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로마견문록 >
109. 로마 견문록
아르시노에는 단 한 번도 이집트를 벗어 나본 적이 없었다.
아니, 이집트는커녕 알렉산드리아 밖으로 나가본 경험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고대 이집트의 수도였던 멤피스와 테베조차 한두 번 가본 게 다였다.
그래도 그녀는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제아무리 과거의 영광을 품은 도시들이라 해봐야 알렉산드리아에 비하면 촌 동네에 불과하게 느껴졌던 까닭이다.
멤피스와 테베에서 볼만했던 거라고는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피라미드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대단하다는 피라미드도 지금 시대에는 대부분이 도굴꾼들에게 약탈을 당한 지 오래됐다.
다른 나라에 사절로 다녀온 신하들도 하나같이 입을 모아 알렉산드리아만한 도시는 없다고 말했다.
아르시노에는 그 말을 진리로 받아들였다.
그녀에게 이집트는 세계의 전부였고, 알렉산드리아는 이 세상의 중심이었다.
이런 어린 생각이 처음으로 흔들린 건 마르쿠스를 만난 뒤부터였다.
그는 아르시노에가 평생 본 적도 없는 물건을 보여주고 상상도 못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처음으로 알렉산드리아를 벗어나 타국을 여행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마르쿠스가 태어나고 자란 곳을 자신도 경험해보고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아르시노에는 주저 없이 로마로 오겠다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물론 클레오파트라를 마르쿠스와 단둘이 놔둘 수 없다는 마음도 한몫했다.
이 정도로 동기가 확실했으니 긴 시간 동안의 항해도 충분히 참을 만했다.
그러나 오스티아 항구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녀가 느낀 감정은 실망에 가까웠다.
세계 최고의 대도시라고 하더니 이게 뭔가 싶을 정도로 주변이 휑했기 때문이다.
아르시노에의 속내를 꿰뚫어 본 마르쿠스는 로마는 조금 더 내륙으로 들어가야 나온다고 알려주었다.
이 사실도 알렉산드리아 태생인 아르시노에에게는 나름 충격이었다.
세계적인 대도시라면 무조건 바다를 끼고 있어야 한다는 일종의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생애 처음으로 발을 디딘 외국은 자신이 지금까지 보던 세계와는 완전히 달랐다.
아르시노에는 들뜬 마음으로 크라수스 가문에서 준비한 마차에 올랐다.
마르쿠스는 아내인 율리아와 함께 마차를 타고 출발했다.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가 탄 마차에는 다나에라는 여인이 함께 탔다.
그녀는 자신을 마르쿠스를 바로 옆에서 섬기는 시종이라고 소개했다.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에 머무는 동안은 그녀가 편의를 봐줄 거라고 했다.
마르쿠스의 노예냐고 물어봤더니 지금은 해방 노예 신분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혹시 첩 같은 건가?'
다나에의 미모를 봐서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원래부터 권력자의 옆에는 미녀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왕족인 아르시노에는 그런 걸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흠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다만 율리아나 다나에는 이집트에서도 거의 본 적이 없을 정도의 미녀였다.
베레니케와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았다.
게다가 율리아는 물론이고 다나에조차 베레니케와는 달리 머리가 청순해 보이진 않았다.
'이런 여인들과 평생을 살았을 남자에게 몸을 들이대며 함락시켜 보겠다고 한 거야? 얼마나 가소롭게 보였을까······.'
아르시노에는 내심 저 뒤편의 마차를 탄 베레니케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슬쩍 옆을 돌아보니 클레오파트라도 비슷한 감상을 품고 있는 듯 보였다.
'그나저나 로마의 마차는 거의 흔들리지가 않네. 길이 좋아서 그런 건가? 아니, 도로의 상태만 보면 알렉산드리아도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은데.'
마차의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으나, 당연히 흔들림이 적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르시노에가 클레오파트라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작게 속삭였다.
"로마의 마차가 우리 이집트 마차랑 비교도 안 되게 승차감이 더 좋은 것 같은데···내 착각일까?"
"마침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야. 솔직히 좀 충격적일 정도로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알렉산드리아의 기술이 세계 최고라고 한 놈이 대체 누구야? 돌아가면 거짓말을 한 죄로 벌을 내려야겠어."
현 세계최강대국인 로마인만큼 알렉산드리아보다 뛰어난 점이 없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착한 지 반나절도 되지 않아서 이런 현격한 차이를 몸으로 체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첫인상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다.
그 정도로 어떤 대상을 접할 때 처음으로 받는 인상은 중요했다.
아르시노에는 로마에 오자마자 처음으로 타게 된 마차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갈 때 이 마차를 꼭 가지고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동시에 로마라는 나라가 예상보다 더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맞은편에서 두 공주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나에가 배시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르쿠스 님이 처음 이 마차를 만들었을 때 다른 분들도 모두 비슷한 반응을 보이셨답니다. 놀라울 정도로 흔들림이 덜하죠?"
"우리가 타고 있는 이 마차를 마르쿠스 님이 만들었다고?"
"예. 이 마차에 쓰인 충격흡수 기술은 전부 마르쿠스 님이 고안하신 겁니다. 게다가 몇 번이나 더 개선해서 이전의 마차와는 완전히 다른 물건이 됐죠. 지금 로마의 상류층은 전부 도련님이 만든 마차를 사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몇 번이나 개선을 했다면 얼마나 오래전에 이 마차를 만들었다는 거야?"
"음···글쎄요, 그게 언제였더라? 너무 오래전 일이라 이제 가물가물할 정도네요. 대충 15년은 넘지 않았나 싶은데요. 마르쿠스 님이 클레오파트라 공주님보다 한 살이나 두 살 정도 더 많았던 때 같아요."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의 표정이 동시에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불신의 빛이 역력한 두 공주들의 표정에 다나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분은 마르쿠스 님을 제대로 모르시나 보네요. 그러면 앞으로 많이 놀라시게 될 거예요."
느릿느릿 주변의 경치가 아르시노에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이내 그녀의 귓가에 다나에의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이 로마에서 그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걸 찾기가 더 힘들거든요."
※※※※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에 머무는 동안 크라수스 가문의 별채에서 지내기로 했다.
베레니케에게는 감시가 붙긴 했어도 그녀 역시 신분에 걸맞게 괜찮은 대우를 받았다.
가문의 모두가 성심성의껏 이집트에서 온 공주들을 돌봐주었다.
아르시노에는 처음 며칠 동안은 이집트와 완전히 다른 로마의 문화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다.
대표적인 게 마르쿠스의 여자 문제였다.
그녀는 당연히 율리아가 마르쿠스의 부인이고 다나에는 첩이라고 생각했다.
이집트의 유력자들은 당연하다는 듯 여러 명의 여자를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도 손꼽히는 권력자인 마르쿠스라면 삼처사첩 정도는 기본으로 거느리고 있을 거라 예상했고,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로마는 일부일처고 첩을 들이는 건 허용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됐다.
처음 이 말을 알았을 때 아르시노에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럼 다나에는 뭔가 싶었지만, 그녀는 조금 경우가 다르다는 대답을 들었다.
확실히 아르시노에가 보기에 다나에는 단순한 시종 관계가 아니었다.
그녀는 마르쿠스와 지나치게 가까웠다.
가끔 공공연하게 애정표현을 하는 게 눈에 보일 때도 있었다.
그래도 부인인 율리아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신경을 쓰지 않는다기보다는 오히려 여유가 넘쳐흘러 보였다.
실제로 율리아는 이집트에서 온 세 명의 공주를 한결같이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했다.
꾸며낸 친절이나 허세가 아니었다.
율리아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는 그녀의 인품과 식견에 반할 수밖에 없었다.
대화하고 있는 상대방을 포근하게 만들어주는 화술에 깊고도 방대한 지식, 거기에 감탄이 나올 정도의 통찰력까지.
아르시노에는 클레오파트라가 같은 여자에게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걸 처음 보았다.
비록 나이 차이가 난다고 해도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놀라운 광경이었다.
가끔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마치 마르쿠스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느낌마저 들었다.
어째서 마르쿠스가 그녀를 아내로 선택했는지 절로 이해가 됐다.
"율리아 님은 마르쿠스 님과 반대되는 진영의 가문이시죠? 혹시 문제가 되거나 하는 경우는 없었나요?"
"로마는 정치적인 견해가 다른 가문끼리 혼인하는 경우가 아예 없지는 않답니다. 결혼을 통해 가문의 융합을 한다기보다는 완충지대를 설정해 두는 느낌에 가깝다고 할까요?"
"아아, 그렇게 들으니 이해가 가네요."
이집트와는 너무나 다른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관습도 시간이 지나니 점점 익숙해졌다.
동시에 현재 로마의 정치 구도도 상세히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로마에 오기 전 아르시노에가 알고 있는 로마인은 마르쿠스와 폼페이우스 정도가 다였다.
카이사르의 경우 이제 막 북방에서 명성을 쌓고 있는 터라 아직 이집트까지는 그 명성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로 직접 와서 보니 이집트에서 듣던 것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갈리아에서 계속해서 들어오는 승전보에 카이사르의 인기는 끝없이 솟구치고 있었다.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는 로마가 이 정도로 규모가 큰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동시에 동방으로도 대규모 원정군을 보낼 수 있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두 사람은 새삼 로마라는 국가가 가진 저력이 얼마나 커다란지 실감할 수 있었다.
'이집트는 로마가 마음먹으면 언제라도 정벌 당할 수 있겠구나.'
이집트에서 말로만 들어서 아는 것과 직접 와서 보고 듣는 건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컸다.
아르시노에는 로마의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기만 했다.
공화정이라는 정치 체계도, 로마 시민들의 의식과 가치관도, 세계의 모든 문물과 기술을 모아 섞어놓은 듯한 도시의 풍경도.
모두가 태어나서 처음 접해보는 것들뿐이다.
마치 다시 한번 세상을 배우는 느낌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건 마르쿠스의 존재였다.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는 자신들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라는 인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로마로 올 때 다나에가 했던 말은 일종의 과장 섞인 비유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과장이나 허언을 내뱉은 게 아니었다.
두 공주는 로마의 그 어디를 가더라도 거리에 짙게 드리워진 마르쿠스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지금에서야 깨달은 건데, 로마의 거리는 알렉산드리아보다 훨씬 깨끗하지 않아?"
어느 날 가마를 타고 시내를 구경하던 아르시노에는 문득 떠오른 감상을 입에 담았다.
로마의 거리는 인구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깔끔했다.
로마의 서민들이 모여 산다는 수부라 지구를 가더라도 그건 변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는 부유층이 모여 사는 일부 구역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청소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다.
물론 그건 마르쿠스가 안찰관의 취임하기 이전의 로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의 로마는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도시가 되어 있었다.
아르시노에의 사소한 의문은 곧바로 풀렸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시민들은 물론, 가마를 지고 가는 이들조차 그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기적으로 도로를 청소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르쿠스 님이 안찰관직을 역임하시면서 로마의 거의 모든 공공시설과 관리제도를 손보셨거든요. 지금은 무엇보다 위생과 청결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몸을 깨끗하게 씻는 걸 엄청 강조하긴 했어."
지금 로마에서는 음식을 먹기 전 비누로 손을 씻는 게 거의 의무나 마찬가지였다.
크라수스 가문에서는 밖에 나갔다 올 때마다 습관적으로 비누로 손을 씻는 게 일상화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어색해했던 아르시노에도 어느 순간 익숙해졌다.
"이렇게 손과 몸에 닿는 주변을 깨끗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병에 걸리는 비율이 거의 10분의 1로 줄어들었습니다."
"지, 진짜? 고작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이 병에 잘 거리지 않게 돼?"
"예. 그리고 이걸 발견하신 분도 마르쿠스 님입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깨끗한 물을 관장하는 여신 테티스의 이름을 빌려 그분의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수많은 로마인의 목숨을 살린 영웅이십니다."
"대단해.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을까?"
마르쿠스의 업적을 줄줄이 들을 때마다 아르시노에는 혹시 로마인들이 자신을 속이려고 하는 게 아닌가 의심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클레오파트라는 정말로 확인을 해보겠다며 검증작업을 시도해본 적도 있었다.
당연히 어딜 가서 물어보더라도 돌아오는 답은 똑같았다.
호기심이 솟아오른 아르시노에는 다나에에게 부탁해 마르쿠스의 업적을 쭉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어렸을 때부터 마르쿠스의 옆에서 그를 지켜본 다나에는 기꺼이 대외적으로 알려진 사항들을 쭉 말해주었다.
단순히 입으로 말해주는 게 아니라 직접 실제적인 예시를 보여주기까지 했다.
"여기가 로마의 공중목욕탕이랍니다."
"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목욕탕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부분이 많네."
알렉산드리아의 왕궁에도 마케도니아식의 으리으리한 대형 목욕탕이 딸려 있었다.
일반 서민들이 널리 이용할 수 있는 대중적인 욕탕도 존재했다.
그러나 이렇게 시설이 좋고 청결하지는 않았다.
"원래는 이곳도 꽤 더러웠어요. 목욕 문화도 그렇게 썩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었고요. 마르쿠스 님께서 이걸 개선하시느라 여러 가지로 신경을 많이 쓰셨죠."
"역시 이것도 마르쿠스 님의 작품이었군."
"실제로 욕탕을 이용하는 시민들의 피부병 발생률이 현격히 떨어지고 만족도도 올랐어요."
다나에는 시험 삼아 욕탕을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이전 목욕탕과 비교하면 무엇이 나아졌는지 물었다.
목욕을 즐기던 시민들은 뭐 그런 당연할 걸 물어보냐는 듯 웃으며 말했다.
"달라진 점이요? 당연히 셀 수도 없이 많죠. 처음에는 왜 그런 불편한 짓을 하나 했는데 지금은 전부 이해할 수 있어요. 네? 예전으로 돌아가면 어떨 것 같냐고요? 그런 똥물에 다시 몸을 씻는다니 말도 안 되죠. 내 장담하는데 이전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적응할 수 있는 로마인은 한 명도 없습니다. 진즉 이렇게 했어야 한다니까요?"
"암요, 마르쿠스 님의 존재는 그야말로 테티스 여신님의 축복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르쿠스 님 만세! 위대한 테티스의 사도께 신의 축복이 있기를!"
어딜 가도 마르쿠스에 대한 찬양이 줄지어 나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감상한 검투사 시합장에서도 그건 변하지 않았다.
검투사 시합장은 피와 폭력만이 난무하는 야만적인 장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직접 보니 단순한 싸움이 아니라 굉장히 즐길 요소가 많았다.
어째서 로마인들이 열광하는 최고의 인기 행사인지 알 수 있었다.
"원래 검투 경기도 이런 모습이 아니었어요. 마르쿠스 님이 대대적인 개조를 하셨죠. 이것도 15년이 넘었을 거예요."
"하아···이제 진짜 뭐라고 해야 할지."
아르시노에는 현실감각이 묘하게 어긋나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로마 시내에 올라가고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건물터를 봤을 때조차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설마 이것도 마르쿠스 님의 주도 하에 지어지는 건가요?"
"예. 아무래도 기존 원형경기장으로는 시민들의 수요를 다 감당할 수 없어서요. 그동안 누적된 이익과 갈리아에서 들어온 막대한 수입 덕분에 최근에 공사에 착공했어요. 최소 5만 명 이상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지어진다고 해요."
이제 막 시작단계에 불과했지만, 공사터만 봐도 완성된 건물의 규모가 짐작이 갔다.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크라수스 가문의 저택에는 매일같이 다양한 클리엔테스들이 찾아왔다.
개중에는 마르쿠스 농법의 혜택을 본 농민들도 섞여 있었다.
그들은 최근에 급증한 생산량에 감사하며 연일 마르쿠스의 이름을 칭송하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이제 더 놀랄 것도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마르쿠스 님이 농사법도 창안하셨나요?"
"네. 모든 지역에서 다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효과가 엄청나요. 농민들의 말에 의하면 생산량이 거의 두 배로 뛰었다고 하니 저렇게 좋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죠."
"농민들의 지지가 엄청나겠네요."
"뭐···대지의 여신의 이름에 빗대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자신들을 신의 핏줄이라 여기는 이집트의 왕족들은 다나에의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아르시노에나 클레오파트라는 마르쿠스 역시 신의 자손일 거라 확신했다.
상식적으로 신의 지혜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와 같은 업적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은행업으로 로마의 금융이 대격변을 맞이했다는 말은 이제 그냥 그러려니 넘겼다.
두 공주는 외지에 왔음에도, 어쩌면 외지에서 왔기 때문에 마르쿠스가 로마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정치, 사회, 문화, 경제, 어느 한 분야라도 마르쿠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특히 적극적으로 로마의 유력귀족들과 교류를 맺고 있는 클레오파트라는 이런 점을 한층 더 또렷하게 인식했다.
그녀가 알기로 마르쿠스는 분명 귀족파의 거두였다.
당연히 귀족파의 인사들은 하나같이 마르쿠스를 칭찬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이집트에서도 이름을 들어보았던 키케로, 키프로스 병합으로 악명이 높은 카토까지 비슷한 말을 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마르쿠스는 무너진 공화정의 가치를 재건하고 원로원의 황금시대를 되찾을 인재였다.
누구보다도 귀족파의 이익을 대변해야 할 것만 같은 인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귀족파와 대립하고 있다는 민중파에서도 마르쿠스에 대한 나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로마의 왕과도 같은 존재라고 여겼던 폼페이우스는 대놓고 마르쿠스에 대한 친근감을 드러내 클레오파트라를 놀라게 했다.
민중파 출신의 유력인사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마르쿠스? 그분은 다른 귀족파와는 다릅니다. 귀족의 가치를 지키면서도 민중들의 삶이 나아지도록 애쓰고 있죠. 귀족파 모두가 그런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민중파라는 게 나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나이가 지긋한 원로들은 마르쿠스를 희망이라고 떠받들었고, 젊은이들은 그를 존경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폼페이우스처럼 요란하게 권력의 실세로 떠오른 게 아니라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조금씩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온 덕분이었다.
가랑비에 속옷이 젖는 줄 모르는 것처럼, 로마의 귀족들은 자신들이 어느새 마르쿠스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와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뭐라 말로 표현 못 할 위화감이 느껴지는 구도였다.
누구보다도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최고의 부를 가지고 있으며, 막강한 권력까지 손에 쥐고 있는 자.
왕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은 이런 존재를 뭐라고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로마에서는 절대 입 밖으로 꺼내선 안 되는 금기에 가까운 단어였다.
'그래도 이게 왕이 아니면 뭐란 말이지······?'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공주들의 눈에 비친 마르쿠스는 로마의 왕에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
로마의 귀족들은 다르게 생각할지도 몰랐지만, 적어도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두 사람이 아직 로마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져서 이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하나 있었다.
이집트와 알렉산드리아는 우물에 불과했다.
그녀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은 좁디좁은 우물에 지나지 않았다.
아르시노에는 마르쿠스를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사는 곳이 우물 속이란 걸 깨닫지도 못했다.
머리 위로 보이는 작은 하늘이 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다.
시야를 넓게 가지라는 말은 굳이 왕족이 아니더라도 누구나가 다 한 번쯤은 듣는 조언이었다.
새들도 높이 날아오를수록 더욱 먼 곳까지 볼 수 있는 법이다.
아르시노에는 자신이 아직 날갯짓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저 우물 속을 날아다니며 썩어가는 물 위를 배회했을 뿐이다.
그러던 그녀가 처음으로 우물 밖의 세상을 보았다.
하늘로 올라가 끝도 없이 펼쳐진 넓은 세상을 인식했다.
그 세상의 지배자는 마르쿠스였다.
살아있는 신은 말만 그럴싸했던 아버지나 언니가 아니었다.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헌신하고 싶은 진정한 신을 만나게 됐다.
로마라는 새로운 세계, 그 세계의 주인인 마르쿠스의 존재가 그녀의 비좁았던 하늘을 끝도 없이 확장시키고 있었다.
< 109. 로마견문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