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중원에서 온 사신 >
152.
사나트루케스가 항복 문서에 조인하는 것으로 로마와 파르티아간의 전쟁은 끝이 났다.
물론 왕이 항복했다고 모두가 순순히 로마의 지배를 인정하는 건 아니었다.
워낙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냈기 때문에 아직 여력이 남아있는 귀족들이 있었던 까닭이다.
대다수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인정해준다면 로마의 지배를 인정하겠다는 입장이었으나, 강경파에 속한 이들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들의 저항은 오래가지 못했다.
수레나스가 반로마파 귀족들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해 연합을 형성하기도 전에 쓸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이 남긴 결과라고는 빠르게 파르티아를 정리하고 귀환하려고 했던 마르쿠스의 발목을 몇 달가량 잡아둔 것뿐이었다.
덕분에 속주 재편성이 늦어진 마르쿠스는 꼼짝없이 겨울을 파르티아에서 보내게 됐다.
"역시 파르티아의 영토 전체를 합병하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어. 쓸데없이 행정구역을 넓히는 꼴이 된단 말이야."
마르쿠스는 대책 없이 땅을 무작정 넓히기만 할 마음은 없었다.
사실 지금 로마의 영토만 해도 이미 거의 행정력의 한계에 도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기에서 동쪽으로 영역을 더 확장한다면 진지하게 제국을 나누는 것까지 고려해야 한다.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지금 로마의 기술과 제도의 발전 상태로는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게 최선이었다.
원나라의 역참 제도를 참고해 행정 시스템을 개선할 계획은 있었으나 아직 준비단계에 불과했다.
거기까지 가려면 마르쿠스가 로마의 모든 의사결정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전쟁에서 이기고 속주화를 선언했는데 이걸 그대로 놔둘 수도 없고······."
다른 지역은 몰라도 특히 국경을 담당하는 속주는 신속한 연락체계를 갖춰놓는 게 핵심이다.
파르티아의 동쪽 국경은 북방 유목민과 남쪽의 인도 세력이 전부 쳐들어올 수 있는 곳이라 특히 경계를 철저히 해야 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마르쿠스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직접적인 로마의 영토로 병합하는 건 자연 국경선으로 삼을 수 있는 이란고원까지.
그보다 더 동쪽에 있는 트란속시아나, 호라산, 발루치스탄을 남북으로 나눠 두 개의 괴뢰국을 세우기로 했다.
이곳은 현대로 치면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의 일부에 해당하는 상당히 넓은 지역이었다.
이곳에 들어설 두 개 국가는 오롯이 로마의 동쪽을 수호하는 방파제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북쪽의 왕조는 카렌 가문을 왕으로 삼게 했다.
로마에게 두 번이나 패하고 충성을 맹세한 카렌은 마르쿠스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가문의 수장이 될 수 없었던 그는 로마군과의 전쟁에서 전대 가주와 그 아들이 전부 죽은 덕분에 가문을 이어받았다.
그래서 로마를 두려워하는 마음은 있을지언정 뼛속까지 원망하는 기색은 없었다.
예상대로 카렌은 마르쿠스에게 감사해 하며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했다.
남쪽의 왕조는 수레나스의 가문을 왕으로 세웠다.
수레나스 본인은 마르쿠스의 밑에 있어야 하니 그의 가까운 친족 중 한 명을 골라 왕으로 만들었다.
이 두 국가는 형식상으로는 왕조였으나 실상은 로마 총독의 지배를 받은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왕위 계승이나 외교, 전쟁 같은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려면 반드시 로마의 허락이 필요하도록 법을 만들어 놓았다.
군왕보다는 일종의 분봉왕에 더 가까운 자리라 할 수 있었다.
마르쿠스는 이후로 혼란이 생기지 않도록 카렌과 수레나스를 불러 주의를 주고 새로운 국가의 체계를 잡아나갔다.
"그런데 마르쿠스 님, 사나트루케스의 처분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사나트루케스? 글쎄···로마로 압송하는 것까지는 정했지만 그 이상은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그러면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한 마디 이의도 내놓지 않고 수레나스가 처음으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나섰다.
마르쿠스는 얼마든지 하라는 의미로 말없이 손짓을 보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수레나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사나트루케스는 감히 마르쿠스 님을 암살하려고 한 대역 죄인입니다. 개선식에서 구경거리로 삼는 치욕 이상의 형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오로데스에게 했던 것보다 더욱 무거운 벌을 내렸으면 한다는 거로군."
"예."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사형이나 노예형을 언도할 수는 없어. 사형은 로마의 전통에 어긋나고, 노예로 부리는 건 파르티아 현지 귀족들의 불만을 초래할 빌미가 될 수 있으니까. 일국의 왕이었던 사람을 그렇게 대우하는 건 로마의 품격을 훼손하는 일이기도 하고."
수레나스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졌다.
단순히 과거에 섬겼던 오로데스의 복수를 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수레나스는 자신의 손으로 파르티아를 멸망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그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었다.
자신들을 밀어내고 왕좌에 앉은 결과가 고작 이런 거였냐며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물론 이게 일종의 화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잘 알았다.
마르쿠스도 수레나스의 심리를 짐작하고 있었으나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사람인 이상 분노나 원망의 감정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
마르쿠스는 오히려 수레나스의 감정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있어서 만족스러운 기분이었다.
"사나트루케스는 로마에 가면 어쩔 수 없이 오로데스와 마주하게 될 때가 올 거야. 그게 그자에게는 가장 큰 굴욕과 고통이 되지 않을까?"
"···그렇군요.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로마로 돌아가는 건 아무리 빨라도 내년이 될 테니 벌써부터 모든 걸 정할 필요는 없어."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더 빨리 반란을 제압했다면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아니. 어차피 속국을 두 개나 새로 만들어야 했으니 늦어질 수밖에 없었을 거야. 이왕 이렇게 된 거 간만에 여유를 즐겨봐야지."
마르쿠스는 아껴둔 포도주를 따라 여유롭게 잔을 기울였다.
클로디우스가 제대로 일을 처리한다면 조금 늦게 간다고 계획에 차질이 생기진 않을 것이다.
아니, 귀환이 늦어지는 게 오히려 더 극적인 효과를 불러올지도 모른다.
어차피 일은 벌어졌으니 아쉬워하는 건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이후의 계획을 검토하고 수정할 건 수정하는 게 백배는 더 효율적이리라.
마르쿠스는 간만에 찾아온 여유로운 휴식을 제대로 즐길 생각이었다.
그러나 귀환 일정이 늦어진 나비효과는 생각보다 커다란 사건을 몰고 왔다.
"동방에서 온 사신이 파르티아를 정복한 총독님과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국경을 통과했다고 하니 며칠 내로 이곳 엑바타나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동방에서 왔다고? 인도 스키타이나 사타바하나에서 사신이 온 건가?"
"아닙니다. 그보다도 더 동쪽에 있는 한이라는 나라에서 온 사신입니다."
부하의 보고에 마르쿠스의 표정이 급변했다.
"한나라에서 사신이 온다고? 파르티아가 원래부터 한나라와 그렇게 자주 교류를 하는 사이였나?"
마르쿠스의 질문에 파르티아 관료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아는 바에 의하면 한나라와 사신을 주고받은 지는 이미 수십 년이 됐습니다."
"상단이 오고가는 정도가 아니라 정식으로 국가 간 사절을 교환했다 이 말인가?"
"예. 동방의 한나라는 과거 최고 성세를 누리고 있던 파르티아 이상의 영토와 국력을 보유한 강대국이었습니다. 그곳의 왕은 스스로 하늘의 아들이라 자처하며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관료의 설명은 당연히 마르쿠스도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이 정도로 상세한 내용을 알고 사신들까지 주고받았으면 실제로 꽤 교류가 있었던 건 사실이라고 봐야겠군.'
역사상 로마가 한나라와 직접적인 접촉을 한 건 2세기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의 일이었다.
그마저도 공식적인 접촉이었는지, 아니면 일개 상단이 방문했던 것인지 확실치 않았다.
그 점을 고려해 본다면 파르티아는 로마보다 거의 200년을 먼저 한나라와 교류를 맺은 것이다.
사실 로마가 한나라와 쉽게 왕래하지 못했던 이유는 거리상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바로 중간에 위치한 파르티아가 훼방을 놓았기 때문이다.
파르티아는 로마에서 포도주와 금은세공을 수입해 한나라에 판매하면서 동시에 한나라의 비단을 로마에 수출했다.
통행료라는 이름의 막대한 중간수수료를 취했음은 물론이다.
이 때문에 로마와 한나라가 인식하는 설탕과 비단의 가격은 정상적인 가격보다 몇 배나 더 높았다.
하지만 로마가 파르티아를 정복한 이상 이제 더 이상 두 나라의 교역을 방해하는 장애물은 없었다.
마르쿠스도 때가 되면 한나라에 상단을 동반한 사절단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고맙게도 저쪽에서 먼저 스스로 찾아왔다고 한다.
원 역사보다 수백 년 더 앞선 역사적인 만남이 성사될 때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온 것이다.
"귀한 손님이니 불편함 없이 정중히 대우하도록. 최대한 빠르게 그들과 접견할 예정이니 필요한 준비를 전부 마치도록 해라. 실수는 용납하지 않겠다."
"예. 지금 즉시 시행하겠습니다."
마르쿠스는 지금까지 파르티아가 한나라와 주고받은 모든 공식 문서를 즉시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한나라 사신의 방문 목적은 파르티아와 맺었던 조약을 로마와 다시 체결하는 것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두 나라 사이에 어떤 협정이 오고 갔는지 전부 파악해둘 필요가 있었다.
이윽고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들고 온 관료는 가장 오래된 문서들부터 차례대로 내용을 번역해주었다.
마르쿠스가 페르시아어를 몰랐기 때문에 부득이하게도 이런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생각보다 파르티아가 한나라와 밀접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도 대강 짐작이 갔다.
마르쿠스가 만든 설탕이 그 원인이었다.
원 역사와 다르게 파르티아는 로마에서 수입한 설탕을 동아시아에 팔아 엄청난 이윤을 보고 있었다.
한나라의 상인들은 이 설탕을 얻기 위해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기꺼이 지불했다.
심지어 비단에 웃돈을 얹어서 설탕과 교환하는 상인들도 부지기수였다.
이렇게 한나라로 들어간 설탕은 자연스럽게 황족들의 입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반응은 극적이었다.
현 한나라의 천자 효선황제 유순은 이 설탕을 반드시 대규모로 수입해 오라고 상인들을 닦달했다.
물론 본인만 먹으려고 한다면 대상단을 몇 개나 파견할 정도로 신경을 쓰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 설탕을 주변의 조공국들에게 과시용으로 조금씩 나눠줄 계획이었다.
실제로 효과는 끝내줬다.
한나라에게서 설탕을 처음으로 받아본 조공국들은 중원의 놀라운 기술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부여 같은 경우는 조공품을 2할 가까이 늘리고 설탕을 조금만 더 받아가기를 청할 정도였다.
이제 설탕은 한나라 주변의 국가들이 사여품으로 가장 받기를 원하는 상품이었다.
효선황제는 이 단맛을 내는 신묘한 가루를 천자의 위엄을 드러내는 수단 중 하나로 삼았다.
그러려면 설탕의 수출은 온전히 한나라 상인들에게만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한나라는 일찌감치 막대한 금액을 내고 파르티아에게 설탕의 독점 수입권을 얻어냈다.
파르티아로서도 판매창구를 단일화하고 돈을 추가로 더 받을 수 있다면 나쁠 게 없는 제안이었다.
두 국가는 그렇게 지금까지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해왔다.
여기까지 보고를 들은 마르쿠스는 이제 한나라의 사신이 어떤 요구를 할지 확실히 알았다.
'원하는 건 파르티아가 그랬듯 자신들에게만 설탕을 팔아달라는 것이겠군.'
적절한 대가를 바친다면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는 제안이었다.
마르쿠스는 사신을 직접 만나서 나머지 세부사항을 조율해보기로 했다.
며칠 뒤 엑바타나에 도착한 한나라의 사신은 마르쿠스의 예상보다 공손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옥좌에 앉아 사신을 맞이한 마르쿠스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파르티아를 정복한 위대한 군주님을 뵙습니다. 저는 천자의 명을 가지고 온 번의라고 하옵니다."
"반갑네. 로마 동방속주를 총괄하는 총독 마르쿠스 크라수스일세."
번의는 총독이라는 말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중국 왕조의 사신이라면 오만함을 기본으로 깔고 간다는 선입견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송구하오나 총독님. 총독이란 지위는 저희에게는 생소한지라 총독님의 위상을 정확히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혹여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가르침을 내려주실 수 없을런지요."
"파르티아와는 오래 교역을 했다고 들었는데 로마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는 것인가?"
"파르티아가 판매하는 진귀한 물건은 전부 서쪽의 대국에서 들여온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귀국을 대진국이라 칭하고 있는데 부끄럽게도 아직 이렇다 할 정보는 없습니다. 사실 저희는 귀국과 직접적인 교류를 하고 싶었으나 파르티아가 그렇게 놔두지를 않았습니다. 하여 이번 기회를 살려 상호교류를 트고 서로를 알아가자는 취지에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건 반가운 말이로군. 우리로서도 이의가 없는 제안일세. 그리고 우리의 정치 체제는 귀국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바로 이해를 시키는 건 어려울 것 같네. 일단 알기 쉽게 말해주자면 이 파르티아 전역을 통치할 권리가 현재 전적으로 나에게 위임되어 있다고 보면 될 걸세."
"오오, 그러시군요."
감탄사를 흘리긴 했지만 번의는 아직까진 좀처럼 감이 오지 않았다.
통치할 권리를 받았다고 해도 그 범위가 너무 모호했다.
파르티아를 정복했다고 하니 군권을 쥐고 있는 건 맞겠지만, 행정이나 외교는 또 다른 문제가 아니던가.
번의가 느끼는 곤혹스러움을 꿰뚫어 본 것처럼 말이 이어졌다.
"통치할 권리는 말 그대로의 의미라네. 이번에 정복한 파르티아와 내가 원래 다스리고 있던 서쪽의 속주에서는 사법, 입법, 행정, 외교의 모든 권한이 나에게 집중되어 있다고 이해해도 무방할 걸세."
"이제야 확실히 이해가 되옵니다."
번의는 처음에 상대방을 군주로 칭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넙죽 고개를 숙였다.
사법, 입법, 행정을 전부 처리하고 외교도 마음대로 맺을 수 있다면 그게 왕이지 뭐란 말인가.
번의의 머릿속에서 마르쿠스는 파르티아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샤한샤로 굳어졌다.
"그러면 총독님, 우선 위대한 승리를 거두신 것을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사실 이번 전쟁의 경과를 이리로 오는 도중에 보고 받았기 때문에 약소한 선물밖에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다음에 방문할 때는 이보다 곱절의 예물을 준비해두겠습니다."
"귀국의 마음 씀씀이에 감사하는 바일세. 귀국에서는 설탕이 귀하다고 하던데 넉넉히 챙겨줄 테니 요긴하게 사용하게나."
"크나큰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마르쿠스는 번의가 가져온 비단을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이 비단은 원래 그를 따라온 상인들이 파르티아와 교역하고 설탕을 사기 위해 마련한 물품이었다.
그런데 번의가 실크로드를 따라오는 도중 갑작스레 로마와 파르티아의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시 발길을 돌려 돌아가야 하나 고민이 들었지만, 번의는 일단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가 알기로는 서쪽의 대진국은 파르티아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국가였다.
자세한 사항은 몰랐지만 저번 전쟁에서 파르티아가 패해 상당한 영토를 잃었다는 것까지는 확인한 사실이었다.
어쩌면 이번 전쟁에서 파르티아가 대진국에게 멸망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기존에 맺었던 조약을 처음부터 전부 새롭게 다시 체결해야 한다.
번의는 즉각 부하를 돌려보내 사정을 설명하게 하고 새로운 지침을 내려줄 것을 천자에게 요청했다.
효선황제는 번의의 정확한 판단을 치하하고 대진국과 파르티아의 전쟁 결과를 지켜보라는 명을 했다.
그리고 만약 대진국이 승자가 된다면 그들과 직접 교역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일렀다.
놀랍게도 중원에 돌려보낸 사신이 돌아오고 얼마 뒤 전쟁이 끝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한나라는 파르티아가 왕중왕을 칭할 정도로 강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최근에는 국력이 많이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파르티아를 그렇게 약화시킨 것도 대진국이었다.
번의는 새롭게 접하게 된 이 미지의 강대국과 최대한 친밀한 관계를 맺어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마르쿠스가 내심 놀랄 정도로 공손한 태도는 이런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선물을 주고받으며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고 판단한 번의가 슬슬 본론을 꺼내놓았다.
"총독님, 사실 제가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이 제안은 결코 귀국에 손해가 되진 않을 것이니 한 번 검토해 주시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좋아, 말해보게."
"감사합니다. 저희는 원래 파르티아에게 설탕의 독점 공급을 약속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파르티아는 사라졌고 귀국이 그 자리에 들어섰지요. 저희는 파르티아를 지배하는 귀국과 동일한 조건으로 계약을 계속 이어나가기를 원하옵니다."
"사실 나도 그 부분은 검토해보았네. 그쪽에서 여러 국가에 수출하는 것보다 더 높은 이윤을 보장해 준다면 같은 조약을 맺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일세."
곧바로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오자 번의의 안색이 환해졌다.
"물론입니다. 파르티아도 저희에게만 설탕을 파는 게 더 이득이라는 계산이 섰기 때문에 그런 협정을 맺었던 것이옵니다."
"그러면 설탕의 가격은 어디 보자···이 정도가 어떻겠나?"
마르쿠스는 파르티아에게 판매하던 것보다 3할의 가격을 더 붙여 제시했다.
물론 엄청난 폭리를 취하던 파르티아에게서 설탕을 사던 한나라로서는 상상 이상으로 저렴한 가격이었다.
"충분히 지불할 수 있습니다."
로마는 설탕을 공급할 상대가 파르티아에서 한나라로 바뀌기만 했을 뿐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런데도 이익은 3할이 늘었으니 가만히 앉아서 엄청난 이득을 본 셈이었다.
게다가 한나라가 결과적으로 설탕을 더 싼 값에 사게 되었듯, 로마도 한나라에서 들여오는 비단을 훨씬 더 저렴한 값에 구매할 수 있게 됐다.
"서로가 만족할 수 있는 협상이 되어 참으로 기쁘군."
마르쿠스는 희희낙락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번의에게 마주 웃음을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도 한 가지 제안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나?"
"예,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아무래도 귀국과 우리는 이번에 처음 접하게 됐으니 서로에 대해 너무 모르지 않나. 해서 문화 교류를 하는 차원에서 사절단을 교환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오오,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천자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번의는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대진국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모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사절단을 보내 공식적으로 정보를 얻어낼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바랄 게 없었다.
무엇보다 기회가 된다면 설탕의 제작법을 비밀리에 빼내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로마가 역으로 비단의 제조법을 빼내 갈 수도 있겠지만, 그건 무리라고 확신했다.
비단은 만드는 방법이 복잡할뿐더러 누에나방의 고치에서 빼낸 실로 천을 짜는 것이다.
이 사실은 철저한 비밀로 관리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단계에서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번의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르쿠스는 이미 비단의 제조법 따위는 전부 알고 있었다.
심지어 한나라 시기의 비단보다 더욱 품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었다.
필요한 건 질 좋은 비단을 생산하는 누에의 품종뿐이었다.
비단 생산법에 대한 관심을 일절 보이지 않으면 한나라의 감시망도 누그러질 터.
그 틈에 누에 알을 가져올 방법이야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
서로 다른 꿍꿍이속을 지닌 마르쿠스와 번의는 웃으며 사절단의 출발 일정을 논의했다.
마르쿠스는 알지 못했지만 한나라로 돌아간 번의는 마르쿠스의 직함을 파르티아의 왕이 사용하는 샤한샤, 즉 왕중왕이라고 기록해놓았다.
역설적이게도 마르쿠스를 왕이라고 표기한 첫 사례는 이렇듯 서방이 아닌 동방의 한나라의 기록에서 발견되게 된다.
< 152. 중원에서 온 사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