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3. 한나라 (184/326)

  < 183. 한나라 >

  183.

  장장 몇 개월에 걸친 여정이었다.

  살짝 연 창문 틈새로 보이는 거리의 광경은 로마나 안티오키아와는 완전히 달랐다.

  웅장한 도시의 규모와 거리의 활기는 푸블리우스에게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함께 따라온 베레니케도 신기한 듯 도시의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눈을 떼지 못했다.

  "형님께서 한나라가 로마에 뒤지지 않을 강국이라고 하셨는데 과연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군."

  "그러게요··· 거리란 건 참 무섭단 생각이 들어요. 이 정도의 대국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집트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형님의 말에 의하면 이곳도 황하라는 커다란 강을 끼고 있어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 버금갈 정도로 문명이 빠르게 시작되었다고 해. 왕에게 거의 모든 권력이 집중된 중앙집권적인 국가라고도 했으니 어떻게 보면 동방의 이집트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긴, 로마보다는 이집트에 더 가깝겠네요. 여기 도시 이름이 뭐라고 했죠?"

  "장안. 관중이라고도 한다는데 이 관중 평야 유역에 거의 3할에 가까운 인구가 살고 있다고 해. 그만큼 풍족한 지역이라는 뜻이겠지."

  마르쿠스는 이 외에도 몇 가지 정보를 더 알려주었지만,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푸블리우스는 내심 마르쿠스의 이야기를 더 귀담아들을 걸 그랬다며 후회했다.

  당장 마중을 나온 관리에게 장안의 인구가 안티오키아를 넘어 로마에 육박한다는 사실을 듣고 얼마나 놀랐던가.

  물론 한나라의 관리 역시 로마의 인구가 백만이라는 푸블리우스의 말에 입을 떡 벌린 건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일단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사항들을 미리 받아오긴 했다.

  푸블리우스는 품속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던 수첩을 꺼내 마르쿠스가 적어준 내용들을 다시 훑어보았다.

  "한나라의 왕은 본인을 황제이자 천자라고 칭한다고 해. 하늘의 주인인 상제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신에게 직접 제사를 지낼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신분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하더군."

  "파라오가 호루스의 화신인 것과 비슷하네요. 그래도 여긴 신이 아니라 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니 한 단계 급이 낮은 느낌이네요."

  푸블리우스가 볼 때는 자신을 신이라고 하는 것이나, 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나 정상은 아니었으나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푸블리우스 님, 이제 곧 사신관에 도착할 것입니다. 저쪽에서 응대할 사람이 나올 거라 했습니다. 우선 황실에 납품하기로 한 설탕들을 건네준 뒤, 시기를 잡아 한나라의 천자와 알현할 예정이라 합니다."

  "그러면 천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쪽 마음대로 움직여도 된다는 뜻인가?"

  "통역할 역관을 데리고 다니기만 하면 문제없다는 대답을 받았습니다."

  푸블리우스는 사절단과 동행한 상인들의 수장 타디우스를 힐끗 돌아보았다.

  오래전부터 마르쿠스의 심복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이번에도 중대한 임무를 띠고 이 자리에 파견됐다.

  포도주와 설탕을 잔뜩 싣고 온 그의 상단은 누가 봐도 교역을 하러 온 것으로 보였으나, 진짜 목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비단을 생산하는 원료가 되는 누에고치를 확보하는 것.

  나머지는 전부 주의를 돌리기 위한 눈속임용에 불과했다.

  타디우스를 따르는 대다수의 사람들도 상인으로 위장한 병사들이었다.

  마르쿠스는 대체 어디에서 정보를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누에고치를 구할 수 있을 만한 후보지를 여러 곳 선정해 미리 알려주었다.

  베레니케는 대체 이런 걸 어떻게 알았을까 의문을 가졌지만 푸블리우스와 타디우스는 시큰둥하게 어깨를 한 번 으쓱할 뿐이었다.

  "형님이 하시는 일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면 돼."

  "그렇습니다. 그냥 의심 없이 받아들이면 그만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는 게 시간낭비죠."

  마르쿠스와 직접적으로 긴 시간을 같이 보내지 않은 베레니케는 아직 그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사절단의 선두가 사신관에 도착했다.

  문 앞에는 한눈에 봐도 고위직인 걸 알 수 있는 화려한 비단옷을 걸친 관리가 서 있었다.

  푸블리우스를 안내해 주던 한나라 역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승상께서 직접 마중을 나오시다니······."

  "승상? 높은 사람인가?"

  "높은 정도가 아닙니다. 승상은 한나라 최고위 대신인 삼공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대우 받는 직책입니다. 상국이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직책이 되었으니 승상이야말로 신하가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지위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사실상 이 나라의 이인자라는 말이군."

  "본래 외국과 관련된 사무는 상시조에서 주관할 텐데 어째서 승상께서······."

  황급히 마차에서 내린 역관이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승상을 뵙습니다. 사신관까지 어인 행차시옵니까."

  "고개를 들게. 먼 곳에서 온 손님을 환영하기 위해 나온 것이니."

  "승상께서 직접 말씀이시옵니까?"

  "서방에서 온 오랑캐라고 해도 공식적인 첫 수교인 만큼 예우를 해주는 게 대국으로서의 도리가 아니겠나. 자네가 적절하게 통변을 하게나."

  역관은 크게 고개를 끄덕인 뒤, 푸블리우스에게 다가가 그럴싸하게 의미를 바꿔 말했다.

  "먼 곳에서 귀하신 분들이 오셨으니 직접 찾아오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허어, 이거 확실히 도리를 아는 사람들이로군. 고맙다고 전해주게."

  일국의 이인자가 직접 사신을 맞이하러 나왔다는 의미는 결코 가벼운 게 아니었다.

  푸블리우스는 한나라가 자신들을 그만큼 특별대우하고 있다고 여겼다.

  사실 이건 전적으로 한나라가 로마의 체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한나라는 로마에게서 꾸준히 설탕을 들여오면서 나름대로의 정보를 함께 수집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화정이라는 제도에 생소한 한나라는 로마의 정치 상황을 자신들의 주관에 맞게 해석했다.

  그들이 인식하고 있는 로마는 세 명의 왕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는 연합국에 더 가까웠다.

  그중 파르티아를 정복하고 그 몇 배나 되는 영토를 다스린다는 마르쿠스는 한나라에 샤한샤, 즉 왕중왕으로 알려져 있었다.

  기존에 수교를 맺고 있던 파르티아의 왕중왕보다 훨씬 더 강한 힘과 권력을 지닌 존재니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푸블리우스는 그런 사햔샤의 하나뿐인 친동생이라고 한다.

  즉, 한나라로 치자면 천자의 동생인 친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 인물이 직접 사신으로 방문한 것이니 당연히 상시조에게 알아서 처리하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결국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승상인 우정국이 직접 마중을 나가기로 한 것이다.

  만약 어설픈 관직을 지닌 이가 나섰다가 푸블리우스의 성질을 건드리기라도 하면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나라는 현재 로마에서 들여오는 설탕으로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괜히 사신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 설탕의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 난감해지는 건 한나라였다.

  물론 승상이 오랑캐를 직접 마중한다는 건 중원의 체면이 손상되는 일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었다.

  그래서 우정국이 직접 나온 건 어디까지나 대국의 아량을 보여준다는 게 대외적인 이유였다.

  어차피 로마인들은 한어를 모르니 역관이 중간에서 적절히 통역을 조절하기만 하면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실제로 로마는 설탕을 주고 은과 금을 건네받는 무역을 한다고 알고 있었지만, 한나라의 입장은 달랐다.

  한나라는 어디까지나 서방의 최강대국 로마조차 자신들에게 조공을 바치고 있으며, 비단과 금은은 조공에 대한 사여품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당연히 로마는 이를 알지 못했다.

  한나라도 로마에게는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았으니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우정국은 최대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마차에서 내린 푸블리우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한의 승상이자 서평후인 우정국이라 합니다."

  "사절단의 총책임자를 맡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입니다."

  "반갑습니다. 이토록 먼 걸음을 해주신 데에 우선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천자께서는 나흘 뒤 여러분들을 접견하실 예정이십니다. 다만 요새 쉽게 피로를 느끼셔서 짧은 시간밖에 할애를 하지 못하신다는 점, 미리 양해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세심한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푸블리우스는 또다시 마르쿠스의 예상이 맞았다는 데에 혀를 내둘렀다.

  '한나라의 천자가 건강이 좋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더니······.'

  마르쿠스가 이런 귀띔을 해준 건 효선황제의 사망 시기가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푸블리우스는 형이 또다시 신들에게 지혜를 받았구나 하고 감탄할 따름이었다.

  "혹시 당분간 머무시면서 계획하고 계신 일이 계십니까? 있다면 저희 쪽에서 최대한 편의를 봐드리겠습니다."

  "그래 주신다면 저희야 고맙지요. 사실 상당한 양의 설탕과 포도주를 추가로 가져왔습니다. 이걸 팔아서 금과 비단으로 바꾸어 가져가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당연히 가능하지요. 금조의 관리에게 내일이라도 이곳을 찾으라 일러두겠습니다. 세세한 사항은 그에게 지시를 내리면 될 겁니다."

  우정국의 태도는 정중했으나 동시에 소란을 일으키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함도 느껴졌다.

  한나라가 이번 로마 사신을 대대적으로 맞이하는 건 주변국에게 위세를 과시하려는 속셈도 있었다.

  푸블리우스는 마르쿠스에게 사전에 들은 대로 여기에 적당히 맞춰줄 작정이었다.

  비단 제조에 관해서는 처음부터 물어볼 생각조차 없었다.

  푸블리우스는 사신관에 머무는 동안 상업에만 관심 있는 연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황실에서 부름이 있었다.

  중원에서 가장 존귀한 신분.

  한제국의 황제이자 하늘의 아들.

  흉노의 호한야를 항복시키며 한 왕조의 중흥을 이룩한 위대한 황제였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푸블리우스는 우정국이 일러준 대로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원래 조공국의 신하는 입조할 때 황제를 향해 큰절을 올리는 게 공식적인 절차였다.

  그러나 로마는 한나라에게 공식적으로 조공을 바치는 관계가 아니었다.

  한나라의 관리들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그냥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가기로 결론을 지었다.

  푸블리우스에게 굳이 절을 시키진 않았지만, 어쨌든 대외적으로는 그가 천자에게 절을 하고 조공품을 바쳤다는 걸로 기록될 것이다.

  어차피 로마인들은 한어를 모르니 문제될 게 없다는 게 그들의 판단이었다.

  "푸블리우스라··· 서방의 샤한샤의 동생이라고 들었네."

  효선황제는 약간 기력이 떨어져 보이긴 했어도 여전히 위엄이 넘치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푸블리우스는 마르쿠스가 샤한샤가 아니라는 사실을 굳이 입에 담진 않았다.

  "그렇습니다, 폐하."

  "그쪽에서 바친 설탕 덕분에 지금까지 제법 괜찮은 성과가 있었지. 덕분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속을 썩이던 우환거리도 싹 사라졌고. 보상을 내려줄 테니 나중에 우승상에게 원하는 걸 말하게."

  "황송합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절차를 거친 뒤 다시 궁을 나선 푸블리우스는 그를 뒤따라온 우정국에게 물었다.

  "아까 역관의 말을 듣자 하니 무슨 골치 아프게 하던 문젯거리가 사라졌다는데 그게 무엇입니까?"

  "아, 그건 아직 확실한 사안은 아닙니다. 내년이 되면 언제 잠잠했냐는 듯 다시 난동을 피울지도 모르지요."

  "혹시 지금 전쟁을 하는 상대라도 있는 겁니까?"

  우정국이 얼굴을 찌푸렸다.

  "전쟁이라기보다는 수백 년 동안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북쪽의 야만족들이 있습니다. 흉노라고 아주 질이 좋지 않은 유목민족들인데 틈만 나면 이쪽으로 쳐들어와 약탈과 노략을 일삼으니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지요."

  "과거형인 걸 보면 지금은 아니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만."

  "뭐, 사실 그렇습니다. 당대의 천자께서 흉노의 호한야를 굴복시키기도 하셨고, 주변국들에 대한 지배력이 한층 강해졌기 때문인지 놈들이 갑자기 잠잠해졌으니까요. 최근 놈들의 상당수가 서쪽으로 이주하고 있다는 말도 들리는 걸 봐서는 드디어 중원을 쳐도 득보다 실이 더 많다는 걸 깨닫지 않았나 싶습니다."

  과거 로마도 북쪽의 갈리아와 게르만에게 연달아 침략을 당한 역사가 있었다.

  푸블리우스는 한나라와 흉노의 관계를 대충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 흉노란 자들이 서쪽으로 옮겨갔다면 우리의 교역로에 눈독을 들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이전에도 그러긴 했습니다. 한 100년 전쯤 저들이 아주 강성했을 때가 있는데 그때는 비단길이 저들에게 넘어갔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럴 걱정이 없습니다. 저들은 하나로 뭉치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지만 조직력이 모래알과도 같아서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쉽게 분열되거든요. 그러니까 결국 오랑캐에 지나지 않는 것이겠지요."

  "대충 무슨 의미인지 알겠습니다. 저희 북쪽에도 갈리아라고 비슷한 야만족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항상 자기들끼리 분열되어 치고받고 싸우면서도 통일된 집단을 유지하지 못했었죠. 그래서 결국은 저희에게 점령당하고 속주화가 되었습니다."

  "그것 참 통쾌한 결말이로군요. 그게 바로 약탈과 노략이 아니면 세력을 불릴 수 없는 오랑캐들의 한계가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이렇게 된 거 로마가 어떻게 주변의 야만족들을 정리했는지 그 비결을 좀 들려주십시오. 저희도 참고할 게 있으면 사용해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제가 장안에서 가장 좋은 기루로 모시겠습니다."

  "얼마든지 들려드리겠습니다. 안 그래도 이곳의 술맛은 어떠한지 궁금하던 참이었습니다."

  푸블리우스가 화통하게 웃으며 우정국의 뒤를 따랐다.

  의외로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은 금세 의기투합해 잔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어쩌면 누에고치의 확보보다 더욱 중요한 이야기가 오고 간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푸블리우스에게는 그걸 알아들을 수 있을 만한 배경지식이 전무했다.

  그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어디서 굴러먹던 흉노라는 야만족보다는 비단의 재료인 누에고치에 정신이 더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로마로 돌아가면 마르쿠스에게 이 이야기를 잊지 말고 해줘야겠다는 정도의 의식은 있었다.

  푸블리우스가 흉노라는 이름에 대해 가지는 감상은 아직까지는 이 정도에 불과했다.

  < 183. 한나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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