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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반란 (176/326)

  < 175. 반란 >

  175.

  아르시노에의 부름을 받은 테오도로스는 야음을 틈타 은밀히 왕궁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던 아르시노에는 테오도로스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용건을 꺼냈다.

  "최근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그대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다. 이번 개혁에 대해 귀족들의 불만이 많다는 말이 들리던데?"

  "파라오시여, 그건······."

  "부정하지 않아도 된다. 솔직히 말해서 불만이 없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게 아닌가? 고위 귀족들이 여러 차례 회동을 가졌다는 건 이미 보고를 받았다."

  테오도로스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척하며 아르시노에의 안색을 살폈다.

  표정만 봐서는 속내를 짐작하기 힘들었으나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굳이 먼저 의도를 입에 담을 필요는 없었다.

  아르시노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게 가장 중요했으니까.

  테오도로스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자 초조해진 아르시노에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클레오파트라 말인데···최근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이건 뭐 귀족들과 싸우자는 것도 아니고."

  "그분께서도 다 뜻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집트를 자신의 손에 쥐고 흔들려는 뜻이야 있겠지. 가끔 보면 공동 통치를 하는 게 아니라 자신만이 파라오라고 생각하는 듯 보일 때가 있어."

  아르시노에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불쾌감이 실려 있었다.

  테오도로스는 짐짓 모르는 척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르시노에 님은 누구보다 진하게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피를 이은 분이시자 로마의 총독과도 깊은 우호 관계를 맺고 계신데요."

  "그렇지. 사실 진정한 파라오를 한 명만 뽑는다고 하면 나야말로 그 자리에 어울린다고 할 수 있어. 그런데 클레오파트라는 아무래도 나를 단순히 상징적인 장식 정도로 여기는 것 같단 말이야. 그리고 내가 제일 불쾌한 점은 관리들이나 시민들 중에서도 그렇게 여기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고."

  "그건 클레오파트라 님께서 수많은 정책을 시행하는 동안 파라오께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귀족들도 그래서 파라오께서도 클레오파트라 님의 생각에 찬동하는 거라 여겼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냥 마르쿠스 총독의 의향에 따랐을 뿐이다."

  "설마 이번 일의 배후에 로마가 있는 것입니까?"

  예상치 못한 정보를 들은 테오도로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르시노에가 주변을 슬쩍 둘러보더니 시중들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자리에 둘만 남게 되자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마르쿠스 총독은 나와 클레오파트라가 다투는 걸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클레오파트라가 하는 행동에 과한 간섭을 하지 않았던 것이야. 괜한 분쟁이 일어나면 마르쿠스 총독이 나한테 실망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클레오파트라가 우리가 권력을 확실히 잡아놔야 로마에서도 만족할 거라고 해서 그냥 놔뒀던 점도 있고."

  "아아, 그런 거였습니까. 그럼 파라오께서는 클레오파트라 님의 개혁에 찬성하는 건 아니 시로군요."

  "당연하지···라고 하기보다는 사실 난 별로 아무렇지도 않다. 그대에게는 냉정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마케도니아가 어떻게 되든 말든 아무런 관심이 없어. 다만 클레오파트라가 너무 설치는 게 좀 눈꼴사나울 뿐이지."

  아르시노에의 무심한 태도가 오히려 테오도로스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만약 아르시노에가 자신의 귀족들의 편이니, 클레오파트라의 적이니 했다면 그녀를 이용하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아르시노에를 써먹을 수 있겠다는 테오도로스의 예상이 점점 확신으로 굳어졌다.

  "파라오시여, 이것 한 가지만 확인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마르쿠스 총독과는 어떤 관계이시옵니까."

  "왜, 위대한 프톨레마이오스의 혈통이 로마인 따위와 정을 통했다고 비난할 생각인가?"

  "설마요. 냉정하게 봤을 때 로마는 현재 세계의 중심입니다. 그리고 마르쿠스 총독은 그 로마의 중심이죠. 만약 파라오께서 그를 파라오의 남자로 만들 수만 있다면 이집트의 미래에는 서광만이 비출 것입니다. 물론 클레오파트라 님이 마르쿠스 총독의 선택을 받는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마르쿠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그저 이집트를 안정화하는데 쓸 만한 도구에 지나지 않아. 나와는 근본적으로 대우가 다르단 말이다."

  "그러면 파라오께서는 이미 마르쿠스 총독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셨다는 거로군요."

  테오도로스는 자신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데에 내심 쾌재를 불렀다.

  여기서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판단한 그는 고개를 숙이고 엄숙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파라오시여, 목숨을 걸고 제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지금 이집트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놈의 마케도니아 타령이라면······."

  "그것만이 아니옵니다. 이 이집트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클레오파트라 님이 아닌 아르시노에 님이 국정을 주도하셔야 합니다."

  "나야 귀가 솔깃한 말이긴 하지만 그대들이 나를 지지하는 이유는?"

  테오도로스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 자신을 떠보려는 듯한 아르시노에의 눈을 피하지 않고 응시했다.

  "그것이 모두가 만족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목적이 같습니다. 아르시노에 님은 이집트의 유일무이한 파라오가 되실 수 있고, 저희들은 지금 누리고 있는 권리를 빼앗기지 않고 지킬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후 국정을 운영하는 데에도 저희가 파라오의 뒤를 든든히 지키고 서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나보고 클레오파트라를 치라 이 말인가?"

  "······."

  침묵은 곧 긍정을 의미한다고 하던가.

  아르시노에는 헛웃음을 흘리며 테오도로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우스운 말이로구나. 내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위험을 감수하겠느냐. 클레오파트라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로마의 영향력을 넘어설 수는 없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이집트의 모든 것은 클레오파트라 님의 손에 들어갈 것입니다. 로마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마르쿠스 총독은 멀리 있고 클레오파트라 님은 가까이 있겠죠. 파라오께서 원하시는 대로 나라를 이끌어가긴 쉽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상황이 그렇게 된다면 클레오파트라 님이 파라오와 마르쿠스 총독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어떤 수를 쓸지 모르지 않습니까."

  "설마 그렇게까지···아니, 아예 가능성이 없는 말은 아닌가?"

  아르시노에의 마음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파라오께서는 클레오파트라 님의 야심을 누구보다 잘 아실 겁니다. 그분께서는 절대 2인자로 만족할 그릇이 아닙니다. 이건 단지 저희가 살기 위해 남을 음해하는 게 아닙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으려면 파라오께서 전면에 나서주셔야 합니다."

  테오도로는 거기까지 말하고 바닥에 엎드렸다. 절절한 목소리가 알현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파라오께서 명령을 내리시면 일어날 충신들이 아직 저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사옵니다. 부디 결단을 내리시어 이집트의 정당한 왕권을 바로 세우소서."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아르시노에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좋아, 그리 하도록 하자.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이미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을 알렉산드리아 시내와 왕궁에 불러들였다. 그녀를 몰아내는 게 그리 쉽지는 않을 거야."

  "저희를 따르는 군사도 만만치 않습니다. 거기에 파라오께서 합류해 주신다면 저희는 명분에서도 뒤지지 않습니다. 아킬라스 장군이 왕궁을 함락시키고 모든 일을 끝내면 파라오께서 마르쿠스 총독을 설득해주십시오. 클레오파트라 님이 너무 독단으로 일을 처리해 이집트가 혼란스러워질 것을 우려했다고 하면 그분께서도 이해해주실 겁니다."

  "좋아. 그러면 나도 그대와 함께 가도록 하지. 아무리 조심했다고 하더라도 며칠 뒤면 자네가 나와 만났다는 사실이 클레오파트라의 귀에 들어갈 거야.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이 궁을 벗어나야겠네."

  왕궁이 이미 사실상 클레오파트라에게 장악되었다는 말에 테오도로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생각보다도 더 교묘한 클레오파트라의 움직임에 혀를 내두르며 아르시노에의 말대로 따르기로 했다.

  아르시노에는 테오도로스의 마차를 타고 그와 함께 은밀히 궁을 빠져나갔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이제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다.

  귀족들은 노예를 시켜 도시 곳곳에 격문을 써서 붙였다.

  '클레오파트라는 자랑스러운 프톨레마이오스 혈통의 의무를 잊어버렸다. 그녀는 세라피스가 아닌 짐승들을 숭배하며 이 알렉산드리아가 이룩한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고 한다. 이는 우리 위대한 선조들의 업적과 알렉산드리아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파라오가 알렉산드리아를 부정한다면 우리는 알렉산드리아의 시민으로서 파라오를 부정하겠다.'

  파라오의 권위를 정면에서 깎아내리는 문장이었다.

  하지만 지지자들을 결집하기엔 더없이 좋았다.

  아직까지 마케도니아 순혈주의를 주장하는 3할에 가까운 시민들과 귀족들에게 빌붙어 권세를 누리던 자들이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냈다.

  당연히 클레오파트라는 이런 격문을 붙인 자들을 전원 역도로 규정하고 참수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렇다고 귀족들이 목을 내밀고 자신들을 잡아가라고 할 리가 없다.

  하나로 똘똘 뭉친 마케도니아 귀족들은 병사들을 끌어모아 알렉산드리아의 서부 지역을 장악했다.

  그들은 아르시노에야말로 진정한 이집트의 파라오라고 부르짖으며 왕궁을 공격했다.

  하지만 맹렬한 기세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큰 소득은 없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미 알렉산드리아 시민들만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메토이코스라고 불리는 재류 외인들도 포섭해 놓은 상태였다.

  시내 한쪽에 격리되듯 모여 살았던 그들은 클레오파트라의 충실한 수족이 되어 귀족군의 발목을 붙잡았다.

  귀족군의 병사들을 이끄는 아킬라스는 몇 번이고 왕궁으로 향하는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양측 모두 상대방을 일거에 압도할 정도로 전력이 우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시가전의 양상을 띠게 된 전투는 보름이 넘어가도록 어느 한쪽으로 추가 기울지 않았다.

  그래도 귀족 연합은 그다지 초조해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로마의 총애를 받는 아르시노에는 자신들과 함께 있었고, 시간을 끌면 유리한 건 도시 외곽을 점령하고 있는 자신들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티오키아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군의 동향도 지속적으로 보고를 받았다.

  로마군이 개입한다면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 상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의외로 로마군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내전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로마인들의 상업 활동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도록 하라는 공문만이 내려왔을 뿐이다.

  테오도로스는 이걸 로마가 사실상 내전을 방관하겠다고 공표한 것이라 해석했다.

  귀족들에게는 오히려 좋았다.

  딱 한 가지 불만이 있다면 아르시노에의 미온적인 태도였다.

  그녀는 연합의 진영에서 머무르기만 할 뿐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시민들을 선동하거나 병사들을 독려하는 역할을 맡아달라고 해도 귀찮다는 듯 건성으로 일을 처리했다.

  "괜찮지 않습니까. 파라오가 저런 성격인 건 오히려 나중에 저희에게 이득이 될 겁니다."

  답답해하는 테오도로스에게 아킬라스가 그런 의견을 냈다.

  왕이 수동적이면 수동적일수록 권신들은 운신의 폭이 넓어진다.

  귀족들은 아르시노에가 원래 남이 떠먹여 주기만을 바랄 뿐 직접 나서지 않는 유형의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까 클레오파트라가 야금야금 세력을 넓히는 걸 방관하기만 하고 있던 것이다.

  지금은 저런 아르시노에의 성향이 답답하게 느껴지겠지만, 자신들이 권력을 잡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옛날 환관들이 권력을 잡고 있을 때처럼 파라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귀족들이 멋대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귀족들의 상당수는 벌써부터 승리를 확정 짓기라도 한 듯 서로 나눠 먹을 이권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킬라스는 들뜬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고 차분하게 지휘를 해나갔다.

  그는 일단 왕궁으로 들어가는 물자를 끊기 위해 항구를 장악하려 했다.

  당연히 클레오파트라도 그걸 두고 보지 않았다.

  전투의 중심지는 자연스레 도시 중심에서 항구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리아 상업의 중심인 항구가 전투에 휘말리자 당연히 경제의 흐름에도 타격이 갔다.

  귀족군은 최대한 상업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하려 했지만 전투를 하는 이상 일정 이상의 피해는 감수할 수밖에 없다.

  시민들은 점점 이 지리멸렬한 내전에 진절머리가 났다.

  알렉산드리아 시내의 여러 시설이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 파선 되었고, 얼마 전 막 시작한 식량의 배급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뿐인가.

  한창 진행되던 연극 공연도 중단되었고 공공 목욕탕도 물을 갈지 않아 더러운 냄새가 풍겼다.

  시민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기 바로 직전, 알렉산드리아의 앞바다에 대규모의 로마 상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귀족군도, 클레오파트라의 군대도 배에 손을 대지 말라는 엄명을 받고 자리를 지켰다.

  수십 척의 배를 끌고 다니는 상단이라면 로마에서도 알아주는 거상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자에게 피해를 입히면 바로 로마에 찍힐 우려가 있다.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던 양군이 행동을 멈추고 무언가를 잔뜩 실은 것처럼 보이는 수송선이 항구에 정박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배에서 내린 건 짐 마차나 상품 따위가 아니었다.

  귀족군이 본 적도 없는 휘황찬란한 갑옷을 입은 수백이 넘는 로마군이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앞에 서 있는 남성을 확인한 테오도로스와 아킬라스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였다.

  "어, 어째서 저자가 여기에······?"

  "로마군은 안티오키아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들었는데······."

  모두의 경악스러운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흘리며 천천히 걸어온 사내.

  마르쿠스가 대치한 양군을 둘러보며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완전 난장판이로군."

  < 175. 반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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