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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동방에 감도는 전운 (111/326)

  < 110. 동방에 감도는 전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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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중해 세계의 패자인 로마는 명실상부 현재 세계 최강의 강대국이었다.

  유럽과 북아프리카 전체를 둘러봐도 로마와 맞상대할 수 있는 국력을 지닌 나라는 없었다.

  동방의 강력한 왕조도 전부 로마의 앞에 무릎 꿇었고, 아직 점령되지 않았던 갈리아마저 카이사르에게 절반 이상 제패 되었다.

  로마가 눈독을 들이지 않고 있는 지역은 게르마니아 정도였다.

  로마군이 감히 상대하지 못할 만큼 게르만 전사들이 강하기 때문인 것은 아니었다.

  게르마니아는 갈리아에 비해 숲이 너무 많았고 기후도 혹독했다.

  많은 수의 군단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정벌할 만한 가치가 있는 땅이 아니었다.

  즉, 게르마니아를 제외하면 로마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는 사실상 대부분 그들의 손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부가 아닌 대부분인 이유는 아직 로마의 패권이 미치지 못하는 나라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동방의 대국 파르티아였다.

  아직 건국된 지 200년도 채 되지 않은 파르티아는 무섭도록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처음에 파르티아의 영토는 카스피 해 남동쪽, 현대로 치면 이란의 북부와 투르크메니스탄 남부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영역에 불과했다.

  심지어 파르티아의 옆에는 셀레우코스 왕조라는 쟁쟁한 경쟁상대도 있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왕조는 신흥국인 파르티아보다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견제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파르티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섭게 세력을 불려나갔다.

  물론 셀레우코스 왕조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안티오코스 3세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파르티아를 공격해 신흥국의 성장세를 한 번 꺾어놓기는 했다.

  그러나 서역의 패자 로마가 지중해를 건너 동방으로 오자 모든 상황이 급변했다.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에게 대패한 셀레우코스 왕조가 동방을 다스릴 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결국 파르티아는 지속해서 군사를 일으켜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완전히 병합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는 시리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영토를 파르티아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크테시폰을 수도로 삼은 파르티아는 이제 과거 페르시아의 영광을 재현하는 대국이 되어 있었다.

  실제로 파르티아는 스스로를 페르시아 문명의 후계자라 자처하며 자신들의 왕을 왕중왕, 샤한샤라고 칭했다.

  왕과 귀족들은 동방을 통해 쏟아지는 초월적인 부를 독점하고 끊임없이 힘을 키웠다.

  그러나 이렇게 소수에게 집중된 권력과 힘은 반드시 내분의 씨앗을 잉태하게 된다.

  파르티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서쪽의 아르메니아와 동쪽의 월지국의 위협이 줄어들자마자, 왕권을 둘러싼 다툼이 거의 연례행사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혼란은 10년 이상 나라를 통치했던 프라아테스 3세가 두 아들의 손에 암살당한 뒤 극에 달했다.

  아버지를 살해한 두 아들은 처음에는 사이좋게 영토를 나눌 생각이었다.

  미트리다테스 3세는 메디아를, 오로데스 2세는 파르티아 왕국을 지배하기로 협의를 맺었다.

  그러나 권력을 얻기 위해 아버지를 암살한 형제가 계속해서 협력할 리가 없다.

  "오로데스는 권력에 눈이 멀어 아버지를 살해한 패륜의 군주다! 그는 파르티아를 다스릴 자격이 없다!"

  "선왕을 살해한 진범은 미트리다테스다! 아버지를 살해한 패륜을 형제에게 뒤집어씌우는 극악무도한 자에게서 메디아를 해방시키겠다!"

  양쪽은 서로를 반역자라 규정짓고 내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의외로 승부의 추는 파르티아의 왕인 오로데스 쪽으로 금방 기울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미트리다테스 3세의 잔인한 성격 탓이다.

  메디아의 백성들은 포악한 군주인 미트리다테스를 위해 목숨 걸고 전쟁을 수행할 마음이 없었다.

  두 번째는 능력 있는 지휘관의 차이였다.

  오로데스 측의 군대를 지휘하는 이는 수레나스라는 청년 귀족이었다.

  그는 왕의 바로 다음가는 지위를 가진 강성한 귀족출신으로 뛰어난 지성과 지휘력을 겸비한 명장이었다.

  미트리다테스 3세는 이 젊은 천재장군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무리 명망 높은 귀족이라고 해도 아직 서른 정도밖에 되지 않은 풋내기가 아니던가.

  미트리다테스는 자신있게 군대를 이끌고 수레나스와 회전을 벌였다.

  그리고 당연히 상대의 역량을 무시한 대가는 처절한 패배로 되돌아왔다.

  "멋진 광경이로군."

  콧수염을 가지런하게 다듬은 젊은 장수가 적군의 시체가 즐비한 사막을 둘러보며 한마디 감상을 남겼다.

  그의 뒤편에 서있던 수하가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장군님의 지휘가 불러온 위대한 승리입니다. 적들은 이제 반항할 기력이 거의 넘지 않았을 겁니다."

  "아군의 피해는 집계됐나?"

  "예. 중기병의 피해가 서른둘, 궁기병의 피해가 백팔십육, 보병의 피해가 칠백하고 이십입니다."

  "천명이 채 안 되는군. 만족스러운 전과야."

  미트리다테스의 군세를 전멸에 가깝게 몰아넣은 수레나스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전장을 뒤로했다.

  파르티아의 군사편제는 기본적으로 기병이 주류였다.

  철갑기병이라고 불리는 소수의 중무장 기병들과 다수의 궁기병들이 파르티아군의 주력이었다.

  주로 가난한 백성들로 구성된 보병은 기병에 비해 중요도가 굉장히 낮게 인식됐다.

  이렇게 기병이 주류인 덕분에 파르티아군은 어지간해서는 한 번의 패배로 전멸당하지 않았다.

  보병들과는 다르게 기병은 전황이 불리하다 싶으면 말머리를 돌려 퇴각하는 게 용이한 까닭이다.

  그러나 수레나스는 미트리다테스의 군세를 이 한 번의 전투로 끝장내다시피 했다.

  그가 사용한 전술은 간단하면서도 비정한 방식이었다.

  소수의 보병들을 미끼로 던져 미트리다테스의 기병들을 유인한 뒤, 자신의 기병으로 포위 공격을 해 도망갈 틈을 주지 않고 섬멸한 것이다.

  그럼에도 보병의 피해가 칠백 정도밖에 나오지 않은 이유는 애초에 파르티아 군에 보병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하들은 누구도 아군을 희생양으로 삼은 수레나스에게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파르티아에서 천시되는 보병을 제물로 상대의 기병 전력을 궤멸시켰다면 이 이상 성공적인 교환은 없었던 까닭이다.

  자신의 막사로 돌아온 수레나스는 갑옷을 벗고 느긋하게 침상에 기대앉았다.

  "술."

  그가 짧게 한마디를 하자 대기하고 있던 미녀가 술잔을 가져왔다.

  단숨에 잔을 비운 수레나스가 손짓을 하자 과일 바구니를 든 여인들이 다가왔다.

  수레나스는 시중을 드는 여인들의 손길을 즐기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수레나스의 수하들은 이런 여유로운 모습이 익숙한지 태연하게 보고를 계속했다.

  "정보를 준 로마 상인이 앞으로도 설탕과 비단의 거래를 계속하자고 요청을 보내왔습니다. 뭐라고 답신할까요?"

  "그자들의 정보 덕분에 미트리다테스의 군대를 한층 더 쉽게 박살낼 수 있었으니 마땅한 포상을 내려야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전해라."

  "예."

  "한데 신기하단 말이지. 상인들이 미트리다테스의 군배치를 어떻게 그리 상세히 알고 있었을까."

  수레나스가 보병을 미끼로 한 포위망을 완벽히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상대방의 움직임을 완벽히 예측하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평소 파르티아와 교역을 하고 있던 로마 상인들이 가져온 정보가 큰 도움이 되었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너무 유리한 정보라 이를 믿지 않았다.

  이게 함정이라고 판단한 수레나스는 정보가 틀려도 피해를 보지 않도록 이중삼중의 계략을 짜고 전투에 임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로마 상인들의 정보는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그 덕에 꽤 오래 끌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내전이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미트리다테스는 이제 도망칠 구석도 마땅치 않았다.

  수레나스는 미트리다테스가 틀어박힌 엑바타나를 포위하고 승리의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아니나 다를까 조급해진 미트리다테스는 사절을 보내 항복의 뜻을 밝혔다.

  사절이 밝힌 조건을 들은 수레나스는 코웃음을 쳤다.

  "항복하고 샤한샤의 왕권을 인정할 테니 목숨은 살려 달라? 아직도 상황파악을 다 못했군."

  그는 시중을 드는 여인들을 좌우에 끼고 조소를 흘렸다.

  "가서 미트리다테스에게 전해라. 미트리다테스와 그 아들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거라고. 단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여인들의 안전은 보장해주겠다."

  수레나스의 의도는 명백했다.

  선왕의 핏줄을 이어받은 남자는 언제라도 분쟁의 싹이 될 수 있었다.

  내전의 열쇠가 될 만한 싹은 사전에 뽑아놔야 한다.

  어차피 그가 모시는 오로데스의 성격을 고려하면 미트리다테스가 그 어디로 도망가더라도 암살을 면치는 못할 것이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사절을 쫓아낸 수레나스는 느긋하게 다시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안락한 휴식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대승을 거둔 뒤의 승리감도 절반으로 줄어버렸다.

  수하가 급하게 가져온 편지 탓이었다.

  "샤한샤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장군께서는 속히 크테시폰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입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미트리다테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텐데 군을 물리라고?"

  "그건 아닙니다. 군대는 그대로 엑바타나를 포위하고 장군께서만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장군께서 거둔 위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연회를 베푸신다고 합니다. 군대의 지휘는 미흐란 님께서 이어받으실 예정입니다."

  "후···전쟁을 다 마무리 지어놓았더니 마무리는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이만 돌아오라? 알았다. 물러가 봐라."

  오로데스의 서신을 가져온 부하가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 물러갔다.

  주변에 늘어선 수레나스의 심복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왕의 명령이 의미하는 바는 어린아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전쟁의 마무리를 다른 귀족에게 맡겨 수레나스가 세운 공을 퇴색시키려 하는 것이다.

  왕의 바로 다음 가는 권위를 지닌 수레나스가 이 이상 명성을 쌓는 걸 두고 보지 않겠다는 뜻이 확실히 전해졌다.

  "이건 너무한 것 아닙니까? 최소 몇 년은 끌릴 내전을 이토록 빠르게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게 대체 누구 덕분인데······."

  "맞습니다. 아무리 샤한샤께서 명을 내리셨다고 해도 곧바로 응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미트리다테스를 사로잡아 처형하고, 그 다음 크테시폰으로 귀환하시죠."

  파르티아는 기본적으로 지방 영주들의 힘이 굉장히 강력했다.

  군대를 편성할 때도 각지의 영주들이 군대를 모으고 왕이나 최고 유력 귀족이 지휘권을 가지는 식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자연스레 왕의 힘은 귀족들을 압도하지 못했다.

  수레나스와 같이 왕 바로 다음의 권력을 지닌 대귀족은 영향력이 왕에게 그리 밀리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로데스로서는 아직 젊은데다가 권력과 명예, 군사력을 모두 갖춘 수레나스를 견제할 수밖에 없었다.

  수레나스는 이런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가 왕좌를 노리는 마음이 있었다면 파르티아의 정세는 혼돈 속으로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레나스는 왕권에 대한 야망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 나름대로 파르티아의 미래를 위하는 충심을 지닌 이였다.

  이 이상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분개하는 부하들을 진정시킨 수레나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샤한샤께서 직접 부르셨으니 당장 가봐야지. 여기서 내가 명령을 어겨도 괜한 경계감만 더 심어줄 뿐이다. 언젠가는 샤한샤께서도 내가 당신의 자리를 위협할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시겠지."

  "지금까지 장군님의 행적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어야 한다고 봅니다."

  "하하, 너무 그렇게 분해하지 마라. 어쩌면 미트리다테스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상대가 곧 이빨을 드러낼지도 모르니까. 그때가 오면 전공쯤이야 실컷 세울 수 있을 거다. 우리가 잡아먹히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예?"

  수레나스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부하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대답대신 파르티아의 주변국이 표시된 지도를 펼쳤다.

  부하 한 명이 지도 위의 한 점을 가리키며 물었다.

  "설마 아르메니아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겁니까?"

  "설마. 놈들은 이미 노쇠한 호랑이다.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른다면 밟아주면 그뿐이야.

  "그럼 설마 동방의 월지가 또다시······."

  "놈들은 이전에 쫓겨난 뒤로는 이쪽을 넘보지 않고 있다. 그때 입은 피해를 아직도 다 회복 못한 거겠지. 우리가 대비해야 할 적은 바로 이곳에서 올 거다."

  수레나스는 부하가 짚은 곳보다 더욱 더 서쪽에 있는 지역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그의 검지에 가려진 지형은 지중해 저 건너편에 위치한 반도였다.

  "거, 거긴 설마······!"

  "정말로 그곳과 전쟁을 하는 겁니까?"

  수하들이 눈을 크게 치켜떴다. 수많은 전쟁을 치른 수하들조차 불안감을 숨기지 못했다.

  수레나스가 가리킨 지역은 이탈리아반도에 위치한 로마였다.

  현재 서방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는 초강대국이었다.

  물론 파르티아는 동방의 제국들과도 교류를 맺고 있었기에 로마라는 이름에 필요 이상으로 위축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로마가 가지고 있는 가공한 힘만큼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폰투스, 아르메니아, 셀레우코스 왕조.

  전부 파르티아 입장에서는 만만히 볼 수 없었던 국가들이다.

  이들이 모두 로마의 앞에서는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

  동쪽에 위치한 덕분에 로마와 대립하지 않아도 됐던 파르티아는 이 모든 과정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하, 하지만 장군님. 로마가 정말로 쳐들어올 생각이었다면 우리가 내전을 벌이는 동안 쳐들어오지 않았을까요?"

  "그렇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저력을 분산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쳐들어오기는커녕 아르메니아를 부추겨 우리를 견제하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수하들의 의견은 일견 타당해보였다. 적국이 내환을 앓고 있을 때야말로 쳐들어가기 가장 좋은 적기라는 건 병법의 기본이다.

  로마가 정말로 파르티아를 침공할 계획이 있었다면 이미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셈이다.

  그럼에도 수레나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단순히 자신의 직관과 상식만을 믿는 남자가 아니었다.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정상이겠지. 하지만 내가 보낸 상인들이 로마에서 가져온 소식은 조금 다르더군. 로마의 삼대 실력자 중 한 명인 크라수스가 내년에 대군을 이끌고 이쪽으로 건너올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폼페이우스가 오지 않는 건 불행 중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로마군은 로마군이다. 절대로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야."

  "하, 하지만 로마는 원래 유력자들을 속주의 총독으로 보내지 않습니까. 단순히 총독이 군대를 이끌고 온다고 전쟁을 염두에 두는 거라고 단정 짓기는 이르지 않을까요? 오히려 이쪽에서 요란한 움직임을 보이면 로마를 자극하는 모양새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네 말이 옳다. 하지만 대비를 해둬서 나쁠 건 없어. 만약 로마가 전쟁을 할 마음이 없어 보이면 그때는 우리도 경계를 늦추면 될 일이다. 안 그래도 샤한샤께 진언을 드리려 했는데 마침 잘 됐어. 크테시폰으로 돌아가는 즉시 대응책을 의논해봐야겠다."

  언뜻 보면 여인을 밝히고 가벼워 보이기도 하는 수레나스였으나  그건 지극히 표면적인 모습에 불과했다.

  그의 냉철한 이성은 눈앞의 작은 전공에 연연하지 않았다.

  미트리다테스 따위는 현재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눈은 오롯이 지중해 너머에서 세계를 호령하는 최강대국. 로마의 원로원을 향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에 비하면 군사적인 업적은 미천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의 장남이 최근 무서운 속도로 전공을 쌓고 있다는 보고도 있었어. 방심은 금물이다.'

  수레나스는 필요 이상으로 적을 과대평가하지도, 과소평가하지도 않았다.

  그저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대처할 수 있게 최선의 준비를 다할 뿐이다.

  "지금 즉시 크테시폰으로 돌아가겠다. 귀환할 준비를 하도록."

  "명을 따르겠습니다."

  수하들이 부산스레 움직였다.

  수도까지 대동할 소수의 심복들만을 대동한 수레나스는 말 위에 올랐다.

  파르티아가 자랑하는 최고의 명장은 그렇게 다가오는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다.

  ※※※※

  수레나스는 자리를 비우면서도 미트리다테스와 그의 아들의 시신을 반드시 확보하라는 명을 내렸다.

  엑바타나에서는 거의 매일같이 피난하는 사람들이 쏟아졌지만, 수레나스의 부하들은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레나스의 부하들도 한 가지 놓친 게 있었다.

  바로 미트리다테스와 교역을 하는 로마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아들만이라도 빼돌려주겠다고 미트리다테스를 설득했다.

  독 안에 든 쥐인 미트리다테스는 로마 상인들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랫동안 서로 교역을 한 사이니 최소한의 신뢰도 있었다.

  그는 파르티아의 왕족임을 상징하는 모든 물건을 아들에게 맡겼다.

  로마 상인들은 그 물건들은 설탕이 가득 든 자루에 숨겼다.

  그리고 아직 어린 미트리다테스의 아들은 여장을 시킨 뒤 몸종처럼 꾸며 감시망을 통과했다.

  수레나스가 크테시폰에 당도했을 때, 미트리다테스의 아들과 로마 상인들은 무사히 파르티아의 영역을 벗어난 뒤였다.

  그들은 곧장 로마의 영향력이 미치는 시리아로 남하했다.

  이 상세한 과정이 담긴 보고서는 그대로 로마에 있는 크라수스 가문에 전해졌다.

  다나에는 이걸 아르시노에와 카드를 하고 있는 마르쿠스에게 즉각 가져다주었다.

  "마르쿠스 님, 안티오키아에서 급히 보고드릴 사항이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지금 바로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아, 그래? 그럼 아쉽지만 이 판은 여기서 접어야겠네."

  마르쿠스가 짐짓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르시노에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뭐라고요? 하던 건 마저 해야지 무슨 소리에요! 내가 다 이긴 판인데!"

  "아, 죄송하게 됐습니다. 안티오키아에서 온 거라면 굉장히 급한 연락일 거라서."

  "정말로 오랜만에 필요한 패가 착착 뽑힌 판인데!"

  마르쿠스는 분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아르시노에를 내버려두고 양피지 두루마리를 쭉 펼쳤다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마르쿠스의 눈빛이 점점 진중해졌다.

  차가운 한기마저 감도는 시선에 아르시노에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카드를 정리했다.

  그녀도 지금 놀고 있을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느낀 것이다.

  가볍게 눈가를 어루만진 그가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전부 계획대로라고 외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게 잘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긴장감과 흥분이 가슴속을 가득 메웠다.

  마르쿠스가 아르시노에를 돌아보며 사과의 말을 건넸다.

  "죄송하지만 당분간은 함께 놀아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괜찮아요. 일이 생기신 거죠? 저도 언니도 마르쿠스 님이 얼마나 바쁘신지 아니까 철없는 아이처럼 불평하진 않을 거예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준 뒤, 다나에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 즉시 아버지에게 가서 전해줘. 집정관의 권한으로 원로원 회의를 소집하시라고."

  < 110. 동방에 감도는 전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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