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이집트에 감도는 전운 >
170.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는 이후로도 거침없이 알렉산드리아의 관습을 뜯어고쳤다.
사실 뜯어고쳤다는 말은 어폐가 있었다.
두 사람이 한 일의 태반은 이집트의 옛 전통을 되살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걸 바로 이집트식으로 바꾸지는 않았다.
무언가 행동에 착수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옳다는 명분을 챙기는 것이다.
마르쿠스의 일 처리를 옆에서 지켜보았던 클레오파트라는 그 점을 잘 알았다.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의 전통을 되살린 부분은 대부분이 사실 어찌 돼도 상관없는 분야였다.
거의 유일한 예외가 왕실의 복식과 관례였으나, 사실 대다수의 시민들은 왕궁 내부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 있지 못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우스의 조언대로 마케도니아 고관들이 시민들을 선동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이집트의 전통복장을 입은 환관 아폴로도로스가 광장에서 파라오의 새로운 정책을 연일 홍보했다.
"이제부터 알렉산드리의 빈민들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식량을 배급받게 될 것이다. 호루스의 화신이시자 아문-라의 따님이신 두 분 파라오께서는 더 이상 시민들이 빈곤에 허덕이는 모습을 보지 않겠다고 천명하셨다."
"와아아아!"
"위대한 파라오시여!"
당연한 말이지만 원래 세상에는 부자보다 아닌 자가 더 많다.
파라오의 새 정책은 알렉산드리아의 빈민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게다가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만을 위해 돈을 쓰는 게 아니었다.
적절히 유희 거리를 제공해 시민들의 환심을 사고, 불만을 억누르는 정책도 동시에 착수했다.
당연하겠지만 이 모든 건 두 사람이 로마에 유학하며 보고 들은 정책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키케로의 집에서 수학하며 그와 심도 있는 토론을 나누었다.
키케로가 조금 자아도취가 심하고 감정적이긴 해도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로마 최고의 석학 중 한 명이었다.
그와 매일 같이 이야기를 나눈 경험은 클레오파트라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정치란 그렇지 않아 보여도 사실 정교한 계산과 수식으로 돌아가는 일종의 공학이다.
타고난 감각과 지성만으로 임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왕정과 공화정이라는 서로 다른 두 정치체제를 경험한 클레오파트라의 식견은 원역사보다 훨씬 더 깊어져 있었다.
매일 같이 궁에서 토론을 벌이는 옥타비우스도 내심 그녀의 재지에 여러 번 감탄하곤 했다.
아르시노에는 종종 두 사람의 대화에서 소외돼서 분통을 터트렸지만, 옥타비우스가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면 그래도 뒤늦게라도 알아듣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오늘은 또 뭘 논의할 거야? 관리들 임명방식을 바꿀 거라고 했었나?"
햇살이 내리쬐는 호화로운 궁전의 정원에서 아르시노에가 능숙한 라틴어로 화두를 던졌다.
"그래. 관리들 선발 방식을 완전히 바꿀 필요가 있어."
클레오파트라도 마찬가지로 라틴어로 대답했다.
그들이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건 옥타비우스를 배려해서가 아니었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면 만에 하나 호위를 서는 병사들이나 시중을 드는 환관들의 입을 통해 내용이 유출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매일같이 사람들을 물리고 세 사람만 밀담을 하는 것도 모양이 빠졌다.
그러니 그냥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당당히 라틴어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집트의 관리 선발 방식은 어떻게 됩니까?"
"후보자들 가운데 추첨을 하는 방식이야. 당연히 신분이 높은 마케도니아인 혈통이 아니면 후보에 들어갈 수 없고."
"···무작위로 관리를 뽑는다는 겁니까? 파라오께서 임명하지는 않고요?"
"물론 우리가 임명할 수 있는 관직도 있어. 하지만 기록관이나 회계관, 재판장이나 심판장 같은 관직은 전부 추첨으로 뽑는 게 알렉산드리아의 방식이야."
옥타비우스는 아르시노에가 뭔가를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클레오파트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클레오파트라가 고개를 끄덕여 아르시노에의 말이 맞다고 확인해주자 그의 눈빛이 이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그리스 쪽의 도시국가가 추첨으로 관직을 나눠 가졌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지만 이집트가···뭐, 선거를 통한 것보다는 돈이 적게 들겠군요. 그럼 이제 이걸 어떻게 바꾸실 생각입니까? 전부 파라오께서 임명하는 쪽으로 가실 건가요?"
"아니. 그러면 내가 마케도니아 세력을 너무 핍박하는 듯한 느낌을 풍길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나는 선거를 도입할 거야,"
클레오파트라의 대담한 선언에 아르시노에가 조심스럽게 반론을 제기했다.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여기가 로마도 아닌데······."
"충분히 가능해. 우선 우리가 임명할 수 있는 관직은 지금 그대로 놔둘 거야. 선거의 대상이 되는 관직들은 지금 추첨으로 뽑히는 것들만 대상으로 할 거고. 명분도 충분해. 솔직히 말해서 이집트의 중대한 관직들을 제비뽑기로 정하고 있었던 것 자체가 어이가 없는 일이니까."
"나쁘진 않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 대다수는 좋아하겠죠. 자신들에게 뭔가 선택권이 생기는 느낌이니까요. 그리고 한 가지 조언을 드리자면 추첨의 폐해로 제비뽑기가 조작됐었다는 사례를 들어주시면 시민들의 지지를 더 쉽게 끌어낼 수 있을 겁니다."
"그거 괜찮네. 그리고 내 생각엔 선거에 당선될 자신이 있는 유지들은 오히려 찬성으로 기울 거야. 반대하는 쪽은 인망도 없고 재산도 빈약한 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겠지. 자연스럽게 고위층 가운데서도 편이 갈릴 거란 말이지. 내가 진짜로 노리는 건 바로 이거야."
"저도 좋은 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참정권의 범위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투표를 알렉산드리아 시민만의 전유물로 만든다면 지금 한창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이집트 원주민들은 실망할 겁니다. 반면에 그들에게 참정권을 주면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불쾌감을 표하겠지요."
옥타비우스의 지적은 타당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이미 예상했다는 질문이라는 듯 곧바로 답을 내놓았다.
"투표권도, 시민권도 전부 차등적으로 부여할 거야. 로마도 그렇게 하잖아? 막대한 재산을 가진 사람의 1표와 빈민들의 1표는 같지 않지. 그 방식을 참고해서 이집트 혼혈들과 원주민들에게 참정권은 주되, 그들이 권리를 행사하기 전에 대부분 결과가 결정되는 방식으로 가려고 해."
이번에는 옥타비우스도 꽤 놀랐다.
방금 발언은 로마의 선거 제도를 심도 있게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할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 님이 만들어갈 이집트가 어떨지 기대되는군요. 미력하지만 저도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네가 진심으로 도와준다면 든든하겠지. 부디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지혜를 빌려주길 바랄게."
"어째서 가끔 저를 경계하는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전적으로 두 분의 편입니다. 애초에 마르쿠스 님의 총애를 받는 두 분과 거리가 멀어진다면 저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지 않겠습니까."
옥타비우스의 능청스러운 태도에 아르시노에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클레오파트라에게 물었다.
"뭐야, 옥타비우스를 의심하고 있었어? 이렇게 착한 아이를 왜?"
"의심까지는 아니야. 그냥 똑똑한 아이지만 아직 어리니까···실수할 가능성도 있고, 엇나갈 수도 있으니까 너무 앞서가다가 걸려 넘어지지 말자는 거지."
"뭐야, 난 또 뭐라고, 그런 거였구나."
태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르시노에를 사이에 두고 옥타비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시선이 교차했다.
아직 어린 소년의 눈빛은 너무나도 순진무구해 보여 클레오파트라도 자신이 괜히 과민반응을 보인 게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사실 옥타비우스가 뭔가 숨겨둔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건 클레오파트라의 추측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옥타비우스는 그런 언동은커녕 이상한 낌새조차 내비친 적이 없었다.
'···그냥 내가 너무 꼬아서 보고 있는 건가?'
클레오파트라는 왜 이렇게까지 옥타비우스를 의식하는 것인지 자신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분명히 사이도 나쁘지 않고 이야기도 잘 통하는데 그냥 뭔가가 찝찝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적인 상성이 잘 맞물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결국 클레오파트라는 포도주를 홀짝이며 애써 복잡한 심경을 억눌렀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아르시노에와 이야기를 나누는 옥타비우스의 얼굴에서 한참이나 시선을 떼지 못했다.
※※※
클레오파트라가 옥타비우스를 견제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집트의 정세는 예상대로 흘러갔다.
두 파라오의 친서민적인 개혁에 시민들은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주었다.
특히 당장 그날의 끼니를 걱정하는 빈민계층은 파라오의 충실한 신도가 되었다.
그리고 빈민층의 생활이 안정되니 시내에서 발생하던 갖가지 사고도 눈에 띄게 빈도수가 줄어들었다.
여기에 옥타비우스는 아르시노에에게 부탁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소문을 퍼트렸다.
파라오가 백성에게 친화적인 정책을 펼 수 있게 된 건 전적으로 동방 총독 마르쿠스 덕분이라는 게 소문의 내용이었다.
이건 그냥 뜬소문이 아니라 확실한 근거가 있는 소리였다.
마르쿠스가 메소포타미아 평야를 장악하고 신농법과 시비법을 발달시키면서 로마의 식량 생산량은 이전과 비할 수가 없게 늘어났다.
덕분에 이집트가 로마에게 헐값에 넘겨야 하는 식량의 양도 크게 줄어들었다.
홍해를 통한 교역로가 완전히 안정화 된 덕분에 상인들의 경제 활동도 한층 탄력을 받았다.
무엇보다 마르쿠스는 파라오들과 친밀한 사이라 앞으로도 이집트는 많은 수혜를 누리게 될 거라는 희망적인 관측까지 따라붙었다.
이러니 이집트의 절대다수는 현 파라오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와 반비례해 마케도니아 고위층의 반감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렇다고 그들이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오히려 요새 그들은 언제나 악몽에 시달렸다.
귀족들의 꿈에서 두 파라오는 알렉산드리아를 들어다가 마르쿠스에게 바쳤다.
마르쿠스는 잘 훈련된 로마 군단을 이끌고 알렉산드리아로 밀어닥쳤다.
지중해의 진주라 불리는 알렉산드리아는 불타고 로마군의 깃발이 그 위에서 펄럭였다.
이집트 복식을 입은 파라오들은 부끄러움도 모르는 듯 마르쿠스의 옆에서 교태를 부렸다.
마르쿠스는 양옆에 파라오들을 끼고 마케도니아 귀족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시퍼렇게 날이 선 무기를 든 로마 병사들이 가차 없이 귀족들의 목을 베었다.
"허어억! 아, 안돼!"
식은땀 흘리며 퍼뜩 눈을 뜬 귀족들은 새벽마다 자식의 목이 잘 달려있는지 더듬어 보곤 했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이들끼리 모임을 하며 의견을 나누는 것뿐이었다.
눈이 시커멓게 죽은 귀족들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애꿎은 포도주만 들이켰다.
"최근 들어 진짜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파라오가 연일 우리를 압박하고 있으니······."
"어디 좋은 의견 가진 사람 없습니까? 우리 대에서 마케도니아의 정기가 끊어지는 게 아닌지 불안해 잠을 못 이루겠습니다."
귀족들은 클레오파트라가 자신들을 찍어내려고 하다는 느낌을 갈수록 강하게 받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케도니아의 전통을 무시하고 이집트 원주민들의 환심을 사려는 술책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게 아니었다.
개혁이 진행될수록 물증은 없어도 심증은 점점 확실해졌다.
지금 이집트에서 고립되는 자들은 마케도니아 혈통이 아니었다.
마케도니아 혈통의 고위 귀족들만이 점점 주류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이거, 선거한다고 했을 때부터 모두가 한마음으로 반대를 했어야 하는데······."
한 귀족의 중얼거림에 선거제에 찬성했던 몇몇 유력 귀족들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얼마 전 클레오파트라를 접견했다가 아무 소득 없이 물러난 재판장이 한숨을 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자리에 모인 면면들은 누가 봐도 알렉산드리아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임이 열리면 빈자리 하나 없이 사람들이 꽉꽉 들어찼다.
그런데 지금은 드문드문 참석하지 않는 이들이 생겨났다.
그들이 어디로 붙었을지는 직접 보지 않아도 예상이 갔다.
재판장이 비어있는 자리 하나를 가리키며 이를 갈았다.
"가니메데스 그놈은 결국 파라오에게 충성하기로 마음을 먹었나 보군."
"지금 파라오에게 아무리 알랑방귀를 껴봐야 실권은 하나도 넘겨주지 않을 텐데 멍청한 게지요."
왕실의 기록을 담당하는 기록관이 퀭한 눈가를 문지르며 군의 지휘권을 가진 아킬라스에게 물었다.
"혹시 실력행사로 나간다면 파라오가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여줄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모두의 기대 어린 시선이 아킬라스에게 집중됐다.
아킬라스가 찝찝한 표정으로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한탄했다.
"유감스럽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습니다. 이미 저쪽으로 넘어간 장군들이 몇몇 있으니까요. 우리가 병력을 동원한다고 해도 저쪽을 수로 크게 압도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군사를 일으킨다면 그건 빼도 박도 못하고 반역이죠. 마르쿠스의 로마군이 기다렸다는 듯 알렉산드리아로 밀고 내려올 겁니다."
"후···그놈의 로마. 이자들이 제일 문제로군. 그래도 선대는 로마가 뒷배를 봐준다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지는 않았었는데······."
"아르시노에는 몰라도 클레오파트라는 선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야망을 품고 있습니다. 분명 우리 모두를 배제하고 이집트의 권력을 손에 쥐려는 계획일 겁니다. 선거를 통해 관리를 뽑는다? 어차피 후보에 자기를 따르는 자들만 꽂아 넣을 텐데 선거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악이 받친 귀족들은 파라오를 규탄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 중에서 공개적인 석상에서는 파라오를 견제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클레오파트라나 아르시노에에게 뭐라고 하려면 로마와 민심을 동시에 적으로 돌릴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재판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만으로 불가능하다면 협력자를 끌어들이는 건 어떨까? 마침 폼페이우스의 차남 섹스투스가 파라오의 즉위를 축하한다며 악숨에서 올라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기록관이 부정적인 어조로 반론을 제기했다. 내키지 않는다는 기색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이전에 폼페이우스의 장남과 작당했던 무리들이 어떻게 쓸려나가는지 보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차남은 장남의 실수 덕분에 권력을 잡은 이입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그렇다면 결국 남은 건 두 파라오를 이간질하는 방법뿐인가?"
"네. 역시 그게 유일한 해답입니다. 어렵긴 해도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르쿠스는 지금 이집트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다른 일처리에 관심을 더 쏟고 있다고 하네. 이 기회를 잘 살려야겠지. 두 파라오가 끼고 다니는 로마인 소년이 있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자를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누가 한 번 접촉해 보게."
옥타비우스의 말끔한 얼굴을 떠올린 기록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로마인이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어줄지도 모르겠군요. 일단 가능한 수단은 전부 동원해 보겠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어렵겠지만 아르시노에는 잘만 하면 우리말에 귀를 기울여줄지도 모르니까요."
손에 쥔 권력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귀족들은 머리를 맞대고 차근차근 책략을 구상했다.
절대로 호락호락 물러나진 않는다. 물밑에서 벌어지는 권력을 향한 암투는 본격적인 막이 오르기 전부터 치열하게 전개됐다.
한편, 귀족들이 비밀회의를 가지는 동안 클레오파트라는 의외의 방문을 받았다.
귀족들의 화제에도 한 차례 올라왔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독대를 청한 것이다.
"축하 선물은 잘 받았네. 부친께도 고맙다는 말 전해주게."
"예. 아버지께서도 원정에 도움을 주신 선대 파라오의 장례식에 꼭 참석해 애도를 표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부득이하게 자리하지 못한 점, 다시 한 번 사죄드리겠습니다."
"사죄할 것까지야. 갑작스럽게 치러진 장례식이었으니 참석하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하네. 대신 이렇게 자네를 보내고 즉위를 축하하는 선물까지 보냈으니 오히려 내가 감사를 표해야겠지."
섹스투스는 감격한 얼굴로 넙죽 고개를 숙였다.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받은 클레오파트라는 가볍게 옥좌를 두드리며 섹스투스가 알렉산드리아에 온 진짜 목적을 물었다.
"그런데 단순히 선물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사절을 통해 보냈으면 될 텐데 자네가 직접 온 이유는 무엇인가?"
"악숨과 이집트는 가깝지 않습니까. 접해있는 이웃끼리 친선을 도모하는 건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물론 그렇긴 하지만 그럴 거라면 굳이 나와 독대를 청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야속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처리해야 할 문제가 많아 그리 여유를 내기 힘든 상황이라네."
말을 빙빙 돌리지 말고 빨리 용건을 꺼내라는 압박이었다.
섹스투스는 주변을 둘러본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선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저는 어리석은 우형과 달리 마르쿠스 님과 적대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나이우스가 몰락하는 걸 봤을 테니 당연히 그렇겠지."
"예.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그 점을 전제로 깔고 제안 드리겠습니다. 파라오시여, 저와 협력 관계를 맺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건 또 무슨······.'
생각지도 못한 요구를 받은 클레오파트라의 눈동자가 가느다란 떨림을 보였다.
< 170. 이집트에 감도는 전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