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 공주의 선택 (108/326)

  < 107. 공주의 선택 >

  107.

  대략적인 합의를 끝낸 아울레테스는 주위 사람들을 전부 물렸다.

  마르쿠스도 자신을 따라온 병사들에게 밖에서 대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드넓은 알현실에는 이제 두 사람만이 남았다.

  아울레테스의 입에서 신하들 앞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화제가 흘러나왔다.

  "자네 덕분에 일이 아주 잘 풀렸네. 반대파를 쓸어버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내 치부를 전부 뒤집어씌운다니 아주 좋은 의견이었어."

  "파라오의 왕권이 반석 위에 선다면 로마에도 좋은 일입니다. 식량 수급에 차질이 없을 테니까요."

  "앞으로도 상호 간에 이득이 되는 관계를 이어나가세. 물론 이번에 진 빚은 이자까지 얹어서 두둑이 갚겠네. 원정에 사용할 군량을 원한다고 했지?"

  "예. 아무래도 소아시아 지역에서 생산한 곡식 대부분은 로마로 보내야 하니까요. 전쟁한답시고 밀 수급량이 줄면 시민들의 원성을 사기 딱 좋겠죠. 성과를 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찬양을 하겠지만, 저는 비판 받을 여지 자체를 주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파라오께서 저를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어차피 아울레테스에게 거절한다는 선택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왕좌를 되찾는 데 로마의 힘을 빌린 이상 아울레테스는 이제 마르쿠스의 클리엔테스나 마찬가지였다.

  전통적인 로마의 클리엔텔라 체계에 따라 파트로누스는 클리엔테스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동시에 클리엔텐스 역시 파트로누스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아울레테스는 이집트의 파라오이긴 해도 마르쿠스의 클리엔테스라는 걸 비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즉, 파라오로서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키려던 베레니케는 처음부터 마르쿠스의 선택을 받을 가능성이 없었던 것이다.

  "군량 지원이야 맡겨만 주게. 그런데 이쪽도 미리 대비를 해둬야 하니 원정 계획을 알려줄 수 있겠나? 혹시 지금 파르티아가 한창 시끄러운 것 같으니 내년에 곧바로 쳐들어갈 생각인가? 내가 볼 때는 기회를 잡으려면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야 할 것 같긴 한데······."

  "아니요. 내년에는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빨라도 내후년, 어쩌면 그보다 더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

  "어째서? 내가 듣기로 파르티아는 지금 당장 내전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고 들었네. 파르티아 원정을 할 거라면 당연히 그 틈을 찌르고 들어가야 하지 않겠나."

  군사적 식견이 그리 뛰어나지 않은 아울레테스라도 상대방의 힘이 가장 약할 때 노려야 한다는 기초적인 사실은 알았다.

  마르쿠스가 고개를 살며시 내저으며 대답했다.

  "이건 파라오께서만 알고 계십시오. 사실 제 부하가 파르티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권력다툼의 한 축인 미트리다테스와 오래전부터 거래를 해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설탕과 비단을 교환하면서 챙긴 이득이 꽤나 쏠쏠한 상황입니다."

  "그러면 미트리다테스의 편을 들어 내전에 개입하면 되는 게 아닌가? 미트리다테스가 오로데스를 밀어내고 왕좌에 오른다면 자네에게 진 빚을 절대 모른 척할 수 없을 텐데? 아니면 아예 일정 영토를 대가로 약속받고 지원군을 파병해도 될 테고."

  "가라앉기 직전의 배에 있는 사람과 이미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사람 중 어느 쪽이 구해줬을 때 감사할 거라고 보십니까?"

  "그거야 당연히 후자···아하, 그러니까 미트리다테스가 패색이 짙어질 때까지는 개입할 마음이 없다는 거로군. 확실히 그편이 로마가 파르티아에 더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겠어. 그나저나 미트리다테스와 이미 연줄을 만들어 놓았다니 자네의 철두철미함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군 그래."

  아울레테스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작지 않은 놀라움이었다.

  마르쿠스는 마치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걸 한참 전부터 예상한 것처럼 보였다.

  "제가 본 미트리다테스는 성정이 포악하고 잔인한 인물입니다. 그런 자를 밀어줘 봐야 왕이 된 뒤에 로마의 뒤를 칠 생각이나 하겠죠. 사람이란 게 원래 위기에 빠졌을 때와 벗어났을 때의 심정이 많이 다른 법이니까요."

  "···그러면 자네는 미트리다테스를 도울 마음이 없다는 건가?

  "필요한 건 파르티아 왕가의 핏줄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미트리다테스는 죽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자세한 계획은 차후 말씀드릴 테니 당분간은 군사를 일으킬 계획이 없다는 것만 알아두십시오."

  아울레테스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쿠스는 아울레테스의 눈에서 미처 지우지 못한 의혹을 엿보았다.

  혹시 이집트도 파르티아처럼 어떤 거대한 계획의 일부에 놀아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혹이었다.

  마르쿠스는 아울레테스의 불안을 달래주려는 듯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파르티아와 이집트는 경우가 다릅니다. 이집트의 경우 로마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우호국이지만, 파르티아는 잠재적인 위험을 띤 적국일 뿐입니다. 거기에 이집트와 달리 상호 신뢰도 잡혀 있지 않으니 일단 로마의 힘을 보여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뭐, 파르티아는 고작 그 정도의 의미를 지닌 나라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이집트처럼 순종적이지 않으니 한 번 본때를 보여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아울레테스는 이를 지금처럼 자기 분수를 잘 안다면 문제없을 거라는 보증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파르티아 역시 차지할 수만 있다면 로마에게 엄청난 도움이 될 땅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예로부터 엄청난 농업 생산력을 자랑했다.

  여기에 파르티아의 방해가 사라지면 로마는 한나라와 직접적인 교역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파르티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다면 이는 로마에 헤아릴 수 없는 이득을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마르쿠스는 파르티아의 가치를 아울레테스에게 그대로 말해주지 않았다.

  안다고 해봐야 생각만 많아질 뿐, 마르쿠스에게 이득이 될 만한 일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아울레테스와의 회담은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두 사람이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알현실의 바깥에서는 상황이 뒤바뀐 세 자매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친애하는 파라···아, 이제 아니죠. 언니께서는 그렇게나 자신만만하시더니 예상보다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았나 봐요?"

  먼저 포문을 연 사람은 아르시노에였다.

  베레니케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을 한 여동생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째려보았다.

  "너, 아니 너만이 아니라 클레오파트라도. 다 알면서 마지막에 나를 부추긴 거지?"

  "에이, 전 분명 처음에 그랬잖아요. 생각만큼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라고. 그런데 그때 언니가 뭐라고 했죠? 그건 꼬맹이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라고 했었나요? 그 말대로라면 언니도 꼬맹이라는 게 되네요."

  통렬한 비아냥에도 베레니케는 동생들에게 달려들 수 없었다.

  이전과는 서로 간의 입장이 완전히 역전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베레니케는 이제 끈 떨어진 연처럼 알렉산드리아에 아무런 기반이 없었다.

  그녀를 뒷받침해주던 측근들은 전부 참수형을 선고받았다.

  솔직히 말해 자신의 목숨만이라도 건진 게 기적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집트에서는 권력다툼에서 밀린 패자에게는 죽음밖에 없다.

  이 자명한 사실은 베레니케조차 확실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나쁘게만 보지는 마세요, 언니."

  시종일관 나긋나긋한 미소를 짓고 있던 클레오파트라가 은근한 목소리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뭐? 너희 둘이 나를 부추겨서 개망신을 당하게 한 걸 나쁘게만 보지 말라고?"

  "그렇게라도 했으니까 언니의 머리가 아직도 목 위에 붙어있는 거잖아요. 저는 사실 언니를 다시 보고 있답니다. 대체 어떻게 처신했기에 마르쿠스 님께서 언니를 살려두신 거죠?"

  "그, 글쎄?"

  "몸으로 유혹할 거라고 하시더니 정말로 살을 섞으셨나요?"

  베레니케 보다 아르시노에가 먼저 펄쩍 뛰며 소리쳤다.

  "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마르쿠스 님이 왜 베레니케 언니 따위랑 동침을 하는데?"

  "아니, 유혹에 넘어가는 건 아니더라도 잘 수는 있잖아. 언니도 외모만 보면 객관적으로 뛰어나니까 혹시 그런 쪽으로 이용가치를 발견한 게 아닐까 싶어서."

  적나라한 클레오파트라의 말에 아르시노에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우, 웃기는 소리 하고 있어 진짜. 마르쿠스 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고!"

  "그런데 그것도 아니라면 언니를 살려둘 이유가 별로 없잖아."

  "그, 그건 그렇지만···그래도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잖아."

  마땅히 반박할 말이 없었던 아르시노에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툴툴거렸다.

  자연스레 두 사람의 의문 섞인 시선을 받은 베레니케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하! 그 새끼는 고자야! 하반신 불구가 확실하다고. 그게 아니고서야 그따위 태도를 보일 수 있을 리가 없지."

  어제저녁의 일을 떠올린 베레니케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자의 앞에서 그토록 온갖 아양을 떨고, 나체로 들이대기까지 한 건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너는 내 취향이 아니니 더 노력하고 와라'는 말이나 들은 것이다.

  미모 하나만큼은 절대적인 자신이 있었던 베레니케의 자존심은 산산이 무너져 버렸다.

  그녀의 반응만 봐도 상황을 익히 짐작한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는 고소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흐음, 그러니까 들이댔는데 까인 거네요?"

  "까인 게 아니라고! 그놈이 이상한 거야. 분명히 하자가 있을 거야···그렇지 않고서는 말이 안 돼."

  클레오파트라가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분께서는 고자임에도 불구하고 멀쩡히 아내가 있고 두 명이나 자식을 본 거네요.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촌철살인의 한 마디에 베레니케는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르시노에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래도 목숨은 건졌으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하도록 해요. 거기 가서 괜히 말썽 피우다가 간신히 구한 목숨 헛되이 날리지나 말고."

  "···그럴 거야. 두고 보라고. 너는 물론 클레오파트라도 상대가 안 될 정도의 교양을 쌓고 말 테니까."

  "뜬금없이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그냥 그런 게 있어!"

  허겁지겁 화제를 돌리는 베레니케를 두 자매는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흘겨보았다.

  클레오파트라는 아주 살짝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으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아르시노에는 클레오파트라와는 다른 의미로 뭔가가 걸렸다.

  "베레니케 언니가 로마로 간다라······."

  "왜? 뭔가 또 불만이니? 솔직히 말해서 로마도 나쁘지 않지. 파라오가 살아있는 신이고 이집트의 왕이라지만 그래 봐야 로마의 신하에 지나지 않잖아? 지금 진정한 세계의 중심은 로마라고. 난 그곳에서 두 번째 기회를 잡아볼 거야. 이렇게는 절대로 안 끝나."

  "어제 마르쿠스 님 앞에서 뻗대다가 그런 말을 들었나 보죠?"

  "뭐, 뭐라고?"

  "그거야 언니가 그런 냉철한 상황판단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대충 그림이 나오네요. 왜 그렇게 풀이 죽어있는지도 이제 다 이해가 가요. 몸으로 들이댔는데 거절당하고, 파라오랍시고 허세를 부리다가 망신만 당했겠네요. 으으···저라면 부끄러워서 그 자리에서 수치로 죽었을 것 같아요."

  밑바닥까지 완전히 간파당한 베레니케의 얼굴이 이 이상 없을 정도로 새빨갛게 변했다.

  그녀는 평소처럼 날카롭게 소리치지도 못하고 그냥 몸을 돌려 자신의 침소로 돌아가 버렸다.

  그 희극적인 모양새에 아르시노에가 배를 잡고 웃었다.

  옆에 있던 클레오파트라마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지금까지 당하고 살며 얹혔던 무언가가 한 번에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한바탕 웃음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이내 서로를 돌아보았다.

  아르시노에가 먼저 웃음기를 거두고 물었다.

  "로마 말이야, 정말로 그렇게 발달한 도시일까?"

  "그렇겠지. 지금은 로마가 세계 최강의 대국이라는 건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니까. 그런 곳의 수도가 별 볼 일 없는 도시일리는 없잖아."

  "역시 그렇겠지? 한번 보고 싶네. 마르쿠스 님도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셨을 텐데."

  별 뜻 없이 중얼거린 동생의 한 마디에 클레오파트라의 몸이 움찔거렸다.

  '로마에 간다고?'

  문득 그녀는 알현실이 있는 방향을 향해 뒤를 돌아보았다.

  마르쿠스와 아울레테스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아직도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로마와 이집트, 양국 사이에 존재하는 명확한 힘의 차이가 그녀의 가슴 한쪽을 꽉 조여왔다.

  클레오파트라는 다른 왕족들과는 다르게 이집트 원주민들의 삶과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심 자신만이 진정한 파라오가 될 자격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와 이집트 토착민을 이어주는 진정한 의미의 파라오.

  살아있는 신의 화신이자, 누구나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진정한 이집트의 군주가 되는 게 그녀가 품은 일생일대의 목표였다.

  그러나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해서 알아야 하는 건 이집트 원주민의 언어와 문화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지금까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총명한 두 눈동자에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결의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

  아울레테스와 모든 협약을 마친 마르쿠스는 그제야 홀가분하게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를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마르쿠스의 부름을 받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쪼르르 달려왔다.

  특히 아르시노에의 반응은 극적이었다.

  "마르쿠스 님!"

  뒤를 따르는 클레오파트라의 만류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단숨에 달려가 마르쿠스에게 안겨들었다.

  기겁한 클레오파트라가 허겁지겁 그녀를 떼어놓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일국의 왕족이 경망 되게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빨리 떨어져서 사과하지 못해?"

  "흥. 우리 외에는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때."

  아르시노에는 코웃음을 치며 보란 듯이 마르쿠스의 가슴팍에 볼을 가져다 댔다.

  클레오파트라가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얘가 부끄러움도 모르고···네가 진짜 얼마나 외교적인 결례를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겠어? 내려올 생각이 없다면 내가 강제로 내려오게 해줄까?"

  "흥! 할 수 있으면 해보든가."

  자매간에 때아닌 난투극이 벌어질 기세였다.

  마르쿠스가 황급히 앞으로 나서며 만류했다.

  "괜찮습니다. 이것도 공주님께서 저를 얼마나 반가워하시는지 보여주는 우정의 증표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은 고맙습니다. 그래도 일국의 왕족이 외간 남자에게 안겨서 아양을 떠는 건······."

  "흥! 억울하면 그쪽도 그렇게 하던가."

  "뭐라고? 진짜 넌 부끄러움이란 게 아예 없니? 왕족이라는 자각이 있긴 한 거야?"

  "공적인 자리에서는 똑바로 처신할 거야. 그리고 마르쿠스 님이 괜찮다고 하는데 언니가 무슨 상관인데?"

  시도 때도 없이 말다툼하는 건 예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마르쿠스는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이전보다 묘하게 부드러워졌다는 걸 간파했다.

  이전에는 상대를 향한 적의와 분노에 가득 차 싸움을 벌였다면, 지금은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하는 평범한 자매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자자, 공주님들. 진정하시고 오랜만에 만났으니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죠. 일단 두 분 다 건강하게 지내고 계시는 것 같아 안심했습니다."

  "마르쿠스 님도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갈리아라는 야만족의 땅에 가서 맹렬히 싸우셨다면서요? 그래서인지 한층 더 용맹해 보이세요."

  "감사합니다. 공주님도 못 본 사이 더 아름다워지셨습니다. 이제 몇 년만 있으면 알렉산드리아의 모든 남성들이 공주님의 미모에 마음을 빼앗길 겁니다."

  "헤헷, 그렇죠? 저도 이제 곧 있으면 결혼할 수 있는 나이니까요."

  클레오파트라가 피식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그 말뜻은 몇 년이 지나기 전에는 아직 어린애라는 뜻이잖아."

  "뭐라고?"

  아르시노에가 도끼눈을 뜨고 클레오파트라를 쏘아보았다.

  마르쿠스가 진정하라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그녀는 곧바로 헤실헤실 웃으며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클레오파트라가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얹었다.

  "마르쿠스 님도 너무 오냐오냐 받아주지 마세요. 그러니까 더 저러는 거랍니다."

  "그래도 사적인 자리에서 너무 예의를 따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클레오파트라 님도 이 자리에서는 너무 예절에 구애받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으으···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클레오파트라는 몇 걸음 더 다가와 마르쿠스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그녀는 아르시노에처럼 무분별하게 남성의 곁에 파고들 수 없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마르쿠스와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었다.

  심장도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알현실에서 느꼈던 두려움의 감정이 다 가시지 않은 거라 결론을 내렸다.

  '이러면 안 되지. 내가 무서워하고 있다는 걸 들키면 괜한 경계를 살 수 있잖아. 일단 눈을 마주치고 웃음을······.'

  살짝 고개를 들어 마르쿠스를 바라본 클레오파트라는 눈동자가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거세게 뛰었다.

  혹시 병이라도 걸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몸 상태가 이상했다.

  그런 클레오파트라와 정반대로 아르시노에는 심혈을 기울여 만든 카드 뭉치를 가져와 마르쿠스의 앞에서 자랑스레 펼쳐놓았다.

  "예전에 마르쿠스 님이 알려주신 놀이에요. 저랑 언니가 공을 들여서 이 정도로 완성도 있게 뽑아냈답니다."

  "호오, 상당히 재미있으셨나 보네요. 이렇게까지 수고를 들이다니."

  "물론이죠. 규칙을 아는 사람들도 점점 궁에 늘어나고 있어요. 저나 언니는 거의 매일 같이 대결을 벌이고 있답니다. 제가 승률이 조금 더 낮긴 하지만요."

  마르쿠스는 흥미를 숨기지 않고 아르시노에가 가져온 카드를 이리저리 만져보며 상념에 잠겼다.

  심심풀이로 만들어준 카드 게임이 이 정도로 인기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니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컴퓨터는 물론 아직 체계적인 유흥거리가 발달하지 못한 이 시대에서 체스나 카드 게임 정도면 충분히 중독성 강한 게임이다.

  귀족들 사이에 이를 잘만 퍼트리면 꽤 짭짤하게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파피루스지로 만든 카드는 내구성이 너무 약해. 그렇다고 양피지에 그림을 그려 넣는 건 너무 낭비가 심하고···역시 슬슬 종이를 만들 때가 온 건가?'

  안 그래도 군사와 농업 분야의 발전이 끝나면 다음으로는 제지법을 발달시킬 생각이었다.

  파피루스지와 양피지는 서사 재료로는 치명적인 약점이 몇 가지씩 있었던 까닭이다.

  종이를 개발하고 간단한 인쇄기술까지 갖추게 되면 그 자체만으로도 사회에 한차례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예상되는 변화를 사전에 철저히 분석하고 혹시 모를 변수의 발생을 통제할 필요가 있다.

  무턱대고 개발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임하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한창 상념에 잠겨 있던 마르쿠스를 깨운 건 클레오파트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저기, 마르쿠스 님."

  "···네?"

  "부탁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요."

  "예, 말씀해 보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들어 드리겠습니다."

  클레오파트라가 크게 숨을 들이켜고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결심을 하긴 했으나 결단의 시간에 직면하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설마 싶었던 아르시노에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 하자 클레오파트라가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저, 저도 이번에 로마로 데려가 주세요!"

  "네?"

  예상치 못한 제안에 마르쿠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107. 공주의 선택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