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유언 >
177.
로마 사람들은 아직 술라를 잊지 않았다.
술라의 시대를 직접 겪은 이들은 이제 대부분 원로였지만, 젊은이들이라고 술라에 대한 기억이 없는 건 아니었다.
술라와 마리우스의 권력다툼, 그리고 뒤에 이어진 잔혹한 숙청은 로마의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당장 술라가 문답 무용으로 숙청한 사람의 수만 해도 9천 명에 달했다.
지금 원로원 의석을 지키고 있는 사람 중 마리우스나 술라에게 가까운 친척을 잃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장 카이사르만 해도 장인의 가문이 술라의 손에 완전히 뿌리 뽑혔고, 크라수스는 부친을 마리우스파에게 살해당했다.
마르쿠스는 할아버지를 잃은 셈이었다.
폼페이우스 역시 내전에서 아버지를 여의었다.
현 로마를 떠받치는 삼두조차 저번 내전의 화를 피해가지 못한 것이다.
로마의 귀족들은 그날의 비극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래서 지금의 세력균형이 무너지는 데에 진심으로 걱정하는 이들이 많았다.
삼두가 로마의 중심이라는 건 인정하기 싫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불변의 사실이었다.
삼두의 한 축이 사라진다면 권력 구도에는 엄청난 변화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특히 다른 누구도 아닌 폼페이우스가 사라진다면 세력의 균형은 극단적으로 양분되는 구도가 된다.
민중파의 카이사르와 귀족파의 마르쿠스.
마르쿠스 쪽으로 무게가 기운다는 게 세간의 평이었으나, 카이사르는 육로로 로마를 향해 진군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비록 두 사람이 장인과 사위의 관계라고 해도 권력을 잡기 위해 가족끼리 갈라서는 건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폼페이우스의 퇴장을 걱정하는 이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귀족파 중 극단적인 사람들은 폼페이우스가 빨리 병상에 드러눕기만을 기다렸다.
그들은 로마를 이끌어나가는 건 언제나 원로원의 귀족들이어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지녔다.
이런 사람들에게 삼두의 균형이 무너지는 건 세상에 둘도 없을 희소식이나 다름없었다.
키케로 같은 온건파는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걱정스레 여기는 중이었다.
폼페이우스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게 세간에 흘러나가면 가까스로 안정시킨 로마의 민심이 당장에라도 요동칠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소문을 차단하고 세간의 의심을 불식시키려 노력했다.
폼페이우스는 이제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기력이 쇠했지만 중후한 무게감만큼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는 권력자이기 이전에 로마를 대표하는 지휘관이었고, 누구보다 뛰어난 전략가이기도 했다.
그동안은 이 능력이 정치적인 면으로 발휘되지 않았지만, 그건 능력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성향의 문제라고 보는 게 더 맞았다.
"지금 원로원의 동향은 어떤가?"
"자네의 빈자리를 노려보려는 승냥이들로 득실거리지. 그러니까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회의장에 얼굴을 비춰주게."
키케로는 폼페이우스의 저택에 매일같이 들락거리며 정계의 흐름을 전해주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했다.
비록 서로 간의 정치적인 입장은 달랐지만, 혼란이 커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같다.
폼페이우스는 건강과는 반비례로 부쩍 늘어난 통찰력으로 자신을 찾는 사람들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그리고 걱정을 빙자해 약점을 캐내려는 이들은 당연히 문전박대당하다시피 쫓겨났다.
폼페이우스의 곁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이는 키케로를 포함해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평상시엔 그렇게나 나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를 떨던 이들일수록 탐욕스러운 면모를 자주 보이더군. 이러니 내가 정치에 환멸을 느낄 수밖에."
"지금은 약과라고 생각하네. 자네의 건강이 나빠지면 나빠질수록 추이를 지켜보던 이들도 점점 더 본색을 드러낼 테니까."
"···안타깝군. 그런다고 해봐야 자신들이 로마의 중심에 설 가능성은 아예 없는 것을."
폼페이우스의 표정에 분노의 감정 따위는 없었다.
그저 안타깝고 허무하다는 기색만이 진하게 베여 나왔다.
이전과는 너무나 달라진 그의 태도에 키케로는 오히려 불안감을 느꼈다.
사람이 확 변하면 마지막이 가까워진 거라는 말이 불안한 가슴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폼페이우스가 완전히 자포자기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완전히 삶을 포기한 듯한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도 그는 앞으로의 계획을 입에 담았다.
"아무래도 섹스투스를 좀 더 가르쳐야겠어. 그나이우스만큼 성급하게 일을 처리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 애는 아직 어리니까. 자기 앞가림을 확실히 할 수 있을 때까지는 내가 교육을 전담해야겠지."
"그래. 내가 볼 때 앞으로 최소 몇 년은 더 자네가 옆에서 그 아이를 가르쳐야 하네. 적어도 클리엔테스들이 믿고 따라도 되겠다는 확신을 가질 정도는 되어야지."
"개인적으로는 오 년 정도를 보고 있네. 그 정도 시간만 주어지면 어떻게든 가문의 가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있을 거야."
키케로는 굳이 그게 가능하냐고 묻지 않았다.
일단 폼페이우스가 죽음을 입에 담지 않고, 자식의 교육을 계획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원로원에는 얼굴을 비치지 않을 생각인가?"
"조만간 한 번 가겠네. 아무래도 민중파 내부에서도 지금 여러 목소리가 나오는 실정이라."
"그래. 꼭 좀 생각해 보게. 자네가 한 번이라도 얼굴을 내비치는 것과 아닌 건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나니까. 지금 시끄럽게 입을 놀리는 놈 중 태반은 자네와 직접 눈을 마주치면 한마디도 하지 못할 게 확실해."
"그런 놈들이야 어차피 입만 나불거리지 실제 행동은 못 할 놈들이니 신경 쓰지 말게."
폼페이우스가 나직하게 말하며 실소를 지었다.
그의 웃음을 본 키케로도 마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건강의 악화로 매일같이 수심이 깊어졌지만 그래도 웃음 자체가 일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폼페이우스는 오히려 건강했을 때보다 더 많이 웃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 했다.
쉽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아예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마지막 원정을 끝낸 뒤 모든 걸 다 이룬 사람처럼 무력감에 빠져 지냈던 순간이 후회됐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거늘 어째서 개인의 일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것일까.
'시간이 있었을 때 자식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폼페이우스는 문득 어제 이야기를 나눴던 크라수스를 떠올렸다.
그는 폼페이우스가 죽고 난 뒤의 미래는 걱정했어도, 자신의 사후를 우려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가문을 온전히 자식에게 물려주는 데에 성공한 사람의 여유가 그때만큼 부러웠던 적이 없다.
'아무리 커다란 명성과 공을 쌓아도 결국 떠날 때가 오면 남겨지는 건 아직 장성하지 못한 자식들인 것을······,'
폼페이우스가 아버지를 떠나보낸 건 그의 나이가 고작 19살이었을 때였다.
더욱이 그때는 내전이 한창 진행 중일 때였다.
폼페이우스는 그런 상황에서도 훌륭히 가문의 재산과 토지를 지켜냈고, 오히려 군단을 모아 공을 세우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했으니 아들도 그래야 한다는 건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불과했다.
폼페이우스는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예전에 이집트에서 마르쿠스가 해줬던 조언이 몇 번이고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마침내 더 이상 기다리기만 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충직한 노예를 시켜 안티오키아로 서신을 띄웠다.
지금 서신을 보내 봐야 그걸 본 마르쿠스가 로마로 올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때까지 건강이 더 나빠지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기다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더 늦게 올 줄 알았건만 재회의 때는 생각지도 못하게 빠르게 찾아왔다.
폼페이우스가 보낸 서신이 브룬디시움에 채 당도하기도 전에 그가 왔다.
마르쿠스가 로마에 돌아온 것이다.
※※※
마르쿠스는 소란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늦은 밤 슬며시 로마로 들어왔다.
이집트에 데려온 병사들도 동행시키지 않았다.
스파르타쿠스와 섹스투스를 포함해 열 명 정도의 수행원들만이 그의 곁을 지켰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그것도 이렇게 조용히 들어올 줄은 몰랐네."
"안티오키아에 있는 제가 이유 없이 로마로 돌아온다면 반드시 무슨 일이 있다는 소문이 돌 테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차피 저는 로마로 자유롭게 돌아올 수 있는 권한이 있으니 법을 어긴 것도 아니고요."
"내 상태는 섹스투스에게 들은 것인가?"
"키케로 님이 서신을 보냈었습니다. 그 전에도 이집트에서 섹스투스를 본 제 지인이 마그누스 님의 건강이 염려된다는 말을 해줬고요."
폼페이우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섹스투스가 입을 경솔하게 놀렸나 보군. 역시 아직 어리단 말이야."
"제 지인이 꽤 날카로운 편입니다. 섹스투스가 큰 실수를 하진 않았다고 봅니다."
마르쿠스는 그 소식을 알려준 옥타비우스가 섹스투스보다 훨씬 어리다는 사실을 굳이 입에 담진 않았다.
후계자 문제로 속을 썩이고 있을 폼페이우스에게 괜한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지는 않았다.
마르쿠스는 폼페이우스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그의 안색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마지막으로 본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폼페이우스의 몸은 상당히 여위어 있었다.
그런데도 특이한 점은 눈빛은 한층 더 형형해진 느낌이다.
그렇게 좋아하던 포도주도 일체 입에 대지 않는 걸 보면 몸이 정상이 아닌 건 확실했으나,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았다.
"그런데 자네 자식들은 잘 크고 있나?"
"예.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걸 보는 게 제 몇 안 되는 기쁨 중 하나입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게 들리겠지만 자식들과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주게. 나처럼 되지 말고."
마르쿠스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한 기분이었다.
폼페이우스는 마르쿠스의 난감함을 알아차렸는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자네에겐 굳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하네. 듣기로는 로마의 어느 부모들보다도 자식 사랑이 각별하다고 하니."
"딱히 저만 그럴 리 있겠습니까. 자식을 사랑으로 품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다고요. 마그누스 님도 자제분들을 아끼시지 않습니까."
"글쎄···설령 그런 마음이 있다고 해도 그걸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에 지나지 않지. 나는 내 개인으로서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가문의 가장으로서는 실패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 사실 이런 충고는 자네보다는 카이사르 쪽에 해줘야 하는데 그가 지금 로마에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게 아쉽군."
"실패라니 그렇지 않습니다. 폼페이우스 님만큼 자신의 가문을 크게 일으킨 사람이 로마 역사상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후계자를 제대로 키워내지 못했지. 내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요절이라도 했다면 변명의 여지가 있겠으나 그것도 아니지 않나. 그나이우스는 실패했고, 섹스투스는 아직 미완에 지나지 않네."
폼페이우스의 표정은 착잡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르쿠스는 다른 의미로 그의 변화에 놀랐다.
이전의 폼페이우스였다면 절대로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의연하게 있으려고 애를 써도 정말로 친한 사람 앞에서는 자연스레 악한 점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는 폼페이우스가 마르쿠스를 얼마나 가깝게 여기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바로 그런 점이 마르쿠스를 더 안타깝게 만들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원래 몸이 허약해 보이는 사람들일수록 더 오래 산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사실 그래서 자네에게 로마까지 와달라는 염치없는 부탁을 한 거였네. 지금까지 부모 노릇을 제대로 못 했으니 마지막 가는 길에라도 확실히 하자는 생각에서 말일세. 얼마 남지 않은 내 생명이 꺼지기 전에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해놔야지."
"아닙니다. 제가 지금이라도 저명한 의사들을 불러와서······."
"의미 없는 행동은 하지 말게. 그래도 자네도 당황한 모양이로군. 이토록 확실한 사실을 부정하려고 애쓰는 걸 보면. 내 지금까지 자네가 되지도 않을 일에 매달리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말일세."
키케로의 앞에서 했던 말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발언이었다.
그래도 이게 폼페이우스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마르쿠스가 무슨 말을 더할 수 있을까.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폼페이우스의 말을 들어주는 것뿐이었다.
"요새는 내 수명이 머지않은 마지막을 향해가고 있다는 걸 매일같이 느끼고 있네. 이전에 떠나는 자네를 배웅할 때 매일 같이 기침을 달고 살던 걸 기억하나? 한데 이제는 그 기침마저 나오지 않더군. 주변에는 그만큼 다시 건강해졌기 때문이라고 하며 안심시키고 있지만 사실은 다르네.
몸이 나아서 기침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이제 기침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진 것이야. 그래도 자네가 이렇게 일찍 로마에 와줘서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네. 내가 병석에 누워 정신이 오락가락하지 않을 때 부탁을 할 수 있게 됐으니까.
"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래. 죽음을 빌미로 강압적으로 짐을 떠넘기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지만 자네 외엔 내가 믿을 사람이 없어서 그러니 이해해주게나."
폼페이우스는 마르쿠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가 뜨겁게 끓여 식힌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나는 가문을 이을 사람을 섹스투스로 결정했네. 하지만 그 아이는 아직 어려. 이제 막 성인이 되는데 주변의 누가 그 아이를 믿고 따라가겠나. 그 아이가 나처럼 이른 나이부터 군공을 쌓은 것도 아닌데. 그러니 부탁함세. 만약 내가 세상을 떠난다면 삼 년···아니, 이 년 만이라도 자네가 그 아이를 좀 돌봐주게. 그렇게만 해준다면 설령 그 아이가 가문의 세를 유지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내 운명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네."
마르쿠스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이곳에 올 때부터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갈지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바다.
그가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 올라오는 기분을 억누르며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섹스투스가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제가 책임지고 그의 뒤를 봐주겠습니다."
< 177. 유언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