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
180.
마르쿠스는 카이사르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솔직히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굳이 가능성을 꼽자면 지금처럼 행동할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하지만 예상은 했다고 하더라도 막상 현실이 되니 곤란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르쿠스는 카이사르에게 단순히 폼페이우스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는 소식만을 전한 게 아니었다.
폼페이우스가 자신이 사라져도 섹스투스를 돌봐달라는 부탁을 했고, 자신은 최소 2년 정도는 그를 돌봐줄 예정이라는 말도 적어두었다.
그리고 카이사르에 물었다.
섹스투스가 폼페이우스의 후계자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면 삼두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줄 의향이 있느냐고.
대답은 그가 보낸 편지의 마지막에 적혀 있었다.
<실로 복잡하면서도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하네. 하지만 굳이 지금 바로 답을 내릴 필요는 없지 않겠나? 만약 섹스투스가 마그누스의 모든 걸 이어받을 그릇이라면 그의 세력을 온전히 흡수할 수 있겠지.
자네가 2년가량 돌봐준다고 했으니 그 정도라면 자기 기반을 다지는 데 충분한 시간이라고 보이네. 정말로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내가 그를 삼두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나. 하지만 아무리 봐도 폼페이우스의 후계자로서, 민중파의 수장이 될 자로서의 역량이 보이지 않는다면 글쎄. 나로서는 어떤 선택을 내리게 될지 잘 모르겠네. 물론 장기적으로 봤을 때 로마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결정해야겠지. 그게 자네와 나에게도 더 좋지 않겠나. 로마로 돌아가게 되면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세.>
마르쿠스는 카이사르의 편지를 받고 몇 번이나 우려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게좋게 돌려 말하고는 있었으나 이건 아무리 봐도 섹스투스를 삼두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섹스투스가 폼페이우스의 모든 걸 계승할만한 그릇이라면 인정하겠다고 한 것부터가 그 증거였다.
폼페이우스를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은 현 로마에 카이사르와 마르쿠스 단 두 명밖에 없다.
정치적인 능력만 보자면 옥타비우스도 가능하겠지만, 아직 그에게는 부족한 군재를 채워줄 심복이 없었다.
섹스투스로서는 당연히 무리였다.
그나이우스보다는 낫다고 해도 폼페이우스와의 비교는 당치도 않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카리스마, 그리스권에 대한 영향력, 민중들의 사랑.
그 어느 것 하나 섹스투스는 폼페이우스에게 미치지 못했다.
그 사실을 카이사르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저런 조건을 달았다는 건 그냥 자신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카이사르의 능력을 고려해 보면 섹스투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카이사르의 상대는 될 수 없었다.
굳이 무력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정치력 측면에서도 카이사르는 섹스투스와 비교가 되지 않았으니까.
작정하고 세력을 집어삼키려고 한다면 야금야금 이권을 털릴 수밖에 없다.
마르쿠스가 중재를 해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럼 그 다음의 일은 아주 쉽게 예측이 갔다.
섹스투스가 두 눈 멀쩡히 뜨고 가진 이권을 털릴 리가 있겠는가.
아무리 섹스투스가 카이사르에 비해 부족하다고 해도 그가 폼페이우스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카이사르를 상대로 일전을 벌일 수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정말로 내전이 일어난다면 귀족파가 누구의 편에 붙을지는 뻔했다.
그대로 놔두면 섹스투스가 쭉 밀릴 테니 그를 지원해 힘의 균형을 맞추려고 하지 않겠는가.
"처음부터 그런 흐름으로 가도록 의도적으로 상황을 조성하겠지."
카이사르와 마르쿠스에게 더 좋을 거라는 말의 의미도 저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잘만 하면 저 일을 빌미로 삼아 원로원의 공화주의자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르쿠스는 급한 일이 생겼다는 핑계로 동방에서 잠시 모른 척하고 있기만 하면 된다.
분명 결과만 놓고 보면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렇게 하자니 마음이 조금 걸렸다.
폼페이우스의 자식을 그렇게 매정하게 내친다는 게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섹스투스가 그나이우스처럼 분수도 모르고 기어오른다면 차라리 마음 편하게 밟아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섹스투스는 마르쿠스를 적대할 마음은 없었고, 오히려 그의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게 너무 티가 많이 날 정도였다.
"그래. 장인어른 말대로 지금 당장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겠지. 2년 뒤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알 수 없으니까."
카이사르가 게르마니아 원정을 끝낼 때까지는 아직 상당히 여유가 있었다.
그것보다는 앞으로 로마에 닥칠 혼란을 어떻게 최소화할지 더 고민을 해봐야 했다.
우선 눈앞에 당면한 문제들에 생각이 미친 그는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더 고민했다.
그리고 이내 결론이 나온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번에는 조금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겠어. 다른 의원들에게도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확실히 알려줘야 경거망동을 하지 않겠지."
폼페이우스는 로마를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을 세운 영웅이다.
그런 사람의 마지막을 앞두고 모략만이 난무하는 현 세태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르쿠스는 크라수스와 쿠리오에게 부탁해 원로원 회의를 소집했다.
로마가 폼페이우스를 떠나보낼 수 있도록 마지막 준비를 끝마치기 위해서였다.
※※※
폼페이우스의 건강은 날이 갈수록 악화됐다.
아무리 숨겨도 이런 소문은 빠르게 퍼지기 마련이다.
마르쿠스는 더 이상 비밀로 한다고 해도 별 소용이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비밀리에 출석한 원로원 회의에서 이미 귀족파와 민중파의 합의를 끌어냈으니 로마가 혼란에 빠질 염려도 없었다.
결국 폼페이우스의 건강이 심각한 상태가 맞다는 말이 로마 전역에 퍼져 나갔다.
이 일을 수습하기 위해 마르쿠스가 로마로 돌아왔다는 것도 이제 모두가 알게 됐다.
식견이 있는 소수의 시민들은 이를 빌미로 또다시 민중파와 귀족파가 충돌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공식적인 발표가 이뤄지기 전에 마르쿠스가 이미 분란의 씨앗을 전부 없애버린 덕분이었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님의 공백이 다시 메워질 때까지 제가 직접 로마에 머물며 국정에 힘을 보태겠습니다.
만약 이번 일을 빌미로 혼란을 일으키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 누가 됐든 간에 지위여하를 막론하고 법의 심판을 받게 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이라도 정치적인 대립을 멈추고 이제 곧 로마를 떠날 위대한 영웅을 위해 진심 어린 애도의 기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
마르쿠스가 이 정도로 강경하게 원로원 회의장에서 발언을 한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그 취지에는 대다수가 찬성의 의사를 밝혔다.
키케로도 진정으로 양식 있는 원로원 의원이라면 정쟁을 벌일 때와 그러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두가 납득하자 마르쿠스는 폼페이우스를 위한 마지막 행사를 자신이 직접 주관하겠다고 밝혔다.
당연히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마르쿠스는 폼페이우스가 로마인들 중 가장 행복하게 눈을 감을 수 있도록 마지막 영광의 무대를 만들어 주었다.
폼페이우스의 기력이 더 떨어지기 전에 행사를 열어야 했기 때문에 조금 서두르긴 했지만, 다행히도 제때에 맞출 수 있었다.
당초 행사는 폼페이우스가 예술가들을 위해 건립한 폼페이우스의 극장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로마에 최초로 건립된 상설극장이라는 상징성이 폼페이우스외 굉장히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조사를 해보니 참여하고 싶어 하는 시민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5천 명밖에 수용할 수 없는 극장으로는 도저히 시민들의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콜로세움으로 장소가 변경됐다.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고 예상했으나 폼페이우스를 향한 시민들의 사랑은 상상 이상이었다.
폼페이우스를 보기 위해 조금이라도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콜로세움은 새벽부터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최대한 간격을 붙여서 사람들을 앉게 했음에도 자리가 모자랐다.
결국 마르쿠스는 시야를 가리지 않는 위치에 임시좌석 간이 망루까지 설치하도록 명령했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영웅을 향해 검투사 경기의 결승보다도 더욱 뜨거운 환호를 보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저쪽이다! 폼페이우스가 들어온다!"
"와아아아아!"
함성 소리가 콜로세움을 뒤흔들었다. 엄청난 반응이었다.
폼페이우스는 가마에 탄 채로 편하게 누워서 관람할 수 있도록 자리로 안내됐다.
"엄청나구만."
수많은 시민들의 환호에 휩싸인 폼페이우스의 피곤한 안색에 오랜만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오늘 행사가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는 듣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은퇴를 기념하기 위한 축제가 개최될 거라고 들었을 뿐이다.
"이런 호사를 누리며 정계를 떠나는 사람은 로마 역사상 마그누스 님밖에 없을 겁니다."
혹시나 문제가 생길까 싶어 폼페이우스의 곁을 지키고 있는 마르쿠스가 말했다.
폼페이우스는 흡족하게 웃으며 관중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병사들이라면 몰라도 이 정도 숫자의 시민들의 열광을 독점해본 일은 폼페이우스로서도 손꼽을 정도였던 까닭이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자네의 배려에는 언제나 감동하게 되는군. 지금까지 정말 고마웠네."
"아직 본 행사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그러시면 곤란합니다."
자연스레 마지막을 염두에 두는 발언에 마르쿠스의 목소리에 안타까운 감정이 실렸다.
폼페이우스의 가마가 제 자리에 위치하자 드디어 무대의 막이 올랐다.
사회자 역할을 맡은 키케로가 경기장의 중앙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았기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구역에는 사람들이 배치되어 키케로의 말을 전달해주었다.
그는 먼저 이런 자리에서 사회를 맡아 영광이라고 밝힌 뒤, 폼페이우스의 위대한 업적을 쭈욱 나열하며 칭송의 말을 읊었다.
지금까지 그가 이룩한 업적, 로마에 가져온 이득과 영광.
그 모든 것들이 있는 그대로 발표되었다.
본래 이런 자리에서는 적당히 살을 붙이는 게 보통이었으나 폼페이우스는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있는 사실 그대로를 전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행적이 얼마나 영웅적이었는지 모두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 여기 모인 시민분들 중에는 위대한 폼페이우스와 함께 해적을 소탕하고 동방을 정벌한 역전의 용사들도, 악숨과 쿠시를 무릎 꿇리고 아프리카의 완전 정복을 이룩한 전사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저 소문과 소식으로 그의 업적을 접한 이들이 많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로마의 시민들 모두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업적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
사위를 울리는 함성 속에서 키케로가 퇴장하고 극단의 배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폼페이우스의 일생을 담은 장대한 연극이 시작된 것이다.
키케로의 말대로 이번 연극은 폼페이우스가 지금까지 이룬 업적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게 목표였다.
거의 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동원해 꾸민 무대다.
지금까지 로마에서 이와 비교될 만한 규모의 연극이 상영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18세의 나이 때부터 군단을 이끌었던 폼페이우스의 찬란한 과거가 무대 위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독재자 술라에게조차 인정받은 천재적인 군사능력으로 마그누스라는 별칭을 얻고, 레피두스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는 모습이 현실적으로 그려졌다.
이게 본격적으로 폼페이우스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걸 알린 신호탄이었다.
그 이후 스페인에서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을 제압하고, 이어서 봉기를 일으키고 패배한 검투사들의 잔당을 완벽히 소탕하며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
이 공으로 개선식을 거행하고 집정관까지 오른 그의 나이는 불과 서른다섯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후 폼페이우스의 명성을 역대 그 어느 로마 장군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게 만든 대 사건이 터진다.
바로 지중해 전역을 뒤덮은 해적들을 일거에 소탕해 버린 대작전이었다.
이 과정은 특별히 공을 들여 경기장에 물을 채우고 소규모의 모의 해전까지 치르며 당시 상황을 재현했다.
시민들은 이때 물류가 마비되어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렸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이 해적들을 불과 3개월 만에 쓸어버린 것은 폼페이우스 스스로도 가장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쾌거였다.
이어서 폰투스의 왕 미트리다테스를 토벌하고 아르메니아를 무릎 꿇리며, 셀레우코스 왕조와 하스몬 왕가를 합병한 과정이 쭉 이어졌다.
폼페이우스는 아련한 눈빛으로 무대 위에서 펼쳐지고 있는 자신의 영광의 시절을 지켜보았다.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완전히 무대에 집중해 환호성을 지르고, 감동에 겨워하는 시민들의 얼굴이 보였다.
세상 그 어디까지라도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그날의 기억들이 폼페이우스의 가슴 속에서 다시금 되살아났다.
마지막으로 가는 길, 최고의 선물을 받은 것이다.
연극을 마치고 객석을 향해 인사를 건네는 배우들.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지르며 열광하는 시민들의 모습.
마지막으로 무대에서 폼페이우스를 향해 올리는 원로들의 찬사까지.
이제 폼페이우스라는 이름은 로마의 역사에 불멸로 남게 되리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평생의 경쟁자이자 마지막에는 좋은 친우였던 크라수스의 눈물 어린 기념사를 들으며 가벼운 웃음을 보였다.
생의 마지막을 앞두고도 초연한 미소였다.
< 180.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