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향료 전쟁 >
166.
완전히 사기가 오른 로마군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며 연합군의 군대를 으깨버렸다.
스파르타쿠스로 말하자면 이미 적의 심장부까지 도달해 있었다.
총사령관인 아사드는 스파르타쿠스의 눈에 띄어 거의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다.
한눈에 봐도 그가 사령관임을 알아본 스파르타쿠스는 거침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를 호위하는 병사들이 떼거지로 인간 방패막을 형성하지 않았다면 아사드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대신 용감하게 앞을 막아선 전사들의 목숨은 허무하게 날아갔다.
촤악! 퍼어억!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부하들의 팔다리와 머리가 허공을 날았다.
아사드는 이 이상 처참한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다.
힘야르 왕국의 기병대 역시 이미 거의 전멸 직전이었다.
나바테아 왕국군을 공격한 하드라마우트의 병력만 그나마 멀쩡한 꼴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중앙이 뚫리면 그들도 자연스레 고립되어 전멸할 수밖에 없다.
"후, 후퇴! 후퇴하라! 전군 후퇴!"
사신이 목덜미까지 임박했음을 너무 늦게 알아차린 그는 재빠르게 말에 올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꽁무니를 뺐다.
총사령관의 후퇴에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병사들도 겁을 집어먹고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직 적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후방 부대는 조금이라도 빨리 도망가기 위해 방패와 무기를 집어 던지고 전력으로 내달렸다.
반면 이미 전투에 돌입한 전열의 병사들은 그조차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저 등을 보인 채 후퇴하는 아군 병사들의 모습을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볼 뿐이었다.
뒤늦게 달아나려 해보았으나 이미 그들은 로마군의 사냥감이었다.
무기를 버리고 납작 엎드린 이들은 포로로 잡혔지만 상황 파악이 늦은 자들은 가차 없이 도살당했다.
하늘에서 올려다본 해안 평원에는 어느새 선홍색의 꽃이 피었다.
사방에 흩뿌려진 연합군 병사들의 핏자국이 만들어낸 자국이었다.
스파르타쿠스는 굳이 전의를 상실한 자들을 쫓아가 베지 않았다.
그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버리고 천천히 아군 진영을 향해 귀환했다.
병사들은 좌우로 쫙 갈라졌고 평원이 떠나가라 함성을 내질렀다.
"스파르타쿠스!"
"로마 인빅타!"
승리를 거머쥔 로마군은 이번 전투의 주역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마르쿠스도 당당하게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스파르타쿠스를 향해 투구를 벗어 경의를 표했다.
압도적인 승리, 위대한 검투사 출신의 병사가 최강의 군단장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 군단장은 뒤늦게 숨을 몰아쉬며 도착한 백인대장들을 흘겨보며 핀잔을 주었다.
"쯧쯧, 그렇게나 단련을 시켰는데 뒤처지다니. 아무래도 훈련이 모자랐나 보군"
"아니, 군단장님···솔직히 저희가 그걸 어떻게 따라갑니까."
"뒤를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솔직히 아찔했습니다. 수만의 대군 사이로 그렇게 뛰쳐나가시면······."
"그러니까 자네들이 충분히 따라올 수 있도록 조절하면서 돌파하지 않았나. 제시간에 맞춰 합류하기만 했어도 적의 총사령관을 놓칠 일은 없었을 텐데."
"···그러니까 다른 군단장님들은 지휘를 하신다고요."
백인대장들이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대로 놔두면 한바탕 설교가 이어질 거라고 판단한 마르쿠스가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도 대승을 거뒀으니 일단 지금의 분위기를 즐기도록 하자. 그래도 12군단이 혹독한 훈련을 통과했으니 그나마 네 뒤를 따라갈 수라도 있던 게 아닐까. 다른 군단이었으면 어림도 없었을 거야."
"제가 직접 훈련시킨 병사들이니까요."
스파르타쿠스의 자부심 어린 대답에 백인대장들도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는 사이 마르쿠스의 곁으로 다가온 샤킬라빌이 아직도 얼떨떨한 얼굴로 축하를 건넸다.
"위대한 승리를 경하드립니다, 총독님. 소문으로만 듣던 로마군의 강력함을 이렇게 눈으로 보게 되니 그저 놀랍다는 말씀밖에는 드릴 길이 없군요."
"자네도 수고했네. 나바테아의 군대가 든든히 버텨준 덕분에 좌익과 우익의 병사들이 손쉽게 적을 돌파할 수 있었어. 이번 전쟁에서 그대들이 세운 공은 내 잊지 않도록 하지."
마르쿠스가 샤킬라빌을 적당히 추켜 세워주자 그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저희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번 대승은 전적으로 총독님의 지휘와 스파르타쿠스 군단장의 놀라운 무력이 만들어낸 결과이지요."
샤킬라빌은 로마에게 항복하자고 강력히 주장했던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만약 주전파의 선동에 넘어가 로마군과 대적했다면 어떻게 됐겠는가.
지금 그가 이끄는 병사들의 태반은 평원에 너부러져 있는 연합군의 병사들과 한 치도 다를 바 없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처음 말리쿠 1세가 회담에서 돌아왔을 때는 너무 과한 조건으로 협정을 체결한 게 아닌가 하는 말들이 많았다.
화친을 주장했던 샤킬라빌 역시 내심 그런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 회전을 보고 확신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로마와 적대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본국에 돌아가는 즉시 보고를 올려야겠군. 만약 주전파 놈들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면 로마의 힘을 빌려서라도 놈들을 찍어내야겠어.'
그가 지금까지 옆에서 본 바로 마르쿠스라는 인물은 섬기기에 이상적인 지도자였다.
적대하는 자는 가차 없이 짓밟으면서도 따르는 자에게는 아낌없는 수혜를 베풀었다.
이번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바테아군을 굳이 띄워주며 막대한 전리품을 약속하기까지 했다.
'앞으로 나바테아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로마의 편에 붙을 수밖에 없다. 아니, 로마가 아니라 마르쿠스 총독에게 충성을 바치는 게 정확한 표현인가.'
로마의 총독은 본래 임기가 정해져 있는 관직이었으나, 샤킬라빌은 마르쿠스가 로마로 돌아가더라도 동방의 권력을 손에서 놓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니 지금부터 미리 좋은 인상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는 마치 왕을 대하듯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물었다.
"적들은 이 전투만으로 절반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계속 몰아쳐서 전쟁을 끝내시겠습니까?"
"아니. 이제 저들도 정면승부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는 걸 알았을 테니 우리가 싸우려고 해도 싸워주지 않을 걸세. 철저히 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전으로 갈 텐데 무리하게 공격하면 이쪽도 피해를 볼 수 있지 않겠나."
"로마군은 공성전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물론 저들이 성에 틀어박힌다고 함락을 못 시킬 거란 생각은 하지 않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쥐는 가끔 고양이를 물기도 하는 법. 괜히 사서 피해를 보고 싶지는 않군."
아무리 연합군이 대패했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아직 최소 3만 이상의 군대가 남아 있었다.
3만 이상의 군대가 지키는 도시를 공격하려면 상당한 준비를 갖출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공성전은 회전과는 달랐다, 아무리 질 좋은 갑옷과 병기로 무장하고 있더라고 해도 피해를 입지 않고 도시를 점령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던 찰나. 유심히 지도를 살피고 있던 수레나스가 한 가지 전략을 제시했다.
"사바 왕국의 수도인 마리브 근처에는 거대한 댐이 있다고 합니다. 이 댐이 없으면 마리브는 도시 유지에 필요한 물을 구할 길이 막힙니다. 댐을 파괴하고 인근의 수원에 숙영지를 건설하고 대기하고 있기만 해도 손쉽게 적들을 무력화할 수 있을 겁니다."
"효과적인 전략이긴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 댐을 부숴버리면 마리브란 도시는 가치가 없어지잖아. 현지 주민들에게 공포를 줄 수는 있어도 뿌리 깊은 증오심을 함께 심어주게 될 거야. 이후의 통치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는 최대한 배제해야지."
"그 점을 간과했군요."
"그래도 효과적인 압박수단으로 쓸 수는 있겠네. 괜찮은 생각이었어."
샤킬라빌이 마르쿠스에게 재차 물었다.
"전면전을 피하고 적을 압박하실 계획이라면···혹시 외교로 전쟁을 마무리 지으실 계획이십니까?"
"눈치가 빠르군."
"하지만 연합군이 순순히 항복하겠습니까. 평원에서 적을 전멸시켰으면 몰라도 절반에 가까운 병력이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아까 말씀하신 대로 저들도 성안에서 공성전으로 시간을 끌면서 버티려고 할 텐데요."
"자네는 혹시 연합을 깨부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뭔지 아나?"
샤킬라빌은 신중하게 고민하다가 답을 내놓았다.
"역시 내부분열을 유도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정확하네. 저들 중 단 하나만 연합을 깨고 나오게 하면 돼. 그러면 그걸로 연합은 끝장날 테니까. 그러려면 사신을 보내서 미끼를 던져줄 필요가 있는데······."
"제가 가겠습니다!"
샤킬라빌은 망설이지 않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바테아의 사령관 자격인 자네가 직접 가면 더 일이 쉽게 풀리겠지만, 그렇게 해주겠나? 일이 잘못 풀리면 위험해질 수도 있을 텐데."
"물론입니다."
샤킬라빌은 결연한 표정으로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라고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
궁지에 몰린 남부 연합군이 최후의 항전을 불사하겠다며 사신의 목을 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확실히 일을 잘 수행해 낸다면 마르쿠스에게 눈도장을 확실히 찍을 수 있다.
샤킬라빌은 나바테아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여기서 승부수를 던져보기로 했다.
그의 속내를 읽은 마르쿠스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샤킬라빌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자네의 각오를 높이 사서 중책을 맡기도록 하겠네. 성공한다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약속할 테니 최선을 다해 보게."
※※※ 해안 평원에서의 충격적인 패배는 즉각 연합국 전체에 펴졌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병사들의 입을 통해 자세한 내용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덕분에 대략적인 전투 양상이 단 사흘 만에 사바 왕국 전역에 널리 알려졌다.
8만의 대군 중 절반에 가까운 병사들이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이야기.
로마군 갑옷과 무기는 연합군의 장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것.
거기에 로마군에는 단신으로 수만의 대군을 돌파해 지휘관의 멱을 따버리는 괴물이 있다는 말까지.
온갖 정보가 살까지 붙어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그래도 연합군은 아직 모든 희망을 버리진 않았다.
평원에서 전멸했다면 몰라도 아사드의 빠른 판단 덕분에 절반의 병사들이라도 건졌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방어를 굳히고 날씨가 더워질 때까지 견딘다면 더위에 익숙하지 않은 로마군은 체력적으로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 전투에서는 패하더라도 전쟁에서 이기는 건 결국 우리가 될 것이다. 그러니 모두 마음 단단히 먹고 마지막까지 힘을 하나로 모아주길 바란다."
샤킬라빌이 사신으로 도착한 건 그렇게 아사드가 연합군의 결속을 한창 다지고 있을 때였다.
연합군은 나바테아의 사령관이 직접 사신으로 왔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동시에 확신했다.
역시 로마가 나바테아를 돕기 위해 군사를 지원했다는 사실은 핑계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실질적인 군통수권은 나바테아가 아니라 로마가 가지고 있다고 봐야 했다.
샤킬라빌이 온 목적도 뻔했다.
분명 항복을 권하러 온 것이리라.
로마가 전쟁에서 패한 자들에게 제안하는 항복 조건은 이미 연합군도 알고 있었다.
현지 귀족들의 기득권을 그대로 인정해주는 속주화는 분명 귀가 솔깃할 만한 제안이었다.
전쟁에서 진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왕족을 제외한 기득권층이 져야 할 부담은 없었다.
그러나 연합군은 이미 싸우기로 결의를 다진 상황이었다.
그냥 바로 내치자는 말들이 주류를 이뤘다.
그러나 최소한 이야기는 들어보자는 말도 소수나마 있었다.
적들이 원하는 걸 알면 대비책을 세우기도 쉽고, 시간을 끌기도 좋지 않냐는 이유에서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에 연합군은 샤킬라빌의 제안을 검토해보는 척하기로 했다.
아사드와 다른 4국가의 사령관들은 국왕을 대신해 샤킬라빌을 맞이했다.
샤킬라빌이 각국의 사령관들이 있는 자리에서 회담을 가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소. 피차 서로를 환영할 입장은 아닐 테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원하는 게 뭐요?"
바로 얼마 전에 회전에서 대패한 탓인지 아사드의 반응은 결코 곱지 않았다.
샤킬라빌은 그런 상대방의 태도에도 여유로운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유창한 사바어를 구사해 마르쿠스에게 건네받은 요구사항을 밝혔다.
"로마와 본국이 그대들에게 바라는 건 단 한 가지입니다. 즉시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십시오. 그러면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지금 누리고 계신 권리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배상금은 당연히 지불해야겠지?"
"전쟁에서 패한 이상 배상금은 당연히 승자가 가져가야 할 권리가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영토 전역이 초토화되는 것보다 배상금을 지불하고 깔끔하게 손을 씻는 게 훨씬 더 이득이 아닐까 싶은데요. 게다가 여기 계신 왕국의 유력자분들은 로마의 시민권을 받아 로마의 귀족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귀가 솔깃할 만한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아사드를 비롯한 연합군의 사령관들은 코웃음을 쳤다.
로마에게 쓴맛을 본 힘야르 왕국의 지휘관이 눈살을 찌푸리며 이를 갈았다.
"여기까지 와서 한다는 말이 정말로 그런 허튼소리라니. 평원에서 도륙당한 내 부하들의 원수를 갚기 전까지는 화친 따위 없을 테니 썩 돌아가라!"
사령관들은 모두가 동감이라는 듯한 마디씩 로마와 나바테아를 성토하는 발언을 입에 담았다.
그래도 샤킬라빌의 얼굴에서는 여유로운 빛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반응이 나올 거라고는 이미 마르쿠스에게 들어두었던 바다.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죽음을 불사하고 저항하겠다는 의지에는 경의를 표합니다. 하지만 이곳 마리브를 계속 지키는 건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당장 마리브댐에 문제라도 생기면 이 근방이 초토화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텐데요."
"네, 네놈들 설마 댐을······!"
"진정하십시오. 어디까지나 만약의 일을 가정하는 겁니다. 저희는 그런 무도한 일을 할 마음이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연합군이 사바 왕국을 계속 방어해내는 건 어렵지 않겠냐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아까 제가 말씀드린 제안 말인데, 사실 그게 끝이 아닙니다."
샤킬라빌은 일부러 말을 잠시 끊었다.
한 차례 사령관들을 둘러본 그는 일부러 목소리를 살짝 낮추고 달콤한 유혹의 말을 속삭였다.
"이번 전쟁의 전권을 쥐고 계신 로마의 마르쿠스 총독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먼저 항복의 의사를 밝힌 국가에게는 전쟁의 배상금을 일절 물지 않겠다고요."
"······!"
소리 없는 충격이 실내를 휩쓸었다.
이게 자신들을 분열시키려는 계획임을 간파한 아사드가 쾅 하는 소리가 나게 책상을 내려치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교활하게! 우리가 그런 저급한 술책에 넘어갈 줄 아는 것인가!"
"술책이라니요. 그저 저는 총독님의 제안을 전해드릴 뿐입니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도 로마는 원로원이라는 귀족 기구에 의해 운영된다는 걸 잘 아실 겁니다. 이번 전쟁의 사령관인 마르쿠스 님도 그 원로원의 일원이고요. 그분께서는 가장 먼저 항복 의사를 밝힌 사령관의 가문을 10년 안에 원로원의 일원으로 받아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
사령관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 그런 허황된 약속을 누가 믿는다고······."
"파르티아나 아르메니아도 항복한 귀족들은 전부 시민권을 얻고 지위와 재산도 다 보존했습니다. 그건 조금만 알아봐도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분께서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요."
이번 조건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했다.
로마 원로원이라는 건 그만큼 엄청난 이름값을 지녔다.
솔직히 샤킬라빌도 마르쿠스의 원로원 의석을 이민족들에게 개방하려는 의도를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술렁이는 걸 느낀 아사드는 사신을 받아들인 결정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고려할 가치도 없는 헛소리요! 회담은 이걸로 끝이오!"
억지로 자리를 파한 아사드는 반강제로 샤킬라빌을 자리에서 밀어냈다.
그는 자리를 나가며 힐끗 뒤를 돌아보고는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저는 하루 동안 기다리고 있을 테니 생각이 있으신 분은 찾아오시길 바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샤킬라빌은 자리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실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색하게 다른 사령관들의 눈치를 살핀 아사드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난 저런 제안에 넘어가는 배신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다른 이들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거요."
"당연하지요. 전 그 정도로 바보가 아닙니다."
"하, 누가 로마의 원로원 자리 따위가 탐이 난답니까?"
카타반과 하드라마우트의 사령관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그러면서도 사령관들은 서로의 속내를 읽어보려는 것처럼 계속해서 곁눈질을 주고받았다.
겉으로는 절대 유혹에 넘어가지 말자고 약속을 나눴으나 주변을 맴도는 공기엔 찝찝한 느낌만이 한가득 배어있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밤이 깊어지자마자 누군가가 샤킬라빌에게 방문했다.
낮에 있었던 회담에서 로마의 제안을 누구보다 바보 취급했던 카타반의 사령관이었다.
샤킬라빌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비밀스럽게 면담을 청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166. 향료 전쟁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