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 파라오 >
135.
그나이우스의 일은 일단락 됐지만, 아직 상황이 완전히 정리된 건 아니었다.
그나이우스와 함께 일을 꾸민 테오스 필로파테르의 처우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던 까닭이다.
본래 이집트에서 살아있는 신인 파라오의 권위를 능멸한 이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아직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가 자신의 의지로 이런 일을 일으켰다고 보는 건 어폐가 있었다.
미리 이 사실을 들었던 아울레테스는 어떤 처분을 내려야 할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거라고 예상한 마르쿠스는 사전에 아울레테스에게 좋은 해결책을 제시해주었다.
"이참에 알렉산드리아의 썩은 환부를 모조리 도려내도록 하죠. 이번 일은 전부 권력을 잡고 싶어 하는 환관 세력이 주도한 겁니다. 그중에서도 주범은 왕자님의 옆에 붙어있는 포티우스로 하면 괜찮을 것 같군요."
"···환관들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자는 전가?"
"덮어씌우는 건 아닙니다. 실제로 포티우스는 이번 일에 아주 깊이 얽혀 있을 테니까요. 어차피 환관들은 현 이집트의 정국을 안정화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왕궁에 붙어있는 한 이런 일이 앞으로도 계속될 텐데 굳이 위험을 감수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래···확실히 맞는 말이야."
한참을 고민했던 아울레테스는 결국 바로 어제 마르쿠스의 제안에 따르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나이우스의 처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이유도 처음부터 그렇게 하도록 합의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레테스는 무심결에 그나이우스를 내려다보고 있는 마르쿠스를 돌아보았다.
태연하기 그지없는 그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감탄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던 거지···보통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면 조금이라도 얼굴에 티가 나야하는 법이거늘.'
구사일생한 기분을 맛보고 있는 그나이우스는 몰랐다. 그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몰락할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었다.
앞선 모든 과정은 폼페이우스의 면목을 살려주고 그에게 빚을 지우기 위해 연출된 상황이었을 뿐이다.
아울레테스 역시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었기에 불만 없이 마르쿠스의 계획에 협조한 것이었다.
언제 봐도 감탄이 나오는 구상과 실행능력이다.
그가 잠깐 상념에 잠긴 사이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병사들이 포티우스를 끌고 들어왔다.
"파라오의 명을 받들어 죄인을 압송해왔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포티우스의 개인 관저에서 이 문서를 발견했습니다."
병사가 바친 문서를 훑어본 아울레테스의 눈동자에 진한 분노와 살기가 어렸다.
"발뺌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로군. 일개 시종장이 감히 왕자를 미혹해 역대 파라오들의 개인 재산에 손을 대려 해?"
병사들에게 붙들린 포티우스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직도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그나이우스를 본 그는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자,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저는 억울합니다. 저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려 했으나 폼페이우스 가문의 힘을 앞세운 저자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협력했던 것입니다!"
"전혀 설득력이 없는 변명이로군."
마르쿠스가 툭 내뱉은 말에 포티우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네가 정말로 저항하려고 했다면 그냥 파라오께 사실을 고하기만 했어도 해결되는 문제였다. 폼페이우스 가문의 힘이 두려웠다고? 평상시라면 그럴 수 있었겠지. 그런데 지금은 내가 알렉산드리아에 와있지 않느냐. 다시 묻겠다. 어째서 협박을 받았다는 사실을 나와 파라오께 고하지 않은 거지?"
포티우스는 입을 딱 벌린 채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이미 그의 편을 들어줄 이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마르쿠스는 처음부터 이번 일을 구실로 환관들을 쳐내려고 마음먹고 있었고, 폼페이우스는 아무리 정이 떨어진 상태라고 해도 이집트의 환관 따위보다는 아들이 더 소중했다.
아울레테스 역시 아직 어린 아들에게 벌을 내리는 것보다는 눈엣가시인 환관 세력을 쓸어버리는 게 낫다고 여겼다.
"마르쿠스, 그리고 폼페이우스. 저자에게 어떤 처분을 내리든 간에 내 결정에 지지를 보내줄 텐가?"
"물론입니다. 이집트인에게 내릴 판결은 마땅히 이집트의 주인이신 파라오께서 행하셔야지요."
마르쿠스와 폼페이우스에 이어서 키케로까지 파라오의 뜻을 존중하겠다고 밝혔다.
아울레테스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산드리아 권력의 중추에 깊숙이 뿌리를 내린 환관들을 쳐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울레테스가 단독으로 밀어붙여도 환관들이 똘똘 뭉쳐 저항한다면 오히려 역공을 당할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마르쿠스와 폼페이우스가 뒤를 봐준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이미 그들이 데려온 3개 군단이 머물고 있었다.
숙청의 명분도 아울레테스에게 있는 이상 이제 망설일 게 없었다.
"시종장 포티우스는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왕족을 현혹시키고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이를 위해 타국의 귀족과 공모해 밀약을 맺기까지 했으니 죄질이 더욱 악랄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걸 단순히 포티우스만의 행패라 보지 않는다. 환관들은 지금까지 역대 파라오들에게 많은 권한과 힘을 부여받았지만, 마치 그게 자신들의 힘인 양 착각하고 마음대로 전횡을 일삼았다.
이에 나는 세라피스 신의 대행자로서 판결을 내리노니 포티우스를 즉결 처형하고, 모든 재산을 국고로 환수할 것이다. 또한 왕족의 교육담당으로 환관들을 기용하던 관습을 오늘부로 폐지한다.
"
"억울합니다! 파라오이시여, 처형이라니요! 저는 지금까지 쭉 왕실에 충성을 바친 몸이옵니다. 그런데 어찌······."
"충성이 아니라 왕실에 기생한 거겠지."
마르쿠스의 싸늘한 일갈에 아울레테스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집트의 왕족들이 한결같이 오만하고 현실에 대한 파악능력이 떨어지는 건 그들의 교육담당인 환관들의 책임이었다.
환관들은 자신들이 교육하는 왕족을 파라오로 만들고 권력을 움켜쥘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이집트의 미래보다는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히 굳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파라오의 자리에 오를 이들은 결코 필요 이상으로 총명해서는 안 된다.
환관들은 왕족들이 어렸을 때부터 줄곧 그들의 허영심을 자극해 허파에 바람이 들어가도록 만들었다.
아이였을 때부터 이런 식으로 교육되면 누구라도 제대로 된 인격을 형성하기 힘들다.
클레오파트라처럼 환관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든가, 아르시노에처럼 생각이 굳어지기 전에 자신의 시야를 넓혀줄 누군가를 만나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마르쿠스가 이집트를 방문하지 않았다면 아르시노에도 역사와 똑같이 오만으로 가득 찬 왕족으로 성장했으리라.
포티우스는 이리저리 발버둥 치며 발악해보았으나 이미 결정된 판결을 뒤엎긴 무리였다.
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마르쿠스를 쏘아보며 외쳤다.
"네놈! 너희 로마 놈들이 오면서 모든 게 엉망이 됐어! 네놈들만 아니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란 말이다. 너희들이 아무리 짓밟아 본들 우리들이 지금까지 알렉산드리아를 떠받쳐 왔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알겠느냐, 이 로마 놈들아!"
"심금을 울리는 유언이로군. 네 비석에 그대로 새겨주도록 하지."
마르쿠스의 심드렁한 대답에 포티우스가 재차 입을 열어 욕설을 내뱉으려 했지만, 병사들의 주먹이 한 발 더 빠르게 날아왔다.
복부를 두들겨 맞고 조용해진 그는 축 늘어진 채 어딘가로 질질 끌려갔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뒤에 폼페이우스는 아예 원정에 대한 상세한 논의를 끝맺자고 제안했다.
번거롭게 또다시 자리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마르쿠스와 아울레테스도 동의했다.
협상의 당사자인 세 사람과 참관인인 키케로를 제외한 모든 이가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우선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데에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폼페이우스가 본격적인 회담에 앞서 아울레테스와 마르쿠스를 향해 다시 한 번 사과를 건넸다.
"우선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약속하겠습니다. 저는 이번 원정에서 군량지원을 제외한 그 어떤 사항도 이집트에 요구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악숨 정벌이 성공적으로 완료되더라도 이집트에 어떠한 압력도 행사하지 않을 거라 맹세하겠습니다."
"그렇게 확실히 선을 그어주니 이쪽도 고맙네. 단순히 군량지원만을 원하는 거라면 이쪽에게도 큰 부담은 없을 걸세. 다만 한 가지 미리 양해를 구해야 할 사항이 있네. 자네들도 알다시피 농사라는 게 언제나 예상대로 결과물이 나오는 건 아니지 않는가. 특히 이집트는 나일강의 범람 수위에 따라 그해의 생산력이 결정되니 더욱 변수가 크다네."
"예. 그 부분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집트는 상시 곡식을 비축해 둔다고 알고 있습니다. 지극한 가뭄이 드는 정도가 아니라면 군량의 지원을 받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로마군에 식량을 지원하는 정도라면 상관없네. 하지만 만약 흉년이 든다면 로마 본토에 가는 밀의 양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걸세. 그게 곤란하다면 수확량이 충분하지 않은 해에는 원정을 가지 않고 다음 해로 미루는 방법이 있겠지."
"···그건 별로 달가운 상황이 아니로군요. 저는 최소 수개월 전부터 상세한 계획서를 전부 작성해두는 유형이라 그렇게 즉흥적으로 일정을 변경하긴 어렵습니다."
"그 문제는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마르쿠스가 입을 열었다.
언제나 적재적소에 날아드는 도움에 폼페이우스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오오, 그래 주겠는가?"
"못해도 내년부터는 메소포타미아 평야에서 나온 곡물을 로마로 보낼 수 있게 됩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가 동시에 기근이 드는 기상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식량문제로 골치를 썩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마그누스 님께서는 아무런 걱정 없이 원정에만 집중하시면 됩니다."
"이거 참, 하나부터 열까지 편의를 봐주니 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군. 좋아, 이렇게 된 거 여기서 자네에게 줄 보상 문제까지 전부 털고 가도록 하지. 혹시 무언가 받고 싶은 게 있나?"
"아직 생각해놓은 건 없습니다."
폼페이우스는 마르쿠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미소를 지으며 홍해가 표시된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러면 내가 생각해둔 보상안을 검토해 보게나. 자네 가문과 자네 가문의 비호를 받은 모든 상인들이 홍해의 교역로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겠네. 다시 말해 악숨의 영역을 지나갈 때 일체의 통행세나 항구세를 지불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 키케로, 내가 속주를 편성할 때 이런 법안을 가결한다고 해도 문제는 없겠지?"
"원로원은 이번 건에 한해서 위대한 폼페이우스에게 속주를 편성할 전권을 위임했소. 로마 시민과 원로원의 권리를 제한하는 조치만 아니라면 무얼 하더라도 당신의 마음이오."
"그렇게 말해주니 든든하군. 어떤가, 마르쿠스? 이 정도면 내 아들이 범한 무례를 수습해준 대가로 충분한 것 같은데."
상상 이상으로 후한 제안에 마르쿠스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만약 이 말을 한 사람이 폼페이우스가 아니었다면, 반드시 이면에 함정을 파놓았을 거란 의심을 했을 것이다.
원래 그는 통행세의 인하 정도만을 요구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넘어서 요금을 아예 받지 않겠다는 건 엄청난 특혜였다.
이 소식을 전해주면 마르쿠스의 클리엔테스들은 또 한 번 무릎을 꿇고 마르쿠스의 이름을 소리 높여 칭송하게 되리라.
"너무나 관대하신 제안입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마음에 들어하니 다행이로군. 이제 마음에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온전히 원정에만 매진할 수 있겠어."
폼페이우스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리며 박수를 쳤다.
이후로도 회담은 막힘없이 진행됐다.
아울레테스와 마르쿠스는 폼페이우스에게 최대한 협조해주었고, 키케로도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다.
마침내 협정서에 아울레테스의 인장이 찍히고, 원로원의 이름으로 이 협정에 효력을 부여한다는 키케로의 동의가 떨어졌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일대 영웅은 마지막으로 시대의 바람을 타고 나일강의 원류로 나아갈 채비를 마쳤다.
※※※※
회담이 끝난 뒤, 키케로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구경하겠다며 먼저 가버렸다.
마르쿠스는 아울레테스와 함께 건물에서 나와 유유히 가마를 타고 파라오의 궁으로 향했다.
아울레테스는 널찍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호위를 모두 물리고 두 사람만 남게 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냈다.
"이번에도 전부 자네의 의도대로 된 건가?"
"전부는 아닙니다."
마르쿠스는 포도주에 물을 섞어 쭉 들이키며 피식 웃었다.
"내가 볼 땐 이 이상은 불가능할 정도로 최고의 흐름이 된 것 같은데?"
"예. 제 생각보다도 일이 더 잘 풀렸습니다. 그러니까 전부 계획대로 흘러간 건 아니라는 뜻이죠."
"···나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기분일세."
아울레테스는 이전에 마르쿠스와 단둘이 만났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분명히 후계자 구도에 대해 상담을 하려고 했던 자리였다.
그런데 마르쿠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 둘 중 한 명을 선택해달라는 아울레테스의 부탁에 뜬금없이 다른 제안을 건네 왔다.
그나이우스와 포티우스를 이용해 후계구도를 더 안정적으로 굳히자는 것이었다.
설명을 들었을 때는 정말로 일이 그렇게 흘러가겠냐고 의심을 했으나. 지금 이렇게 결과로서 증명이 됐다.
꼭 귀신에 홀린 듯한 느낌이었다.
"어떻게 그때부터 그나이우스가 포티우스와 접촉할 거라고 생각한 것인가? 아직 증거도 찾지 못했을 때인데."
"그나이우스는 저에게 커다란 열등감을 품고 있었고, 어떻게든 이번에 성과를 내고 싶어 했습니다. 거기에 이집트의 차기 후계구도를 이용하려고 한다는 정황도 포착이 됐죠. 제 존재 때문에 입장이 미묘해진 환관들과 결탁하려는 것쯤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
아울레테스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마르쿠스는 이미 사전에 포티우스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역사상으로도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 빌붙어 권력을 얻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던 자였다.
그런 인물이 얌전히 권력의 구석으로 밀려난 현 상황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나이우스가 먼저 접촉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아마 그쪽에서 움직였을 것이다.
"열등감과 권력욕에 시야가 좁아진 이들의 행동을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목적도 뻔히 짐작이 가고 자신들의 계획에 매몰되면 주변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되니까요."
"역시, 자네와 협력하기로 한 건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네. 자기들 마음대로 왕족을 주무르려고 했던 환관들이 쓸려나갔으니 앞으로 이집트의 정계도 더 건강해지겠지. 사실 난 원래 그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네."
"앞으로는 왕족분들의 교육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셔야 할 겁니다. 왕가의 피를 받은 분들은 지금보다 더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 성장할 의무가 있습니다."
마르쿠스가 환관들을 쳐낸 건 단순히 아울레테스만 좋으라고 한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 이집트는 쭉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어야 할 국가였다.
왕족들이 언제까지나 세상 물정 모르는 상태로 있는다면 분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날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정체성과 인격의 형성은 어린 시절의 교육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그러니 왕족들의 교육담당을 친로마파로 깔아둘 필요가 있었다.
처음에는 환관 세력을 포섭할까 생각도 했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기득권을 로마에게 빼앗겼다고 여겼다.
게다가 수세대에 걸쳐 뿌리내려온 아집과 독선도 상당했다.
동방의 다른 귀족들처럼 포섭하는 것보다는 깔끔하게 쓸어내는 게 후환이 없을 거라 판단했다.
"그나저나 저번에 말했던 내 뒤를 이을 후계자들 말인데······."
아울레테스가 손안에 잔을 천천히 돌리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나? 폼페이우스 가문이나 환관들의 개입을 원천 차단했으니 저번에 논의한 대로 추진하면 되겠나?"
"이미 선택지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으니 고민할 필요가 없죠."
"···그래. 역시 그렇겠지?"
"물론입니다. 테오스 필로파테르 왕자는 아무리 환관의 꼬드김에 넘어갔다고 해도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습니다. 아직 어리니 직접적인 처벌은 받지 않았다고 해도 이 사건이 널리 알려지면 과연 그가 파라오의 자리에 오르는 걸 신관들이 용납할까요?"
아울레테스가 숨을 들이키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 마르쿠스는 태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역사적으로도 파라오에 오를 마땅한 남성이 없는 경우 여성들이 공동 통치를 했습니다. 당장 베레니케만 하더라도 그녀의 어머니를 공동통치자로 내세우지 않았습니까."
"그때 왕자들은 거의 아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지금도 테오스 필로파테르 왕자가 실각되면 적법한 후계자는 클레오파트라 공주와 아르시노에 공주, 단 둘뿐입니다. 신관들이나 귀족들도 반대할 명분이 없을 겁니다."
"···역시 자네는 언제나 실리에 앞서서 명분을 확실하게 챙기는군."
아울레테스는 후계자 문제에 대한 답을 확실하게 돌려받았다.
마르쿠스의 의도는 명백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 둘 중 한 명을 택하지 않았다.
일단 둘을 모두 후보로 올린 뒤, 누구에게 실권을 쥐여줄지 이후의 행보를 보고 결정하겠다는 뜻이었다.
"앞으로도 이집트가 안정적으로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제가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가끔씩 궁금할 때가 있다네. 자네 같은 왕을 섬기는 신하들은 대체 어떤 기분일까. 적어도 나를 섬기는 이들과는 다른 기분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로마에는 왕이 없습니다. 제가 아무리 높이 올라가더라도 조금 더 특별한 위치에 있는 시민이 될 뿐이겠죠."
"···자네가 그렇다면야······."
아울레테스는 로마에서 왕이란 단어가 금기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눈앞이 있는 사내가 그 누구보다도 제왕에 가장 가까운 자라는 확신이 있었다.
아울레테스는 문득 로마라는 커다란 제국을 단 한 명의 통치자가 다스리는 모습이 어떨지 궁금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르쿠스는 평상시처럼 속내를 짐작하기 힘든 얼굴로 옅은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 135. 파라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