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흔들리는 균형 >
186.
카이사르는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자는 마르쿠스의 요청을 무시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로마와 갈리아의 경계선에 있는 루카에서 회동을 가지기로 했다.
루카는 원 역사에서 카이사르와 크라수스, 폼페이우스가 삼두정치를 공개적으로 드러낸 기념비적인 장소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평범하고 한적한 산림도시에 불과했다.
마르쿠스가 이곳을 지정한 건 이렇게라도 이 역사적인 장소를 한 번쯤 와보고 싶어서였다.
그는 아우세르 강변의 기분 좋은 바람을 맞으며 카이사르의 도착을 기다렸다.
카이사르는 마르쿠스가 도착하고 정확히 반나절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호위로 데려온 백여 명 정도의 기병대는 건물 밖에 대기해 둘만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카이사르가 안으로 들어오자 마르쿠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십시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야 자네가 했지. 산책을 하기엔 꽤 멀리까지 나온 게 아닌가?"
카이사르가 장난기 어린 어조로 물었다.
물론 서신이 아니라 굳이 직접 만나자고 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리라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르쿠스가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지도 약간은 짐작하고 있었다.
서신을 미리 받기도 했고, 애초에 그도 비슷한 이유로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가.
준비된 의자에 비스듬하게 누운 카이사르의 목소리가 방 안에 낮게 내리깔렸다.
"원래 느긋하게 서로의 업적을 축하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럴 시기는 아닌 것 같군. 자네가 보낸 편지는 봤네. 엘베강 동쪽 유역의 동향을 살펴달라고 했지? 이미 조사를 위해 병사들을 파견해 둔 참이라네."
"예? 이상한 징후가 포착되기라도 한 겁니까?"
"아니. 그런 줄 알고 보냈는데 결과는 별거 없었네. 나도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찝찝했었는데 의외더군."
"확실한 겁니까?"
마르쿠스는 이상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어째서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냐며 의아해하는 카이사르에게 현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다.
카이사르는 신중한 얼굴로 마르쿠스의 말을 경청했다.
"과연··· 자네는 카렌 왕국에 쳐들어왔던 유목민족들의 사례가 게르마니아 동부의 이변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비약이라고 여기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반드시 확인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카이사르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아직 완전히 납득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자네가 뭘 우려하는지는 알겠네. 그래도 카렌 왕국이 있는 곳과 게르마니아 동부는 거리가 어마어마하게 떨어져 있지 않나? 육로로 빙 돌아간다면 말을 타고 몇 주는 족히 내달려야 할 텐데?"
"유목민족의 이동반경은 저희들의 통념과는 많이 다릅니다. 갈리아나 게르마니아와도 비교가 되지 않아요."
"스키타이란 유목부족의 세력이 과거 막강했다는 건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그들은 결국 파르티아조차 무너뜨리지 못했지 않나. 단순히 그들만 보자면 로마의 적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마르쿠스가 걱정하는 건 바로 이런 인식의 괴리였다.
동방에서 가장 강대한 유목제국이 흉노라면 서역에서는 스키타이를 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가 전성기를 맞이했을 때 스키타이는 이미 쇠퇴기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리고 이들을 중앙아시아에서 밀어내고 파르티아와 박트리아를 공격할 수밖에 없게 만든 이들이 바로 흉노였다.
흉노는 끊임없이 중화권과 싸우며 성장한 유목 국가로 북아시아, 아니 세계 최강의 유목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역사상 이들의 영역은 중원의 북부에서부터 몽골 고원 전체, 현대의 시베리아 남부와 만주에까지 뻗어 있었다.
진나라가 쌓은 그 유명한 만리장성도 이 흉노를 견제하기 위한 방벽이었다.
그 강대한 한나라조차 흉노에게 패해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치고 실크로드를 빼앗긴 적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현 시대에는 흉노의 전성기가 한풀 꺾인 상태였다.
그래서 마르쿠스도 지금까지 북방 유목민족들의 동향에 그리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역사의 줄기는 다르게 뻗어 나가고 있었다.
저 먼 동북방까지는 영향이 미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게 안이한 판단이 될 수 있었다.
유목민족의 특성상 강대한 부족이 나와 세력을 통일한다면 그들은 언제라도 세계를 휩쓰는 재해로 성장할 잠재력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봐도 전성기의 흉노가 그랬으며, 이후 중원을 정복하는 몽골과 여진족의 사례가 그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로마인은 마르쿠스가 품고 있는 위기의식을 공유할만한 역사적 배경이 전무했다.
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식견이 있는 카이사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마가 유목민족의 무서움을 실감하게 되는 건 지금으로부터 400년 뒤인 훈족의 발호다.
흉노와 스키타이의 혼혈인 훈족은 게르만족을 간단히 복속시키며 로마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후 신의 채찍이라고 불린 훈족의 왕 아틸라에게 로마는 악몽과도 같은 경험을 맛보게 되지만, 그건 너무나도 먼 미래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사실 로마의 국력은 원 역사보다도 훨씬 더 강대했으니 마르쿠스가 괜한 걱정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낮지는 않았다.
물론 그도 자신이 과민반응을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황을 확실히 판단하기 위해 카이사르의 협조를 구했던 것이다.
"카이사르 님이 제 서신을 받기도 전에 조사대를 파견했던 건 나름대로 걸리는 점이 있으셨던 게 아닙니까."
"게르마니아 원정을 하면서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을 느꼈었네. 하지만 조사를 간 병사들의 말을 들어보니 별다른 특이사항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걸세. 자네도 같은 조사결과를 받았다고 했었지?
그래서 난 이런 결론을 얻었네. 자네가 도입한 신무기들 덕분에 안 그래도 강했던 우리 군단의 전력이 이제 타국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게 아닐까? 자네, 아라비아 원정을 하면서 적들의 전력에 단 한 순간이라도 긴장을 했던 적이 있나?
"
"없습니다. 회전은 단 한 번 했을 뿐이지만 전투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랬겠지. 나도 비슷했네. 브리타니아 원정 때부터 느꼈지만 전술을 짜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전력 차이가 극심했어.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살육이 되니 전투 한두 번만 해도 적들도 저항 의지를 상실하더군."
이건 오만이 아니었다.
마르쿠스 역시 파르티아 원정 때부터 익히 느끼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로마군이 보유하고 있는 장비는 현대로 치면 비대칭전력의 일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일반적인 전쟁이 성립할 리가 없다.
지금까지 로마와 적대한 모든 국가가 너무나 손쉽게 무너진 건 미지에 대한 공포가 강하게 작용했다.
실제로 10년 가까이 전장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카이사르는 강대해진 로마의 힘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유목민족의 위험성을 듣는다고 해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래 봐야 충분히 찍어 누를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시질 않았다.
오히려 마르쿠스가 카이사르의 의견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사실 딱히 그렇지 않더라도 지금은 적극적인 방어대책을 펼 마땅한 근거가 없었다.
아무리 마르쿠스라고 해도 의심이 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막대한 군대와 재정을 투입할 수는 없었다.
'나중에 드네프르강까지 진출해 중국처럼 장성을 쌓으면 되겠지. 먼 훗날의 일을 대비할 거면 그 정도로도 충분할 거야.'
마르쿠스는 일단 이 화제는 여기서 끝내기로 했다. 그가 새로운 주제를 꺼냈다.
카이사르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화두이기도 했다.
"그럼 다른 쪽으로 이야기를 돌려보죠. 섹스투스에 관한 건입니다."
"그 얘기를 할 줄 알았네. 하지만 이미 이전에 대충 합의가 되지 않았나?"
"섹스투스를 인정할 마음이 없다··· 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인정하고 자시고 보여준 게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판단을 내리겠나."
"그래서 그나이우스를 데려가신 겁니까?"
마르쿠스가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카이사르가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가 빠르군. 섹스투스도 그걸 알고 있나?"
"아니요. 저도 얼마 전에 들었습니다. 사실 여부가 확실하지도 않았고, 카이사르 님의 의중도 파악이 안 됐는데 섣불리 말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죠."
"언제나처럼 신중하군, 그래서 마음에 드는 거지만."
"그나이우스와 섹스투스를 대립하게 만들 생각이신가 보군요. 제가 끼어들지 않기를 원하십니까?"
얼마 전에 이야기를 나눴던 그나이우스와는 역시 그릇부터가 다르다.
카이사르는 더더욱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자네 말대로일세. 그리고 냉정히 말하자면 자네는 끼어들어서는 안 되네."
"하지만 전 못해도 2년 동안은 섹스투스를 지지해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이게 외부세력에 의한 위협이라면 응당 자네가 도와줄 명분이 생기겠지. 하지만 이건 가문의 일원이 가장의 권위를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반기를 드는 걸세. 안 그래도 섹스투스는 자기 가문의 충성을 약속받는 데 자네의 이름을 빌렸네. 그런데 여기서 가문의 분쟁을 해결하는 데까지 자네의 손을 빌린다? 그런 자를 어떤 피호민이 믿고 따르겠나. 섹스투스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자신이 직접 처리하겠다고 나서겠지."
냉정히 따져 본다면 카이사르의 말에 허점은 없었다.
섹스투스는 이미 과할 정도로 마르쿠스의 이름값에 묻어가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다가 섹스투스가 마르쿠스의 클리엔테스가 되는 게 아니냐는 말들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섹스투스가 그런 소문에 뭔가 느끼는 게 있었다면 이번 일은 자신이 직접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가 묘한 웃음기 섞인 어조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고작 이 정도 일에서도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자가 마그누스의 이름을 이어받는다는 건 인정할 수 없네. 만약 섹스투스가 또다시 자네에게 의존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내가 직접 마그누스의 세력을 흡수할 걸세."
"그 부분에 이견은 없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것뿐입니까?"
그 카이사르가 고작 섹스투스의 그릇을 시험해보기 위해 이런 일을 꾸몄을 리는 없다.
섹스투스가 자격 미달이라고 판단되면 꿀꺽하겠다는 본심을 드러냈지만, 이번 일을 잘 처리한다고 해도 딱히 그를 인정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카이사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말을 아꼈다.
대신 그는 조금 뜬금없게 들리는 대답을 건넸다.
"지금 로마는 조금 변했나?"
"예?"
"마그누스가 죽고 균형이 무너진 지금 로마의 분위기가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게 쿠리오의 의견일세. 그는 지금의 로마를 보면 이미 파국인 걸 알고 있음에도 억지로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부부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더군."
"이해가 갈 듯 말 듯한 비유로군요."
카이사르가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는 여인과의 관계가 파탄 난 적이 없을 테니 딱 와닿지는 않겠지."
"그러는 카이사르 님은 그런 경험이 있으십니까?"
"개인적으로는 없지만, 상황이 따라주지 않아 이혼을 한 적은 있지 않나. 남녀 간의 문제만 해도 그럴 때가 있네. 사람의 본심과는 별개로 결합하고, 헤어져야 할 때가 있단 말일세. 그리고 그건 국가와 제도도 별로 다르지 않지. 억지로 봉합하고 억누르고 있어 봐야 결국 과감하게 칼을 들이대야 할 때가 올 걸세."
"그런 걸 지금 간단히 정할 수는 없습니다."
마르쿠스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어댔다.
그가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는 복잡한 시선으로 카이사르에게 물었다.
"저는 내전이 벌어지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카이사르 님의 의중은 어떻습니까? 품은 뜻을 위해서라면 내전조차 불사할 마음이 있으십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면 해야지. 하지만 그럴 때가 온다고 해도 자네와 칼을 부딪칠 마음은 없네."
"일단 의향은 알겠습니다. 방금 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천천히 더 고민을 해보도록 하죠."
"길게 해서는 안 될 걸세. 나도 이제 서서히 나이가 들고 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토대를 쌓고 후대를 위한 모든 준비를 끝내놓는 것일세. 궁극적으로 답을 내놓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결국 자네라는 걸 잊지 말게."
카이사르는 그렇게 본론을 마무리했다.
이후에도 몇 가지 주제로 이야기를 더 나눴으나, 마르쿠스에겐 그다지 중요한 것들이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선택의 시간이 그리 멀지 않다고 강조했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마르쿠스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고, 그 길을 걸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남은 건 과감하게 발길을 내딛기만 하면 된다.
그렇지 못하고 있는 건 그가 생각하는 시기와 카이사르가 바라보고 있는 시기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어느 쪽의 의견이 옳은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역사는 결국 승자의 논리로 귀결되는 까닭이다.
※※※
카이사르는 자신의 말을 몸소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그의 원조를 받은 그나이우스는 아무도 모르게 히스파니아로 들어가 폼페이우스의 클리엔테스들을 포섭했다.
카이사르의 말대로 설득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히스파니아는 원래 섹스투스보다 그나이우스를 더 선호하는 지역이었고, 그리스권을 더 선호하는 섹스투스에게 반감이 있었던 까닭이다.
물론 카이사르의 은밀한 지원이 없었다면 아무리 그나이우스라고 해도 히스파니아를 집어삼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카이사르를 등에 업은 그나이우스는 섹스투스가 어떻게 대응을 하기도 전에 모든 일을 마무리 지었다.
몇 달도 채 지나지 않아 히스파니아 전역은 섹스투스가 아닌 그나이우스를 따르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배신하고 귀족파에 빌붙은 섹스투스를 어찌 폼페이우스 가문의 가장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형으로서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는 동생을 교화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억지에 가까운 주장이었으나 가문 내부의 일이니 딱히 외부에서 개입할 명분도 없었다.
당연히 섹스투스는 격분해 가장의 권위를 무시하는 그나이우스의 행태를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마침내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던 거짓된 평화가 막을 내리고, 기나긴 혼란의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 쏘아 올려졌다.
< 186. 흔들리는 균형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