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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동방총독 (126/326)

  < 125. 동방총독 >

  125.

  마르쿠스는 폼페이우스와 나눈 협약을 크라수스에게 그대로 전했다.

  마르쿠스가 없는 이상 앞으로는 크라수스가 로마에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다행히 크라수스는 군사적인 능력은 떨어져도 정치적인 감각은 폼페이우스보다 훨씬 더 나았다.

  만약 크라수스가 없었다면 마르쿠스는 지금처럼 마음 놓고 동방으로 떠난다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귀족파의 중진들과 젊은 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마르쿠스를 배웅하기 위해 저택을 방문했다.

  카토와 키케로는 중요한 안건은 편지를 보낼 테니 꼭 답변을 달라는 부탁을 건넸다.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비불루스도 다녀갔다.

  공화정을 수호하는 청년들에 소속된 귀족들도 인사를 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키케로가 야심차게 끌어모았던 공화정을 수호하는 청년 모임은 이미 세가 많이 줄어있었다.

  모임의 핵심 인원 중 한 명이었던 데키무스와 쿠리오가 카이사르에게 붙어버렸기 때문이다.

  카시우스와 브루투스는 배신자들을 성토하며 작금의 험난한 현실을 개탄했다.

  그들은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인물은 오직 마르쿠스뿐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듯 보였다.

  "마르쿠스, 부디 카이사르에게 뒤지지 않는 굳건한 위상을 세워주게. 자네가 동쪽에서 든든히 버티고 있다면 제아무리 카이사르라고 해도 섣부른 행동은 못 할 테니까."

  마르쿠스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저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말을 할 뿐이었다.

  그렇게 로마에서 모든 일을 마친 마르쿠스는 식솔들을 이끌고 브룬디시움으로 향했다.

  배웅을 나온 클레오파트라는 마지막으로 아르시노에와 자매간의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다.

  마르쿠스는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듣지 못했지만, 돌아온 아르시노에의 눈가에 살짝 눈물이 고여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굳이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마르쿠스는 들뜬 마음을 억누르며 배를 타고 동방의 여왕이라 불리는 안티오키아로 향했다.

  신기하게도 이미 한번 올랐던 항해 길인데도 이전과는 느낌이 판이하게 달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총독대행이라는 애매모호한 직함이 아닌 진정한 총독으로서 속주에 부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권한과 힘을 대신 휘두르는 게 아니다.

  앞으로 동방의 5개 속주는 전적으로 마르쿠스의 뜻대로 움직이게 된다.

  단순히 행정권만 휘두르는 게 아니었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움직임에 위협을 느낀 원로원은 마르쿠스에게 거의 제한 없는 권한을 부여했다.

  외교나 군사에 관련된 문제조차 원로원의 동의를 받지 않고 사전에 처리하는 게 가능했다.

  이 정도면 사실상 한 나라의 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르쿠스는 당분간은 자신에게 허락된 이 권리를 차분하게 만끽하기로 했다.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그는 급하지 않은 용무는 행정관들에게 처리하라고 이른 뒤, 오랜만에 제대로 된 휴식시간을 가졌다.

  '지금까지는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어. 잠깐 쉰다고 큰일이 나진 않겠지.'

  마르쿠스는 오랜만에 두 발을 쭉 뻗고 그동안 쌓인 피로를 풀어냈다.

  지금은 총독의 청사로 쓰이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궁전 안뜰은 가족들이 제일 좋아하는 휴식처였다.

  시원하게 그늘이 진 곳에서 율리아의 무릎을 베고 누운 그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생각해보면 정말 쉴 틈이 없었지.'

  마지막으로 이틀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어본지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매일 같이 이렇게 지낼 수 있으면 진짜 소원이 없을 텐데."

  마르쿠스가 안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트라야누스는 다나에가 들려주는 영웅 서사시에 흠뻑 빠져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고 있었다.

  소피아는 아르시노에와 함께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체스를 두는 중이었다.

  아직 열 살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녀의 체스 실력은 이미 아르시노에보다 뛰어났다.

  덕분에 기물을 한 개 빼고 두고 있는데도 제법 국면이 치열해 보였다.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아이들이 어느새 저렇게 자랐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뭉클했다.

  "세월이 참 빠르죠? 어느새 아이들이 저렇게 자랐으니."

  율리아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귀를 감싸 안았다.

  따뜻하면서도 잔잔한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었다.

  마르쿠스가 율리아를 올려다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당신은 전혀 변하지 않았어. 아니, 변하긴 했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지금이 더 아름다우니까."

  "당신도 변했네요. 그렇게 듣기 좋은 말도 다 해주고."

  "그런가? 예전에도 애정표현에는 적극적이었다고 생각하는데."

  "행동으로는 몰라도 언어로는 표현이 조금 서툴렀죠. 그런 면은 아버지랑은 참 다르네요. 물론 아버지랑 똑같다면 그건 그것대로 제가 곤란했겠지만."

  율리아가 고개를 숙여 마르쿠스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무릎을 베고 있는 마르쿠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생긋 웃었다.

  "앞으로는 가끔씩 이렇게 여유롭게 지내도록 해요. 아이들도 좋아할 거예요."

  "마음만 같아서는 나도 그러고 싶지. 하지만 지금도 사실 할 일이 많아. 일단 이 안티오키아라는 도시 자체가······."

  "또 그런다. 지금처럼 쉴 때만이라도 일에 관한 생각은 머리에서 지우세요."

  율리아가 가볍게 검지를 들어 마르쿠스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부드러운 살결이 맞닿는 감촉에 감정이 고조되는 게 느껴졌다.

  근처에 아이들이 있는 게 아니었다면 이미 입을 맞추고 그녀의 몸을 안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마르쿠스의 기색을 느낀 것인지 율리아가 못 말리겠다는 미소를 지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아이들이 들어갈 때까지만 참아요."

  "알아. 나도 그 정도 분별은 있어."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진정으로 친밀한 사이는 서로를 둘러싼 침묵조차 어색하지 않은 관계라고들 한다.

  몇 마디의 말만 나눠도, 가끔은 그저 시선을 교환하기만 해도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어째서인지 첫날밤의 풋풋하면서도 달콤했던 기억이 두 사람의 머릿속에 동시에 떠올랐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이어졌던 짧지만 강렬했던 순간.

  불현듯 그때를 떠올린 율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미 들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당시 저희는 폼페이우스 님과 당신 중 누구를 택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어요."

  "그래, 예전에 장인어른께 들었어. 당신이 나를 좀 더 좋게 보았다고 했지?"

  "단순히 나이 차이 때문이 아니었어요. 뭐라고 해야 할까···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런 느낌을 받았었어요. 아, 이 사람을 따라가면 되겠구나.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이런 예감이 들었다고 할까요?"

  "그럼 그때의 결정에 후회는 없어?"

  마르쿠스의 물음에 율리아는 일초도 망설이지 않고 즉답했다.

  "물론이죠. 단 한 순간도 후회한 적은 없어요."

  율리아가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웃었다. 마르쿠스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몸을 안았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커다란 나무 뒤편에서 끊이지 않는 입맞춤이 이어졌다.

  ※※※※

  마르쿠스는 한동안 총독직이 가져다주는 호사스러운 생활을 듬뿍 만끽하며 지냈다.

  안티오키아의 토착 귀족들은 새로 부임한 총독의 눈에 들기 위해 연일 호화로운 연회를 개최했다.

  보통의 총독처럼 1년이 아니라 5년 이상을 머무는 게 확정된 상태였으니 모두가 마르쿠스의 환심을 사지 못해 안달이었다.

  인근의 귀족들이 하루가 멀다고 찾아와 총독 청사의 앞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마르쿠스와 안면을 트려 애쓰는 건 시리아 인근의 귀족들만이 아니었다.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의 친로마파 귀족들도 선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찾아왔다.

  마르쿠스는 과한 뇌물은 받지 않으면서 그들과 친분을 쌓았다.

  하도 접대할 사람이 많았는지라 연회가 열리는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더 많았다.

  수많은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군림하는 마르쿠스의 위용은 이 일대를 다스리는 제왕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오만하지 않고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자존심 높은 동방의 귀족들은 마르쿠스에 대한 호감이 점점 더 커졌다.

  그들은 내심 총독이 된 마르쿠스가 이전과는 달리 본색을 드러낼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그는 총독 대행 시절과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위엄 있는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현지 귀족들을 배려하는 자세를 잊지 않았다.

  심지어 파르티아 원정에 도움을 주었던 귀족들에게는 약속했던 것보다도 더 많은 보상을 내려주었다.

  두둑한 이자를 받은 귀족들은 마르쿠스의 덕을 칭송하며 변하지 않는 충성을 맹세했다.

  모두가 이토록 신임총독의 부임을 환영하니 분란이 끼어들 틈조차 없었다.

  그러나 이런 안락한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마르쿠스의 앞으로 수레에 가득 실린 파피루스 문서 다발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총독님께서 반드시 서명을 해주셔야 할 문서들입니다."

  "···이게 다?"

  막 강가에서 뱃놀이를 즐기기 위해 나가려던 마르쿠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수레를 돌아보았다.

  로마에서도 가끔 일거리가 너무 많을 때면 사람들이 지게에 서류를 싣고 올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수레에 문서를 한가득 실어오는 경우는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물론 며칠 동안 권력자의 삶을 즐기느라 행정에 소홀히 하긴 했지만,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뭔가 착오가 있던 거 아닌가? 급하지 않은 업무는 행정관들의 재량껏 처리해도 좋다고 했을 텐데?"

  자연스레 낮아진 목소리에 행정관 중 한 명이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송구합니다. 하지만 무려 5개 속주에서 일이 집중되다 보니 혼선이 잦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 모두가 총독님이 계신 이쪽에 조율을 부탁하는데 현재 그에 대응할 체제가 갖춰지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일이 다 책임자에게 밀리고 밀려서 결국 나한테 오게 됐다 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마르쿠스가 두꺼운 토가를 벗어버리고 의자에 몸을 푹 파묻었다.

  처음으로 총독이 되었단 사실에 들떠서 자신이 관할하는 속주가 5개라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전에 총독 대행을 할 때는 다스리는 영역이 지금보다 훨씬 작았고, 그마저도 크라수스와 분담해서 일을 처리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롯이 그 혼자서 모든 일을 책임져야 했다.

  게다가 5개의 속주 중 2개는 이제 막 편성된 곳이다.

  적극적으로 현지 동화책을 펴나가야 할 시점인데 당연히 이런저런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며칠 만에 수레로 운반해야 할 정도로 문서가 쌓인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로마에서 어마어마한 서류 중노동에 시달려온 마르쿠스는 이 난관을 타개할 확실한 해결책을 알고 있었다.

  풍부한 경험으로 다져진 경력직을 데려오면 되는 것이다.

  마르쿠스는 셉티무스와 다나에는 물론 푸블리우스까지 모두 소환해 산처럼 쌓인 문서와 전투에 돌입했다.

  한창 트라야누스와 놀아주고 있던 다나에는 당연히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안티오키아에 와서는 서류 정리를 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는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모양이군요."

  "아니, 나는 기병대장이라고······."

  자그마하게 속삭이는 세 사람의 대화가 마르쿠스의 양심을 푹푹 찔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혼자서는 문서를 처리하는 것보다 쌓이는 속도가 더 빠른데.

  마르쿠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몇 마디 변명을 덧붙였다.

  "이렇게나 행정이 구시대적일 거라고는 예상을 못했지 뭐야. 최대한 빠르게 행정 체계부터 손을 좀 봐야겠어. 책임소재와 권한의 범위도 더 확실하게 정해두고 관료의 숫자도 늘리고······."

  "정말 훌륭한 생각이시군요. 물론 그게 완벽히 갖춰질 때까지는 저희가 계속 고생을 해야 하는 거겠죠?"

  "···그거야 뭐······."

  마르쿠스가 머리를 긁적이며 슬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나에가 왼쪽 눈동자로는 서류를 읽고 오른쪽 눈으로 마르쿠스를 흘겨보는 신기에 가까운 기술을 선보이며 물었다.

  "어디 가세요?"

  "파르티아의 사신을 만나야 해서 말이야. 미안하지만 잠깐만 수고 좀 해줘."

  "······."

  세 사람의 침묵 어린 대답에 마르쿠스는 뻣뻣한 걸음걸이로 집무실을 나섰다.

  이건 결코 부하들에게 일을 떠넘기고 도망가는 것이 아니었다.

  외교적인 행사도 총독이 처리해야 하는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으니까.

  마르쿠스가 알현실에 들어서자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던 파르티아의 사신이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로마의 위대한 총독 마르쿠스 메소포타미쿠스를 뵙습니다."

  전쟁 전에 보였던 뻣뻣한 태도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최근 과중한 업무로 기분이 좋지 않은 마르쿠스의 분위기를 감지한 것일까.

  사신은 혹시나 마르쿠스의 심경을 거스르지 않을지 걱정하며 눈치를 살피기까지 했다.

  "그래, 샤한샤께서 보내신 것인가? 어떤 용무로 왔는지 바로 본론부터 말해보게."

  "예. 총독님의 말씀대로 샤한샤께서는 로마에서 언제쯤 원군을 파병해 주실 수 있는지 궁금해하고 계십니다."

  "원군?"

  "인더스 유역을 정복하는 걸 도와주신다는 협정을 맺지 않으셨습니까."

  사신은 깊숙이 고개를 조아리며 자세를 낮추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마르쿠스의 눈동자가 기묘한 빛을 띠었다.

  '이놈들 봐라? 진짜로 인더스까지 넘어갈 생각인가?'

  마르쿠스는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겨 사나트루케스의 의중을 짐작해 보았다.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자이니 진짜로 인더스 유역을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여기지는 않을 텐데···아니면 국가의 기반을 전부 그리로 옮기려는 건가? 왕조의 중심을 인더스 유역으로 옮기고 로마의 지원을 받으면 어쩌면 성공할지도 모르겠군.'

  보통이라면 국가의 명운을 걸고 도박을 하는 경우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파르티아의 상황은 상당히 암울했다.

  농업의 핵심지역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전부 로마로 넘어가 버렸고, 영토도 자그로스산맥의 바깥까지 축소되어 버렸다.

  로마에서 식량을 계속 팔아주지 않는다면 나라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그렇다고 로마와 전쟁을 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되찾는 건 현실성이 너무 떨어졌다.

  이미 자그로스산맥을 자연경계로 국경이 그어져 버린 이상 저곳을 넘어 로마로 쳐들어가는 건 지극히 어려웠다.

  파르티아 국민들과 귀족들의 여론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사나트루케스로서는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분출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진짜로 인더스 유역을 점령한다면 좋고 다시 빼앗기더라도 시간끌기용으로는 충분하다는 계산이리라.

  물론 마르쿠스는 그런 광대놀음에 어울려줄 마음이 없었다.

  협정을 맺었으니 원군을 파견하긴 해야겠지만, 정확한 일자와 시기를 정한 건 아니었다.

  이유만 있다면 얼마든지 시간을 끌어도 상관없었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지. 하지만 우리도 소중한 로마 시민의 피가 흐를 수 있는 만큼 만반의 준비를 한 뒤 원정에 임하고 싶네. 이건 당연히 이해해줄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러니 샤한샤께서도 양측이 언제쯤 완벽히 준비를 끝낼 수 있을지 알고 싶어 하십니다."

  "글쎄···나도 속시원하게 말해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직 확실한 건 아무도 모른다네."

  "그, 그게 무슨···분명히 인더스 원정에 협력하기로 협정을 맺지 않으셨습니까."

  사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자 마르쿠스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저었다.

  "오해하지 말게. 설마 로마가 한 번 맺은 계약을 어길 리가 있겠나. 다만 험난한 산지를 넘어 인더스까지 가는 건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봤을 뿐일세. 군단의 사기도 걱정이고, 보급로의 확보도 문제고, 이래저래 예상되는 난관이 많지 않나. 아무리 인더스가 풍족하다고 해도 모든 걸 현지 조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래서 우리 로마는 조금 관점을 바꾸기로 했네. 육로로 돌파하기가 힘들다면 해로를 이용하면 되는 게 아니겠나."

  "예? 해로라니요?"

  마르쿠스가 손짓하자 행정관 한 명이 홍해에서 인도까지 경로가 표시된 지도를 펼쳤다.

  마르쿠스가 에티오피아 지역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자, 보게. 로마의 위대한 영웅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몇 년 내로 이 악숨 왕조를 점령할 예정일세. 그러면 로마는 홍해를 완벽히 장악해 이곳의 해로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겠지? 즉, 험준한 산맥을 통해 보급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뜻이네. 이집트와 악숨에서 식량을 실어 인더스 쪽으로 보내버리면 되니까."

  "오오, 그렇게만 된다면······."

  "그래. 인더스 유역을 '정말로' 정복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 그렇게 샤한샤께 말해주게나."

  "알겠습니다. 총독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파르티아의 사신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퇴장했다.

  마르쿠스는 그런 사신의 뒷모습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기지개를 쭉 펴며 옆에 선 보좌관에게 물었다.

  "오늘은 이제 남은 일정 없지?"

  "예. 공식적인 일정은 이걸로 끝입니다."

  "좋아. 그러면 재빠르게 서류 정리를 끝내고 남은 시간은 소피아랑 좀 놀아볼까?"

  오랜만에 딸과 오붓하게 카드게임을 즐길 생각에 들뜬 마르쿠스가 막 알현실을 나서려 했을 때다.

  다급한 표정의 행정관들이 우당탕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때아닌 소란에 불쾌해진 마르쿠스가 자연스레 두 눈을 찌푸렸다.

  "이건 또 뭔가. 오늘은 남은 업무도 없을 텐데 무슨 일로 이렇게 다급하게······."

  "폭동입니다!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총독님!"

  "뭐라고 폭동?"

  딸과 오붓한 시간을 보낼 마음에 부풀어 있던 마르쿠스의 꿈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하늘을 보고 이마를 짚은 마르쿠스의 입에서 자연스레 분노가 섞인 한탄이 흘러나왔다.

  "이것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

  < 125. 동방총독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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