사소한 건 신경 쓰지 않기로 한 그녀는 고혹적인 목소리로 교태를 부렸다.

  "후훗,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지금 바로? 아니면 조금 더 서로에 대해 안 뒤에?"

  베레니케가 얇디얇은 아마포를 슬쩍 내리자 그녀의 아름다운 신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라면 누구든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로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마르쿠스에게는 이미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베레니케의 잘록한 허리나 탐스러운 골반도 자리를 잡지 못했다.

  대신 최근 구상 중인 판금 갑옷의 새로운 형태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기존의 못생긴 통짜 갑옷이 아니라 더 로마다우면서도 위엄이 있는 디자인으로······.'

  날카로우면서도 서늘하게 빛나는 강철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베레니케의 미모마저 빛이 바래지는 느낌이다.

  몇 가지 완벽한 형태의 갑옷을 떠올리자 눈치 없이 솟아오르려던 성욕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마르쿠스는 파르티아의 동태를 적은 타디우스의 보고서를 집어 들고 침상 위에 누웠다.

  베레니케에게는 슬쩍 눈길을 한 번 준 게 다였다.

  "파라오께서는 저기 옆에 침실로 들어가셔서 쉬십시오. 저는 중요한 보고서를 좀 더 읽다가 자야겠습니다."

  "네?"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냉막한 태도에 베레니케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는데 부끄럼을 타시는 건가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전부 알아서 해드릴 테니까요."

  "아내와 자식이 있는 몸인데 이제 와서 그런 것에 부끄러움을 느낄 리가 있겠습니까."

  아까 전 보였던 친근한 어조와 부드러운 미소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더 이상 연기를 할 필요가 없어진 마르쿠스는 이제 베레니케를 바라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타디우스의 보고서를 읽어 넘기며 무심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일 같이 궁으로 들어갈 테니 제가 부르기 전까지는 저기서 쉬고 계시면 됩니다. 그 뒤에 선위 절차를 밟도록 하죠."

  "선위라니 그게 대체 무슨······?"

  "당연히 선왕인 아울레테스 님에게 파라오의 자리를 다시 넘겨야지요. 설마 진심으로 제가 파라오의 편을 들 거라고 생각한 겁니까?"

  "······!"

  베레니케는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와서 이럴 거라면 조금 전에는 어째서 그런 태도를 보였단 말인가.

  그녀의 속내를 읽은 마르쿠스는 가볍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정식으로 선위를 하기 전에는 그래도 파라오의 신분이니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준 겁니다. 일단 이집트는 로마의 친우이고 파라오는 이집트의 왕이니까요.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적당히 체면을 세워줘야지요."

  "나, 나는, 나는 절대로 내 자리를 넘기지 않을 거야! 나는 이집트의 살아있는 신이다! 감히 누구도 내게 선위를 명령할 수 없어! 이 무도한 로마 놈들이 감히······!"

  "하아···역시 하나부터 열까지 다 설명을 해줘야 하는 건가. 하긴, 이런 절차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살려두기로 한 거지만."

  낮게 가라앉은 마르쿠스의 목소리에 베레니케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녀가 보았던 어리숙한 눈빛이나 욕정에 물든 시선, 자상한 태도가 전부 연기였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절로 오싹해졌다.

  무엇보다 마르쿠스의 입에서 나온 말의 의미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그게 무슨 소리···살려두다니?"

  "내가 굳이 이렇게 귀찮은 절차를 밟은 이유가 어째서라고 생각하지? 당신을 파라오로 인정하지 않고 그저 반역자로 규정짓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어. 그랬으면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칠 필요도 없지. 대신 당신은 반역자의 신분에 불과하니 분노한 아울레테스에게 즉각 목이 잘렸을 테고."

  "그, 그건 그러니까······."

  "난 오히려 당신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들어야 할 입장이라고. 당신이 목숨만이라도 건질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준 거니까."

  "하!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제야 알겠군. 반역자로 낙인찍혀서 목이 잘리기 싫으면 알아서 아울레테스에게 선위를 하고 물러나라고?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당신의 아버지는 그래도 당신을 죽이고 싶어 하겠지만."

  베레니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울레테스의 왕권에 대한 집착을 고려해보면 아무리 딸이라고 해도 자신의 자리를 위협한 이를 봐줄 리가 없다.

  마르쿠스의 말대로 어떤 수를 써서라도 베레니케를 죽이려고 할 것이다.

  "어째서 그런 늙은이를 선택하는 거야? 아무런 재미도 보지 못할 그런 늙은이보다는 내가 훨씬 낫지 않아? 나는 당신에게 엄청난 쾌락을 안겨다 줄 수 있다니까? 파라오를 정복한 첫 로마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거야?"

  "나를 설득하고 싶었으면 내 마음이 끌릴만한 이권을 준비해왔어야지. 거의 2년이나 시간을 줬는데도 준비한 게 고작 자신의 몸이라니···그 정도로 왕위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어떻게 보면 감탄이 나오는 자신감이야. 그 부분은 인정해줘도 되겠어."

  "그, 그러면 아울레테스가 해주기로 한 걸 나도 하겠다고 약속할게. 그러면 되지?"

  "아니. 아무리 봐도 당신은 이집트를 이끌어나갈 능력이 없어. 이집트는 로마의 중요한 곡창지대야. 최소한의 안정을 지킬 능력이 없는 군주가 정권을 잡으면 로마의 식량 수급에 차질이 생기겠지. 당신의 역할은 끝났어. 이만 물러나도록 해."

  이건 요구나 권고가 아닌 명령이었다.

  드높은 파라오의 자존심을 가진 베레니케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굴욕이었다.

  그녀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웃기지 마라! 나는 아문-라의 화신이다. 살아있는 신이란 말이다. 감히 누구도 나에게 물러나라 말라 명할 수 없······."

  "당신이 자신을 뭐라고 칭하든 관심 없고 다 인정해줄 수 있어. 하지만 당신이 뭐든 간에 파라오는 로마의 신하야. 이런 기초적인 사실을 모르는 당신을 그 자리에 계속 올려둘 수는 없어. 이렇게 말하면 이해하겠지?"

  "시, 신하? 내가 로마의 신하라고?"

  "당신만이 아니야. 폰투스의 파르나케스도,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도 전부 자신의 왕국의 왕이기에 앞서서 로마의 신하에 지나지 않아.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로마의 보호국이라는 자리를 내려놔야지."

  베레니케는 입술을 앙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거만한 로마 놈을 벌하고 싶었으나, 그럴 힘도 권한도 없다는 비참한 현실이 자각됐다.

  마르쿠스는 보고서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손가락으로 침소의 출입구를 가리켰다.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금 당장 저기로 나가서 궁전으로 돌아가도록. 그게 아니라면 조용히 저기서 쉬고 있다가 내일 궁으로 나와 함께 들어가라. 그러면 목숨은 건져서 로마로 갈 수 있도록 해줄 테니까."

  "다, 당신···정말로 날 봐도 아무렇지도 않아? 내가 당신 여자가 되어준다니까? 어떻게 나를 앞에 두고도 그런 태도를 보일 수 있어?"

  "미안하지만 나는 침대 밖에서도 나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이상형이거든.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은 그 자체만으로도 골칫거리야. 내 마음에 들고 싶으면 지금부터라도 책도 좀 읽으면서 식견을 쌓아봐. 본바탕은 나쁘지 않으니까 몇 년 동안 꾸준히 노력하면 내가 한 번쯤은 돌아봐 줄지도 모르지."

  "뭐, 뭐라고? 네까짓 게 무엇이기에 감히 나에게 그런 말을 해! 나는 위대한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피를 받은 베레니케란 말이다!"

  철저히 자존심이 박살 난 베레니케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마르쿠스는 일부러 그녀의 자존감을 더 깔아뭉개기로 했다.

  앞으로 유용한 카드로 써먹기 위해서는 일단 저 드높은 콧대를 좀 낮춰둘 필요가 있는 까닭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당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지. 일단 머리를 식히고 자신의 처지를 잘 되새겨 보도록 해. 앞으로 잘 처신하면 나도 당신을 이집트의 왕족 정도로는 대우해 줄 테니까."

  마르쿠스는 더 이상의 대화는 끝이라는 듯 입을 다물었다.

  베레니케는 눈물을 훌쩍이며 벗어두었던 옷을 도로 입었다.

  이쯤 되자 그녀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마르쿠스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런 무력감을 느끼는 건 인생에서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터덜터덜 옆의 방으로 건너가기 전 마지막으로 고개를 힐끗 돌렸다.

  자신을 거부한 남자는 여전히 신경조차 쓰지 않으며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분함과 오기로 눈물을 억누른 그녀는 자신에게 배정된 침상에 누워 억지로 잠을 청했다.

  어쩌면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는 일이 이렇게 흘러갈 거라 예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베레니케는 자신이 처음부터 두 여동생의 함정에 빠졌던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녀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두고 봐라. 너희 둘이 뭘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희 두 사람도 원하는 바를 이루긴 쉽지 않을걸?'

  다른 건 몰라도 남자를 보는 눈 하나는 자신 있었다.

  마르쿠스는 클레오파트라나 아르시노에가 넘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베레니케는 가증스러운 여동생들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가 될 거라 확신하며 눈을 감았다.

  ※※※※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마르쿠스는 베레니케를 앞세우고 알렉산드리아 왕궁으로 진군했다.

  이로써 로마군은 베레니케의 묵인 하에 알렉산드리아의 궁을 점령하는 모양새를 취하게 됐다.

  왕궁을 지키는 병사들도, 관료들은 감히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아울레테스는 거침없이 걸어가 왕좌에 앉았다.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베레니케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아울레테스가 진정한 파라오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아울레테스는 베레니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명령했다.

  "정당한 권리를 되찾은 파라오로서 명한다. 저 반역자를 처형해라."

  근위병들이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위대한 아문-라의 화신이시여, 명을 받들겠습니다."

  베레니케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녀가 다급하게 마르쿠스의 등 뒤로 숨었다.

  "음···죄송하지만 그건 곤란하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마르쿠스가 손을 들자 다가오려던 파라오의 근위병들이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베레니케는 정당하게 왕위를 계승했고, 그 자리를 다시 파라오께 넘겼습니다. 무엇보다 로마의 관습은 패자를 처형하지 않습니다. 베레니케는 일단 제가 사로잡은 포로로 처리될 테니 로마의 관습을 따라야 합니다."

  아울레테스는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분명 어제 마르쿠스는 그런 말을 했었다.

  그러나 왕위에서 억울하게 쫓겨나 타국에서 망명해야 했던 파라오의 분노는 쉽사리 가라앉을 만한 게 아니었다.

  그는 어떤 이유를 내세워서라도 이 사건과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었다.

  "저 아이가 살아있는 한 반란의 불씨는 언제라도 살아날 것이네. 그러니 지금 당장 죽여야 해!"

  "베레니케는 앞으로 평생을 로마에서 살게 될 겁니다. 파라오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결코 이집트에 돌아올 일은 없을 겁니다. 제 명예를 걸고 약속드리죠."

  "···하지만 이집트의 법에 따르면······."

  "파라오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두 법이 상충할 때는 로마법이 우선입니다. 저는 원로원의 대표이자 군단을 이끄는 사령관으로서 로마의 법을 엄격하게 집행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제가 더 이상의 무례를 범하지 않도록 선처해주시기 바랍니다."

  마르쿠스의 정중한 요청에 아울레테스도 더 뭐라고 하지 못했다.

  그러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시 한 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로마와 이집트.

  어느 쪽이 절대적인 우위를 가지고, 어느 쪽이 명령을 따라야 하는 위치인지를 말이다.

  "그래도 베레니케에게 반역죄를 적용할 수 없다면 나를 쫓아낸 패역의 무리들을 어떻게 처단할 수 있는단 말인가. 설마 그들까지 용서하란 말은 아니겠지?"

  "물론 아닙니다. 그렇다면 내정간섭이 되겠지요. 하지만 어째서 반역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베레니케는 자신이 주도해 반란을 일으킨 게 아니라 파라오를 반대하는 반역의 무리들에게 속은 것뿐입니다.

  그들은 무엄하게도 로마와 이집트 사이를 이간질했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키프로스를 병합했고, 그러는 동안에도 파라오께서는 간악한 무리들이 정보를 왜곡해 일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제대로 알 수 없었지 않습니까. 그렇게 명분을 확보한 그들이 베레니케를 끌어들여 반란이라는 참담한 행위를 일으킨 것이지요.

  "

  구석에서 자신들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던 베레니케의 측근들이 펄쩍 뛰었다.

  "우리가 키프로스 병합을 방조했다니 무슨······!"

  "군단장님의 말을 경청하라!"

  로마 군단병이 방패로 바닥을 쿵 하고 찍자 겁에 질린 관료들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마르쿠스가 건넨 말의 의미를 이해한 아울레테스가 살기 어린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군. 저 괘씸한 반란의 무리들이 감히 나의 자리를 노리고 치밀하게 계획을 준비한 것이었군. 상식적으로 내가 키프로스의 병합 건을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처를 했겠지 그냥 두고 봤겠나? 지금 이 사태가 일어난 건 모두 저들의 농간 탓이로다."

  "그렇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자들이로군요. 파라오께서 어떤 처벌을 내리시든 로마는 그걸 지지할 겁니다."

  어차피 원래부터 반역죄를 피하기 힘들었던 이들이다.

  마르쿠스는 이참에 아울레테스의 실정을 모두 반역도들에게 떠넘기고 오명을 씻으라는 제안을 한 것이다.

  베레니케를 데려가기로 했으니 이 정도의 당근은 던져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아울레테스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클레오파트라는 소름이 돋았다.

  아르시노에는 그저 마르쿠스의 시원시원한 모습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일련의 과정들이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매끄러워······.'

  어디부터가 계획된 것이고 어디까지가 임기응변의 산물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마르쿠스가 사절로 올 때부터, 어쩌면 그 이전부터 계획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물론 아직은 어디까지나 미약한 의심에 지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사람이 어떻게 이토록 한참 뒤의 미래를 전부 내다보고 계략을 짤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정말로 이게 전부 계획된 일이었다면 누가 감히 그에게 대항할 수 있을까.

  클레오파트라는 떨리는 시선으로 마르쿠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를 돌아본 마르쿠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며 마주 웃었다.

  조금 두렵기도 했지만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묘한 열기에 가슴이 뛰었다.

  < 106. 로마의 신하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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