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내전의 조짐 >
173.
"폼페이우스 님이···잘못될 수도 있다는 거야?"
아르시노에의 목소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미약하게 떨렸다.
그녀가 순진하기는 해도 정치적인 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 로마의 권력 구조가 어떻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지, 삼두의 일각이 허물어지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야."
클레오파트라 역시 단호하게 선을 그으면서도 찝찝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녀가 북아프리카의 국가들이 표시된 지도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만에 하나 추측이 사실일 때를 위해서 대비를 하는 게 좋겠어. 안일하게 마음 놓고 있다가 막상 일이 터졌을 때 대처하지 못한다면 파라오의 자격이 없는 거니까."
"섹스투스에게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떠보는 건 어때?"
"아직 물증이라고 할 만한 게 없으니까 시기상조야. 게다가 우리의 추측이 틀렸을 경우도 생각해야지. 어디까지나 지금은 그럴 수도 있다 정도니까."
"머리가 아프네···하필 지금 이런 일이 터지다니."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가 단독으로 판단해 움직이기엔 시기가 좋지 않았다.
마르쿠스는 지금 안티오키아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고, 이집트는 새로운 파라오의 등극과 개혁으로 시끄러운 상황이었다.
'그래서였나.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즉위식에도 오지 못했다는 의미가.'
폼페이우스가 어째서 잠잠했는지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집트가 마르쿠스의 클리엔테스라고 해도 폼페이우스는 아울레테스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의 성격상 지원을 받았다면 결코 그것을 모른 척 할 리가 없다.
"당장 로마에 사람을 보내 봐야겠어. 그리고 마르쿠스 님에게도 서신을 보내자. 그분께서는 이미 현 상황을 인식하고 계실지도 모르니까. 옥타비우스, 네가 마르쿠스 님에게 편지를 써줘."
"안 그래도 어제 이미 보냈습니다."
"잘했어. 이런 일은 시간이 중요하니까."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우스가 독단으로 움직였다고 질책하지 않았다.
그만큼 이번 사안은 촉각을 최대한 곤두세우고 신속히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만약 정말로 폼페이우스가 몇 개월 뒤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까.
의외로 아무 일도 없이 넘어갈 수 있다는 희망적인 관측 따위는 하지 않았다.
폼페이우스가 거느린 영역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이집트를 제외한 아프리카 전역, 히스파니아와 그리스 지역 전체가 폼페이우스의 클리엔테스였다.
거기에 지중해를 꽉 잡고 있는 해군전력도 그의 소유였다.
그런 거대한 세력을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섹스투스가 온전히 이어받을 수 있을 것인가.
클레오파트라와 옥타비우스는 무리라고 결론을 내렸다.
섹스투스는 아직 위대한 아버지를 계승할 수 있다는 명확한 증거를 보여주지 못했다.
로마의 클리엔텔라 체계는 법적으로 강제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충성심으로 움직이는 제도도 아니다.
클리엔테스들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파트로누스를 지지하고 따르는 것이었다.
파트로누스는 클리엔테스들이 자신을 따르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줄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클리엔테스들은 언제라도 등을 돌릴 수 있었다.
폼페이우스가 아무리 수많은 클리엔테스를 거느리고 있다고 해도, 그들이 섹스투스에게도 똑같이 충성을 바친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삼두의 균형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옥타비우스는 다른 무엇보다 이걸 가장 우려하고 있는 듯 보였다.
"폼페이우스 님은 민중파의 수장으로 분류되고 있었지만, 최근에는 중립파에 가까운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셨습니다. 기반은 민중파에 있지만 마르쿠스 님과 친하기도 하셨고, 로마의 분란을 막는다는 명예로운 역할을 수행하길 원하셨으니까요. 하지만 전 섹스투스가 이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고 봅니다.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무게감이 현저하게 부족해요."
"그렇겠지. 폼페이우스는 자신이 가진 이름만으로도 충분한 억제력을 행사할 수 있었어. 만약 민중파와 귀족파가 충돌을 일으킨다고 해도 폼페이우스가 제어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지. 섹스투스로는 안 돼. 오히려 카이사르와 마르쿠스 님이 그를 같은 삼두로 인정할지부터 의문인데."
마르쿠스는 폼페이우스와의 의리 차원에서 섹스투스를 포용해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그런다는 보장이 없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아직 카이사르라는 인물에 대해 정보가 부족했다.
직접 본 적이 없었는지라 오로지 주변의 평가만으로 짐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마르쿠스는 카이사르를 야망이 크고 그에 걸맞은 능력을 지닌 사내라고 평가했다.
현재 로마에서 다방면으로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이일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마르쿠스가 이 정도로 후한 평가를 내렸다면 당연히 섹스투스 정도로는 상대가 되지 않을 터.
카이사르의 야망이 정말로 들은 대로라면 폼페이우스의 빈자리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옥타비우스, 네 생각은 어때? 만약 지금부터 1년 안에 섹스투스가 폼페이우스 가문의 가장이 된다면 카이사르가 어떻게 나설 것 같아?"
"이건 고민할 필요조차 없죠. 당연히 히스파니아 지역을 잡아먹을 겁니다. 저라면 최대한 티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겠지만, 외종조부님의 성향상 조금 더 직접적인 방식을 선호할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일단 섹스투스를 품어주진 않을 거라는 말이네."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요. 외종조부님께서 마음만 먹는다면 민중파의 수장자리도, 히스파니아의 광산도 전부 자신의 손에 넣을 수 있을 텐데 그걸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클레오파트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예상이었다.
같은 입장이라면 자신 역시 똑같은 선택을 할 게 틀림없었던 까닭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르시노에의 입에서 우려의 한 마디가 새어나왔다.
"내전이 벌어질 수도 있는 건가······?"
클레오파트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대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야. 이쪽에 불똥이 튀지 않기만을 바라야지."
"그래도 여차하면 마르쿠스 님이 막아주시지 않을까? 아니면 내전이 벌어진다고 해도마르쿠스 님이 중재를 하실지도 모르잖아."
"순진한 발상이야. 그분께서는 한 없이 이성적인 분이야. 정말로 내전이 벌어진다면 자신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뽑으려고 하실 걸? 악숨이랑 쿠시는 마르쿠스 님이 마음만 먹는다면 바로 합병할 수 있어. 섹스투스도 그 점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불안해하는 걸 테고."
"으음···진짜 골치 아프네."
아르시노에가 팔짱을 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나라를 경영한다는 건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지금까지는 크게 실감도 되지 않았었다.
어차피 세세한 일은 클레오파트라가 알아서 할 테니 자신은 옆에서 적당히 거들어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보아하니 그렇게 손 놓고 있을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확실히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일단 로마에서 사람이 돌아오는 걸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가는 건 하책입니다. 이게 단순히 우리의 착각이었을 때와 사실이었을 때를 구분해 어느 쪽이어도 문제없이 대응할 수 있도록 행동방침을 확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좋아.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지금 처리하고 있는 문제부터 확실히 매듭을 지어야죠. 원래는 중장기적인 안목에서 여유롭게 진행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습니다. 조금 과격하게 손을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클레오파트라도 옥타비우스의 의견에 동의했다.
"왕권을 확실히 세워두지 않으면 나중에 괜히 일이 질질 끌릴 수도 있어. 내전을 기회라고 생각하는 멍청이들이 나올 확률도 그만큼 높아질 수 있고."
"예. 제 판단도 그렇습니다."
"그럼 그냥 마르쿠스 님에게 부탁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아르시노에가 살짝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비상시국에 괜히 크게 일을 벌이는 게 과연 좋은 판단일까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제외한 두 사람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계산할 것이 갑자기 몇 배로 늘어선 클레오파트라와 옥타비우스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대책을 상의했다.
결국 세 사람의 회동은 밤이 깊어질 때까지 끝날 줄을 몰랐다.
※※※
"마그누스 님의 거동이 이상하다고?"
"이상한 것 까지는 아니고 조금 기력이 떨어지신 듯하다는 크라수스 님의 의견이 있었습니다."
이집트에 개입할 때를 엿보고 있던 마르쿠스는 로마에서 날아든 한 장의 서신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째서 지금? 아직 그럴만한 때가 아닐 텐데······."
"예?"
"아니, 그냥 혼잣말이야. 단순히 의욕이 없어진 걸 아버지가 잘못 봤을 가능성은?"
"서신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는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원래 심리상태라는 게 육체에도 영향을 주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악숨 원정 이전과는 무언가 달라진 게 확실하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셉티무스에게 서신을 넘겨받은 마르쿠스는 최대한 빠르게 내용을 훑었다.
크라수스만이 아니라 로마에 심어둔 그의 정보원들도 비슷한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다.
처음에는 원로원 회의를 몇 번 빠지는 정도에 불과했으나, 요새는 손님도 거의 받지 않고 그토록 좋아하던 문화생활도 별로 즐기지 않는다고 한다.
혹시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 돈 뒤로는 다시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점이 더 의구심을 자아낸다는 말도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내가 로마로 돌아가 봐야 하나?"
"만약 마르쿠스 님이 로마로 돌아가신다면 소문이 더 급물살을 타고 퍼지지 않겠습니까?"
"그래.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은 느낌이야."
원 역사에서 폼페이우스는 지금 시기에 건강의 문제를 호소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카이사르와 갈라서서 대립하며 한창 열을 올리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래서 악숨 원정이 끝났을 때도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거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
이집트에서 배신당해 죽는 그 순간까지도 폼페이우스가 심한 병을 앓았다는 기록은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이 짧았어. 확실히 나이가 들수록 심리 상태에 따라 건강이 좌우되는 경향이 커지는 법인데.'
폼페이우스는 악숨 원정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이후 계속 어딘가 붕 떠 있는 듯 보였다.
명백히 이전보다 의욕이 떨어져 있었고, 피로를 호소하는 일도 잦았다.
동방으로 떠나는 마르쿠스를 배웅하러 나왔을 때도 거의 기침을 달고 살지 않았던가.
'그때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마르쿠스의 얼굴에 우려의 빛이 스쳤다.
폼페이우스는 지금 여기서 퇴장해서는 안 된다.
사적으로 가까운 사이라서만이 아니라 그의 공백을 메워줄만한 인물이 현재 민중파에 보이지 않았던 까닭이다.
게다가 가장 큰 변수인 카이사르가 어떻게 움직일지 현재로서는 예상할 수가 없었다.
엘베 강 원정도 한창 진행 중이라 그와 제대로 소통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귀족파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지?"
"아직 폼페이우스 님이 원로원 회의도 잘 나오고 있고 병석에 누운 건 아닌지라 조심스러운 분위기입니다. 민중파는 폼페이우스 님의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연일 강조하고 있고요."
"민중파야 그렇게 나오겠지. 하지만 정말로 문제가 있다면 언제까지 그렇게 부정할 수만은 없을 거야. 키케로나 카토는 이미 눈치 챘을 테니까. 아마 정말로 마그누스 님의 건강에 문제가 생긴 거라면 그들이 곧 장문의 편지를 써 보낼 거야."
불안한 예감은 빛나가는 법이 없다고 하던가.
마르쿠스의 예상대로 사흘이 채 지나기도 전에 키케로에게서 서신이 도착했다.
내용은 짐작했던 바와 별 다르지 않았다.
키케로는 이미 새벽을 틈타 폼페이우스의 저택에 의사가 출입했다는 사실까지 확인을 마쳤다고 적어두었다.
<요새는 삼두 회의도 거의 열리지 않고 있네. 저번에 나와 카토가 자네를 대신해 회의에 참석했을 때 폼페이우스는 그리 아픈 티를 내지는 않았네. 하지만 눈 밑이 시꺼멓게 죽어 있는 건 숨길 수 없었다네. 그리고 카토를 비롯한 다른 귀족파의 일원들은 지금 이걸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보이네. 민중파를 압박할 절호의 기회라는 거지.
카이사르의 대변인인 쿠리오는 거의 매일 같이 카이사르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네. 하지만 카이사르가 한창 게르만 놈들과 싸우고 있는 상황이라 순조롭게 명령을 받지는 못하는 듯 보이더군. 어쨌든 나는 개인적으로 폼페이우스가 골골 대더라도 오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일세. 로마의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에 있었던 비극이 되풀이 되지 말란 법이 없지 않겠나. 내전 따위는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네. 내가 로마의 분위기를 계속 자네에게 전해줄 테니 심상치 않다 싶거든 직접 와서 손을 써주게.>
키케로의 편지는 그런 부탁으로 마무리 됐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직 키케로 같은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의원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키케로나 크라수스가 언제까지 귀족파를 억누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귀족파는 삼두에 밀린 지금도 로마의 주인은 자신들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폼페이우스가 물러난다면 어떤 식으로 나올지는 충분히 예상이 됐다.
카이사르와 섹스투스의 관계 재정립도 민감한 문제인데 여기에 귀족파까지 강경하게 나간다면 무력충돌이 일어나는 건 그야말로 한 순간이다.
마르쿠스는 자리에 앉은 채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셉티무스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조용히 그의 결정을 기다렸다.
"카렌 왕국에서 별다른 보고는 들어오지 않았지?"
"예. 저번에 한 번 격퇴한 이후로 동쪽의 유목민족들은 현재 잠잠한 상황입니다."
"그러면 남은 건 이집트로군."
"어떻게 할까요? 이대로 클레오파트라 님과 옥타비우스 님에게 맡기시겠습니까?"
마르쿠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될 수 있으면 이대로 추이를 지켜보려고 했었는데 아무리 봐도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이상 사소한 변수 하나라도 놔둘 수는 없어. 가능하다면 그 둘은 계속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놔두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마르쿠스가 시중에게 스파르타쿠스를 불러오라고 일렀다.
동시에 셉티무스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상선으로 위장해서 배를 몇 척 수배해. 너무 많이는 말고 병사들을 천 명 정도만 데려갈 수 있을 정도로."
"이집트에 직접 가시려는 겁니까?"
"그래, 그리고 이집트의 문제가 해결되는 즉시 로마로 갈 거다. 외부에 소문이 흘러나가지 않도록 비밀리에 움직일 테니 각별히 신경 쓰도록."
< 173. 내전의 조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