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균열의 방아쇠 >
172.
테오도로스가 물어온 정보는 마케도니아 귀족들의 행동방침을 확실히 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안티오키아에 정보원들을 파견해 마르쿠스의 동향을 살피는 한편,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를 이간질할 거리를 계속 조사했다.
그리고 동시에 공격의 방향을 바꿨다.
이전처럼 무턱대고 파라오의 개혁에 반대만을 던져서는 실익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찬성할 건 과감히 찬성했다.
대표적으로 베레니케의 사면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베레니케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고 로마 시민이 되면서 파라오의 계승권도 사라졌으니 이제 출입 금지령을 해제해도 되지 않겠느냐 주장했다.
아르시노에 역시 그녀의 의견을 지지했다.
마케도니아 귀족들은 사실 이 안건에도 찬성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긍지 높은 마케도니아 혈통의 파라오가 로마 시민이 됐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있어서는 배신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레니케가 결혼한 대상이 마르쿠스의 동생 푸블리우스라는 점이 문제였다.
지금 마케도니아 귀족들은 최대한 마르쿠스에게 잘 보여야 하는 입장이었다.
테오도로스가 누구보다 빠르게 찬성 의사를 밝혔다.
"베레니케 님이 이전의 폭정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계신다면 출입 제한을 푸는 것쯤이야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분께서 파라오의 자리를 다시 노리신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래 봐야 누구도 호응을 해주지 않을 테니까요."
"수석 재판장인 그대가 찬성을 해주니 마음이 든든하군. 그러면 베레니케를 다시 왕실의 공주로서 받아들여도 아무런 문제 없겠지?"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긴 합니다. 우선 베레니케 님이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그 어떤 왕자님들과도 결혼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로마의 귀족과 결혼했으니 그럴 가능성은 없겠지만, 그래도 명시적으로 확실하게 규정을 해놓지 않으면 차후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릅니다."
"그건 일리가 있는 말이로군. 그대의 제안을 따르도록 하지."
테오도로스가 의외로 건설적인 의견을 개진하자 클레오파트라도 선선히 그의 뜻을 받아들여 주었다.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 겁니다만 베레니케 님의 자손은 파라오의 계승권이 없다는 걸 두 분 파라오의 이름으로 천명하소서. 이는 후대의 혼란을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이옵니다."
"하긴 베레니케는 엄밀히 말해 로마인이니 자식들이 분란의 씨앗이 될 소지가 있지. 그렇게 하도록 하마. 괜찮겠지, 아르시노에?"
"이의 없어. 베레니케는 그냥 알렉산드리아에 들어올 수 있게만 해줘도 상관없다고 했으니까."
파라오의 재가가 떨어지자 기록관은 즉시 포고문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테오도로스는 그 모습에서 눈을 떼고 자연스럽게 원래 꺼내려고 했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파라오시여, 이번 건을 이렇게 신중하게 처리하는 이유는 결국 두 분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테오도로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짐작한 클레오파트라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렇지 웬일로 협조적으로 나오나 싶었다는 속마음이 살짝 겉으로 드러났다.
"아직 나와 내 동생은 후계를 걱정할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본래 남매가 함께 통치하는 관례와 달리 두 분은 자매가 함께 옥좌에 오르셨지요. 당연한 말이지만 남매와 달리 자매는 후대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 점에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미리 말해두겠지만 나는 내 동생과 혼인할 마음이 없네. 아이를 보지도 않을 것이고."
"나도 마찬가지야."
현재 남은 프톨레마이오스 혈통의 왕자는 둘 뿐이었다.
그중 한 명은 이미 파라오 계승권을 박탈당했고 또 다른 한 명은 너무 어렸다.
그래도 전통을 따르려면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는 저 둘과 결혼을 해야 옳았다.
그걸 공개적으로 부정하고 나서자 보수적인 노귀족들의 눈살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
주도권을 잡았다고 판단한 테오도로스는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그는 두 파라오의 반응을 보기 가장 좋은 화두를 들이밀었다.
"그러면 파라오께서는 어떻게 자손을 가지실 계획이시옵니까? 혹시 동방 총독 마르쿠스 크라수스와 이야기가 되어 있는 것이옵니까?"
여기서 긍정을 하든 부정을 하든 상관없다.
그저 속내를 짐작할 수 있을 만한 반응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호락호락 테오도로스의 의도에 걸려들지 않았다.
그녀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걸 여기서 말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정 알고 싶으면 나중에 마르쿠스 총독이 방문했을 때 물어보면 어떤가. 자네에게 그럴 만한 담력이 있다면 말이지만."
"하지만 파라오시여, 후대의 문제는 귀족들만이 아니라 알렉산드리아 시민들, 더 나아가 전 이집트 백성들에게도 중대한 사안이옵니다. 부디 백성들의 불안감을 종식시켜 주시옵소서."
"그렇다면 확실히 말해주지. 나나 아르시노에는 확실하게 자손을 낳아 뒤를 잇게 할 테니 그런 걱정은 접어두어도 좋다. 세라피스와 아문-라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파라오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테오도로스도 더 묻지 못했다.
그래도 아무런 소득 없이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제야 기억났다는 듯 손바닥을 마주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고 보니 남쪽에서 귀한 손님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폼페이우스 가문의 후계자라고 들었는데 환영하는 연회를 개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와 내 동생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왔다고 하니 극진히 대우하기는 해줘야지. 그 부분은 자네들이 알아서 하게."
"예, 그러면 파라오께서는 이미 그분과 대담을 나누셨다는 이야기로군요. 그분을 궁전에서 보았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헛소문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 직접 만나서 축하를 하고 싶다고 해서 잠깐 시간을 내어 얼굴을 보았다."
"그건 조금 이상하군요. 듣자 하니 그날 아르시노에 님은 아킬라스와 환담을 나누셨다고 들었는데···어째서 폼페이우스 가문의 후계자가 클레오파트라 님만 따로 보기를 청한 걸까요?"
테오도로스는 클레오파트라보다는 아르시노에의 반응을 더 유심히 살폈다.
아무거나 좋으니 일단 두 사람의 사이에 사소한 균열이라도 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아르시노에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클레오파트라가 먼저 귀찮다는 듯 손을 휙휙 저었다.
"그거야 내가 로마에 머무는 동안 폼페이우스 가문 사람들과 여러 번 얼굴을 마주쳤기 때문 아니겠나. 자네는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찾아온 손님 접대할 생각이나 잘 하게.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마케도니아 귀족들은 순순히 명에 따라 알현실에서 물러났다.
"후우."
넓은 알현실이 다시 한산해지자 클레오파트라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르시노에는 머리에 쓰고 있는 커다란 장식을 대충 발밑에 내려놓으며 연신 혀를 찼다.
"아아, 진짜 귀찮아. 무슨 놈의 꼬투리를 저렇게 잡으려 드는지. 그냥 마음 같아서는 죄다 관직을 박탈해 버리고 시골로 쫓아버리고 싶네."
"그럴 수 없으니까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거잖아. 뭐, 그래도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이 끝나면 그렇게 하는 것도 불가능이 아니겠지만."
"볼수록 진짜 어이가 없다니까. 내가 마르쿠스 님의 아이를 가진다고 하면 뭐 자기네가 어쩔 건데. 기뻐하면서 축복이라도 해줄 거야?"
"글쎄. 아마 그러면 프톨레마이오스 혈통에 불순물을 주입했다고 뒤에서 씹어대지 않을까? 대놓고 그런 말을 하면 목이 달아날 게 확실할 테니 겉으로는 축하해주는 척하면서."
클레오파트라가 대전에서 말을 확실히 하지 않은 것도 전부 귀족들의 반응을 예상해서였다.
그리고 조금 뒤, 나가는 귀족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충분한 시간을 두고 옥타비우스가 알현실에 들어왔다.
그의 얼굴을 본 아르시노에가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어서 와. 여기서 있었던 이야기는 다 전해 들었지?"
"예. 안내해준 시종에게 전부 들었습니다. 역시 생각과 한 치도 다른 바 없는 치졸한 행동을 보여주는군요."
"원래 그런 자들이니까 그러려니 해야지. 그런데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섹스투스가 여기에 온 진짜 목적이 뭐야?"
귀족들의 기대와는 달리 섹스투스가 클레오파트라와 독대를 한 건 이미 아르시노에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가 정체불명의 제안을 했다는 것까지 전부 공유되고 있었다.
어차피 옥타비우스가 대화를 전부 들은 이상 숨길 수도 없었고, 애초에 클레오파트라는 대화를 비밀로 할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섹스투스의 목적이 현재 판명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클레오파트라도 여러 방면으로 조사를 해보았으나 아직 정보원들이 돌아오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일단 진짜 축하나 하자고 온 게 아닌 건 확실해."
"식량 수급 같은 걸로 도움이 필요한 걸까?"
"그건 아니야. 내가 알기론 쿠시와 악숨은 최근 강우량이 부쩍 늘어 갈수록 식량 생산량이 늘고 있다고 식량 문제로 우리에게 팔을 벌릴 일은 없을 거야."
"거참 감이 안 잡히네. 조금 초조해 보이기까지 했다면서? 으음···지금 폼페이우스 가문의 힘은 최고조일 텐데 어째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혹시 밀려났다고 생각했던 장자가 다시 부상하려는 낌새가 있는 건 아닐까?"
이번에는 클레오파트라도 바로 아니라는 답을 내놓지 않았다.
가능성은 낮아 보여도 그럴 확률이 아예 없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후계자를 누구로 삼을지는 전적으로 폼페이우스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의 판단에 의하면 폼페이우스는 마르쿠스와 달랐다.
철저하게 이성적인 사람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감정적인 결정을 하는 이였다.
만약 장남에 대한 애착이 평소에 남달랐다면 다시 한 번 기회를 줄지도 몰랐다.
그래서 초조함을 느낀 섹스투스가 확실한 공적을 세우려고 한 거라면 대충 설명이 되긴 한다.
"남쪽으로 보낸 정보원이 돌아와야 알겠지만 그럴 가능성도 염두에 두긴 해야겠네. 만약 후계자 경쟁이 본격화되면 우리 쪽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나이우스가 또 어떤 돌발행동을 벌일지도 모르고."
"저는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봅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옥타비우스의 반론에 두 파라오의 시선이 집중됐다.
"어째서?"
"마그누스 님이 그나이우스를 다시 중용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저는 정보가 적어서 확실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지만, 마르쿠스 님은 그렇게 확신하고 계셨습니다. 그분께서 확실하다고까지 한 이상 아마 폼페이우스 님에게 직접 언질을 들었거나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모르는 정보의 출처에 클레오파트라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분께서 그러셨었어? 그런데 나는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물어보시지 않으셔서 그런 게 아닐까요. 전 이 문제로 그분과 심도 있는 이야기를 몇 번 나눠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 생각해 보면 진즉 내가 물어봤어야 했던 사안인데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네. 이건 내 실책이야. 어쨌든 그러면 너는 달리 짐작이 가는 이유라도 있어?"
옥타비우스는 굳은 안색으로 말을 아꼈다.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걸 본 아르시노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앞에서도 이야기 못 할 정도의 문제인 거야?"
"아뇨. 그건 아닙니다. 다만 섣부른 추측으로 말하기엔 사안이 사안인지라···일단 마르쿠스 님에게는 확인을 구하는 편지를 써두었습니다."
"답답하네. 대체 뭔데 그렇게 뜸을 들이는 거야?"
"클레오파트라 님은 기억하시겠지만 섹스투스는 두 번이나 미래의 불확실한 상황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습니다. 만약 그가 후계자 선정 문제로 골치를 썩고 있다면 그런 식의 말은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후계자 선정은 엄연히 현재 당면한 문제이니까요."
아르시노에가 모호한 표정으로 반론을 제기했다.
"그 미래의 불확실성을 제거해 현재의 우위를 확실히 하려는 계획이었을 가능성은?"
"전 당시 알현실 밖에서 두 분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그때 섹스투스의 어조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내색하진 않으려 했겠지만 아직 어려서인지 티가 나더군요."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굉장히 묘한 느낌이 드는데······."
"어쨌든 이건 굉장히 큰 문제입니다. 저희가 계획하고 있던 마케도니아 귀족의 숙청 건은 이 일과 비교하면 하찮은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아니. 그러니까 뭔데 그렇게 뜸을 들이냐고.
답답해하는 아르시노에와는 달리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우스가 무얼 말하려는지 감을 잡은 듯 보였다.
그녀가 검지로 관자놀이를 짚으며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나간 추론 아닐까? 정말이라면 로마가 발칵 뒤집혔을 텐데."
"아직 그렇게 심하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정말이라면 닥쳐서 대비하는 것보다는 미리 준비를 해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정보원들은 남쪽이 아니라 로마로 보내십시오. 어차피 쿠시나 악숨에 간 정보원들은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보고만을 보내올 겁니다."
"···확실히. 지금으로서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추론이야."
심각한 두 사람과 달리 또다시 자신만 소외당했다고 생각한 아르시노에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슬슬 그쯤 하지 않으면 나도 화낼 거야. 제대로 알아먹게 설명하든가 아니면 둘이 따로 나가서 떠들어."
"좋아. 네가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해줄게. 섹스투스는 경제나 식량 쪽으로는 쿠시와 악숨이 잘못될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어. 그런데도 미래의 상황이 바뀔 수 있다고 불안해하고 있었지. 그러면서 은근슬쩍 이집트와 협력 관계를 구축하길 원하고 있어. 그러면 그가 두려워하는 대상은 뭐라고 봐야 할까? 적어도 우리는 아닐 텐데."
"글쎄···홍해 건너편에 있다는 사막 부족은 마르쿠스 님이 이번에 쓸어버렸다고 하니 아닐 것이고. 더욱 남쪽이나 서쪽에 뭔가 있는 건가?"
"악숨의 서쪽과 남쪽엔 아무것도 없어. 그러면 자연히 답은 나오지.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같은 로마야. 정확히 말하면 섹스투스는 자신이 악숨과 쿠시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축소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 거라고 봐야겠지."
"너무 과한 걱정 아닐까. 폼페이우스 님의 영향력은 어지간해서는 쉽게 흔들릴 수 있는 게 아닐 텐데···어라, 설마?"
거기까지 말을 한 아르시노에는 불현듯 떠오르는 한 가지 가능성에 침을 꿀꺽 삼켰다.
클레오파트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추론이 맞다는 걸 확인해주었다.
"그래. 현재 제일 유력한 가능성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건강 악화야."
< 172. 균열의 방아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