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7. 부고 (168/326)

  < 167. 부고 >

  167.

  카타반의 사령관 샤리프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실히 살핀 뒤 샤킬라빌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는 샤킬라빌과 인사를 나누자마자 다짜고짜 본론을 꺼냈다.

  "내가 처음으로 온 것 맞소?"

  "축하드립니다. 가장 먼저 기회를 잡으신 게 맞습니다."

  그 말을 들은 샤리프의 입이 귀밑까지 걸렸다.

  "낮에 했던 그 말은 아직 유효한 게 확실하오?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고 내 가문을 로마의 원로원에 넣어주겠다는······."

  "물론입니다."

  "좋소. 그리고 혹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로마를 욕하고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이는 바보라고 비하한 것은 본심이 아니라오."

  샤킬라빌은 피식 웃으며 마르쿠스에게 받은 협정서를 품에서 꺼내 펼쳤다.

  "원래 경쟁자들을 견제하려면 어느 정도의 속임수는 필요한 법 아니겠습니까. 다 이해합니다."

  "이해해주니 고맙소. 그러면 재빠르게 서명하고 가겠소이다."

  협정서를 꼼꼼히 읽어본 샤리프는 샤킬라빌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데에 크게 만족했다.

  적혀 있는 내용은 그가 들은 것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카타반의 실세이자 로마 원로원의 일원.

  이 얼마나 가슴 뛰는 울림이란 말인가.

  그는 더 돌아보지 않고 협정서에 서명한 후 인장을 찍었다.

  "탁월한 결정을 하신 겁니다. 이걸로 샤리프 님의 가문은 당당한 로마 귀족의 일원입니다."

  "원로원에는 언제쯤 들어갈 수 있겠소?"

  "10년은 기다려주셔야 할 겁니다. 지금 바로 점령지의 가문을 원로원에 들이는 건 반발이 심할 테니까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다고 확언하셨으니까요."

  "원로원에 확실히 들어갈 수만 있다면 10년이든 15년이든 못 기다리겠소? 로마는 계약만큼은 확실히 지킨다고 누누이 들어왔으니 내 믿고 기다리지. 카타반은 오늘부로 연합에서 탈퇴하리다."

  샤리프는 협정서 중 한 부를 소중히 품에 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사히 임무를 완수한 샤킬라빌은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배웅해 주었다.

  그런데 그때 예상치 못한 사고가 일어났다.

  방을 나서려던 샤리프가 하드라마우트의 사령관 자비르와 딱 마주친 것이다.

  자비르 역시 낮에 있었던 회담에서 원로원 의석 따위 탐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인물이었다.

  샤리프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손을 흔들었다.

  "여,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시오?"

  "그러는 그쪽이야말로···나오는 방향을 보아하니 설마?"

  "안타깝지만 이미 마차는 떠났다오."

  부끄러움 따위는 한 점도 느껴지지 않는 샤리프의 태도에 자비르가 어이없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낮에만 해도 배신자는 천하의 바보가 따로 없을 거라는 말을 했으면서 스스로 배신자가 되다니. 부끄럽지도 않은 것인가?"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원로원 자리는 탐이 나지 않는다더니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시나? 고민을 좀 해보니 생각이 바뀌기라도 하셨나?"

  원래부터 남부 왕국들은 연합군을 결성하기 전까지는 결코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뒤통수를 치고 자신만 빠져나갈 수 있는 탈출구가 있다면 그 길을 택하지 않는 게 이상한 사이라고 보는 게 옳았다.

  결국 자비르는 억지로 유지하고 있던 최소한의 예의마저 벗어던지고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이 쥐새끼 같은 배신자가!"

  "뭐라 쥐새끼? 본인도 배신하려고 했던 주제에 한발 늦었다고 떳떳한 척하는 태도가 아주 일품이로구나."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고성에 샤킬라빌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챘다.

  이대로 놔두면 서로 멱살잡이라도 할 기세였다.

  바깥의 상황을 몰래 지켜보는 그는 속으로 비웃음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애써야 했다.

  마르쿠스에게 전해 들은 여러 가지 경우의 수 중 한 가지로 상황이 척척 진행돼가는 모습에 희열마저 느껴졌다.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한 번 실감한 그는 적절한 타이밍에 나가서 두 사람의 싸움을 중재했다.

  카타반은 종래의 협약을 그대로 인정받았고 하드라마우트의 사령관에게는 마르쿠스와 대담할 수 있는 자리를 따로 주선해주기로 했다.

  배상금은 내야겠지만, 원로원 의석은 잘하면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비르는 일단 그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진짜로 원로원 의석을 얻을 수만 있다면 배상금쯤이야 돈으로 의석을 샀다고 생각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카타반에 이어 하드라마우트마저 로마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항복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렇게 남부 왕국군의 연합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연합군의 상황은 마르쿠스가 예상한 그대로 흘러갔다.

  샤킬라빌이 마리브를 떠난 바로 다음 날 샤리프와 자비르는 연합군에서 탈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로마와 전쟁을 계속하는 건 우리에게 별로 이득이 없을 것 같소. 우리는 그냥 이쯤에서 로마와 타협하는 길을 선택하겠소."

  "우리도 마찬가지요. 이 이상 싸워봐야 쓸데없는 피만 더 흐를 뿐 아니겠소?"

  혼자라면 눈치가 보였겠지만, 함께 빠져나갈 상대가 있으니 거리낄 게 없었다.

  누구 보다 앞장서서 로마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말자는 자들이 가장 먼저 항복하겠다고 나서니 남은 사람들은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자네들 설마···로마를 찾아가 자리를 약속받은 것인가?"

  "허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는 거요? 객관적으로 전황을 파악하고 최선의 선택을 한 것뿐이오."

  "여기서 항복을 한다고 하면 자네들은 몰라도 자네들이 섬기는 왕은 자리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걸 모르겠나?"

  "그거야 협상하기 나름 아니겠소. 하여튼 우린 빠질 테니 계속 저항하고 싶거든 그쪽 마음대로 하시오."

  그 말을 끝으로 샤리프와 자비르는 자신들의 군대를 이끌고 마리브를 떠났다.

  뜻밖의 상황을 마주한 남은 세 왕국의 사령관들은 이내 절망에 빠졌다.

  공교롭게도 저 두 국가는 저번 회전에서 나바테아가 지키는 우익을 공격한 덕분에 가장 많은 전력을 온존하고 있던 국가였다.

  덕분에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의 수가 순식간에 절반 이하로 줄어버렸다.

  게다가 이렇게 된 이상 장기전을 벌인다고 해도 가망이 없었다.

  카타반과 하드라마우트가 아예 로마편에 붙는다면 그들이 로마 쪽에 보급할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다.

  실낱같던 희망조차 이제 완전히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저런 소인배들을 믿고 끝까지 싸우려고 한 내가 죄인이로다······."

  아사드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제 더 이상 저항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카타반과 하드라마우트가 연합에서 이탈하자 현지 귀족들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하나둘 항복하자는 의견을 냈다.

  마리브에 사는 백성들도 로마가 언제 댐을 무너트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연일 불만을 쏟아내고 있었다.

  속된 말로 그들 입장에서는 로마가 이긴다고 해도 그저 지배자가 바뀌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댐이 무너진다면 마리브라는 도시는 더 이상 지금의 규모를 유지하는 게 불가능하다.

  삶의 터전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어차피 사바 왕국은 현재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아사드 같은 충신이 아닌 다른 귀족들은 사바 왕국이 힘야르에게 넘어가는 건 기정사실이라고 보고 있었다.

  어차피 머지않아 망할 거라면 지금 로마에게 항복한다고 해도 달라질 게 없지 않겠는가.

  결국 귀족들과 백성들의 아우성에 이기지 못한 사바 왕국은 로마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바 왕국이 항복하니 마인 왕국 역시 자동으로 로마의 밑으로 들어왔다.

  홀로 남은 힘야르 왕국도 더는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고 마지막으로 무기를 버렸다.

  첫 회전에서 승리를 거둔 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연합군을 와해시킨 외교 전술의 승리였다.

  마르쿠스는 약속대로 가장 먼저 항복한 카타반에게는 배상금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당초의 목적대로 홍해 인접한 사바 왕국과 힘야르 왕국의 영토 대부분은 로마의 속주에 편입시켰다.

  다른 왕국들은 자치권은 보장해주되 나바테아 왕국의 관리를 받는 속국으로 위치를 하향 조정했다.

  아무래도 로마가 아라비아 땅 전역을 직접 지배하는 건 여러모로 부담됐기 때문이다.

  알아서 충성을 맹세한 나바테아에게 던져줄 당근도 필요했으니 생색을 내기엔 딱 좋았다.

  이로써 마르쿠스는 목표로 삼았던 모든 걸 완수했다.

  이번 전쟁의 성과는 그에게 있어서 굉장히 컸다.

  우선 홍해의 동편을 완전히 장악해 해상 무역로를 확실히 손에 넣었다.

  이 시기 최고의 무역상품 중 하나이던 유향의 산지도 확보했다.

  이제 아라비아반도 남부에서 생산된 유향은 육로가 아닌 홍해를 통해 로마와 이집트로 수출될 것이다.

  물론 중개상인을 거칠 필요가 없으니 이전처럼 같은 무게의 금덩이보다 비싼 값을 지불할 필요도 없다.

  운송비를 감안하면 상당한 금액을 붙여 팔긴 하겠지만, 그 차익은 전부 마르쿠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바테아를 통해 사막세력이 이 이상 성장하지 못하도록 제어할 수 있게 됐다.

  마르쿠스는 돌아가면 샤킬라빌을 나바테아의 실질적인 1인자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에게는 나바테아를 대표해 로마의 원로원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가해주겠다는 약속도 해주었다.

  감격한 샤킬라빌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마르쿠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앞으로 나바테아는 허울뿐인 왕을 대신해 그가 실질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만약 나바테아가 처신을 제대로 못 해서 아라비아 남부에서 여론이 안 좋아지면 그때 로마가 직접 개입하면 된다.

  때는 착실하게 무르익고 있었다.

  사방에 뿌려놓은 씨앗들이 이제 싹을 피우고 커다란 줄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려왔던 구상을 현실로 그려낼 발판이 거의 다 마련되었다.

  ※※※

  "그런데 정말로 그들을 원로원에 받아주실 겁니까?"

  전쟁을 승리로 장식한 로마군이 메카를 지나쳐 북상할 때쯤 안토니우스가 더 이상 의문을 억누르지 못하겠다는 듯 물어왔다.

  묵묵히 라틴어를 공부 중이던 수레나스도 잠시 책에서 눈을 떼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그럼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나?"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원로원에서 점령지의 귀족들을 자신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려 하겠습니까?"

  "그러는 자네도 원로원 의원이지 않나."

  "저야 뭐···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수레나스 같은 뛰어난 장수라면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 아라비아 남쪽의 귀족들은 조금···거부감이 드는군요."

  안토니우스의 솔직한 의견에도 마르쿠스는 별로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예상했다는 듯 웃으며 안토니우스의 말을 받았다.

  "그게 일반적인 반응이겠지. 하지만 이건 현지 안정화 차원에서도 시행해 볼법한 정책이라는 걸 명심하게. 동맹국과 속주 출신의 귀족들은 한 명씩 원로원에 집어넣는다면 그들도 자신들의 목소리가 반영된다는 느낌을 받지 않겠나. 당장 카타반의 샤리프도 원로원 의석을 준다고 하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항복을 했고."

  "그렇긴 하죠. 그 자비르라는 귀족도 제발 원로원 의석을 달라고 총독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었으니까요."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뒤 뛸 듯이 좋아하던 자비르의 모습을 떠올린 안토니우스가 뒤틀린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까 말했다시피 원로원은 의석수를 늘린다고 하면 절대 반대할 겁니다. 속주와 동맹국에 한 자리씩 의석을 나눠주는 건 원로원의 품위를 훼손하는 행위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러니 내가 직접 원로원 의석수를 늘리진 않을 거야. 굳이 내가 하지 않더라도 일을 처리해줄 사람이 있으니까."

  "···혹시 카이사르 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안토니우스가 곧바로 정답을 맞힐 거라고 생각 못 했던 마르쿠스가 의외라는 듯 눈을 깜빡였다.

  아무래도 그간 옆에서 보고 배운 게 있으니 이런 쪽으로 눈치가 꽤나 좋아진 느낌이었다.

  "그래. 카이사르 님은 지금 원로원에서 자신의 세력이 가장 빈약하지. 민중파의 수장은 아직 폼페이우스 님이라는 느낌이고 귀족파의 지지는 나에게 집중되어 있으니까.

  게다가 카이사르 님은 지금까지 줄곧 원로원의 권한 약화를 목표로 움직이고 있었어. 원로원에 들어오면 충실한 수족이 되어줄 세력까지 확보했으니 지금쯤 원로원 의석수를 늘리려는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을걸?

  "

  실제로 원 역사에서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의석수를 600석에서 900석으로 늘렸다.

  그 대부분의 자리는 당연히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갈리아의 유력자들과 지지자들에게 돌아갔다.

  물론 마르쿠스는 저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일을 추진할 마음은 없었다.

  안토니우스는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마르쿠스의 치밀함에 감탄했다.

  사실 이렇게 마르쿠스의 의도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가 성장한 증거였다.

  이전에는 머릿속에 군사적인 일로 가득해 정치적인 문제를 일부러 외면해 왔기 때문이다.

  수레나스도 마찬가지였다.

  천재적인 전략가이자 대귀족이었던 그는 언제나 승리자였기에 정치적인 능력에 그리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왕에게 충성을 바치기만 하면 언젠가 진심을 알아줄 거라는 우직한 면모도 한몫했다.

  그 점에 있어서는 폼페이우스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유형의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점이 독이 되어 원 역사에서는 오로데스에게 암살당했다.

  만약 그가 처신을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그리 허무한 최후를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필요 이상의 적을 만들지 않는 마르쿠스의 처신술은 수레나스에게 굉장한 도움이 되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사고의 틀을 넓히고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이런 변화를 실감할 때마다 마르쿠스에 대한 충성심이 깊어지는 걸 느꼈다.

  마르쿠스를 옆에서 섬기는 부하들은 대부분 비슷한 심정이었다.

  '이 사람이 만들려고 하는 국가를 직접 보고 싶다.'

  수레나스는 자신이 로마인이 아님에도 어느새 그런 마음을 품게 됐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미래의 편린을 볼 수 있는 시간은 빠르게 찾아왔다.

  나바테아에서 전후처리를 끝마친 마르쿠스가 안티오키아로 귀환하자 동방은 다시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가 없는 동안은 푸블리우스와 셉티무스, 율리아가 속주의 업무를 처리했다.

  대부분의 일은 그들만으로 처리가 가능했지만, 그래도 마르쿠스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사안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그런 것들을 따로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마르쿠스의 집무실 책상에는 무수한 보고서의 더미가 올라가 있었다.

  익숙한 광경에 절로 쓴웃음을 지은 마르쿠스는 여독을 풀 새도 없이 업무를 재개했다.

  "일단 시급한 일부터 순서대로 보도록 하지. 그러고 보니 원정을 떠나기 전에 내가 처리하라고 했던 일은 어떻게 됐지? 카렌 왕국에서 하도 앓는 소리를 해서 2개 군단을 지원해 줬던 거로 기억하는데."

  셉티무스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서류 더미의 중간쯤에서 종이 몇 장을 꺼내 넘겨주었다.

  "여기 일의 경과가 담긴 보고서입니다. 요약하자면 침범한 유목민들은 전부 격퇴하는 데 성공했지만, 갈수록 저들의 공세가 심해지니 앞으로도 지원이 필요하다는 내용입니다."

  "원래 그쪽 지역은 유목민들의 침략이 잦은 곳이잖아. 사전에 대비할 수 있도록 체제를 갖추는 데 나름 도움을 줬던 것 같은데."

  마르쿠스는 혀를 차며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그가 굳이 파르티아 전역을 지배하지 않고 동쪽에 괴뢰국을 세운 건 유목민들을 막을 방파제를 형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파르티아에 머물 때도 나름 신경을 써서 대비를 해두었다.

  그런데 아라비아 원정을 하기 전에 예상외로 카렌 왕국에서 도움을 청하는 서신이 날아들었다.

  유목민들이 필사적으로 국경을 넘어와 원군이 필요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마르쿠스는 그 때문에 2개 군단을 동원해 카렌 왕국을 지원하게 했다.

  아라비아에 8개 군단만을 이끌고 간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예상대로 로마군단은 카렌 왕국을 유린하던 유목민들을 간단하게 격퇴했다.

  하지만 보고서에는 꽤 신경 쓰이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마르쿠스는 마지막에 적혀 있는 군단장의 의견을 소리 내어 읽었다.

  "이번에 침략한 유목민들은 단순한 약탈이 목적이 아니라 아예 그곳에 눌러앉으려고 했다. 본래 불리하면 그대로 후퇴하는 그들답지 않게 마지막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최후의 항전을 계속했다. 이는 지금까지 그들이 보이던 양상과는 다르다는 게 현지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건 확실히 뭔가 이상하긴 하군."

  파르티아는 건국 초기 흉노에게 밀려난 여러 부족들의 침략에 여러 차례 시달린 전적이 있었다.

  그들은 어차피 흉노에게 유린당한 땅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파르티아의 땅이라도 정복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달려들었다.

  어쩌면 이번에도 비슷한 경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이 시기에 흉노가 날뛴 사례가 있었나? 잘 모르겠는데···나중에 기회가 되면 찾아봐야겠군.'

  마르쿠스는 좀 더 자료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따로 옆으로 분류되어 있는 서신들에 눈길을 돌렸다.

  서신은 총 두 개였는데 날짜를 보아하니 처음에 온 편지는 마르쿠스가 원정을 떠나고 곧바로 도착한 듯싶었다.

  "이건 이집트에서 왔나 보군. 그러고 보니 공주들이 보이지 않는 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예. 공주님들께서는 처음에 온 그 편지를 받고 이집트로 귀국하셨습니다."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가 동시에 귀국해야 할 일이라면 어떤 사안일지 대강 짐작이 갔다.

  이집트에서 날아온 파피루스를 펼쳐본 마르쿠스는 자신의 예상대로의 내용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파라오가 몸이 많이 안 좋다면 당연히 돌아갈 수밖에 없었겠지. 그래, 그것보다 조금 더 뒤에 도착한 서신은 뭐야?"

  셉티무스는 말없이 서신을 집어 마르쿠스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이집트에서 공식적으로 보낸 게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마르쿠스의 정보원이 보낸 보고서였다.

  어찌나 급하게 써서 보냈는지 파피루스에는 단 한 문장만이 쓰여 있었다.

  짧은 문장이었으나 마르쿠스의 눈은 한동안 그 보고서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쓰여 있는 내용은 이러했다.

  <이집트의 파라오 아울레테스 사망>

  < 167. 부고 > 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