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동방원정 사령관 >
112.
원로원의 허가가 떨어지자 본격적으로 군단이 편성되기 시작했다.
이집트에서 돌아온 3개 군단 중 2개 군단이 먼저 시리아로 떠났다.
마르쿠스의 사병이나 다름없는 12군단은 다른 2개 군단과는 별도로 비티니아로 향했다.
새로운 장비의 실험과 무기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훈련을 받을 필요가 있어서였다.
그런 뒤 이탈리아반도 중부와 남부에서 동방원정에 합류할 군단병을 대규모로 모집했다.
이미 편성된 3개 군단을 제외해도 9개 군단이라는 대병력을 속주에서만 편성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의외로 지원자들은 금방 모였다.
갈리아에서 연일 들려오는 승전보가 로마 남성들의 혈기를 한계치까지 끌어올린 덕분이었다.
지금 이탈리아 전역은 자신의 용맹함을 증명하고 영광을 잡고 싶은 남성들로 가득했다.
게다가 동방원정은 갈리아처럼 단순히 무훈만을 쌓을 수 있는 장소로 여겨지지 않았다.
두둑한 퇴직금과 함께 한몫을 챙길 수 있는 기회로 인식되고 있었다.
로마인들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폼페이우스의 개선식이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었던 까닭이다.
황금과 은, 보석, 각종 예술품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쭉 늘어서 있던 장관은 그리 쉽게 잊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심지어 폼페이우스의 군단병들은 퇴직금과 함께 국유지까지 우선 임차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
그때 아직 어렸던 소년들은 자신이 군대에 지원할 수 없는 나이라는 걸 분하게 여겼다.
동방원정에 참가하지 않았던 젊은이들은 다시 한번 기회가 온다면 절대 놓치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이런 분위기 덕분에 예상보다 더 빠르게 군단 편성이 완료됐다.
크라수스는 속주 총독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새롭게 편성된 5개 군단을 이끌고 한발 먼저 시리아로 건너갔다.
마르쿠스는 상황을 완전히 정리한 뒤에 시리아로 넘어갈 예정이었다.
또다시 장기간 집을 비워야 한다는 말을 들은 가족들은 아쉬움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최소 5년 동안은 동방 속주에 머물러 계셔야 한다는 거죠?"
"응. 아마 그럴 거야."
"아이들이 많이 서운해하겠네요. 특히 소피아는 요새 당신 옆에서 떠나려고 하지를 않던데."
율리아는 마르쿠스의 손을 잡고 잠시 동안 가만히 있었다.
사실 가장 실망한 사람은 아이들이 아니라 율리아인 것처럼 보였다.
마르쿠스도 그녀의 심정은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해적소탕과 동방원정에 참가해 몇 년을 떨어져 있었다.
돌아온 뒤에도 몇 년 함께 있나 싶더니 그대로 갈리아에 가 2년이 넘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동방에 가 최소 5년 동안은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쿠스도 자신이 별로 칭찬받을 남편이 아니라는 자각은 있었다.
이제 한창 커가고 있는 쌍둥이들에게도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자식들의 성장을 눈으로 바로바로 볼 수 없다는 아쉬움도 컸다.
다나에는 속으로만 앓는 율리아를 대신해 안타까운 마음을 대놓고 드러냈다.
"솔직히 5년은 너무 길어요. 최소 5년이라면 그보다 더 길어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마르쿠스 님이 돌아오시면 도련님이랑 아가씨가 거의 10살이 넘어갈 수도 있다는 건데······."
"그래서 나도 생각을 좀 해봤어. 아버지도, 나도 집을 너무 길게 비우니까 가족들이 불안해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해. 그러니까 아예 가문 전체가 안티오키아로 와서 지내는 게 어떨까?"
"그래도 되나요?"
"저희가 따라가면 방해만 되지 않나요?"
수심이 가득했던 율리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다나에도 두 눈을 빛내며 반문했다.
생각보다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자 마르쿠스는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안티오키아는 알렉산드리아에 맞먹는 동방 최고의 대도시야. 총독 관저도 있는 곳이니 생활하기 불편함은 없을 거고, 로마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자주 만날 수 있을 테니 나한테도 좋지."
"그럼 그렇게 하죠. 아이들의 교육은 가정교사와 제가 책임지면 되니까요."
율리아는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결정을 내렸다.
사실 마르쿠스가 없는 로마는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좋은 대화 상대였던 카이사르도 갈리아에 간 뒤로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비단옷의 홍보도 워낙 성공적으로 끝난지라 이제 그녀가 나서지 않아도 충분했다.
지금 와서 율리아가 하는 일이라고 해봐야 어수룩한 귀부인들과 어울려주며 그녀들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주는 게 다였다.
계속 이렇게 시간을 보낼 거라면 차라리 동방에서 심신을 새롭게 추스르는 게 몇 배는 더 건설적일 것 같았다.
아이들의 교육이야 안티오키아에서도 똑같이 할 수 있으니 굳이 로마에 남아 있을 이유도 없었다.
율리아가 마르쿠스와 함께 간다는 것은 곧 크라수스 가문 전체가 움직인다는 뜻이기도 했다.
옆에서 부부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아르시노에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저도 안티오키아에 갈래요!"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닙니까? 공주님께서 원하신다면 로마에서 불편함 없이 머무실 수 있도록 편의를 봐 드릴 수 있습니다."
"로마는 이미 충분히 구경했으니까 안티오키아에도 가보고 싶어요. 라틴어나 로마의 문화는 율리아 님에게 배우는 게 가장 효과가 좋으니 굳이 로마에 머무는 걸 고집할 필요가 없죠."
아르시노에는 로마에 온 목적의 9할 이상이 마르쿠스였으니 그를 따라가려는 게 당연했다.
클레오파트라 역시 주변의 모두가 안티오키아로 가버린다고 하니 적잖게 고민이 됐다.
로마에 온 목적을 고려하면 이곳에 남아 여러 귀족들과 교류를 맺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안티오키아로 함께 가고 싶은 마음도 상당히 컸다.
클레오파트라의 얼굴에 떠오른 망설임을 알아본 마르쿠스가 부드럽게 그녀를 달랬다.
"무조건 저희와 함께 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베레니케야 저에게 딸린 볼모이니 안티오키아로 데려가겠지만, 공주님들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로마에 계속 머무시겠다면 제가 없어도 키케로 님께서 후견인 역할을 해주실 겁니다."
"···역시 저도 가야겠어요."
내심 그녀가 로마에 남을 거라고 보고 있었던 마르쿠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여러 방면으로 생각해보고 내린 결정입니다. 저도 당분간은 안티오키아에서 머물며 공부를 하겠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도 모르게 안티오키아에 가야 하는 이유를 몇 가지 떠올리며 자신의 결정을 합리화했다.
우선 그녀는 아직 너무 어렸다. 고작 13살의 소녀가 혼자 무언가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로마의 정계는 만만하지 않았다.
조금 더 관록이 쌓일 때까지는 여유를 가지고 자기발전에 힘쓰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안티오키아라는 장소도 그녀의 흥미를 끌었다.
시리아는 키프로스를 제외하면 가장 최근에 로마의 영토로 편입된 속주였다.
속주 체제는 로마가 자신들의 패권을 행사하는 가장 핵심적인 수단 중 하나다.
로마라는 국가를 통찰하기 위해서는 로마가 실제로 어떻게 속주를 경영하고 있는지 볼 필요가 있었다.
결정적으로 안티오키아는 옛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이기도 한 도시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말로는 클레오파트라에게 다양한 감상을 품게 했다.
그녀는 옛 숙적의 영락한 수도를 직접 눈에 새겨두고 앞으로 이집트를 어떻게 이끌어가야 할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모두의 의견이 통일되자 마르쿠스는 마음 놓고 이후의 일을 구상할 수 있게 됐다.
사실 식솔들을 전부 동방 속주로 오게 한 건 파르티아 원정이 끝난 뒤의 일을 고려해서였다.
이미 동생 푸블리우스가 터를 닦아놨으니 생활에 불편함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안티오키아는 알렉산드리아와 마찬가지로 그리스 문화가 주류인 곳이라 로마인들이 적응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건 폼페이우스와 최종조율을 하는 것 정도인가. 내일이나 모레쯤 시간을 내서 한 번 가봐야겠군.'
마르쿠스가 다나에에게 폼페이우스에게 작성할 서신을 부탁하려고 했을 때였다.
방 안으로 들어온 스파르타쿠스가 예상치 못한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마르쿠스 님,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님께서 오셨습니다."
"뭐? 어째서?"
"마르쿠스 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시간이 여의치 않다면 내일 다시 오겠다고 하시더군요."
"괜찮으니까 응접실로 안내해드려. 다나에는 최고로 좋은 포도주와 안줏거리를 준비하라고 하인들에게 말해줘."
스파르쿠스와 다나에가 동시에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
마르쿠스는 폼페이우스도 양반은 못 된다고 속으로 웃으며 응접실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파르타쿠스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폼페이우스가 호탕하게 웃어젖히며 다가왔다.
"여어, 동방원정군의 실질적인 사령관! 떠나기 전에 이렇게 볼 수 있어서 참으로 반갑군."
"안 그래도 제가 내일쯤 찾아뵐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먼저 발걸음을 해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하, 당연히 와야지. 드디어 자네가 군단의 총지휘를 맡게 됐는데 말이야.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언젠가는 이런 시기가 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네. 다만 첫 상대가 파르티아라 난이도가 조금 높은 느낌이지만."
"그래도 폼페이우스 님에게 받은 가르침을 전부 활용하면 이기지 못할 적은 아니라고 봅니다. 강력하긴 해도 파고들 약점이 꽤나 많은 국가니까요."
폼페이우스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싸우기 전에 이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두는 게 폼페이우스가 지닌 전쟁관의 핵심이었다.
자신의 가르침을 마르쿠스가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절로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상대방의 약점을 찌르는 건 물론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 하지만 상대방을 공략할 생각으로만 머리가 꽉 찬 지휘관은 종종 아군의 약점을 간과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점도 잊지 말게. 자신이 떠올릴 수 있는 발상은 적의 머리에서도 나올 수 있다는 걸 두 번 세 번 명심하도록 하게. 특히 파르티아군을 이끄는 장수가 수레나스라면 절대로 긴장을 늦춰서는 아니 되네."
마르쿠스는 은근히 놀랐다.
수레나스에 관해서라면 당연히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로마 공화정 최악의 패배 중 하나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카르헤 전투를 이끈 장본인이 바로 그였던 까닭이다.
크라수스와 푸블리우스는 역사대로라면 수레나스에게 패배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마르쿠스는 적장을 경계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가 적의 장수를 이렇게 높이 평가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수레나스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자세한 신상정보는 모르네. 하지만 최근에 파르티아의 왕위를 둘러싼 내전에서 그가 어떤 전술을 취했는지 대강 들을 기회가 있었네. 자세한 이야기가 기술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대강 짐작이 가더군. 그는 아마 나와 비슷한 철학을 가진 인물일 걸세. 철저하게 상대방의 약점을 파고든 뒤, 확신이 들 때 승부를 결정짓는 전투를 벌이는 유형의 장수란 말이네. 그러니 군대를 이끌 때는 우선 아군의 취약한 점과 불안 요소를 차단하는 데 주력하도록 하게."
마르쿠스는 폼페이우스의 진심 어린 조언을 선뜻 받아들였다.
"불안 요소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뭐가 있을까요?"
"회의에서도 잠깐 이야기가 나왔지만, 지형적인 불리함과 보급로의 문제를 들 수 있겠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행군하는 병사들의 체력이 고갈되는 속도가 일반적인 행군보다 훨씬 빠르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하네. 거기에 식량만이 아니라 식수의 보급도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것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주변국들과의 관계와 자네가 정복하고자 하는 지역의 특성을 심도 있게 고려해야 할 거야. 전투에만 매몰된다면 자네 역시 루쿨루스와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도 있네. 이 점을 절대 잊지 말도록.
"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충고 감사드립니다. 폼페이우스 님의 밑에서 경험을 쌓은 막료 출신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그래. 나중에 만약 개선식을 하게 되면 연설에서 내 이름을 짤막하게라도 언급해주게. 그 정도만 해줘도 나로서는 대만족일 것 같군."
"당연히 그래야지요. 애초에 제가 동방원정을 계획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폼페이우스 님께서 동방 속주를 평정하신 덕분이니까요. 제가 위대한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그건 결국 폼페이우스 님이 닦아놓으신 기반 위에서 일군 영광입니다. 이 사실을 모를 로마인들은 아마 없을 겁니다."
절반은 폼페이우스를 띄워 주기 위한 아부였으나, 나머지 절반은 진심이 섞인 말이기도 했다.
마음에 쏙 드는 대답에 크게 고무된 폼페이우스는 눈앞에 있는 포도주잔을 기분 좋게 비웠다.
적당히 술이 들어가자 폼페이우스는 마음 한구석에 걸렸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나저나 자네는 물론 크라수스까지 떠나면 나 혼자서 로마 정계를 책임져야 하는데······."
전쟁에 관한 일이라면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지만, 정치 쪽은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았다.
전쟁과 정치 양쪽을 완벽히 아우르는 카이사르의 수완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폼페이우스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던 마르쿠스는 차분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만약 원로원이 또다시 도발을 하거나 이쪽을 누르려고 강경하게 나온다면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나? 지금까지는 크라수스와 적절히 호흡을 맞추거나 자네가 조언을 해주었지만, 이제 그럴 수도 없지 않나. 그나마 가까이 있는 카이사르에게 서신을 보내도 답변을 받으려면 몇 달은 족히 걸릴 텐데."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원로원은 당분간은 현상 유지를 목표로 침묵을 지킬 테니까요."
"호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일단 제가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는 건의를 하고 떠날 겁니다. 그리고 굳이 제 말이 아니더라도 귀족파 의원들이 굳이 민중파를 자극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랬다가 만약 제가 파르티아에 참패를 당하기라도 하면 엄청난 역풍이 불 테니까요. 제가 승전보를 가지고 오면 그때서야 행동을 개시할 겁니다."
폼페이우스는 눈에 띄게 안도하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럼 나도 귀족파처럼 적당히 현상 유지만을 목표로 하면 되는 건가?"
"예. 폼페이우스 님께서 마음만 먹으시면 그 정도쯤이야 간단할 거라고 믿습니다. 사실 귀족파도 아버지와 제가 없는데 감히 폼페이우스 님을 건드릴 마음은 품지 못할 겁니다."
"그건 그래. 노쇠한 늙은 너구리들 따위가 내게 이빨을 들이밀 배짱이 있을 리가 없겠지. 좋아, 자네가 동방에서 성과를 거둘 때까지는 내가 로마의 안정을 책임지고 있겠네. 마음 푹 놓고 있게나."
"예. 아무런 걱정 없이 다녀오겠습니다."
마르쿠스가 희미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그의 말대로 동방의 판도가 확정되기 전까지 로마는 폭풍전야의 고요 속에 잠길 것이다.
물론 그 뒤에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혼돈의 폭풍이 로마를 휩쓸겠지만, 지금은 먼 미래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폼페이우스도, 귀족파의 키케로와 카토도, 심지어 갈리아에 있는 카이사르조차 5년 뒤의 로마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현재 불확실한 미래의 모습을 어렴풋하게 그려나갈 수 있는 사람은 아직까지는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
로마에서 처리해야 할 모든 일을 끝마친 마르쿠스는 식솔들을 이끌고 시리아로 건너날 채비를 끝마쳤다.
가문 전체가 움직이는 대이동이라 엄청난 행렬이 이어졌다.
원로원에서는 붙여준 호위들까지 더해지자 배 한 척으로는 짐을 다 실어 나를 수 없을 정도가 됐다.
키케로와 카토를 비롯한 귀족파의 수많은 의원들이 로마의 성문 밖까지 따라와 마르쿠스를 배웅했다.
친분이 두터워서라기보다는 그만큼 마르쿠스가 공을 세워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자네에게 우리 귀족파의 명운이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세. 카이사르의 기세는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정도를 아득히 넘어섰네. 그가 브리타니아 원정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은 자네도 들어서 알고 있겠지? 만약 브리타니아 원정마저 성공으로 끝난다면 대체 누가 그를 막을 수 있겠나. 그러니 자네가 힘을 내줘야 하네."
키케로가 침울한 표정으로 마르쿠스의 손을 꽉 잡으며 격려의 말을 건넸다.
카토도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키케로의 말을 받았다.
"키케로의 말대로일세. 카이사르를 멈출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원로원 내에는 자네밖에 없어. 자네의 패배는 곧 원로원의 패배로 이어질 거라는 점을 명심하게. 자네는 절대 져서는 안 돼. 명심하게. 자네의 어깨 위에 원로원의 미래가 걸려 있음을. 혹시라도 질 것 같으면 그냥 군대를 물려도 상관없네. 그럴 때는 그냥 국지적인 승리라고 포장하면 그뿐이니까. 부디 자네에게 위대한 군신 마르스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기원하겠네."
누구보다도 마르쿠스의 성공을 기원하는 귀족파의 모습은 한 편의 희극처럼 역설적인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마르쿠스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키케로와 카토를 안심시켜 주었다.
"걱정 마십시오. 반드시 여러분들이 흡족해할 만한 보고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마음 편히 가지시고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없는 동안 로마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맡겨두게. 카이사르의 입김이 닿지 않는 폼페이우스는 정치적으로는 그리 위협적인 상대가 아니니까."
크라수스 가문은 원로원의 성대한 응원을 받으며 마침내 시리아로 떠났다.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마르쿠스는 가장 먼저 가족들이 살 저택을 둘러보았다.
시리아에 먼저 자리를 잡은 푸블리우스와 한발 먼저 도착한 크라수스가 이미 총독 관저 인근에 대저택을 마련해두었다.
가문의 식솔들은 물론 이집트의 세 공주가 지내기에도 전혀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호화로웠다.
가족들의 주거 문제가 해결됐으니 다음은 본격적으로 파르티아에 관한 문제를 다룰 차례였다.
안 그래도 마르쿠스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미트리다테스 3세의 장남, 사나트루케스 2세가 급히 면담을 요청한 상태였다.
마르쿠스는 기꺼이 사나트루케스 2세와 대담을 나누기로 했다.
총독인 크라수스는 현지에서 2개 군단을 추가로 편성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실질적인 총독 업무는 마르쿠스가 대행하고 있었다.
그는 총독의 집무실에서 사나트루케스 2세를 맞이했다.
마중을 나간다거나 필요 이상으로 상대방을 띄워 주는 일은 하지 않았다.
사나트루케스는 아직 14살에 불과했으나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허례허식을 부리지 않은 어린 왕자는 마르쿠스를 대면하자마자 자존심을 버리고 간곡히 부탁을 건넸다.
"우리 가문은 로마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가 누려야 할 마땅한 권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총독께서 힘을 빌려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마르쿠스는 사나트루케스를 이용하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지만,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상대방을 떠보기 위해 일부러 부정적인 태도를 가장했다.
"흐음···정당한 권리라고 해도 왕자님의 부친께서는 내전에서 패하지 않으셨습니까. 파르티아의 귀족들은 대부분 현왕을 지지할 것 같은데요."
"파르티아의 귀족들은 오로데스가 승리했기 때문에 그의 편을 드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파르티아의 옥좌에 앉는다면 언제라도 태도를 뒤바꿔 저를 지지할 것입니다. 로마의 입장에서도 오로데스보다는 기반이 전무한 저를 왕으로 세우는 게 더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파르티아에 쉽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테니까요."
대놓고 자신을 꼭두각시로 삼아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었다.
마르쿠스가 눈가를 가늘게 좁히며 재차 물었다.
"왕자님께서는 자신의 모국이 로마의 보호국이 되어도 좋다는 말씀이신지요?"
"오로데스를 제 손으로 처형할 수만 있다면 개의치 않습니다. 저는 제 가족들의 원수를 갚고 정당한 자리를 되찾아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요."
미트리다테스 3세와 그의 가족들은 전원 악바타나에서 처형당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즉, 14살의 어린 왕자는 하루아침에 자신을 제외한 모든 가족을 잃어버린 것이다.
복수심에 눈이 몇 번쯤 뒤집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용하기에 이만큼 이상적인 조건을 지닌 왕족은 없다.
그럼에도 마르쿠스는 섣불리 확답을 주지 않았다.
보호국이 된다는 애매모호한 약속만으로는 안 된다.
사나트루케스가 정확히 어디까지 자신의 이권을 내놓을 수 있는지 확실한 선을 그어둘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전쟁에서 이기고 왕자님을 왕위에 올려드린다고 해도 파르티아 지방 귀족들의 힘이 완전히 죽는 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파르티아가 로마의 보호국이 된다고 해도 그건 허울뿐인 관계에 지나지 않겠죠. 저는 로마 시민들에게 확실하게 눈으로 보이는 이득을 안겨줄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나트루케스도 익히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확실한 조건을 제시하지 않고 로마의 도움을 받아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몇 번이나 한숨을 들이키며 심호흡을 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넘겨 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믿습니다."
가장 듣고 싶었던 최고의 대답이었다.
마르쿠스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억누르고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왕자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요."
< 112. 동방원정 사령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