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후계자들 >
139.
"옥타비우스가···안티오키아에서 유학을 한다고요?"
아티아가 당황한 듯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마르쿠스가 직접 여러 가지를 가르쳐주겠다는 건 분명 엄청난 기회였다.
평범한 이였다면 당연히 감사하며 받아들여야겠지만, 아티아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지금의 결정으로 아들의 미래가 결정될 수도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마음이 내키지 않나?"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그저 너무 의외라······."
아티아는 내심 아들을 카이사르의 측근으로 키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카이사르의 조카딸이었으니, 옥타비우스는 카이사르의 종손이 된다.
아들이 없는 카이사르에게는 옥타비우스가 가장 가까운 남자 혈육이라 할 수 있었다.
로마인들은 가문을 이을 아들이 없다면 가까운 친척 가문에서 남자 아이를 입양하는 관습이 있었다.
즉, 옥타비우스가 카이사르의 눈에 들면 그의 후계자로 입양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이다.
여기서 귀족파인 마르쿠스의 밑에 들어가면 옥타비우스가 귀족파의 일원으로 여겨질 위험이 있다.
물론 아직 어린 옥타비우스를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겠지만, 이 유학이 나중에 어떻게 작용할지 예상이 가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그렇다고 섣불리 거절을 하는 것도 영 찝찝했다.
어쩌면 카이사르보다는 마르쿠스의 측근이 되는 게 아들의 미래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아티아의 청사진은 어디까지나 옥타비우스가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는 걸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아티아는 카이사르가 얼마나 실용적인 인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옥타비우스가 그분의 기준을 충족시킬 만큼 훌륭히 성장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아들을 사랑하긴 해도 그게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조건을 냉철히 고려해야 했다.
'옥타비우스는 똑똑하긴 해도 몸이 약한 게 단점이야. 갈리아에서 막대한 군공을 쌓은 분인 만큼 그런 점을 중시해서 볼 수도 있어.'
그리고 무엇보다 율리아가 차남을 낳는다면 옥타비우스가 가진 혈연으로서의 우위 점도 사라지게 될 위험이 있었다.
율리아의 장남인 트라야누스야 마르쿠스의 뒤를 있겠지만, 만약 두 번째 아들이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카이사르의 입장에서 보면 상식적으로 조카의 아들보다는 친딸의 아들이 몇 배나 더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르쿠스와 율리아의 사이는 얼핏 보기에도 굉장히 좋아 보였다.
율리아와 조금만 말을 섞어 봐도 바로 알 수 있었다.
마르쿠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율리아의 눈과 표정에서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듬뿍 흘러나왔다.
그 정도로 부부 금실이 좋다면 당장 내년이나 내후년에 아이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다.
'그래. 카이사르 가문의 양자가 되는 건 너무 불확실성이 큰 도박이야. 그렇다면 차라리 이 기회를 살리는 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아티아는 힐끗 시선을 돌려 옥타비우스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이 사안의 중대성을 알긴 하는지 태연하게 눈앞의 음식들을 즐기고 있었다.
"옥타비우스, 총독님께서 분에 넘치는 제안을 해주셨는데 네 생각은 어떠니?"
"저에게 선택권이 있나요? 어린 자식의 훈육은 전적으로 부모님에게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냥 내가 정해주는 대로 따르겠다고?"
아티아가 이맛살을 구기며 물었다.
옥타비우스는 단호한 미소를 지으며 잘 익힌 돼지고기를 손으로 찢어 입으로 가져갔다.
"제가 끼어들 자리가 아닌데 섣불리 나서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니까요. 총독님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괜찮으니 네 의견을 듣고 싶다."
마르쿠스가 흥미롭다는 듯 포도주잔에 묻은 얼룩을 손가락으로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어떤 선택을 내리는데 당사자의 의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 네 생각이 궁금하구나."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제가 안티오카에서 홀로 잘 적응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가족들에게 저를 위해 전부 따라와 달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요. 하지만 총독님의 옆에서 보고 배울 수 있다면 제 미래에 그보다 도움이 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확실히 아직 어린 네가 먼 타국의 땅에서 홀로 지내는 건 정서적으로도 좋지 않겠구나. 아티아, 옥타비우스를 위해 당분간은 가족들과 함께 여기에서 지내는 게 어떤가? 저택과 하인들은 전부 원하는 대로 준비해주겠네. 율리아도 사촌이 바로 근처에서 지낸다면 기뻐할 테니까."
"네? 옥타비우스만이 아니라 저와 옥타비아도요?"
"그러고 보니 옥타비아는 혼처가 정해졌나? 만약 이미 결혼을 했다면 이곳으로 건너오는 건 조금 힘들 수도 있겠군."
아티아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지금 혼담이 오가는 집안이 있지만, 아직 결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고?"
마르쿠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가 알고 있는 역사대로라면 이미 그녀는 클라디우스 마르켈루스와 결혼했어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결혼하지 못했다면 이미 역사가 많이 뒤틀린 상태라고 봐야 하리라.
'하긴 이미 로마의 정세는 역사와 완전히 달라졌으니 고위층 간의 결합도 역사대로 흘러갈 리가 없지.'
로마 귀족들의 결혼은 대부분이 정략결혼이다.
옥타비아와 옥타비우스는 평민 귀족이었지만, 어쨌든 율리우스 씨족과 발부스 가문의 피를 이어받았다.
혈통만 보면 어느 명문 귀족보다도 더 고귀한 피가 흐른다고 할 수 있었다.
본래 옥타비아와 결혼할 클라디우스 마르켈루스는 기원전 50년에 집정관이 될 만큼 촉망받는 인재였다.
하지만 그는 역사와 달리 이전의 법무관 선거에서 낙선해버렸다.
엄청난 돈을 들인 선거에서 낙선했는데 결혼을 할 정신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아티아가 한숨을 푹 내쉬며 포도주를 한 모금 입에 가져갔다.
"총독님의 제안은 정말 감사하지만, 그런 이유로 제가 안티오키아에 머무는 건 불가능합니다. 옥타비아의 혼기가 이제 찼는데 아직도 결혼을 하지 못한다면 좋은 혼처를 구하기가 앞으로 점점 더 힘들어질 테니까요."
"그거라면 내가 해결해주겠네. 옥타비아와 어울리는 최고의 신랑감을 내가 직접 찾아주면 수고가 훨씬 덜 들지 않겠나. 전도유망한 젊은 청년이든, 이미 성공한 완숙한 정치가든 원하는 바를 말해주면 바로 후보를 구해주도록 하지."
"정말이신가요? 세상에, 너무나 큰 은혜입니다. 그래만 주신다면 제가 안티오키아에 머물지 못할 이유가 없지요."
마르쿠스가 직접 중매를 선다는 것은 곧 그만큼 옥타비아를 아낀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이 소식이 퍼지면 옥타비아와 결혼을 하겠다는 명문 귀족들이 줄을 서서 달려들 것이다.
그 정도로 마르쿠스가 현재 로마에서 가지는 위상은 절대적이다.
쟁쟁한 후보가 너무 많아 행복한 고민에 휩싸이는 미래가 훤히 내다보였다.
"사실 돌이켜보면 내가 옥타비아에게는 너무 신경을 써주지 못했던 게 아닌가 싶네. 옥타비우스가 태어났을 때는 별장을 선물했었는데 말이야."
"감사합니다. 옥타비아, 너도 어서 총독님께 감사를 표하렴."
"총독님. 이토록 과분한 은혜를 내려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평생토록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내가 연령대별로 괜찮은 후보를 열 명쯤 해서 총 서른 명 정도를 뽑아 오마. 네 어머니와 상의해서 원하는 상대를 골라보렴. 필요하다면 직접 만나보고 결정해도 상관없으니 부담 갖지 말고. 율리아, 당신의 사랑스러운 사촌에게 훌륭한 사위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어떨까?"
"안 그래도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율리아가 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아티아와 옥타비아는 문자 그대로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기분이었다.
세 여인이 로마에서 이름난 명문 귀족들을 거론하며 남편감을 찾는 사이 마르쿠스는 옥타비우스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네가 바라는 바를 들어줬다. 혹시 또 원하는 게 있느냐?"
"예?"
옥타비우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영악하기 짝이 없는 표정 연기였으나, 마르쿠스는 그런 옥타비우스가 오히려 더 마음에 들었다.
"누이를 많이 사랑하나 보구나. 가족을 사랑하는 건 좋은 일이지. 자애롭고 기품이 넘치는 누이가 아직까지 좋은 신랑을 만나지 못했으니 안타까웠을 테고."
"···죄송합니다. 딱히 총독님을 이용해보겠다거나 하는 마음을 가진 건 아니었습니다."
"너를 탓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의 인물이라 점점 더 흥미가 동하는구나."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대화의 흐름을 유도해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내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이건 마르쿠스가 지금까지 즐겨 사용한 방식이기도 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마르쿠스는 역사에 기록된 옥타비우스의 행적에 영감을 받아 지금과 같은 모습을 취하게 된 것이다.
아직 어린 옥타비우스를 보는 그의 심경은 조금 복잡했지만,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반면 옥타비우스가 받은 충격은 더 컸다.
지금까지는 누구도 그의 이면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
옥타비우스가 허약한 몸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홉 살이 됐을 때부터 자신의 단점을 역으로 이용해 사람들의 행동을 유도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이성이 아닌 본능적인 깨달음이었다.
자신의 몸이 약하다는 걸 비웃은 사람일수록 자신을 얕보는 경향이 강했고, 그런 사람들은 손쉽게 말로 조종하는 게 가능했다.
옥타비우스는 사람의 심리를 유도한다는 게 얼마나 효과적인 기술이 될 수 있는지 체감했다.
무력을 쓰는 저급한 방법과는 차원이 달랐다.
폭력과 협박을 수단으로 한 방법은 일회성으로 그치기 때문이다.
강제적인 수단을 쓴 사람의 사회적인 평판에도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타인이 자신의 의지로 그렇게 행동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으면서 원하는 결과를 끌어올 수 있었다.
옥타비우스는 이런 방법으로 지금까지 많은 재미를 보았다.
물론 십대 초반인 그가 한 일이라고 해봐야 그리 대단치는 않았다.
자신을 무시한 어린 귀족들에게 소소한 복수를 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을 골탕 먹이는 정도에 불과했다.
총명한 옥타비우스는 이번에도 마르쿠스가 자신을 굉장히 높이 평가한다는 사실을 바로 간파했다.
그래서 자연스레 누나의 결혼으로 화제를 유도해 마르쿠스의 힘을 빌리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마르쿠스는 그런 옥타비우스의 심리를 당연하다는 듯 간파해 알아서 일을 처리해 버렸다.
어린 옥타비우스에게는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과 동류, 어쩌면 더 뛰어날지도 모르는 이를 발견한 것이다.
강렬한 호기심과 흥분, 그리고 미약한 두려움이 작은 심장을 가득 채워나갔다.
이 사람의 밑에서 더욱 많은 걸 배워보고 싶다.
그런 열망이 자연스레 솟구쳐 올라왔다.
"총독님, 부디 많은 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옥타비우스는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단순히 유학 생활을 잘 부탁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이를 모를 리가 없는 마르쿠스는 흡족한 미소로 그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약속하마. 오늘의 결정을 후회하는 일은 없을 거다."
※※※※
모든 손님 접대를 마친 뒤 마르쿠스는 오랜만에 총독 관저의 뒤편에 마련한 거대한 저택으로 향했다.
얼핏 보면 이름난 귀족이 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호화로운 저택이었으나, 딱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바로 무장한 군대가 철통처럼 저택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그 모습은 저택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내부에서 외부로 나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이제 슬슬 머리는 식혔나?"
마치 자신의 집처럼 내부로 들어선 마르쿠스가 응접실의 의자에 앉으며 저택의 주인에게 물었다.
고급스러운 잔에 키프로스산 포도주를 가득 따른 수레나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머리가 과열된 적이 없는데 식힐 필요가 어디 있겠소."
"어째 말투가 공손해졌는데? 말투처럼 생각도 달라졌을 거라 기대해 봐도 좋은 건가?"
"당신은 약속을 지켰으니···나도 진지하게 당신과의 약속을 검토해 보는 중이오."
"그거 참 반가운 소리로군. 그래서, 여기 안티오키아는 어떻던가? 로마의 속주라고 해도 제법 살기엔 괜찮지?"
수레나스는 포로이긴 했으나 원한다면 안티오키아의 어디라도 돌아다닐 수 있었다.
항상 옆에 감시가 따라다닌다는 제약은 있었으나, 수레나스 본인도 이런 당연한 조치에 불만을 품지는 않았다.
오히려 포로에게 너무 호사스러운 대우를 해주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크테시폰과 비교해 봐도 전혀 모자라지 않는···아니, 오히려 이곳이 더욱 발전한 도시라는 느낌이 들었소. 그래서 난 더욱더 당신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오. 당신은 내가 탐이 난다고 하지만 정말로 내가 당신에게 필요하긴 한 것인가 의문이 들더군."
"그런 의문을 품게 된 이유를 말해줄 수 있을까?"
"우선 이미 이 동방에서 당신에게 대적할 수 있는 세력은 아무도 없소. 로마는 이미 세계를 전부 먹어치운 최강의 패권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로마와 맞설 수 있는 곳은 우리가 비단을 들여왔던 저 동방의 대제국 정도겠지. 파르티아는 이미 성장동력을 잃었으니 로마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할 거요.
당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 내년이라고 짓밟을 수 있을 정도로 약해지지 않았소? 나를 거둬봐야 내 능력을 대체 어디에 쓰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이오.
"
"시 비스 파켐, 파라 벨룸(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이 있지. 전략수립에 뛰어난 인재는 그 어느 때라도 필요한 법이라네."
콘스탄티노플 백작이라고 불린 레나투스가 4세기에 펴낸 논문, 군사론에서 언급된 유명한 격언이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경구에 수레나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듣는 말인데···누가 그런 말을 한 거요?"
"말해줘도 모를걸. 아, 플라톤도 법률론에서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어. 그리고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여도 전쟁이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법이야. 당신이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그건 그렇소. 하지만 이런 걸 보면 볼수록 뭔가 심경이 복잡해진다고 해야 하나······"
수레나스는 탁자 위에 지금까지 읽었던 동방 주간을 올려놓았다.
두께가 상당한 것이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거의 모든 신문을 다 읽어본 듯 했다.
"왜, 기사 내용이 마음에 안 들던가?"
"분명 과장이 있겠지만 사실을 기반으로 썼다는 건 알 수 있었소. 하지만 내가 정말로 놀랐던 건 이런 매체를 만든 발상과 그걸 뒷받침하는 기술력이오. 여기선 당신이 신들에게 지혜를 받았다고 하던데···믿기지 않지만 이런 결과물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소."
"그러면 더더욱 나를 섬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는 하지 않겠소."
수레나스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파르티아의 대귀족으로서 평생을 살아온 자신이 이제 와서 로마인으로 살아간다는 게 가능한 것인지.
만약 그렇게 했는데 별로 효용이 있는 존재로 자리매김하지 못한다면?
고작 그런 꼴을 보기 위해 로마로 귀화했는가 하는 자책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대로 마르쿠스의 심복으로 승승장구 하더라도 문제다.
자신이 평생을 일궈온 기반을 저버리고 살아남은 배신자라는 죄책감이 들지 않을까.
그러나 냉정히 생각하면 이미 수많은 파르티아의 귀족들이 마르쿠스에게 붙은 상황이었다.
현실이 이런데 너무 고집부릴 건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마음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르쿠스는 수레나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혼란스러운 상태라는 걸 꿰뚫어 보았다.
단호하게 거절을 반복했던 처음에 비하면 이는 분명 긍정적인 신호라고 볼 수 있었다.
'슬슬 쐐기를 박아 넣을 때가 된 건가. 마침 상황도 갖춰졌으니 잘하면 한 번에 모든 걸 해결할 수도 있겠군.'
때가 왔음을 직감한 마르쿠스가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 수레나스 쪽으로 쭉 밀었다.
"고민하는 자네를 위해 마음을 굳힐 수 있는 계기를 주도록 하지. 이걸 한 번 읽어보고 따를지 말지는 자네의 마음대로 하게나. 단 선택을 하면 무를 수 없으니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도록."
의아한 눈길로 종이의 내용을 살펴본 수레나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파르르 떨렸다.
"이, 이게 정말 사실이오?"
"내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나?"
"내가···이런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보는 거요?"
"받아들이든 말든 자네의 자유니 마음대로 하게. 다만 반드시 일어날 일이니 조만간 마음을 정해야 할 거야."
마르쿠스의 의미심장한 한 마디에 수레나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떨리는 눈동자와 두 팔이 그의 현 심경을 적나라하게 대변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 139. 후계자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