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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최후의 원정 (147/326)

  < 146. 최후의 원정 >

  146.

  "자네 덕분에 일이 아주 쉽게 풀렸어."

  마르쿠스는 응접실에서 수레나스와 마주 보고 앉았다.

  모든 게 이전과 같았지만 딱 한 가지가 달랐다.

  물샐 틈 없이 저택을 감시하는 병사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넓은 응접실이 갑자기 한산해지니 수레나스로서는 조금 어색한 느낌이었다.

  그가 마르쿠스의 눈을 직시하며 물었다.

  "이렇게 나를 자유롭게 풀어줘도 괜찮은 것이오?"

  "안 될 게 뭐가 있겠나. 자네는 이번 암살 소동을 제압하는 데 공을 세운 몸이야. 같은 파르티아 출신 귀족들이 아닌 내 편에 서기로 한 이상 나도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나."

  "나는 그저 그들의 행동에 공감할 수 없었을 뿐이오. 아무리 생각해도 암살은···이 땅에 더 큰 혼란과 무의미한 전쟁만을 가져올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자넨 이번 일로 자신의 입장을 외부에 확실히 드러낸 거야. 다른 귀족들은 물론 파르티아도 드디어 수레나스가 로마의 편에 섰다고 인식하겠지."

  수레나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타프레네스를 속여 마르쿠스의 덫에 걸리게 하는데 수레나스가 일조했다는 건 이제 안티오키아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수레나스 역시 자신의 행동이 외부에 어떻게 비칠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모든 걸 다 고려한 상황에서 마르쿠스의 계획에 따른다는 선택지를 고른 것이다.

  "그런데···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오? 파르티아를 칠 것인가?"

  "아직은 무리겠지. 확실한 물증도 없는 상태고 로마는 이미 북쪽과 남쪽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으니까. 동쪽까지 전선을 확장하는 건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남쪽이라면···그런가. 드디어 원정이 시작된 건가."

  수레나스의 눈길이 한쪽 구석에 있는 신문으로 향했다.

  폼페이우스에 관한 기사를 몇 번이나 읽었는지 그쪽 면만 종이가 조금 닳아 있었다.

  "폼페이우스 님을 의식하고 있는 건가? 하긴, 같은 전략가로서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겠지."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로마가 정말로 파르티아에 위협적인 원정군을 파견한다면, 그 대장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일 거라 생각했오. 그래서 그자에 관한 조사를 하고 실제로 싸우게 된다면 어떤 전략을 구사할지 생각도 해보았소. 물론 당신에게 패배해 폼페이우스와는 만나보지도 못했지만."

  수레나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심경을 헤아린 마르쿠스는 품속에서 한 장의 지도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이집트의 남쪽, 악숨 왕조와 그사이에 위치한 쿠시 왕국의 영토가 대략적으로 표시된 지도였다.

  "안 그래도 지금쯤이면 슬슬 폼페이우스 님의 군대가 남하를 시작했을 거야. 재미 삼아서 이번 전쟁이 어떻게 흘러갈지 한 번 예측을 해보는 게 어떨까? 실제에 더 가까운 추론을 하는 쪽이 승리하는 걸로."

  "재미있겠군. 기꺼이 응하도록 하겠소."

  마르쿠스와 수레나스가 지도를 마주 보고 한창 토론에 열을 올리고 있을 무렵, 폼페이우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7개 군단을 이끌고 남하를 시작했다.

  악숨을 정벌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수단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쿠시 왕국을 통과해야 한다.

  쿠시 왕국은 고대에는 이집트를 한 번 점령한 적이 있는 강국으로 수도 메로에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먼저 사절을 보내 로마의 패권에 들어오고, 악숨을 정벌하기 위해 국경을 개방하라는 요구를 건넸다.

  사실상 로마의 속국이 되라는 제안이었다.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쿠시 왕국은 폼페이우스의 제안을 가볍게 묵살했다.

  전성기만큼은 되지 않아도 쿠시 왕국은 여전히 5만 이상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

  고대 쿠시 왕조의 피를 이어받은 현 국왕 샤바카는 즉각 로마군에 맞설 병력을 소집했다.

  쿠시의 삼대 귀족인 카쉬크와 타하르몬이 수도 북동쪽에 위치한 나파타에 방어선을 형성했다.

  마지막으로 왕의 사위인 피앙카가 왕국의 남쪽에서 병력을 규합해 원군이 필요한 곳으로 지원을 갈 예정이었다.

  쿠시 왕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폼페이우스는 즉각 대규모 선단을 조직했다.

  쿠시 왕국의 주요 도시인 나파타와 메로에는 전부 나일강을 끼고 들어선 도시였기 때문이다.

  대규모 선단으로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가 총공세를 펼친다.

  누가 봐도 폼페이우스의 전략은 명확했고, 이 소식은 곧 쿠시 왕국의 귀에도 들어갔다.

  다급해진 샤바카는 수도를 지키는 대부분의 병력까지 전부 나파타로 보냈다.

  어차피 로마가 배를 타고 오는 이상 나파타를 거치지 않으면 수도에 도달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나파타에서 확실하게 로마군을 격퇴하는 게 최선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샤바카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배를 타고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그는 나파타에 도착하기 전에 병력을 하선시켰다.

  "전군, 최대한 육로로 남하한다. 우리는 나파타를 거치지 않고 바로 수도 메로에를 칠 것이다."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명령에 군단장들은 당연히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마그누스 님, 하지만 나파타에 주둔 중인 적군에게 뒤를 공격당할 위험이 있지 않겠습니까."

  "괜찮다. 저들은 우리가 강을 거슬러 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저들은 우리 군단이 얼마나 빠르게 행군할 수 있는지 모른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을 때는 이미 우리는 수도 근처에 숙영지를 짓고 있겠지."

  "그렇긴 합니다만···그럼 이 선박들은 단지 눈속임을 위해 만든 것이었습니까?"

  "그럴리가."

  7개 군단이 탑승할 수 있는 배들을 고작 적을 한 번 속이기 위한 용도로 쓰고 버릴 리가 없다.

  폼페이우스는 수송부대의 대장에게 명령이 적힌 지령서를 건네며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할 일을 전부 적어두었으니 여기에 적힌 대로 따르도록. 다시 한 번 말해두지만 천재지변의 사고가 일어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판단을 우선시하지 마라."

  지금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병력은 그의 밑에서 해적소탕과 동방 평정을 이룩한 정예들이 아니었다.

  그가 동방을 완전히 평정한 건 이미 15년 가까이 지난 과거였다.

  그때 군인이었던 젊은이들은 이미 대부분이 은퇴했기 때문에 새로 병력을 뽑아야 했다.

  그래도 위대한 폼페이우스의 명성 덕분인지 새롭게 들어온 신병들도 총사령관의 명령에 비교적 잘 따르는 편이었다.

  배에서 내린 폼페이우스의 군단은 최고 강행군으로 쿠시 왕국의 수도인 메로에로 진격했다.

  예상대로 로마군이 강을 타고 올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쿠시 왕국은 허를 찔렸다.

  나파타를 방어하는 장수들이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을 때 폼페이우스는 이미 메로에에 하루거리까지 접근한 상태였다.

  "수도가 위험하다!"

  "왕께서 시급히 회군해 로마군의 뒤를 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예상외의 사태에 총지휘를 맡은 카쉬크와 타하르몬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두 사람이 이끄는 군사는 3만이 넘어갔지만, 이들 중 아무도 대규모 전쟁을 지휘해본 경험이 없었다.

  이들이 단순히 지위와 인맥으로 이런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 아니다.

  근 100년간 쿠시 왕국은 주변의 국가와 제대로 된 전쟁을 치러본 일 자체가 없었다.

  북쪽의 이집트는 로마의 보호국이 된 뒤로는 이빨 빠진 호랑이였고, 동남쪽의 악숨도 이제 막 나라의 틀을 갖춘 신생국이었다.

  가끔 충돌을 해도 그건 소규모의 국지전에 불과했을 뿐, 일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는 전투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로마와 싸우기로 결의를 한 뒤에도 로마군이 정확히 어느 정도나 강한지, 어떤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너무 오랜 기간 평화에 익숙해져 있던 대가였다.

  "일단 수도로 회군합시다. 만약 수도가 함락당한다면 우리는 로마군에 앞뒤로 포위당한 형국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파타 방어군은 수도를 포위하기 시작한 로마군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확실한 건 얼핏 봐도 수만 이상은 되는 게 확실한 대군이라는 것과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배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는 것이다.

  정확히 어느 정도의 규모로 군대를 나눴는지 파악이 되지 않았으니 당연히 헷갈릴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 최악의 경우를 피하는 선택을 하는 게 보통 인간의 심리였다.

  카쉬크는 타하르몬의 의견에 동의해 나파타를 포기하고 방어선을 뒤로 물리기로 했다.

  메로에가 점령당한다면 왕의 목숨이 위험한 것은 물론, 잘못하면 앞뒤에서 공격당하는 형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삼만이 넘는 대군이 일제히 수도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그토록 방비를 철저히 굳히고 있던 거점을 제대로 된 전투도 치르지 않고 포기한 것이다.

  병사들 사이에서 가벼운 동요가 일었다.

  카쉬크는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척후병을 내보냈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사흘도 못 되어 참담한 보고가 들어왔다.

  "척후 부대가 전멸당했습니다!"

  "뭐라고?"

  이번에는 카쉬크조차 당황할 수밖에 없는 보고였다.

  척후 부대는 처음부터 전투를 위해 내보낸 게 아니었다.

  적들과 충분히 거리를 둔 채 동향을 살피라는 명령을 두 번 세 번 강조하기까지 했다.

  그런 그들이 전멸당했다고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의 행동을 예상하고 척후 부대를 요격하기 위한 별동대를 매복시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길···교활한 놈들 같으니."

  참담한 기분이 들게 하는 비보는 시시각각 계속 이어졌다.

  "적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병력 규모 산출 불가!"

  어차피 수도 인근에 진을 치고 있을 게 뻔한 놈들이 어째서 이렇게 집요하게 정보를 차단하는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그래도 하늘의 도우심으로 메로에 인근의 부족들에게 연락이 닿았다.

  "로마군은 현재 숙영지를 건설하고 생전 처음 보는 요상한 병기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계에 엄청난 힘을 쓰고 있는 듯 매일 밤 엄청난 수의 횃불이 타오르고 있는 게 멀리서도 훤히 보입니다. 아마 곧 수도에 총공격이 시작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군. 공성병기를 조립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인가. 이쪽을 경계하게 만들어 행군 속도를 늦추고 최대한 빠르게 수도를 점령할 셈이었나 보군."

  상황을 파악한 카쉬크와 타하르몬은 부하들을 독려해 행군 속도를 올렸다.

  일단 메로에에 최대한 근접한 뒤에 하루 정도 병사들을 휴식하게 하고 로마군을 견제할 생각이었다.

  정석대로의 판단이었다.

  만약 로마군이 정말로 먼저 수도를 칠 생각이었다면 효과를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목적은 처음부터 메로에의 함락 따위가 아니었다.

  메로에를 구원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려온 쿠시 왕국군의 대병력이 넓은 평야 지대에 들어섰을 때였다.

  카쉬크는 상상도 못 한 광경에 입을 떡 벌린 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메로에의 앞에 주둔하고 있어야 할 로마군이 자신들을 가로막고 서 있었던 것이다.

  누구도 몰랐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최근 들어 인근 부족과도 연락이 잘되지 않았던 참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미 수도 공격이 시작됐을지도 모른다 싶어 급하게 달려온 것이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카쉬크는 넓게 펼쳐진 로마군의 횡진을 바라보며 극심한 패배감에 휩싸였다.

  이제야 폼페이우스의 노림수가 뭐였는지 깨달을 수 있었던 까닭이다.

  "처음부터 우리 군의 각개격파가 목적이었던 것인가······."

  방어를 철저히 굳히고 있는 나파타를 무리하게 공격했으면 로마군도 상당한 피해가 나올 수밖에 없다.

  거기에 시간이 끌리면 남쪽에서 올라오는 피앙카의 2만 대군이 지원군으로 합류하게 된다.

  폼페이우스는 그래서 수도를 치는 척하면서 카쉬크의 군대를 끌어냈다.

  척후병의 움직임을 철저하게 차단한 것도, 일부러 짚더미와 횃불을 잔뜩 세워 경계가 철저한 것처럼 위장한 것도, 여봐란듯이 공성탑과 파성추를 만들어댄 것도.

  전부 적에게 거짓된 정보를 주기 위한 기만전술이었다.

  카쉬크의 눈이 평야 저편을 향했다.

  적의 규모는 대충 어림잡아도 아군보다는 더 많아 보였다.

  악몽의 시작이었다.

  피앙카의 부대만 일찍 합류했어도, 병사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주기만 했어도 이 정도로 절망적이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방이 탁 트인 이런 지형에서는 도망쳐봐야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면치 못한다.

  카쉬크가 이를 악물었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직접 만나본 적도 없으며 당연히 얼굴조차 모른다.

  아는 거라고는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라는 이름뿐.

  이름 외에는 알지 못하는 로마 총사령관의 존재감에 마음이 짓눌렸다.

  '속국이 되라는 제안을···받아들이라고 설득했어야 했던 것인가.'

  카쉬크는 무겁게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후회란 시기를 놓치고 난 뒤에야 무참히 가슴을 후벼 파는 법이다.

  그리고 때늦은 한탄은 허망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압도적인 로마 군세가 쿠시 왕국군의 3만 군대를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

  "제길···메로에까지는 얼마나 남았나?"

  쿠시 남부에서 병력을 모아 북상하기로 했던 피앙카는 때아닌 로마군의 기습에 발이 묶인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나파타로 가려고 했지만, 수도 메로에가 공격당했다는 소식에 황급히 경로를 변경했다.

  일단 중간에 카쉬크와 합류해 병력의 규모를 늘린 뒤 로마군의 배후를 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알고 나타났는지 로마군의 궁기병이 끊임없이 화살을 날려대며 피앙카의 진군을 방해했다.

  수는 천 단위밖에 되지 않았지만, 보병 위주인 피앙카의 군대의 발목을 잡기엔 충분했다.

  폼페이우스가 궁기병대에게 내린 명령은 처음부터 단 하나였다.

  '적에게 피해를 입힐 생각을 하지 말고 행군 속도를 늦추고 적의 척후부대를 요격하는 것만 신경 써라. 그리고 적이 메로에에 충분히 가까워졌다면 뒤로 돌아가 적의 배후를 차단해라.'

  기병대장은 폼페이우스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피앙카는 궁기병대의 공격을 뿌리치며 우직하게 행군을 계속했다.

  그러나 궁기병들의 공격에 피해가 없도록 움직이니 자연히 움직임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폼페이우스가 예상한 경로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그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앞에서 짜증나게 굴던 궁기병대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췄다.

  피앙카는 찝찝하면서 동시에 마음이 후련해졌다.

  아마 메로에가 가까워졌으니 더 이상 행군을 방해하는 게 큰 의미가 없어졌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거기에 지금쯤이면 카쉬크와 타하르몬의 군대도 근처에 있을 테니 협공을 당하는 걸 우려한 움직임일 수도 있다.

  카쉬크의 부대가 이미 몰살당한 지 이틀이 넘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피앙카는 메로에로 통하는 남쪽 분지에 발을 들였다.

  좌우에 완만하게 경사진 고원을 끼고 넓게 펼쳐진 분지는 매복하기에 최상의 지형이었다.

  고원의 습지에 매복하고 있던 폼페이우스의 대군은 그대로 함정에 걸려든 피앙카의 군대를 급습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은 쿠시 왕국군은 제대로 된 대형조차 짤 시간이 없었다.

  "저, 적이다! 로마 놈들이 공격해온다!"

  "뭐, 뭐야. 수도를 공격하고 있다는 놈들이 왜 여기에 숨어 있어!"

  "나파타 방어군은 뭐하고 있는 거야!"

  병력의 수와 질에서 압도적으로 밀리는 판국에 기습공격까지 당했다.

  볼품없이 쓸려나가는 병사들을 본 피앙카는 겁에 질려 퇴로를 살폈다.

  그러나 어느새 후방으로 돌아온 로마의 궁기병들이 눈을 번득이며 도망가는 병사들에게 화살을 퍼붓고 있었다.

  피앙카는 못이라도 박힌 듯 자리에 멍하니 서서 반격하라는 말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변변한 전투조차 하지 못하고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부하들의 시신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윽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가 그의 온몸을 뒤덮고 지나갔다.

  ※※※※

  "지원군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샤바카는 불안감으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로마군이 수도 바로 앞에 숙영지를 건설했는데 어떻게 된 게 지원군의 그림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설마 이놈들···수도를 포기하고 더 후방에 방어선을 형성하기로 한 건가?"

  메로에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은 1만이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했다.

  굳건한 성벽이 있다고 해도 1만 정도로는 넓은 성벽을 전부 지키기란 무리다.

  결국 시간을 끈다면 아무리 방어를 굳혀본들 뚫리는 건 기정사실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샤바카는 불안감이 커질수록 자신의 안에 있는 투지도 점점 더 사그라지는 걸 느꼈다.

  그러던 찰나 그나마 남아있던 한 줌의 저항심마저 앗아가 버리는 일이 터졌다.

  "로마군으로부터 사절이 도착했습니다."

  "사절? 무슨 사절. 항복을 권하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하! 이제 보니 놈들도 급하긴 급한가 보군. 카쉬크와 타하르몬, 피앙카의 원군이 도착한다면 이쪽에도 기회가 온다. 놈들에게 항복 따위는 꿈도 꾸지 말라고 전해라."

  "원군 따위는 오지 못하오."

  당당하게 샤바카의 앞에 선 로마군의 병사는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상자를 세 개나 가져왔다.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

  그리고 세 개라는 숫자.

  "서, 설마······."

  그 안에 뭐가 들어있을지 예상한 샤바카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로마 병사는 그런 샤바카의 모습을 신경도 쓰지 않고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주변에서 비명을 지르는 신하들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샤바카의 귀를 울렸다.

  언제까지나 현실 도피를 하고 있어도 달라지는 건 없다.

  파르르 떨리는 샤바카의 눈동자에 눈을 감고 누워있는 쿠시 왕국 삼대 귀족의 시신이 비쳐들었다.

  "허억······!"

  옥좌에 앉아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볼품없이 바닥에 주저앉는 꼴을 보일 뻔했다.

  시신의 상태는 의외로 깨끗하고 부패하지 않도록 처리도 잘해놓은 상태였다.

  이런 점에서 명예와 형식을 중요시하는 폼페이우스의 성정이 잘 드러났다.

  "위대한 임페라토르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께서는 쿠시 왕국에 조건 없는 항복을 요구하셨소."

  "항복한다면···내 안전은 보장받을 수 있는 건가?"

  "왕의 지위는 내려놓아야 하겠지만, 신변의 안전은 절대적으로 보장해 주겠다는 게 임페라토르의 뜻이오."

  왕으로 계속해서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의미하는 건 뻔했다.

  폼페이우스는 쿠시 왕국을 로마의 속주로 삼을 계획인 것이다.

  그렇다고 샤바카가 여기서 계속 싸운다는 선택을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쿠시 왕국의 주력군은 괴멸당했고, 주요 장군들은 이미 모두 전사했다.

  싸우고 싶어도 싸울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왕좌에서 물러난다면···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건가?"

  "로마의 귀빈으로 대우받을 것이오. 원한다면 시민권을 얻어 로마의 귀족이 될 수도 있으니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라겠소."

  고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샤바카는 결국 스스로 성문을 열고 폼페이우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왕이 항복의 뜻을 밝히자 각지에 퍼져 있던 귀족들도 시민권을 대가로 로마에 충성을 맹세했다.

  이로써 쿠시 왕국은 완벽히 로마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약 천년을 이어온 쿠시 왕국이 로마의 속주로 들어가는데 걸린 시간은 단 50일에 불과했다.

  < 146. 최후의 원정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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