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암살 >
140.
"총독님, 그 안건은 절대로 불가하옵니다! 재고해 주시옵소서!"
"몇 번이나 말한 것 같은데. 다 생각이 있어서 진행하는 거라고."
귀족들을 접견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안티오키아 궁전의 알현실에 고성이 몰아쳤다.
최근에는 드문 일도 아니었다.
관료들은 질렸다는 얼굴로 언제나처럼 반복되는 논쟁을 지켜봤다.
"총독님,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메소포타미아의 귀족들 중에는 페르시아, 아니 바빌로니아 제국 때부터 뿌리를 내리고 있던 유서 깊은 가문도 있습니다. 그들이 수백 년 동안 유지해온 전통을 존중해주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그들의 전통을 무시할 마음이 없네.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전통은 최대한 존중해 줄 거야. 하지만 명백히 개선의 필요성이 있는 사안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지금과 같은 방식의 관개농업은 토지의 사막화를 촉진할 우려가 있어. 난 로마의 전통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비옥한 메소포타미아의 농토를 지키려는 걸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귀족, 호르쉬드가 고개를 조아리며 소리쳤다.
"총독님의 고결한 뜻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희들이 지금까지 해온 방식은 전부 잘못됐다'라는 식의 정책은 많은 이들의 불만을 초래할 것입니다."
"그럼 어쩌라는 건가?"
마르쿠스의 얼굴에 짜증스런 빛이 스쳤다.
호르쉬드가 잽싸게 한 마디를 보탰다.
"우선 귀족들을 한 자리에 모아 그들의 의견을 최대한 들어주시옵소서. 그리고 점진적으로 의견을 좁혀나간다면 분명히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자네들은 언제나 너무 과한 배려를 바란다는 자각이 없는 것인가? 시리아나 아르메니아의 현지 귀족들에게 이 정도의 배려와 특권을 쥐여준 적은 없는데 말일세."
"총독님의 은혜에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저는 최대한 분쟁 없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로마에 편입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것뿐이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네. 그러니 자네의 말을 계속 들어주는 거야."
호르쉬드는 다시 한 번 정중히 감사 인사를 올렸다.
"그런 점에서 한 가지만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열리는 결혼식에 관한 겁니다만···아무래도 메소포타미아의 유서 깊은 귀족들은 배치에 불만을 보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각 귀족들의 영향력과 명성을 고려해 자리를 배정해 줬는데 여전히 불만이 있을 거라는 말인가?"
"그들의 자존심은 엄청납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때부터 이 땅을 지켜온 저희 가문 역시 굉장한 자부심이 있사옵니다.
하물며 크세르크세스 왕이나 키루스 대제부터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이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들은 이 땅의 주인이 숱하게 바뀌는 동안에도 자신들의 땅에 뿌리를 내리고 꿋꿋이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그렇게 쌓인 시간이 수백 년입니다. 시리아나 아르메니아의 신흥 귀족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 걸 굴욕이라 여기는 게 마냥 오만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
마르쿠스는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자존심은 추할 뿐이었으나, 그걸 당사자 앞에서 지적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그리고 호르쉬드의 주장은 현시대의 통념에 비춰 봤을 때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의 귀족들은 실제로 이상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로마 이전의 지배자인 파르티아가 현지 귀족들에게 상당한 실권을 보장해 주었던 국가라 그런 경향이 더 심하기도 했다.
마르쿠스는 괜한 입씨름을 하기 싫다는 듯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휙휙 저었다.
"자네들이 사랑하는 전통과 역사를 고려해 위치를 조정해줄 테니 그렇게 알고 물러가게."
"바다처럼 깊고 광대한 총독님의 관대함에 그저 황송할 뿐이옵니다."
호르쉬드는 몇 번이나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셉티무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귀찮은 자입니다. 매번 질리지도 않고 와서 저런 말만 늘어놓고 가니······."
"확실히 조금 극성맞긴 해. 자부심이 상당한 건 알겠는데 그게 너무 과하면 역겨울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는 걸까."
"계속 저렇게 행동하도록 놔두실 겁니까?"
"귀찮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제재하는 건 또 별개의 문제야. 저 정도면 그래도 온건하게 비판을 하는 축이잖아. 저런 의견까지 입에 재갈을 물리면 현지 의견을 완전히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어."
"하긴···그것도 그렇겠군요."
셉티무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 그래도 준비할 게 많은데 자존심만 강한 퇴물들이 설치는 게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르쿠스도 나직하게 혀를 차며 쓴웃음을 지었다.
"특히 메소포타미아처럼 토착 세력들의 영향력이 큰 곳은 명분만 생기면 벌떼처럼 들고일어날 테니 신중히 다룰 필요가 있어. 그걸 무력으로 찍어 누르는 건 모범이 서지 않아. 바로 로마에서 한 마디씩 훈수를 하는 인간들이 생길 테니까."
"그러니 그냥 자존심을 살려주면서 천천히 로마화 시키는 게 낫다는 뜻이로군요. 그래도 저번에 귀족들끼리 가진 회동에 대해서는 추궁하시는 게 좋지 않았을까요?"
"조사해 봤는데 마땅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그럼 당연히 그쪽에서도 그냥 둘러대겠지. 그리고 정말로 저쪽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다면 일단은 그냥 두는 게 나아. 섣불리 건드리면 괜히 꼬리를 잡기 더 힘들어지거든."
"알겠습니다. 그러면 지금처럼 조용히 감시망을 운용하도록 하죠."
셉티무스는 언제나처럼 마르쿠스의 판단을 믿었다.
게다가 지금 그는 귀빈들의 대접과 결혼식 준비 때문에 모든 일을 세세하게 챙길 여건이 되지 않았다.
철저하게 파고들지 않아도 된다면 솔직히 말해서 대환영이었다.
눈에 띄게 안도하는 표정을 본 마르쿠스가 피식 웃었다.
"네가 직접 하지 않아도 되니까 수레나스의 저택에 다음 주에 나올 신문의 견본을 미리 가져다줘. 위대한 폼페이우스 님의 원정 기사가 잘 보이도록 위에 펼쳐서."
"그자가 드디어 고집을 꺾은 겁니까?"
"마음은 이미 기울었는데 아직 망설임이 남아 있는 모양이야. 이번에 그걸 떨쳐낼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어 줄 생각인데···글쎄, 선택은 자신이 해야겠지."
"폼페이우스 님의 원정 기사를 보면 확실히 마음이 들끓을 것 같긴 하군요. 저번 전쟁은 수레나스 입장에서는 불완전 연소로 끝났을 테니까요."
셉티무스는 좋은 의견이라고 찬동하며 그대로 등을 돌려 나가려다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자리에 멈춰섰다.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말씀드리는 걸 잊었습니다. 아티아 님의 가족분들이 머무실 저택은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분들이 사용하던 가구와 대동하지 않은 노예들도 이쪽으로 보내달라고 로마에 연락을 넣은 참입니다."
"좋아. 그런데 옥타비우스는 어떤가? 그 아이는 몸이 약하니 각별히 신경을 써줘야 해. 갑자기 기후와 토양이 다른 곳에서 생활하면 몸에 탈이 날 수도 있으니까."
"최대한 로마에 있을 때와 비슷한 생활을 하실 수 있도록 편의를 봐 드리고 있습니다. 음식도 똑같은 식재료로 같은 요리를 해드리라고 일러뒀습니다. 도련님과 아가씨께서도 옥타비우스 님과 잘 어울리고 계시니 친우 관계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건 반가운 소식이로군.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으니 친하게 지내줬으면 했는데."
마르쿠스는 저택이 준비될 때까지는 옥타비우스와 그의 가족들이 총독 관저에서 머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자연스럽게 옥타비우스를 자신의 아이들과 가깝게 지내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트라야누스와 소피아는 둘 다 성격이 모난 아이들이 아니라 또래 친구인 옥타비우스를 반갑게 맞이했다.
가정교사가 작성한 보고서를 전부 읽어본 마르쿠스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가정교사의 말대로라면 옥타비우스는 트라야누스보다는 소피아와 더 마음이 잘 맞는 듯하네. 원래부터 그럴 줄 알았지만."
"아무래도 도련님께서는 활동적인 걸 좋아하시니까요. 반대로 아가씨께서는 정적인 활동을 좋아하시고요."
"소피아는 체스든 카드든 트라야누스가 너무 약하다고 재미없어했는데 곧 좋은 상대가 생길 테니 잔뜩 신이 낫겠군."
"아무래도 그렇겠죠. 아르시노에 님도 그리 썩 실력이 좋지 않으시니······."
"본인은 인정하지 않을걸? 패배할 때마다 운이 좋지 않았다는 말만 하더라고."
셉티무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그래서 그 카드 대결이 인기가 좋은 겁니다. 지면 자신의 탓이 아니라 운이 나빴다는 핑계를 댈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기면 자신이 세운 전략의 승리라고 자화자찬할 수 있죠. 최근에 시리아의 귀족들 사이에서도 유행하고 있다는데 조만간 상당한 돈을 건 대회가 개최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확실히 결혼식이 끝나고 여유가 생기면 대회를 개최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종이와 인쇄기를 사용하면 카드를 대량으로 찍어내는 것도 가능하니 일반 대중들에게도 널리 보급할 수 있다.
자고로 재미있는 유흥거리를 던져주는 것만큼 시민들의 인기를 얻는 데에 효과적인 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돈이나 식량을 푸는 건 단발성으로 그치지만, 지속적으로 개최할 수 있는 대회는 인기가 사그라지지 않는 한 효과는 영속적이기 때문이다.
마르쿠스는 이미 각 속주마다 중심이 되는 대도시에 원형 경기장을 설치하고 여러 가지 행사를 기획하는 중이었다.
우선 로마 전통의 검투 시합에 동방 속주 고유의 요소를 도입해 바로 내년부터 실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마상창 시합과 경마도 조만간 도입해볼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것들은 전부 관객들이 참가하기보다는 관람하면서 돈을 걸고 즐기는 것에 가까웠다.
카드 게임처럼 시민들이 직접 경험해볼 수 있는 놀잇감을 퍼트리는 건 상당히 괜찮은 생각 같았다.
물론 아무리 종이가 싸다고는 해도 일반 시민들이 카드를 수백 장씩 들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 카드를 대여해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공공시설을 만들 필요는 있으리라.
이렇게 사업에 대한 구상으로 상념에 잠기니 꼭 옛날로 돌아간 것만 같아 감회가 새로웠다.
마르쿠스는 오랜만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샘솟는 아이디어를 수첩에 옮겨 적으며 과부화 된 머리를 식히는 시간을 가졌다.
※※※※
메소포타미아 속주의 중심도시, 크테시폰.
동방의 여느 대도시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웅장함을 자랑하는 이곳은 로마의 지배에 들어갔음에도 조금도 활기가 죽지 않았다.
안티오키아에서 곧장 귀환한 호르쉬드는 여독을 풀 새도 없이 호화로운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바닥을 울리는 거친 발걸음 소리가 그의 심기가 편치 않음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사자 문양이 조각된 문 안쪽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먼 길을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호르쉬드를 초청한 이는 인타프레네스 가문의 젊은 수장이었다.
올해 서른을 갓 넘긴 나이, 호리호리하면서도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귀공자는 현재 크테시폰에서 가장 큰 세력을 지니고 있는 귀족들 가운데 하나였다.
과거 페르시아 최고의 명문 귀족 중 하나였던 그 인타프레네스 가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이름을 사칭하는 가짜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현 인타프레네스 가문은 그 이름을 내세울 정도의 부와 힘을 지니고 있었다.
최근 무서운 기세로 떠오르고 있는 호르쉬드로서도 절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이였다.
그렇다고 해도 안티오키아에서 먼 길을 달려온 그의 어조에서는 자연스레 일말의 짜증이 묻어 나왔다.
"아무리 말과 배를 타고 왔다고 해도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는 쉽게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오. 나를 급히 부를 만한 일이 아니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할 거요."
"당연히 어설픈 일로 호르쉬드 님의 시간을 뺏는 우를 범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건 저희에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 피치 못하게 무례를 저지른 점 사과드립니다."
메소포타미아의 대귀족이 고개를 숙여 사과하니 호르쉬드로서도 더 역정을 낼 수는 없었다.
그는 적당히 고개를 까딱이고는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호화롭게 마련된 주안상을 중심으로 다수의 귀족들이 죽 늘어서 앉아 있었다.
면면 하나하나가 지역에서 꽤나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었다.
무엇보다 한결같이 친로마파가 아니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호르쉬드 님, 어서 오십시오."
"시리아에서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호르쉬드의 얼굴을 본 귀족들이 반색하며 인사를 건네왔다.
개중에는 40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 귀족 히다르네스의 얼굴도 보였다.
이 정도의 거물들이 한데 모인 건 분명 범상치 않은 일을 논의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불안한 예감을 느낀 호르쉬드가 얼굴을 찌푸리며 자리에 멈춰 섰다.
"저번에 이미 확실히 의사를 밝힌 것 같은데···나는 친로마파도, 반로마파도 될 마음이 없소. 당신네들의 권력투쟁에 날 끼워 넣지 말란 말이오."
"그래도 호르쉬드 님은 저번에 저희가 입에 담았던 말을 총독에게 보고하지 않았잖습니까. 그것만으로도 반쯤은 한배를 탄 것이지요."
"그건 말하는 게 시간 낭비라 생각했기 때문이오. 어차피 당신들은 모르는 척 듣고만 있었을 뿐이고 떠든 건 끌려가도 상관없는 자들일 뿐이었잖소. 내가 마르쿠스 총독에게 보고를 했어도 당신들은 꼬리를 자르면 그만이었겠지."
"정확한 판단이십니다. 하지만 적어도 총독이 저희가 그런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그에 상응하는 경계를 했을 테니 저희도 대대적으로 계획을 수정해야 했겠지요. 이런 말씀을 드리면 기분 나쁘실 수도 있겠지만, 저번 회의는 저희가 호르쉬드 님을 떠보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습니다."
호르쉬드의 안색이 점점 더 굳어졌다.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는 기색이 훤히 느껴졌다.
그가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난 당신들이 그 바보 같은 계획을 진행하든 말든 상관할 마음이 없소. 실패하면 다 죽는 거고 성공해도 그리 이득이 크지 않은 멍청한 행동을 왜 하려는지 이해가 안 될 뿐이오."
"충분한 이득이 있습니다. 로마 놈들에게 경계심을 심어줄 수 있지요. 우리가 했다는 증거가 남는다면 파멸을 피할 수 없겠지만,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일에 성공한다면요? 자신들 마음대로 이 지역을 주무르려는 로마 놈들의 행보에 제동이 걸리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들키지 않고 그런 일을 한다는 게 불가능이란 말이오. 무조건 증거가 나오게 되어 있고, 그러면 성난 로마군에 의해 메소포타미아는 초토화될 거요. 당신들이 죽는 거야 본인들 자유겠지만, 난 거기 함께 휩쓸리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소."
"그래도 호르쉬드 님은 로마의 정책에 줄곧 반대를 표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안티오키아의 궁전에 드나드는 걸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요. 호르쉬드 님 같은 분이 함께해 주신다면 계획의 성공률이 최소 2배 이상 높아질 겁니다. 아니, 무슨 일이 있어도 호르쉬드 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인타프레네스의 절절한 호소에 호르쉬드가 곤란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후우···정말로 미치겠군. 애초에 당신들은 이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모르겠소? 내 장담하는데 당신들 중 누구도 나만큼 마르쿠스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할 거요. 내가 이 계획에 끼고 싶어하지 않는 건 도저히 성공 가능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오. 그렇다고 동포를 팔아넘기는 짓을 할 수는 없으니 입을 다물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말씀을 들으니 저희는 더더욱 호르쉬드 님의 인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호르쉬드 님의 말씀대로 저희는 로마 총독에 대한 정보가 너무 적습니다. 하지만 호르쉬드 님께서 가진 정보를 알려주신다면 훨씬 더 치밀한 계획을 세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대가로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가진 이권의 일부를 넘겨드리겠습니다.
"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본 호르쉬드의 얼굴이 일순간 경직됐다.
현재 인타프레네스의 저택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거의 모든 반로마파 귀족이 집결해 있었다.
이들 모두에게서 이권을 나눠 받는다면 호르쉬드는 사실상 메소포타미아의 왕이나 다름없는 지위를 가지게 된다.
순간적으로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성공 가능성이 너무 낮은데······."
"현 총독이 그렇게나 철두철미합니까? 물론 뛰어난 인재라는 말은 많이 들었고 신분도 보았지만, 대부분은 과장된 소문이 아니었습니까?"
"당신들이 들은 모든 말과 소문이 사실에 기반을 둔 내용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오. 내가 볼 때는 증거를 100가지쯤 남겨도 상관없다는 조건이 걸려도 이 계획을 성공시키긴 어려울 거요. 그 정도로 마르쿠스는 철통같은 경호에 둘러싸여 있소."
"그렇다면 음식에 손을 대는 건 어떻겠습니까?"
이야기를 쭉 듣고 있던 히다르네스가 신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호르쉬드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원시적인 수법은 절대 통하지 않소. 식자재부터 철저히 검수하고 완성된 음식을 먼저 맛보는 노예들이 있으니까."
"그러면 아무런 수가 없다는 겁니까?"
누구도 히다르네스의 한탄 어린 질문에 답을 내놓지 못했다.
호르쉬드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좌중에 깃든 침묵을 깨트렸다.
"뭐···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오. 어떤 사람이든 커다란 행사가 있을 때는 빈틈이 드러나는 법이니까. 정 일을 저지르려면 결혼식이 가장 좋은 기회가 되겠지."
인타프레네스가 눈을 반짝이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결혼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기회는 지금 이 순간밖에 없다고 모두가 동의했으니 이런 자리가 마련될 수 있었던 겁니다."
"1할 5푼."
"예?"
갑작스러운 호르쉬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신들이 누리고 있는 이권의 1할 5푼을 넘기게. 물론 로마의 눈에 띄지 않도록 비밀스럽게. 그렇게 맹세한다면 내가 이 계획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전원에게서 1할 5푼을 받아간다는 건 너무 큰······."
"그러면 교섭은 결렬이로군. 난 이만 돌아갈 테니 붙잡지 마시오."
인타프레네스는 정말로 몸을 돌려 응접실에서 나가버린 호르쉬드를 따라가 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알겠습니다. 1할 5푼을 드리지요. 다만 우리는 앞으로 운명공동체인 겁니다. 절대로 서로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고 쭉 함께하겠다는 맹세를 한다면 요구를 들어드리겠습니다."
"물론. 아후라 마즈다의 이름 앞에 맹세하겠소."
아후라 마즈다는 페르시아와 파르티아가 믿는 조로아스터교의 최고 신의 이름이다.
아후라 마즈다의 이름을 건 맹세는 그만큼 페르시아의 귀족에게는 큰 의미가 있다.
인타프레네스가 흡족하게 웃으며 호르쉬드를 다시 응접실로 이끌었다.
그의 입에서 마침내 주워 담을 수 없는 진한 음모의 잔향이 흘러나왔다.
"그럼 시작해볼까요. 총독 마르쿠스를 암살하기 위한 논의를."
< 140. 암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