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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개막. 로마 대 파르티아 (116/326)

  < 115. 개막. 로마 대 파르티아 >

  115.

  작전을 세우느라 머리가 아픈 건 파르티아군만이 아니었다.

  쳐들어가는 로마군 쪽도 고민이 많은 건 마찬가지인 상황.

  마르쿠스는 거의 매일같이 지휘관 회의를 열어 부하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역사에서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을 그렇게나 처참하게 실패한 원인은 별다른 데에 있지 않았다.

  바로 공훈에 집착해 참모진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했기 때문이다.

  크라수스가 이끌고 있었던 군단은 결코 허약하지 않았다.

  4만에 가까운 보병과 4천의 기병은 충분히 파르티아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는 대병력이었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붙여준 유능한 막료들도 있었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빠르게 성과를 내고 싶은 마음에 부하들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에게 뒤처져있다는 조급함이 시야를 좁아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칸나이, 토이토부르크 전투 등과 함께 로마 역사상 최악의 패배로 손꼽히는 비극이 되어 돌아왔다.

  마르쿠스는 그런 실수를 되풀이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다행히도 지금의 크라수스는 역사와는 많이 달랐다.

  눈부신 전공을 쌓고 있는 장남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고, 귀족파의 영수로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에 대한 열등감도 덜했다.

  로마에서 가문의 후계자를 훌륭히 길러 낸 것은 전적으로 가장의 공으로 여겨졌다.

  그런 점에서 크라수스는 모든 로마 귀족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존재였다.

  개인의 출세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에 밀릴지 몰라도 자식 농사에서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이번 전쟁에서도 크라수스는 명목상 최고 사령관을 맡았지만, 실질적인 지휘는 마르쿠스에게 일임했다.

  마르쿠스는 우선 각 군단장들에게 최대한 많은 의견을 말하게 했다.

  지휘관 회의에 들어오는 군단장들은 상당수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붙여준 베테랑들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파르티아를 공략할지 자유롭게 논의를 했고, 마르쿠스는 그 과정을 전부 지켜보았다.

  가장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하는 안토니우스가 현 상황을 정리해 발표했다.

  "파르티아는 지금까지 싸워왔던 자들과는 다릅니다. 여기 계신 분 중의 상당수는 폼페이우스 님의 밑에서 동방 원정을 수행한 경험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파르티아는 동방 왕조들과 비슷하면서 또 다릅니다. 우선 저희가 가장 조심해야 할 건 역시 사막의 변덕스러운 기후입니다.

  중무장한 군대가 사막을 행군하면 필연적으로 여러 문제를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파르티아는 광활합니다. 사나트루케스 왕자를 왕으로 세우려면 크테시폰까지는 진격할 필요가 있는데 그러면 상당한 장기전을 각오해야 할 겁니다.

  "

  이야기를 듣고 있던 군단장 한 명이 의문을 표했다.

  "굳이 사막을 가로지를 필요가 있을까요? 강변에서 식수를 확보하고 이동하면 문제가 없겠지만, 병사들의 체력 문제도 그렇고 파르티아군의 주력인 기병도 자유롭게 활개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냥 아르메니아의 산악지형을 통과하는 게 어떨까요?"

  병법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보통은 다 이렇게 판단할 것이다.

  역사에서 크라수스는 아무런 대비도 없이 사막을 가로질렀다가 엄청난 낭패를 보았으나, 그때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류했었다.

  크라수스가 부하들의 말에 조금만 귀를 기울였어도 카르헤의 굴욕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도 군단장들 중 몇몇은 사막을 횡단한다는데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랐다.

  지금까지 가만히 토론을 지켜보고 있던 마르쿠스가 입을 열었다.

  "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 없네. 사막의 기후를 대비하기 위한 복장은 이미 준비해 놓았으니까. 그리고 파르티아군이 자신들이 유리하다고 판단해주면 우리야 고맙지. 그들의 주력이 우리와 회전을 벌인다면 전쟁이 단기간에 끝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질 테니까."

  "예···분명히 그건 그렇긴 합니다."

  파르티아는 자신들의 기병 전력이 로마보다 월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이미 등자와 합성궁이 널리 보급됐고 군마의 품종 개량도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로마군의 경기병은 파르티아의 밑이 아니었다.

  중무장 기병으로 놓고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비교할 수조차 없게 커졌다.

  당연히 기병이 전체 군단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이전보다 훨씬 높아졌다.

  보병 3만 5천 정도에 기병 4천을 운용했던 크라수스의 로마군과 달리 현재 로마군은 5만의 보병과 1만의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시리아 방어와 병참선의 확보를 위해 후방에 2개 군단을 배치하고도 이 정도의 대병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저들이 사막에서 싸움을 걸어오면 그대로 적을 격파하고 파르티아의 주요 도시를 점령해 나가면 되니 모두 걱정하지 말게. 사실 사막을 횡단하는 데에는 적들이 전장으로 나오도록 유도하려는 노림수도 있다네."

  "아아, 그렇군요. 하긴 산악지형을 통과하면 우리 측의 기병도 운신에 제약을 받을 테니 제대로 활동할 수가 없겠죠. 그런데 어째서 주변 지역을 먼저 제압하려는 겁니까? 그냥 최단 시간 내에 수도를 점령하면 더 쉽게 항복을 받아낼 수 있지 않을까요?"

  "아주 좋은 질문일세.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가 가진 인식의 맹점이라는 걸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명심해야 하네."

  마르쿠스가 잠시 말을 끊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대다수의 지휘관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분위기를 읽은 마르쿠스가 천천히 부연설명을 했다.

  "파르티아를 건국한 아르사케스 왕조는 지금까지 우리가 상대한 다른 왕조와는 이질적인 자들일세. 농경에 기반을 둔 다른 왕조들과 다르게 파르티아의 지배층은 유목민족에 더 가깝다는 걸 알아둬야 하네. 수도가 함락당할 것 같다? 그러면 그냥 다른 곳으로 이동해 계속 싸우면 그만이야. 수도가 점령당하는 건 상당한 타격과 굴욕이지만 그게 항복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

  "아···그렇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파르티아의 왕은 자신을 왕중왕인 샤한샤라고 주장하기는 해도 실제 권력은 그에 미치지 못하네. 지방의 대귀족들이 지지하지 않는다면 왕의 권력은 단숨에 무너질 수 있어. 게다가 우리에게는 사나트루케스라는 왕족까지 있지. 주요거점을 초토화하면서 귀족들을 위협하면 상당수의 지방 귀족들은 그냥 우리에게 붙는 걸 선택하게 될 걸세."

  마르쿠스의 설명은 파르티아를 공략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를 관통하고 있었다.

  실제로 파르티아의 전력은 전성기 로마에 비하면 한참이나 체급이 딸렸다.

  로마가 본격적으로 파르티아와 싸웠던 제정 초기에는 무려 1세기 동안 수도를 세 번이나 점령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파르티아의 지배층은 유목민답게 산발적으로 저항을 이어나갔고, 로마와의 협상을 유리한 위치에서 마무리 지었다.

  정주민족이 유목민족에게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자 한다면 우선 상대방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공화정 시기의 로마 군인들은 아직 이런 지식이 부족했다.

  마르쿠스의 설명을 들은 군단장들은 이번 전쟁에 대한 인식을 근본부터 새롭게 다졌다.

  한층 더 신중해진 분위기 속에서 푸블리우스가 지도를 가리키며 의견을 냈다.

  "그렇다면 군단을 둘로 나누는 건 어떨까요? 한쪽은 적의 주력을 견제하고 다른 한쪽은 지역을 점령하면 급해지는 건 파르티아가 아니겠습니까."

  "나쁘지는 않은 의견이다. 하지만 위험부담이 너무 커. 그리고 상대방의 병력은 거의 전원이 기병이기 때문에 우리가 섣불리 병력을 나눈다면 한쪽만 각개격파를 당할 위험이 있다. 병력을 나누는 건 적의 주력을 격파한 뒤에 상황을 보고 결정해야 할 거야."

  "확실히 그렇긴 하겠군요. 하지만 그래도 양방향에서 공격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푸블리우스가 손가락으로 지도 위에 쭉 선을 그었다.

  "우리가 사막을 통해 들어가고 아르메니아는 북쪽을 통해 파고든다면 파르티아도 병력을 나눌 수밖에 없을 겁니다."

  "물론 아르메니아에는 이미 참전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다. 그래도 너무 과한 기대는 하지 말도록. 그자들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파르티아의 시선을 분산하는 게 끝이니까."

  푸블리우스의 제안은 지극히 정석적이고 상식적이었다.

  상대방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당연히 아르메니아의 참전을 경계하고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병력을 배치할 때 아르메니아에 일정 이상의 수비 병력을 주둔시켰을 것이다.

  아르메니아는 이를 핑계로 적극적인 공격을 하지 않을 테고, 파르티아 역시 로마와 아르메니아와 동시에 싸우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파르티아의 병력 일부를 떼어놓는다는 데에는 의미가 있었다.

  푸블리우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아르메니아의 전력은 실제로 고려하지 않고 전략을 짜야겠군요."

  "맞아, 대신 그들에게는 남쪽으로 수송부대를 보내 군량을 지원하라고 이야기해 놓았다."

  안토니우스가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집트에서 도착한 식량이 워낙 많아 군량 자체는 부족하지 않습니다. 병참선만 제대로 지킨다면 딱히 아르메니아에 군량을 요구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아예 협력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곧바로 이어진 대답에 안토니우스도 그건 그렇다며 동의했다.

  사실 마르쿠스도 실제로 아르메니아의 군량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그가 노리는 건 이 전쟁 이후의 판도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어차피 지금의 아르메니아는 껍데기만 남은 불안정한 국가에 불과했다.

  이대로 놔둔다면 로마와 파르티아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팡질팡하며 혼란을 가속할 뿐이다.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메소포타미아 북쪽의 국경선이 안정되지 않는다.

  그럴 거라면 차라리 아르메니아를 로마에 병합하고 북방의 경계선을 카프카스 산맥까지 확장하는 게 더 나았다.

  그렇다고 아무런 명분 없이 아르메니아에 개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군량 제공은 이를테면 아르메니아의 불성실한 지원을 물고 늘어질 수 있는 구실이었다.

  이 계획은 아르메니아로 떠난 특사조차 알지 못했다.

  다만 특사는 마르쿠스의 명령대로 로마가 이미 군량이 풍족하다는 사실은 철저하게 숨겼다.

  "영명하신 아르메니아의 군주시여, 이번에 우리 로마가 파르티아와 전쟁을 하는 사실을 익히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로마의 보호국으로서 의무를 다해 우리가 그들을 공격하는 동안 국경에서 이목을 끌어주십시오."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아르타바스데스는 솔직히 이번 전쟁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로마와 파르티아가 치고받다가 나란히 고꾸라지는 결과나 나왔으면 했다.

  그가 본심을 숨기고 옥좌 앞으로 몸을 내밀며 물었다.

  "그 말은 우리는 굳이 파르티아와 전면전을 벌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파르티아의 시선을 끄는 정도만 돼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그러면 당연히 이쪽에서 공격해야지."

  파르티아와 전쟁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공짜로 영토를 넓힐 수 있는 기회라면 마다하지 않는다.

  특사는 만약 파르티아군의 방어가 단단하면 직접적인 군사 지원보다는 군량을 보태달라는 제안을 건넸다.

  아르타바스데스는 일단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특사가 물러간 뒤 간단한 회의를 거쳤다.

  여기서 마르쿠스의 입김이 들어간 귀족들이 왕의 마음에 쏙 드는 의견을 냈다.

  "만약 로마가 이번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이기면 우리 아르메니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도 그들은 우리를 사실상 속국이나 다름없게 대하지 않습니까. 여기에 파르티아의 영토까지 획득한다면 그 횡포가 더욱 심해질 겁니다."

  "그래. 짐도 그리 느끼고 있었다. 로마에서 온 사신도 마치 우리가 자신의 부탁을 당연히 들어줘야 한다는 태도가 아니었더냐."

  "예. 그런 거만함이 앞으로 더욱 심해지면 심해졌지 약해지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로마가 파르티아를 일방적으로 쓰러트리는 결과가 나와서는 안 됩니다."

  아르타바스데스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아무리 로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파르티아의 편에 붙을 수도 없는 노릇인데."

  "예. 그건 더더욱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로마는 최소한 명분을 찾는 시늉이라도 하지만 파르티아는 다릅니다. 늑대를 피하자고 호랑이를 집에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냥 폐하께서는 로마와 파르티아가 서로 치열하게 싸우도록 관망만 하시는 게 좋을 거라고 사료됩니다."

  "그러니까···도와주는 척만 하고 실질적인 지원은 해주지 말자는 건가?"

  귀족들의 제안은 달콤한 꿀처럼 느껴졌다.

  아르타바스데스는 즉시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파르티아와의 국경에 병사들을 배치해 시선만 끌고, 군량도 적당히 느릿느릿 지원하기로 했다.

  만약 전쟁이 끝나고 로마가 이를 문제 삼으면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았지만, 신하들은 기다렸다는 듯 답을 내놓았다.

  "어차피 로마와 파르티아는 이번 전쟁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을 거라 우리에게 신경을 쓸 여력이 없을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제아무리 로마가 강하다고 해도 군량 보급이 완전하지 않다면 제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로마의 부탁을 대놓고 거절한 것도 아니니 충분히 변명할 수 있을 겁니다."

  아르타바스데스는 더없이 흡족한 기분을 느꼈다.

  그가 볼 때도 로마와 파르티아는 어느 한쪽으로 힘의 추가 기울지 않았다.

  물론 객관적인 전력은 로마가 더 높지만, 본래 전쟁은 수비하는 쪽이 공격하는 쪽보다 유리하다.

  게다가 로마는 현재 저 먼 서방의 갈리아를 점령하는 데에도 엄청난 수의 대군을 편성한 상태였다.

  파르티아 하나에 모든 전력을 집중시킬 수 없는 상황이라 파르티아 입장에서도 충분히 비등한 싸움을 벌일 수 있었다.

  양쪽 다 심대한 타격을 받는다면 아르메니아는 그 틈을 타고 세력을 키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번 쇠락한 국가가 다시 한번 번영하려면 반드시 계기가 필요하다.

  아르타바스데스는 이 전쟁을 아르메니아 중흥의 기회로 삼기로 정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귀족들의 생각은 왕과는 달랐다.

  냉정하게 말해서 그들은 지배자가 아르타바스데스든 로마든 크게 상관이 없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확실히 보장만 해준다면 누가 위에 서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대다수였다.

  아르메니아의 귀족들은 아르탁세스 왕조가 들어서기 전에는 셀레우코스 왕조에 뿌리를 둔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나 소속감은 상당히 희박한 편이었다.

  로마는 상대국을 점령해도 보통 왕을 제외한 권력자들의 위치를 보장해주는 편이었다.

  실제로 셀레우코스 왕조도 왕족만 쫓겨났을 뿐, 핵심 귀족들은 모두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게 동방의 귀족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상당히 컸다.

  '아, 로마가 들어오더라도 우리 위치에는 별로 변화가 없겠구나.'

  마음 한구석에 이런 생각이 자연스레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로마가 현지의 귀족들을 대우해주고 시민권까지 뿌리는 건 결코 자선사업이 아니었다.

  점령지를 쉽게 안정시키는 것뿐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정복을 수월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는 것이다.

  마르쿠스는 아르메니아 귀족들의 성향과 생각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는 이에게는 아르타바스데스의 밑에 있을 때보다 더 큰 이권을 안겨주겠다고 약속했다.

  귀족들로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노련한 귀족들은 로마에 대한 증오를 가장해 왕을 구워삶았다.

  마르쿠스의 편에 붙지 않은 다른 귀족들도 딱히 반대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침묵을 지켰다.

  아르타바스데스는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이 순간 아르메니아의 운명은 결정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로마군은 분명 파르티아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으나, 그런 순간에도 마르쿠스의 그림자는 아르메니아의 왕궁을 스멀스멀 잠식하고 있었다.

  ※※※※

  로마군이 본격적으로 진군을 개시하자 파르티아군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우선 로마군이 사막을 통해 파르티아로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수레나스는 복잡한 의미가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정석적으로 산지를 통과해 오기를 바란 기대가 빗나갔기 때문이다.

  이제 가능성은 두 가지로 좁혀졌다.

  상대방의 지휘관이 생각 이상으로 무능하거나, 아니면 파르티아군의 기병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전력이 막강하거나.

  마음 같아서는 전자이길 바랐으나 후자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일단 그는 자신이 편성한 1만 5천의 기병을 천천히 진군시켰다. 동시에 수도에 있는 오로데스에게는 아르메니아를 견제해 달라는 서신을 보냈다.

  오로데스는 즉시 소수의 별동대를 편성해 아르메니아를 공격해 들어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파르티아의 발 빠른 대처에 아르메니아는 군대를 진군시키지 않고 대치 상태를 유지했다.

  이제 남은 건 사막을 통해 진군하는 로마군을 물리치는 것뿐이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병사들 몇몇은 로마군이 사막을 통과하기 전에 회전을 벌이자고 주장했다.

  로마와 한 번도 싸운 경험이 없는 파르티아의 기병들은 확실히 적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로마는 지금까지 싸운 적들과는 다르다. 필요 이상으로 적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되겠지만 절대 방심하지 마라."

  몇 번이나 엄중하게 주의를 시켜도 젊은 병사들은 그다지 수긍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로마군의 핵심이 보병이었기 때문이다.

  보병은 파르티아에서는 가장 천대받는 병종으로 전장에서도 버림패로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보병들이 군단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니 자연스레 마음이 풀어지는 것이다.

  수레나스도 싸우고 싶어 하는 병사들의 혈기를 마냥 억누를 수만은 없었다.

  그는 전투를 벌이기 좋은 지형을 몇 군데 물색해 놓았다.

  그리고 사막에서 살아가는 부족들에게 로마군에 대한 정보를 계속해서 전달받았다.

  만약 로마군의 준비가 예상외로 허술하다면 즉각 기병들을 내보내 응징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수레나스의 기대는 여지없이 빗나갔다.

  정보원들이 건넨 보고만 읽어봐도 로마가 얼마나 사전에 준비를 해왔는지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하얀색 천을 몸 전체에 둘러서 햇빛을 차단하고 있다는 건가?"

  "예.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어서 자세히는 볼 수 없었지만, 그 정도는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강가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식수를 확보하고 하얀색 천으로 열기와 모래를 차단한 건가. 확실히 아무런 생각 없이 쳐들어온 건 아니로군."

  사막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상식이나 다름없지만, 실제로 사막을 경험해보지 못한 자들은 종종 햇빛의 무서움을 간과하고는 한다.

  더워 죽겠는데 왜 추가로 옷을 껴입느냐고 의문을 표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이런 사람들도 사막에 하루만 던져 놓으면 그 이유를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다.

  만약 로마군이 별다른 준비 없이 사막에 들어왔다면 며칠 못 가서 탈수 증상에 시달렸을 것이다.

  조금 행군이 늦어지더라도 강가와 거리를 유지하는 경로로 움직이는 것도 좋은 선택이었다.

  "역시 곧바로 회전을 벌이는 건 위험부담이 너무 커. 놈들의 전력을 객관적으로 파악한 뒤에 방침을 정해야겠다."

  기병들의 장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공격과 퇴각이 용하다는 게 최고의 강점이었다.

  수레나스는 이 점을 적극적으로 살려 로마군의 힘을 재단해 보기로 했다.

  소수의 별동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은 즉각 마르쿠스의 귀에도 들어갔다.

  막료들은 즉각 기병을 출격시켜 적을 쫓아내자고 했지만, 마르쿠스의 섣불리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본격적인 싸움을 하러 온 것치고는 보고된 적의 수가 너무 적었던 까닭이다.

  "탐색하러 온 상대에게 굳이 이쪽의 전력을 보여줄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꽁꽁 감추고 있으면 적도 역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챌 테니···활 정도는 보여주는 게 좋겠군. 각 군단장들은 백인대장들에게 기병을 뒤로 물리고 보병들을 앞으로 내보내라고 전하게.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신병기는 철저하게 감추고 사용하지 말도록. 방패병과 궁병만으로도 적의 궁기병쯤은 충분히 쫓아낼 수 있으니까."

  "예!"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각 군단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대열을 새로 형성했다.

  마르쿠스는 아직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는 수레나스의 존재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전투는 아직 벌어지지 않았지만, 군단을 이끄는 총사령관들의 심리전은 이미 시작됐다.

  단 한 번 판단을 그르치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이 역시 전투나 마찬가지였다.

  마르쿠스도, 수레나스도 결코 방심하지 않고 서로의 수를 읽기 위해 적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수레나스가 모르는 점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그가 신경 써야 할 상대는 자신의 정면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마르쿠스가 놓은 덫은 단순히 전방만 주시한다고 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순수한 군인이자 전략가인 수레나스와 달리 마르쿠스의 본질은 정치가에 더 가까웠다.

  그에게 있어서 전쟁은 결국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군사적인 면에만 주목해서는 마르쿠스의 시선을 따라올 수 없다.

  이 사실을 수레나스가 언제 눈치채느냐에 따라 전황은 언제라도 요동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 115. 개막. 로마 대 파르티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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