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전쟁은 검으로만 하지 않는다. >
116.
파르티아의 궁기병들은 수레나스의 명령대로 무작정 공격해 들어가지 않았다.
애초에 로마군과 정면으로 싸울 수 있을 정도의 수가 오지도 않았다.
그들은 언제라도 퇴각할 수 있도록 거리를 유지하며 로마군의 대응을 떠보려고 했다.
수레나스가 알고 싶었던 건 로마가 새로 육성했다는 궁기병들에 관한 정보였다.
그들이 사용하는 활의 성능은 어떤지, 기마술은 어느 수준까지 올라왔는지를 알아야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마르쿠스는 수레나스의 의도대로 행동해줄 마음이 없었다.
단단한 갑옷과 방패로 무장한 보병들이 기병의 진로를 막아섰다.
"뭐야, 대체 무슨 생각이지?"
궁기병을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는 중무장한 기병들로 돌격하는 방식과 더욱 우수한 투척 무기로 장거리에서 견제하는 방법이 있다.
파르티아는 설마 로마가 자신들보다 사거리가 긴 활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로마군의 대응을 보기 위해 거리를 좁힌 파르티아의 궁기병들은 예상보다 훨씬 멀리서 날아온 화살에 일순간 혼란에 빠졌다.
쒜에엑!
퍼버벅!
"으아악!"
"뭐, 뭐야. 이놈들의 화살이 여기까지 날아온다고?"
선두에 서 있던 기병들이 맥없이 쓰러지며 사막의 모래에 붉은 피를 흩뿌렸다.
궁기병의 실제 전투 거리도 일반 궁병에 비하면 두 배 이상 짧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말을 타면서 활을 당기려면 평지에서 쏠 때보다 많은 힘과 정교한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상대방 측에 우수한 궁병들이 많다면 궁기병의 힘은 단숨에 반감된다.
이런 단점을 해결하기 위해 파르티아는 궁기병들만이 아니라 다수의 중무장 기병을 함께 운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탐색전이라 중무장 기병들은 함께 오지 않았다.
파르티아의 기병 지휘관은 판단이 빨랐다.
여기에 있어 봐야 손해만 누적될 뿐이라고 확신한 그는 주저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로마군이 예상보다 강력한 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충분한 수확이었다.
황급히 귀환한 지휘관의 보고를 받은 수레나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역시 자신이 있으니까 굳이 북쪽으로 빙 돌아오지 않았겠지."
아무런 대비도 없이 기병들이 활개를 칠 수 있는 지역으로 들어왔을 리가 없다.
로마가 나름대로 궁기병을 확충했고 사거리가 우수한 활까지 갖췄다면 충분히 자신감을 보일만 했다.
물론 수레나스가 대처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궁기병만으로 공략하기는 꽤 까다로울지 몰라도 중무장 기병을 동원해 파상공세를 피면 충분히 뚫어낼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말로 표현 못 할 찝찝함이 느껴졌다.
수레나스의 눈에는 로마군의 움직임이 마치 '우리가 자신 있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라고 외치는 걸로 보였다.
로마군이 진군해온 이유도 납득이 가고, 동시에 파르티아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일전을 걸어봄 직했다.
실제로 부하들도 로마군이 만만치는 않겠지만, 이길 수 없는 상대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탁 트인 지형에서 기병의 전력을 최대로 발휘하면 충분히 승리를 거둘 수 있으니 회전을 벌이자는 말들이 쏟아졌다.
'흐름이 뭔가 이상하다.'
수레나스는 로마군이 일부러 자신들이 대처할 수 있는 만큼만 정보를 보여줬을 가능성을 고려했다.
"로마군의 기병을 육안으로 확인하지 못한 점이 걸린다. 아직은 좀 더 정보를 모아봐야겠어."
천재적인 명장답게 그의 예감은 날카로웠다. 마르쿠스의 노림수를 거의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만약 한 번의 탐색전으로 로마군의 전력을 다 간파했다고 여기고 회전을 벌였으면 낭패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수레나스는 꾸준히 소규모 기병들로 로마군의 진영 근처를 맴돌며 적의 정보를 얻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로마군은 행군 속도가 늦어지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철저하게 전력을 숨겼다.
파르티아 궁기병들의 도주로를 차단하기 위해 소규모의 경기병을 우회시켜 몇 번 공격한 게 다였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파르티아 군 내에서도 점점 불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몇몇 귀족들은 로마군은 조금씩 전진하고 있는데 대체 언제까지 간만 보고 있을 거냐며 대놓고 분통을 터트렸다.
반면 로마군은 흔들리지 않고 우직하게 주요 거점도시들을 향해 진군했다.
파르티아군의 경우 태생이 귀족 연합체였기 때문에 한 번 불거진 불만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았다.
"장군, 이러다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서 도시를 빼앗기게 생겼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병사들의 사기가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사기가 떨어지고 있는 건 적군도 마찬가지일 거다. 우리가 계속 견제를 하면 저들의 행군 속도도 떨어질 수밖에 없어. 아직 저들은 분명히 뭔가 숨기는 게 있다. 그걸 확인하지 않고 싸우는 건 너무 위험부담이 커. 국가의 명운을 걸고 도박을 할 수는 없지 않겠나?"
수레나스라고 싸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리가 없다.
솔직히 몇 번이나 그냥 싸우기 좋은 지형을 선점하고 회전을 벌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사실 로마군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건 착각에 불과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러나 지금 싸우면 대패할 거라는 불안한 예감이 마음 한켠을 떠나지 않았다.
수레나스는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어차피 불리한 건 쳐들어온 로마군이다.
주요 거점들을 잃는다고 해도 끊임없이 적을 견제하며 후방의 보급부대를 괴롭히면 된다.
그러면 제아무리 로마군이라고 해도 원정을 계속하지는 못할 것이다.
파르티아로서도 피해가 막심하긴 하겠지만 적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마르쿠스도 당연히 수레나스의 전략을 간파했다.
군단장들은 눈에 띄게 느려진 행군 속도에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적이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전장으로 나오지 않는군요. 궁병을 노출시킨 게 실수였을까요?"
"아예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면 더욱더 경계를 굳히고 싸우려 들지 않았을 걸세. 그래도 이 정도 보여줬으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싸움을 걸어올 줄 알았는데 적의 지휘관은 생각보다 촉이 더 좋군."
안토니우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지도를 내려다보며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쳤다.
"일단 이대로 유프라테스강 인근에 있는 거점들을 점령하면 식수는 문제가 없습니다. 군량도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준비해놓았던 덕분에 당장 문제는 없을 것 같군요. 아르메니아를 믿고 있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군량 제공을 전혀 하지 않더군요."
"애초에 이런 사태를 상정하고 짠 계획이니까. 우리는 이대로 보급하기 수월한 지역을 돌아다니며 귀족들의 주요 거점만 타격하고 다니면 돼. 그리고 아르메니아는 이후 그릇된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르도록 해줘야겠지."
"한데 우리가 이대로 진군 속도를 늦추면 당초에 계획한 대로 지방 대귀족들의 영토를 철저히 유린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일부를 함락시키는 정도의 성과밖에 낼 수 없을 텐데 원정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요?"
"아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네. 급한 건 우리가 아니라 저쪽이니까. 저들의 군대는 우리 로마처럼 중앙에서 소집한 군단병이 아닐세. 지방 귀족들이 자기 영지의 가신들을 긁어모아 편성한 것에 지나지 않아. 나라의 안위보다는 자기 영지의 안전이 우선이란 말이네."
마르쿠스는 파르티아군의 현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일종의 봉건 군대인 파르티아는 자신들의 이권을 수호하기 위해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다.
수레나스가 파르티아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전략을 짜더라도 그게 귀족들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받아들여질 리가 없다.
파르티아는 중앙집권형의 정주민족이 아니다.
청야전술 따위를 써봐야 귀족들이 호응해주지 않는다면 효과가 얼마나 있겠는가.
마르쿠스는 지금처럼 유프라테스강의 물줄기를 따라 파르티아 귀족들의 영지를 초토화하기만 하면 됐다.
물론 수동적으로 적의 불만이 폭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이럴 때를 위해서 타디우스를 통해 파르티아의 귀족들과 연줄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물론 귀족들에게 수레나스를 모함해 끌어내리라는 요구를 건네지는 않았다.
파르티아가 거의 회생 불가능의 상태라면 모를까, 지금의 파르티아 귀족이 오로데스를 배신하고 로마에 붙을 이유는 없었다.
대신 마르쿠스는 파르티아로 침공하기 전에 상인들을 동원해 미리 그럴듯한 소문을 퍼트려 놓았다.
수레나스가 로마와 밀약을 맺고 샤한샤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로마가 지금 쳐들어오는 건 사나트루케스를 파르티아의 샤한샤로 옹립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생각해 봐라, 아무리 로마라고 해도 파르티아와 전면전을 벌이면 피해가 심각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로마가 강하다고 해도 친로마파 왕을 하나 세우자고 그런 무리를 하겠는가. 왕이 바뀌어 봐야 귀족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통치를 하는 건 불가능하다. 로마의 진짜 목적은 메소포타미아 평야다. 수레나스는 이걸 방관할 셈이다.'
처음에 파르티아 귀족들은 이걸 헛소문이라 치부했다.
메소포타미아 평야를 빼앗긴다고 쳐도 파르티아가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다.
필연적으로 전쟁이 계속될 텐데 로마가 그런 허술한 판단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수레나스가 로마와 협력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소문이 들려왔다.
'수레나스는 로마군이 쳐들어오면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을 것이다. 로마군 역시 크테시폰으로 바로 진격하지 않고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유역의 귀족 거점만을 공략할 것이다.
로마의 목적은 오롯이 수레나스를 제외한 귀족 세력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그런 뒤 로마가 물러나면 수레나스는 로마를 격퇴한 공을 내세우며 샤한샤의 자리를 노릴 것이고, 로마는 자신들이 초토화시킨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일부를 야금야금 차지할 생각이다. 두고 보아라, 로마가 쳐들어오면 수레나스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절대로 싸우지 않을 테니.'
묘하게 구체적인 소문이라 무서운 속도로 퍼져 나가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소문의 당사자인 수레나스는 전쟁을 치르기 위해 자리를 비운 상태라 수도에서 이런 소문이 퍼지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귀족들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수레나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얼마 뒤, 그가 정말로 로마군과 싸우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귀족들은 격렬한 분노를 터트렸다.
이게 단순한 모함이라고 하기에는 수레나스의 행동이 사전에 퍼졌던 소문과 지나치게 일치했다.
이 믿을 수 없는 소식은 아르메니아군을 몰아내고 수도로 귀환한 오로데스의 귀에도 전해졌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 수레나스 그놈이 로마와 밀약을 맺었다고?"
오로데스의 폭풍 같은 분노를 접한 신하들이 모두 납작 몸을 낮췄다.
"위대하신 샤한샤여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문에 불과할 뿐입니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낭설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 확실치 않은 헛소문의 정확도가 놀라울 정도로 높은데도 말이냐? 그 소문의 출처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수레나스와 내가 출병할 때쯤 퍼졌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럼 그 소문을 퍼트린 놈은 예언자라도 되느냐?"
신하들은 아무런 반론도 하지 못한 채 식은땀을 흘렸다.
설마 수레나스가 배신을 했을 거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었으나, 그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던 까닭이다.
오로데스는 즉각 고위 귀족들을 소집해 회의를 열었다.
왕의 최측근 무타레스와 마침 수도에 머물고 있던 미흐란과 카렌이 참석했다.
안 그래도 오로데스가 수레나스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들은 올 것이 왔다는 심경으로 조심스레 왕의 눈치를 살폈다.
히르카니아의 대귀족인 카렌이 먼저 의견을 피력했다.
"수레나스의 행동에 이해하지 못할 구석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반역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면 굳이 이제 와서 이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조금 더 일찍 야욕을 드러냈겠지요."
의외로 수레나스를 옹호하는 의견이 나오자 오로데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왕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 하나로 고위직까지 올라온 무타레스는 지금이 나설 때라고 판단했다.
한 걸음 앞으로 나온 그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수레나스를 규탄하기 시작했다.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수레나스가 어째서 지금까지 야욕을 드러내지 않았느냐고요? 지금 이렇게 로마의 손을 빌려 작업을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지금 크테시폰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철저히 인근 귀족들의 영지만을 초토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귀족들이 샤한샤를 불신하게 만듦과 동시에 수레나스가 집권했을 때 방해가 될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계책입니다. 수레나스 가문이 다스리는 사카스탄은 지리상 로마와 충돌할 일이 없다는 점을 떠올려 보십시오.
"
무타레스의 말에 오로데스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지방 귀족들의 여론은 지금 어떤가? 역시 좋지 않겠지?"
"예. 로마군이 방향을 틀어 자신들 쪽을 향해 오면 어쩌나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째서 샤한샤의 군대가 로마군과 일전을 벌이지 않는지 의심과 분노의 시선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수레나스 그놈에게서 무슨 연락은 없었나?"
"서신이 오긴 왔습니다. 한데 그것이 말도 안 되는 내용인지라······."
무타레스가 재빠르게 양피지를 펼쳐 오로데스에게 바쳤다.
서신의 내용을 읽어본 오로데스가 코웃음을 쳤다.
"뭐라? 로마군의 의도가 다 파악되지 않았고 강력한 노림수를 숨기고 있는 것으로 예상되니 회전을 피하겠다? 철저하게 장기전으로 몰고 가서 협상으로 전쟁을 끝내는 게 파르티아의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이놈이 정말로 실성한 것인가."
어찌나 화가 솟구쳤는지 오로데스는 손안의 양피지를 구겨서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가 신중론을 펼치던 카렌을 노려보며 물었다.
"이래도 자네는 수레나스의 편을 들고 싶은 건가?"
"확실히 바로 납득이 가는 이유는 아닙니다. 하지만 수레나스의 군사적인 재능은 여기 있는 모두가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적어도 그가 그런 판단을 내린 이유는 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암! 들어봐야지. 대체 이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전투를 피하고 있는 이유를 꼭 들어볼 것이야."
중립을 지키고 있던 미흐란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수레나스의 서신은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느낌입니다. 그 군사의 천재 수레나스가 싸워보지도 않고 물러난다? 저로서는 그런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수레나스는 지금 우리 군의 총지휘를 맡은 사령관입니다. 그를 귀환시키면 지휘에 공백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카렌의 걱정스러운 염려에도 무타레스는 단호한 대답으로 일관했다.
"어차피 싸우지도 않고 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지금 수레나스의 자리에 그 누구를 가져다 놔도 군의 지휘에 문제가 생깁니까? 로마군의 근처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전투다운 전투는 하고 있지도 않은데 말입니다."
"그건 그렇지만······."
"제가 정계에 몸을 담은 지 어언 30년. 이렇게까지 배신감에 치를 떨어본 적이 없습니다. 수레나스는 배신자입니다! 그는 끝까지 로마와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그자를 신뢰하는 건 다 같이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길이라 확신하는 바입니다."
무타레스의 절절한 호소에 미흐란과 오로데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자 카렌도 더는 수레나스의 편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대귀족들의 합의가 이뤄지자 오로데스는 기다렸다는 듯 신하를 불러 명을 내렸다.
"즉시 수레나스에게 서신을 보내라. 당장 로마군과 결전을 벌여 놈들 패퇴시키든지, 아니면 지휘권을 반납하고 수도로 돌아오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위대한 샤한샤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오로데스와 대귀족들의 인장이 찍힌 명령서는 최단시간 내에 수레나스에게 전해졌다.
명령서의 내용을 읽어본 수레나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까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로마군의 진격속도를 늦추는 데 그토록 공을 들였거늘···이제 와서 회전을 벌이면 지금까지 한 작전이 전부 쓸모가 없게 된다는 말이다! 샤한샤께서 정말로 이런 명령을 내리셨다고? 아니, 그 전에 다른 귀족들이 여기에 합의했다는 말이냐?"
수레나스의 한탄에도 전령은 그렇다는 대답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수레나스는 이내 피가 나올 정도로 주먹을 꽉 쥐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최대한 빠르게 크테시폰으로 돌아간다. 내가 직접 샤한샤를 뵙고 설명을 드려야겠어."
< 116. 전쟁은 검으로만 하지 않는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