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프로파간다 >
129.
예루살렘에서의 용무는 이제 다 끝났다.
광산에서 새로 일할 광부들도 구했고, 현지의 불만도 잦아들었다.
결정적으로 콧대 높은 유대인들의 자존심을 꺾어준 게 최고의 성과였다.
만족스럽게 군단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떠나려 했을 때다.
백인대장 한 명이 헐레벌떡 다가와 보고를 올렸다.
"총독님, 포로 중 한 명이 자신은 로마 시민권자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확인해 보니 사실인 것 같아서 총독님의 지시가 필요합니다."
"로마 시민권자라고?"
의외의 사태에 마르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속주에 정착해 뿌리를 내리는 로마 시민이 없는 건 아니지만, 설마 안티고누스의 지지자 중에 로마 시민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귀찮게 됐군. 로마 시민을 처벌하려면 이래저래 절차가 복잡한데···아니, 잠깐. 이건 역으로 기회가 될지도?'
마르쿠스는 순간적으로 이 우연을 이용할 방법을 떠올렸다.
그는 주변에 늘어서 병사들을 지나쳐 병사들에게 붙들려 있는 포로 앞에 이르렀다.
외모를 보아하니 라틴 계통의 로마 시민이 아니라 순수 유대인 혈통의 로마 시민이었다.
마르쿠스가 세운 계획에 딱 적합한 이라 할 수 있었다.
"자네가 로마 시민이라고?"
"그, 그렇습니다! 저는 안티고누스가 그런 음모를 꾸미고 있는 줄 정말 몰랐습니다. 저는 순수하게 상인으로서 안티고누스에게 줄을 대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로마 시민권은 어떻게 얻게 됐나?"
"아버님께서 로마군에 용병으로 복무하셨습니다. 그 대가로 시민권을 얻었습니다."
"오오, 그래. 로마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위대한 용사의 핏줄이었군."
마르쿠스는 손수 포로를 묶은 밧줄을 풀어주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로마를 위해 싸우고 시민권을 얻는 건 외국인이 로마인이 되는 전형적인 방법 중 하나였다.
그 유명한 성경의 사도 바울도 할아버지가 로마군으로 복무하고 시민권을 받은 케이스라는 설이 있다.
로마는 속주 동화책 중 하나로 이런 사람들을 극진히 대우해줬다.
속주민들로 하여금 자신도 로마 시민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다.
마르쿠스는 주변을 둘러싼 유대인 군중들이 최대한 잘 볼 수 있도록 포로를 일으켜주었다.
눈치 빠른 통역병들이 재빠르게 원래 있던 자리로 복귀해 마르쿠스의 말을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히브리어로 통역하기 시작했다.
"로마 시민을 정당한 재판 절차도 없이 처벌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로마는 로마를 위해 피를 흘린 사람의 공로를 절대로 잊지 않는다네. 자네가 정당한 재판을 통해 죄를 벗을 수 있도록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네."
"가,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포로의 어깨에 손을 올린 마르쿠스의 목소리는 친근하기 그지없었다.
상황을 지켜보는 유대인들의 눈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일반 속주민과 명확히 구별되는 로마 시민권자의 위용이 절절하게 실감이 됐기 때문이다.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알패오라고 합니다."
"그래, 알패오. 자네는 로마 시민으로서 가진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있을 테니 아무런 걱정할 필요 없네."
이탈리아 반도에서 태어난 로마인이 아니더라도 로마 시민권을 가진 이들이라면 모두가 예외 없이 로마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물론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인지 아닌지로 약간의 구별을 두는 문화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차이는 로마 시민권자와 비시민권자의 차이에 비하면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르쿠스는 수군거리는 군중들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둘러보았다.
이 정도면 로마 시민권의 위력은 충분할 정도로 과시했다.
본래 다마스쿠스로 돌아가 예루살렘의 처우를 공식적으로 발표하려 했으나, 지금 기회를 활용하는 게 훨씬 효율적일 것 같았다.
그는 목청을 가다듬고 술렁이는 분위기에 쐐기를 박아 넣었다.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확실히 말해주겠다. 유대 지역은 지금처럼 속주세를 충실히 납부하는 한 자치권을 보장받을 것이다.
안티파트로스는 유대의 행정 장관으로서 유대의 모든 대소사를 처리할 권리를 지닌다. 유대 지역이 로마에 소속감과 충성심을 보인다면 로마 역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줄 것을 여기서 약속하겠다.
알패오의 존재가 바로 그 증거다. 추가로 이번 폭동에 참여하지 않고 중심을 지킨 예루살렘의 자산가들에게는 공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로마 시민권을 수여하겠다. 앞으로도 정기적으로 로마에 유익한 자들로 여겨지는 이들은 로마의 시민으로 받아들여질 테니 정진하기를 바란다.
"
시민권 수여 대상자로 지정된 유대인들의 얼굴에 형언할 수 없는 환희의 빛이 떠올랐다.
다른 유대인들은 그들을 선망과 동경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유대인 중 현실적인 젊은 층은 자연스레 자신들도 로마 시민이 되는 걸 목표로 삼았다.
마르쿠스는 역사에서 카이사르가 했던 대로 유대인들에게 항구의 사용 허가도 내주었다.
물론 항구세는 받기로 했다.
게다가 무너진 성전의 증축도 공식적으로 허가를 내주었다.
다만 카이사르와 달리 예루살렘의 성벽 재건까지는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유대인들의 극적인 반응을 끌어내기에는 충분했다.
안티파트로스가 머리를 조아리며 소리쳤다.
"위대한 로마의 총독, 마르쿠스 메소포타미쿠스시여! 관대하신 결정에 온 유대 지역을 대표해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물론 이건 공짜로 주는 게 아닐세. 앞으로 자네들은 시리아 남부의 평화를 유지하며 다시는 오늘과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걸 명심하도록. 로마의 총독이 예루살렘으로 진군하는 일이 다시는 없기를 바랄 뿐이네."
"기대를 배반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저희들의 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안티파트로스에 이어서 대제사장 힐카누스는 성전의 증축을 허락받고 감격에 겨워 눈물까지 흘렸다.
그는 십계명에 능통하고 예언서의 내용까지 알고 있는 마르쿠스야말로 신에게 기름 부음 받은 지배자라고 천명했다.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제에 이어 이민족이 이런 칭호를 받는 건 역사상 두 번째의 일이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밖까지 따라 나와 마르쿠스가 돌아가는 길을 축복과 환호로 배웅해주었다.
이로써 최소한 마르쿠스가 살아있는 동안은 유대가 로마에게 반항할 일은 없게 되었다.
마르쿠스의 최종 목표는 유대 지역을 완전히 해체해 로마화 시키는 것이었으나, 아직 그 사실을 눈치챈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히브리어를 아는 병사의 도움을 받아 한 가지 구절을 암송한 뒤, 따라오는 유대인들을 향해 들려주었다.
"그대들에게 신의 평화가 함께하기를."
유대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앞다투어 마르쿠스에게 신의 영광이 함께하기를 기도했다.
이로써 유대 지역의 민심을 완전히 얻은 마르쿠스는 위풍당당하게 안티오키아로 귀환할 수 있었다.
1만이 넘는 포로를 잡았고, 현지에서는 칭송이 가득했으며, 병사들의 피는 단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이것이 단 한 번의 예루살렘 방문으로 마르쿠스가 얻어낸 성과였다.
※※※※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마르쿠스는 즉시 사후처리에 들어갔다.
포로로 끌려온 안티고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전원 북쪽의 광산으로 보내졌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바친 배상금은 폭동의 피해를 입은 주민들에게 지급되었다.
밖에서 보기에는 이걸로 모든 일이 일단락되었다고 여겼으나, 마르쿠스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내심 예루살렘에서 폭동을 일으켜준 안티고누스에게 고마웠다.
안 그래도 속주의 행정을 대대적으로 개편하려고 했는데 아주 좋은 명분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총독직을 수행하며 느낀 거지만 로마의 속주 행정은 허점이 너무 많았다.
행정관들의 전문성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일단 절대적인 수가 너무나도 떨어졌다.
공화정 시기의 속주는 행정 부서의 관리가 고작 150명, 많아 봐야 300명 정도에 불과했다.
인구 1만 명당 관리가 1명도 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이러니 행정력 곳곳에 구멍이 뚫리고, 문제를 사전 예방하는 게 아니라 일이 터진 뒤에야 대처하는 식이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마르쿠스가 판단한 속주 행정의 문제점은 제대로 된 공문서 관리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반도 내에 있는 로마의 대도시들과는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총독은 행정, 사법, 군사 등 모든 영역에 걸쳐 일을 처리해야 하기에 이런 결점을 뼈저리게 자각할 수 있었다.
특히 사법 영역에서 이런 문제가 특히 두드러졌다.
명확한 지침과 판례가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관리들이 판단을 내릴 수가 없고, 자연히 총독에게 업무가 집중되는 것이다.
조금만 사안이 복잡해져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총독님, 자유민 출신의 고아가 노예로 양육되었다면 이 자의 신분은 자유민이 맞는 겁니까? 그럴 경우 양육비에 관한 책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노역형을 선고받은 자들을 공공 노예로 부리는 경우가 발견되었습니다. 노역형의 범주에 이런 것도 포함되는 것입니까? 제가 볼 땐 중간 기록이 누락된 것 같은데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총독님 군단병의 특별 수당 책정에 관해서······."
이렇게 기록 관리의 부실로 생긴 부담은 전부 총독에게 집중되었다.
문제는 마르쿠스가 담당하는 속주가 1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거의 모든 속주에서 비슷한 사태가 터지니 몸이 5개쯤 되지 않으면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명확한 규범 없이 자의적으로 일을 처리하면 해결되는 문제였으나, 마르쿠스는 그렇게 할 마음이 없었다.
속주 행정의 공백을 가다듬을 필요성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는 일단 규칙을 명확히 하는 것과 의도적으로 빈틈을 악용하는 이들을 엄벌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당시 동방에는 속주 행정의 빈틈을 이용해 이런저런 일을 벌이는 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속주법의 허점을 찔러 초고 이율의 고리대금업을 하는 귀족부터, 공공 재원을 함부로 다루는 관리, 처벌망을 교묘히 빠져나가 폭력을 휘두르는 자유민 조직까지.
그야말로 전 계층에 걸쳐 일탈을 벌이는 게 당연시되는 상황이었다.
마르쿠스는 일단 각 도시에서 해당 지역 출신의 행정관들을 추가로 뽑았다.
마음 같아서는 근본적인 제도 자체를 싹 뜯어고치고 싶었지만, 시간도 너무 많이 걸렸고 그럴만한 권한도 없었다.
훗날 그럴 수 있는 자리에 가게 된다면 선진화된 관료 시스템을 도입할지도 모르겠으나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감사관을 파견해 회계처리를 더 엄격하게 하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간 관례를 엄격히 명문화하는 것 정도였다.
시리아 속주 전역에 야근의 바람이 몰아쳤다.
행정관들 전원이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각종 사례와 통용되는 관습을 문서로 정리했다.
물론 마르쿠스가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특히 행정에 오래도록 종사한 이들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했다.
단지 총독이 누구 보다 솔선수범해 바쁘게 일을 하고 있으니 대놓고 표출하지 못할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행정에 잔뼈가 굵은 셉티무스는 이런 불만을 바로 짚어내 보고를 올렸다.
"마르쿠스 님, 최근 관리들의 불만이 상당한 건 알고 계시지요?"
"왜, 일이 너무 많다고 하던가?"
"마르쿠스 님의 지시대로 초과수당을 지급하고 있으니 그 부분은 참을 만하다고 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일하라고 하면 버티지 못하겠지만 일시적인 초과근무니까요."
"그럼 뭐가 불만이라는 거지?"
"판례나 규범을 전부 명문화하는 걸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중요한 법률만이라면 석판에 새기거나 양피지에 적으면 되는데 그렇게 하기엔 양이 너무 많습니다. 필연적으로 파피루스에 적을 수밖에 없는데 아시다시피 파피루스는 관리가 너무 힘든지라······"
마르쿠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예상했던 지적이었다.
이 시대에 문서를 기록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였다.
점토판에 글씨를 새기거나 양피지와 파피루스를 이용하는 것이다.
점토판이야 당연히 대량의 문서를 기록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으니 고려할 가치도 없다.
양피지는 튼튼하고 관리만 잘하면 오래가지만 가격이 턱없이 비쌌다.
반면에 파피루스는 가볍고 재료를 구하기 쉬워 대량으로 문서를 기록하기에 적합했다.
하지만 보관은 별개의 문제였다.
파피루스는 습기에 터무니없이 약하고 내구성도 영 좋지 않았다.
다시 말해 엄격히 관리해도 쉽게 파손이 되었으며, 주기적으로 필사를 해 사본을 만들어야 했다.
행정관들은 아무리 명문화된 규범을 만들어도 지속적인 관리가 불가능하다고 여긴 것이다.
실제로 이런 단점 때문에 파피루스는 당나라의 제지기술이 이슬람으로 넘어간 이후 생산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일리가 있는 불만이야. 하지만 이미 대안이 다 준비되어 있으니까 걱정 말라고 전해줘. 아니다, 역시 눈으로 직접 보여주는 게 좋겠지? 내일 기록을 담당하는 관리들을 불러줘. 내가 직접 그들의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다는 걸 눈으로 확인시켜 줄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셉티무스는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관리들을 소지하기 위해 등을 돌려 나갔다.
섬기는 주인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그의 등에서 돋보였다.
마르쿠스의 명령이 떨어진 다음날, 셉티무스는 바로 관리들을 명령받은 장소에 집결시켰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긴장의 빛이 역력했다.
말단 지방 행정관 입장에서 로마의 총독은 그야말로 구름 위의 존재였다.
혹여라도 자신들의 불만이 귀에 들어갔을까 싶어 안절부절못하며 몸을 떨었다.
마르쿠스가 모습을 드러내자 관리들은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괜한 일로 시간이 지체되는 걸 원하지 않은 마르쿠스가 손을 들어 그들의 행동을 제지했다.
"그럴 필요 없으니 일어나 따라오게. 자네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물건들이 있으니까. 한 번 감상을 들어보고 싶군."
"새로운 물건이라니요?"
"자네들의 고생을 획기적으로 줄여줄 신문물이지. 자네들만으로는 대량의 문서를 기록하는 건 몰라도 관리는 힘에 부칠 수밖에 없지 않나. 그래서 최근에 이래저래 걱정의 말들이 많이 나온다고 들었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관리들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런 일은 없습니다. 저희는 총독님의 명령에 불만을 가진 일 따위는 한 번도······."
"추궁을 하려는 게 아니니 너무 긴장할 필요 없네. 사실 나도 파피루스는 이래저래 결점이 많은 물건이라 문서를 기록하는 용도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마르쿠스는 관리들을 도시 외곽에 위치한 자신의 연구 시설로 이끌었다.
시설을 지키는 무장한 병사들의 모습에 관리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설의 터는 굉장히 넓었다.
작은 건물이 몇 채나 눈에 띄었고, 상당한 수의 장인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곳이 제지와 인쇄를 개발하는 곳일세. 몇 년 동안 꾸준히 기술을 개량한 결과 드디어 최근에 쓸 만한 수준의 결과물이 나오게 됐지."
"제지? 인쇄?"
처음 듣는 단어에 관리들은 그저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셉티무스 역시 이쪽 분야에는 거의 아는 바가 없는지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열심히 주변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제 3 제지소라고 쓰인 건물에 들어간 마르쿠스가 기술자 한 명을 불렀다.
"인원수에 맞춰서 종이 좀 가져다주게. 그리고 펜과 잉크도."
기술자가 가져온 종이를 넘겨받은 마르쿠스는 그걸 관리들에게 한 장씩 배부해주었다.
난생 처음 보는 종이를 받아든 관리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손에 들린 종이를 만져보았다.
"이게 대체 뭡니까?"
"종이라고 하는 물건일세. 앞으로는 파피루스가 아니라 여기에 문서를 기록할 예정이니 글씨를 써보게나."
관리들은 펜에 잉크를 묻혀 종이 위에 여러 가지 문장을 적어보았다.
질감도 나쁘지 않았고, 쉽게 찢어지지도 않아 파피루스보다도 더 글씨를 쓰기 편하게 느껴졌다.
"놀라운 물건이로군요. 혹시 이 종이라는 물건도 파피루스처럼 양피지에 비해 저렴하게 만들 수 있습니까?"
"양피지는 물론 파피루스보다도 훨씬 더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네. 그걸 위해 이 제지소를 만든 거니까."
마르쿠스는 처음 종이를 만들 때부터 13세기에 서양에서 처음으로 도입되었던 공장식 제지공장을 염두에 두었다.
13세기 정도의 기술로도 건설할 수 있었고 관련 문헌도 대량으로 남아 있어 구현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종이를 개발한 종주국인 동양은 의아하게도 이 공장식 제지소를 끝끝내 개발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중세 이후 종이의 가격이 서양이 동양보다 20배 가까이 더 저렴해지는 결과가 나왔다.
마르쿠스는 종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관리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더욱 놀라운 사실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같은 내용을 필사하는 문제는 자네들이 걱정할 문제가 아니네. 이제부터는 사람이 그런 작업을 할 필요가 없거든."
"예? 그게 대체 무슨······."
마르쿠스는 대답 대신 결과물을 보여주기로 했다.
제지소에서 관리들을 이끌고 나온 그는 이번에는 제 5 인쇄소라는 쓰인 건물로 들어섰다.
커다란 책상의 중앙에 네모난 아치형의 기둥이 달린 듯한 요상한 기구가 눈에 띄었다.
관리들은 종이야 무언가를 쓰는 용도라고 짐작할 수라도 있었지만, 인쇄소 안에 있는 정체불명의 기기는 용도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마르쿠스가 1400년이라는 시간을 건너뛰고 모습을 드러낸 인류 역사상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를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이게 바로 역사상 최초로 발명된 금속활자 인쇄기일세. 자네들은 운이 좋아. 인류 최초로 인쇄기가 작동하는 걸 볼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되었으니까. 지금부터 자네들이 가진 활자에 대한 개념이 근본부터 뒤집어질 테니 기대하도록."
< 129. 프로파간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