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개막. 로마 대 파르티아 >
114.
마르쿠스의 예측대로 파르티아의 사신은 즉각 시리아 총독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이번에도 크라수스 대신 마르쿠스가 사신을 맞이했다.
화려한 비단과 보석으로 치장한 중년의 사신은 딱 봐도 심기가 불편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히 총독과 회담을 청한 걸로 기억하는데···그쪽은 총독이라기에는 너무 젊지 않나? 어찌 샤한샤의 서신을 가지고 온 나를 이토록 무시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고운 법이다.
통역에게 상대방의 말을 전해 들은 마르쿠스가 코웃음을 쳤다.
"나는 적법한 동방 속주의 총독 대행이니 고까워하지 말고 용건을 말하게."
"총독 대행? 당신이 크라수스의 아들인가 보군, 그런데 크라수스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총독께서는 지금 안티오키아에 계시지 않으니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네. 하지만 나 역시 총독의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으니 나와 이야기하는 게 곧 총독과 회담을 하는 거라 생각하게."
"전쟁을 준비하느라 바쁜가 보군."
사신의 이죽거림에 마르쿠스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회담을 하자고 온 건지 싸우자고 온 건지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는 분위기였으나, 이게 파르티아의 방식이었다.
절대로 기싸움에서 지지 않으려는 파르티아의 사신은 결코 상대방에게 굽혀주는 법이 없었다.
원 역사에서도 크라수스와 파르티아 사신 간의 만남은 고성과 욕설로 점철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마르쿠스는 설마 진짜로 그랬을까 싶었지만, 경험해 보니 놀랍게도 사실이었다.
그로서도 앞으로 한번 거하게 싸울 상대에게 예의를 차려줄 마음은 없었다.
자연히 회담의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졌다.
"샤한샤께서 원하시는 바는 단 하나. 반역자 미트리다테스의 아들 사나트루케스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곳에 있다는 정보는 이미 입수했으니 발뺌할 생각은 하지 말도록. 그러니 당장 그자를 포박해서 데려오길 요청한다. 로마가 과욕을 부리지만 않는다면 본국과 로마는 앞으로도 우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테니 현명한 판단을 하길 바란다."
"로마는 이미 사나트루케스 왕자를 손님으로 받아들이기로 정했으니 파르티아의 요구에 따를 의무가 없다. 아쉽지만 그쪽의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을 것 같군."
"그자는 샤한샤의 정통성을 부정한 대역 죄인이다! 설마 로마는 그 반역자의 편을 들 셈인가?"
"애초에 미트리다테스와 오로데스 둘 다 선왕의 적법한 핏줄이 아닌가. 둘 중 누구를 후계로 삼는다는 확실한 유언이 있던 게 아니라면 상대를 일방적으로 반역자라 낙인찍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실제로 미트리다테스는 메디아를 다스리기도 했었고."
파르티아 사신의 얼굴이 노기로 붉게 물들었다.
마르쿠스의 말은 사실 거의 억지에 가까웠다. 그러나 정식으로 받아들인 망명인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파르티아의 주장도 억지이긴 마찬가지였다.
양측의 입장은 확고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합의가 이뤄질 가능성은 없었다.
"이쯤 됐으면 로마가 더러운 야욕을 드러낸 거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하지만 사나트루케스를 이용해 본국의 정치에 간섭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 말을 역으로 돌려줘야 할 것 같은데. 파르티아의 주장은 로마를 향한 협박과 모욕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로마는 이런 위협의 싹은 반드시 뽑는다는 걸 알아두도록."
마르쿠스의 서늘한 일갈에 사신은 순간 움찔했다.
오로데스는 반드시 사나트루케스의 신병을 확보하라고 했지만, 동시에 로마와의 전쟁도 될 수 있으면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파르티아의 정보망은 결코 얕잡아 볼 수준이 아니었다.
사신이 지금까지 보고 들은 바에 의하면 로마와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미 로마 본토에서 어마어마한 숫자의 대군이 시리아에 상륙했다는 첩보도 들어왔다.
크라수스가 전쟁 준비를 하느라 부재중이냐고 비꼰 것도 근거 없이 내뱉은 소리가 아니었다.
로마가 사나트루케스야말로 파르티아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발표하는 건 시간문제로 보였다.
결국 몇번이나 고성이 더 오갔으나 회담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났다.
여기에 있어 봐야 시간 낭비라고 판단한 사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파르티아로 돌아갔다.
의미 없는 설전으로 피곤해진 마르쿠스도 짜증 나는 심정을 억누르며 자택으로 돌아왔다.
그는 앞으로의 일을 의논할 겸 푸블리우스를 찾았다.
가족끼리 저녁을 먹기로 약속했으니 분명히 아직 저택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드넓은 저택을 돌아다니던 와중 마르쿠스의 눈에 응접실 한구석을 훔쳐보는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가 보였다.
"거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성큼성큼 다가오는 마르쿠스에게 아르시노에가 손가락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레 응접실 앞까지 걸어갔다.
두 사람을 따라 힐끗 안쪽을 들여다보니 의외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동생 푸블리우스와 베레니케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설마 둘이 벌써 가까워진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닌 듯 보였다.
두 사람의 사이는 한눈에 봐도 아직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마르쿠스가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이듯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어째서 저 둘이 같이 있는 거죠?"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고개를 휙휙 저었다.
"저도 방금 막 왔어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구경하던 것뿐이에요."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레 아르시노에에게 쏠렸다.
그녀가 장난을 치다가 걸린 아이처럼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말이죠, 아무래도 언니가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처럼 보여서 우회책을 써봤다고나 할까요."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였으나 상황 자체만 놓고 보면 나쁘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마르쿠스는 푸블리우스에게 베레니케를 한 번쯤 만나보라고 할 생각이었던 까닭이다.
최근 로마 문화와 라틴어를 공부하는 데 여념이 없는 그녀는 과거에 비하면 제법 교양이 쌓인 상태였다.
동생이 싫다고 하면 억지로 권할 마음까지는 없었으나 만약 두 사람이 이어진다면 이보다 좋은 결과는 없었다.
물론 크라수스 가문의 남성이 외국인 여성과 혼인하려면 사전에 조치해야 할 것들이 꽤 많았다.
로마 문화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클레오파트라가 흥미 가득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그런데 푸블리우스 님이 언니가 마음에 든다고 해도 둘이 맺어질 수가 있나요? 로마인들의 통념에 조금 벗어나는 일이 아닌지······."
"사전에 몇 가지 작업이 필요하겠지만 가능합니다.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격한 환영을 받을 수도 있죠."
베레니케는 단순한 공주가 아니라 무려 전 파라오라는 신분을 지니고 있다.
그런 그녀가 로마 문화에 심취해 로마인이 되고 싶어 한다는 말을 퍼트린다면 로마인들로서도 엄청난 자부심을 느낄 수밖에 없다.
특별법을 제정해 명예 로마 시민권 같은 걸 수여해주면 불만을 품을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로마인이 외국 왕족과 결혼하는 게 아니다.
로마로 귀화한 왕족이 로마인에게 시집을 오는 느낌을 주면 된다.
로마 체제의 우월함을 선전할 수 있는 사례로 삼을 수도 있고, 이집트 왕가에 로마인의 핏줄을 심어놓을 수 있으니 원로원도 찬성할 것이다.
설령 찬성하는 분위기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이후 동방의 정세를 고려하면 실보다는 득이 많은 결합이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푸블리우스의 의향이었다.
그가 베레니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 이건 애초에 의미가 없는 이야기였다.
다행히도 슬쩍 보니 푸블리우스의 태도는 꽤나 긍정적으로 보였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는 모습이나, 베레니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만 봐도 상당한 호감을 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 예전에 다나에를 꽤나 좋아했었지.'
성격은 달라도 외견만 보자면 베레니케와 다나에는 비슷한 유형의 미녀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푸블리우스는 도발적이고 요염한 인상의 미녀를 좋아하는 듯싶었다.
'전쟁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자리를 주선해봐야겠군.'
푸블리우스와 베레니케를 바라보는 마르쿠스의 입가가 엷은 호선을 그렸다.
이상적인 형태의 동방 판도가 그의 머릿속에서 선명한 형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
크라수스는 군단 편성이 완료되자마자 총독의 이름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파르티아의 오로데스는 로마와 조약을 맺고 우호를 다진 선왕을 비열한 방법으로 암살했다. 이는 로마의 권위를 직접적으로 무시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거기에 로마로 망명한 정당한 왕위 계승자를 내놓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는 협박을 가해오기까지 했다. 나 크라수스는 이런 무도한 행위를 로마에 대한 위협이라 판단하는 바이다. 파르티아는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
크라수스의 목소리에 원로원도 바로 호응했다.
의원들은 직접 마르스 신전에서 승리를 염원하는 기원제를 올렸다.
그 간절한 바람을 담아 동방 원정군이 출진 준비를 마쳤다.
같은 시각,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동쪽의 대도시는 혼란에 휩싸였다.
파르티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의 시민들은 코앞까지 다가온 전쟁의 분위기를 누구보다 민감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오로데스의 소환을 받은 유력 귀족들이 하나둘씩 수도로 모여들었다.
파르티아의 최고 실세이자 천재 전략가로 명성이 높은 수레나스, 오로데스의 심복 무타레스, 미트리다테스의 목을 자른 미흐란, 히르카니아 산맥의 지배자인 카렌 가문의 수장까지.
파르티아의 권력의 핵심들이 모두 집결했다.
오로데스는 연일 대책 회의를 마련해 이 난관을 극복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나 온 힘을 다해 싸워야 한다는 것 외에는 뾰족한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로마 놈들이 쳐들어오는 건 확정된 사실이라 봐야겠지?"
오로데스의 살벌한 물음에 수레나스가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조사해본 바로는 이미 로마의 대군이 진군할 준비를 마쳤다고 합니다. 그 수는 최소로 잡아도 10개 군단, 6만에 이른다고 합니다."
"6만?"
귀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로마군이 전쟁에서 5만 이상의 대군을 동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루쿨루스가 폰투스와 아르메니아를 연달아 격파했을 때 지휘한 병사들의 수도 4만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6만 이상의 병력을 소집했다면 이건 작정하고 쳐들어오는 거라고밖에 해석할 수가 없었다.
"6만이나 되는 로마군과 부딪치면 이기든 지든 그 피해가 엄청날 겁니다. 협상할 방법은 없습니까?"
미흐란의 제안에 다른 귀족들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런 대전쟁은 지방의 대귀족들에게는 별로 좋을 게 없었다.
귀족들은 전쟁이 벌어지면 일단 병력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6만이 넘어가는 로마군과 전투를 벌인다면 얼마나 큰 손실이 일어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를 않았다.
패배하기라도 하면 즉시 몰락.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회복에는 몇 년이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대다수의 귀족들은 수레나스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뭔가 묘안을 낼 수 있지 않겠냐는 기대가 담긴 시선이었다.
오로데스는 그런 귀족들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가볍게 혀를 찼다.
회의의 중심이 왕이 아닌 수레나스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마다 신경이 묘하게 거슬렸다.
수레나스 역시 오로데스의 그런 심경을 눈치채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파르티아에 닥친 초유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하는 것만으로도 여유가 없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지금 상황에서 전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나마 한 가지 시도해볼 만한 방법이 있다면 로마군의 명분을 약화시키는 것 정도가 있겠지요."
"로마놈들의 명분은 사나트루케스에게 있지 않습니까. 그걸 어떻게 약화시키죠?"
"샤한샤께서 미트리다테스와 나눈 협의문이 있을 겁니다. 거기에 따르면 샤한샤께서는 파르티아, 미트리다테스는 메디아를 다스리기로 합의가 끝난 상태였습니다. 이 협정을 공개하고 사나트루케스를 반역자가 아닌 정당한 왕족으로 대우하겠다고 발표하면 로마도 더 억지를 부리지는 못하겠죠."
"그런다고 과연 로마가 물러갈까요?"
"물러가지는 않겠죠. 6만이나 되는 병력을 끌어모은 건 무조건 전쟁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쳐들어올 거라고 봐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로마군의 명분을 약화시키고 그들이 일방적인 침략을 일으키고 있다고 규탄하는 것 정도입니다."
수레나스의 의도는 이 전쟁의 성질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이었다.
사실 현재 흐름만 놓고 보면 파르티아에 굉장히 좋지 않았다.
원래라면 지금의 전쟁은 로마의 일방적인 침략전쟁, 그 이상도 아니어야 했다.
하지만 사나트루케스의 존재 때문에 상황이 어려워졌다.
양 국가 간의 전쟁이면서 동시에 미묘한 내전의 양상을 띠게 된 것이다.
로마는 이미 파르티아를 정벌하는 게 아니라 사나트루케스를 왕위에 올릴 거라고 천명했다.
자연히 오로데스 파벌이 아닌 귀족들 중에는 전쟁에 필사적으로 임하기 꺼려하는 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쟁에서 져봐야 오로데스와 그의 핵심파벌들만 갈려 나갈 뿐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를 쇄신하려면 어떻게 해서든 사나트루케스의 문제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귀족들도 수레나스의 의견이 그럴듯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오로데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나트루케스를 정당한 왕족으로 인정하면 미트리다테스와 맺은 협정대로 그에게 메디아 지역을 넘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기적으로 봤을 때 또 어느 귀족이 그를 옹립해 오로데스에게 반기를 들지도 몰랐다.
왕권을 위협할 불안의 싹을 무엇하러 자신의 손으로 다시 심는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사나트루케스 그놈은 반역자다. 놈의 지위를 인정해주라고? 하! 어림도 없다. 그렇게 했을 때 로마군이 돌아가면 모를까 어차피 쳐들어올 놈들인데 어째서 그렇게까지 해줘야 한다는 말이냐."
"위대한 샤한사이시여, 로마군이 사나트루케스를 파르티아의 정당한 왕이라고 주장하는 이상 저희는 힘을 온전히 결집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헛소리냐. 그런 놈들이 있다면 반역죄로 엄히 다스릴 거라고 명하면 그만이다. 너는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고 로마 놈들을 쓸어버릴 계책이나 짜내도록 해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수레나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로데스가 단순히 꽉 막히고 편협한 군주라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건 아니었다.
물론 어느 정도 그런 면은 있었으나 오로데스는 수레나스를 견제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왕으로서 언제라도 자신을 쳐낼 수 있는 신하의 존재는 위협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특히 선왕과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오로데스로서는 한층 더 외부의 위협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가끔 수레나스의 수려한 얼굴을 볼 때면 가슴이 서늘하게 얼어붙는 느낌을 받았다.
마음 같아서는 군의 최고 지휘권을 당장이라도 박탈하고 싶었다.
그러나 오로데스는 그 누구보다 수레나스의 능력을 잘 알았다.
다른 어중이떠중이들이 상대라면 다른 귀족에게 지휘를 맡겼겠지만, 이번의 상대는 로마다.
수레나스를 제외하면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거라고 보이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로데스는 신하의 능력을 꿰뚫어 보는 안목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그 능력을 뛰어난 신하들을 견제하는 데에만 사용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으나 그런 자각까지는 없었다.
"수레나스,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전력을 너에게 맡길 테니 반드시 로마 놈들을 막아라. 공을 세운다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대가를 내려주마."
"목숨을 걸고 로마군을 격퇴해 보이겠습니다."
"그래, 좋아. 그러면 우선 대략적인 방침을 말해보도록. 너라면 이미 몇 가지 그럴듯한 책략을 떠올려 뒀을 테니."
"지금 단계에서 펼칠 수 있는 전략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선 로마군이 어떤 경로로 진군할지 알아야 대비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세 가지 경로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오로데스와 다른 귀족들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역시 능력만 보자면 그만큼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없었다.
"경로가 세 가지나 된다고? 상식적으로 고려해 보면 아르메니아의 산악 지대를 통과해 오지 않겠나? 그쪽으로 파고들어야 우리의 우월한 기병 전력이 제힘을 발휘하지 못할 테니까."
"예. 샤한샤께서 말씀하신 경로가 가장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사막 지대를 가로지를 가능성도 아예 없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행군하면 사막의 폭염도 충분히 버틸 만하니까요. 만약 그들이 셀레우키아를 점령한다면 우리도 곤란해지기 때문에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배를 띄워서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을 단숨에 거슬러오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이건 가능성이 거의 없을 겁니다.
"
"그러면 산악 지대만 경계해두면 되지 않나. 놈들이 사막으로 들어오면 우리야 좋지. 우월한 기병 전력을 바탕으로 단숨에 짓밟아 버릴 수 있을 텐데."
"그렇게 희망적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놈들이 사막으로 들어온다면 그에 걸맞은 자신감이 있다고 봐야 할 테니까요."
"단순히 군사적 감각이 떨어지는 걸 수도 있지 않나?"
수레나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조사한 정보에 의하면 크라수스는 군사적인 실적이 거의 없는 이였으나 그의 아들은 달랐다.
더욱이 폼페이우스가 폰투스 왕국을 무릎 꿇렸을 때 로마가 궁기병을 운용했다는 정보가 있었다.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는 게 좋아 보였다.
만약 정말로 로마군이 사막으로 들어온다면 기병 전력에서 압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수레나스는 내심 그들이 무난하게 아르메니아의 산악 지대를 통과해 들어오기를 바랐다.
"일단 구체적인 전략을 수립하는 건 나중에 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움직여야 할 때입니다. 병사들을 모으고 로마군의 예상 경로에 척후병을 풀겠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로마군의 진군을 막을 테니 저를 믿고 맡겨주시길 바랍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수레나스는 걸음을 서둘러 왕궁을 나섰다.
꼿꼿하게 등을 세우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오로데스의 마음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수레나스가 진다면 사나트루케스와 로마는 그대로 크테시폰으로 밀고 들어올 터.
그의 목숨은 끝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수레나스가 로마를 이긴다고 해도 문제였다.
6만이나 되는 로마군을 물러나게 한다면 수레나스의 명성이 얼마나 치솟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오로데스는 명함만 샤한샤일뿐이지 아무런 실권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수레나스가 파르티아의 중심이 되리라.
로마군을 격퇴하면서 동시에 수레나스도 전사한다면 그로서는 더 바랄 게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일이 편하게 흘러갈 리가 없다.
오로데스는 왕좌에 몸을 파묻은 채 깊고도 진한 한숨을 흘렸다.
왕의 복잡한 심경을 눈치챈 측근 무타레스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야심과 질투, 충심과 권력욕이 용광로처럼 녹아든 모략의 틈새에서 수레나스는 묵묵히 방어군의 편성을 완료했다.
그 숫자는 궁기병과 중무장 기병을 합쳐 1만 5천이 넘어갔다.
로마군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인원이었으나 전원이 기병으로 구성된 부대라 그 전력은 실로 막강했다.
수레나스는 아무리 수가 부족하더라도 전체적인 질은 절대 밀리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패배하고 돌아오진 않겠다. 승리의 영광과 함께 귀환하거나 사막에 묻혀 전사하든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두 가지뿐.'
각오를 다진 수레나스는 기마에 올라 출병을 명령했다.
나팔수의 신호와 함께 기병들이 뿌연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10개 군단 이상의 어마어마한 병력을 투입한 로마군과 기병을 한계까지 쥐어짜내 맞서는 파르티아군.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하더라도 동방의 판도는 급변한다.
드높은 자존심과 그에 걸맞은 힘을 가진 두 패권 국가의 맞대결이다.
세계를 뒤흔드는 변화의 방아쇠가 된 대전쟁의 막이 마침내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 114. 개막. 로마 대 파르티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