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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대국의 관계 (191/326)

  < 190. 대국의 관계 >

  190.

  마르쿠스는 카이사르파와 섹스투스파의 대립이 격화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채 알렉산드리아로 향하고 있었다.

  카이사르파가 막 가비니우스를 고발했을 무렵, 마르쿠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하루 거리에 있는 바다 위를 지나는 중이었다.

  지중해 한가운데를 지나는 중이었기에 로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듣지 못했다.

  오히려 섹스투스에게 그토록 주의를 줬으니 알아서 잘하고 있을 거라 믿고 마음을 놓았다.

  뱃머리에서 들이마시는 시원한 공기에 짭짜름한 바다의 향기가 스며들었다.

  뺨을 스치고 머리카락을 휘날리게 하는 바닷바람도 상쾌함을 더해주었다.

  "앞으로 한동안은 쉬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이참에 한 달 정도 느긋하게 쉬다가 올까?"

  최근 부쩍 걱정거리가 늘어나고 있는 마르쿠스는 실로 오랜만에 해방감을 맛보았다.

  사실 문제가 해결된 건 하나도 없었지만, 지금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흉노니 내전이니 하는 건 카이사르가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고 자신은 그냥 푹 쉬고 싶었다.

  이번 기회에 아르시노에가 하자고 했던 나일강 유람을 즐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기왕 쉴 거면 가족들을 전부 오라고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푸블리우스도 로마로 오는 것보다는 알렉산드리아로 오는 게 더 편할 테니까."

  안티오키아에서 로마로 가는 것보다는 알렉산드리아로 오는 게 2배 이상 거리가 짧다.

  베레니케도 이집트로 돌아오고 싶어 했으니 당연히 환영하지 않을까 싶었다.

  "일정상 푸블리우스가 슬슬 한나라를 떠날 시기가 됐을 텐데······."

  처음 사신으로 동생을 보낼 때만 해도 누에고치만 가져오면 더 바랄 게 없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지금은 북방 유목민의 동향과 정보를 가져왔으면 하는 마음이 더 강했다.

  물론 사전에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정말로 흉노가 서진을 했다면 한나라 측에서도 상당한 반응이 있었을 것이다.

  마르쿠스는 푸블리우스가 한나라의 분위기를 세심하게 살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푸블리우스는 마르쿠스의 바람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그는 베레니케와 함께 한나라의 문화를 흠뻑 즐기면서도 조사할만한 가치가 있는 정보를 추려내고 있었다.

  물론 그중에서 흉노족의 동향 같은 건 우선순위가 상당히 뒤로 밀려 있었다.

  푸블리우스의 입장에서는 한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은 유목민족들에 대해 굳이 알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그래도 마르쿠스가 물어본다면 대답을 할 수 있을 정도로는 기억하고 있었다.

  푸블리우스는 마르쿠스가 사전에 해준 조언을 충실하게 잘 지키고 있었다.

  한나라의 요리들을 최대한 다양하게 먹어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을 것.

  그리고 한나라의 문화들을 적극적으로 접해보고 여기에도 가능한 한 좋은 소리를 아끼지 않을 것.

  푸블리우스는 기꺼이 그렇게 했다.

  로마는 기본적으로 타문화를 수용하는 데 거부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베레니케 역시 한나라를 동방의 이집트라 인식하고 있었기에 한나라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로마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비단옷과 독특한 장신구를 직접 착용하고 돌아다녔다.

  한의 귀족들은 이런 그녀의 행동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

  저 멀리서 온 서방 대국의 왕족이 중원의 우수한 문화에 교화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음식을 먹는 것만 해도 그랬다.

  이 당시 한나라에는 이제 슬슬 술과 식초, 누룩이나 장 같은 음식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진나라 시기에 약재로 여겨지던 차가 기호품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도 한나라 무렵이었다.

  푸블리우스는 이런 한나라의 식문화를 적극적으로 즐겼다.

  생선을 발효시켜서 먹는 로마인의 특성 덕분에 중원의 음식에도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한나라의 온갖 산해진미를 즐기는 서양인에 대한 소문은 금방 한나라의 귀족들 사이에서도 화젯거리가 됐다.

  "허허허, 푸블리우스 전하. 이번에 제가 연회를 하나 주최하는데 참석하셔서 자리를 빛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희 가문에서도 푸블리우스 전하를 모시고 자리를 한 번 만들어 볼까 합니다.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한나라는 마르쿠스를 서역의 황제에 준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푸블리우스를 왕족으로 대우했다.

  그것도 보통 왕족이 아니라 천자가 친히 특별대우를 하는 중요인물이었다.

  그런 만큼 귀족들은 가문의 격을 외부에 드러내기 위해 푸블리우스와 베레니케를 모시려고 애를 썼다.

  물론 푸블리우스는 아무 귀족들의 초대에나 응하진 않았다.

  그는 삼공이나 그에 준하는 지위에 있는 관리들의 집에만 방문하는 것으로 자신의 권위를 세웠다.

  그렇게 장안에서의 즐거운 생활도 어느덧 마지막을 앞두고 있었다.

  효선황제는 이제 로마로 돌아가야 하는 푸블리우스를 위해 성대한 작별행사를 열어주었다.

  "먼 길을 돌아가야 하니 든든히 먹어두게나."

  뭐든지 거대하고 요란하게 하는 한나라의 방식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푸블리우스도 이번에는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한나라 천자가 작정하고 개최한 연회는 지금까지 그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규모였다.

  아직 만한전석이란 개념조차 없었을 때였지만, 이 당시의 한나라의 궁중연회만 하더라도 세계 그 어디와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웅장했다.

  이틀 동안 이어지는 행사 내내 각 지역을 대표하는 요리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나왔다.

  로마에서 미식으로 유명한 루쿨루스의 만찬도 이에 비하면 명월 앞의 반딧불에 불과했다.

  효선 황제는 이 행사에서 푸블리우스의 의전 서열을 천자의 바로 다음으로 두었다.

  심지어 행사 전에 천자를 향해 절을 하는 필수의례조차 면제 받았다.

  오히려 효선황제는 푸블리우스를 자신의 근처에 앉히고 그가 불편한 점이 없는지 수시로 살펴주기까지 했다.

  "하하, 페르시아의 샤한샤는 이전부터 중원의 천자와 동격으로 교류관계를 맺어왔네. 그러니 그의 동생인 자네는 처음 보았을 때처럼 나에게 절을 할 필요는 없네. 조공 사절단이 아니라 국빈의 방문이니까."

  효선황제가 호탕하게 웃으며 역관에 통역을 명령했다.

  통역을 들은 푸블리우스도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화답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토록 신경을 써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앞으로도 양국의 우호관계가 지금처럼 쭉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럼, 그래야지. 그나저나 이곳의 음식이 자네의 입에 맞는 듯하니 다행이로군. 여기에 있는 동안 거의 매일같이 즐겼다는데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지?"

  "예. 각 지역별로 아예 다른 나라의 요리처럼 특색이 뚜렷하게 갈리는 게 신기하더군요. 정말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실제로 먼 옛날에는 다른 나라였으니까. 당장 여기에 올라오고 있는 요리들만 해도 같은 건 단 하나도 없다네."

  푸블리우스는 쉴 새 없이 제공되는 온갖 일품요리의 향연에 눈을 완전히 빼앗긴 듯 보였다.

  효선황제는 그 틈에 바로 옆에 있는 승상 우정국에게 작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저번처럼 공식적으로는 절을 했다고 기록하게. 그리고 자네가 알아서 적당한 관직과 이름을 정해서 책봉해주고."

  "예. 페르시아의 샤한샤 마르쿠스와 그의 동생에게 내릴 관직을 마련해두겠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사절이 떠나는 대로 예인들을 불러 이날 있었던 일을 그림으로 그리라 명하게. 어떤 식으로 그림이 나와야 하는지는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겠지?"

  "물론입니다. 저 먼 서역에까지 미치는 폐하의 위광이 그 무엇보다 잘 드러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이라 이르겠습니다."

  효선황제가 만족스럽다는 듯 입가에 진한 미소를 띄웠다.

  그의 걱정과는 다르게 푸블리우스는 장안에서 이상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여러 가지 정보를 모으고 있다고는 했으나, 비밀스럽게 행동하지도 않았고 그 내용들 또한 사신이라면 으레 물어보고 다닐 내용에 불과했다.

  한나라에서 자랑하는 다른 기술들의 원리나 제작과정을 탐문하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순수하게 사절단의 활동에만 집중하러 온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괜히 보안유지에 각별히 신경을 기울이라 일렀던 자신이 과민반응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보통이라면 은근슬쩍 비단 제조법 같은 걸 캐물을 법도 한데 아무래도 기우였던 모양이로군.'

  실제로 조공을 바치러 온 국가의 사절단 중에서는 비단의 제조법을 훔치려고 한 이들이 상당수 있었다.

  비단을 대량으로 수입해가는 로마라면 당연히 그런 욕구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푸블리우스는 먹는 것에만 관심을 보일 뿐, 비단의 비자조차 입에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차를 몇 번 마셔보더니 이걸 가져가면 안 되겠느냔 질문을 해올 뿐이었다.

  효선황제는 육성으로 웃음을 터트리며 찻잎을 넉넉히 쥐어주라고 명했다.

  결국 푸블리우스는 장안에서 떠나는 그 순간까지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않았다.

  ※※※

  찻잎이 잔뜩 담긴 자루를 실은 마차가 천천히 로마로 귀환하는 길을 내달렸다.

  돌아갈 때는 올 때보다 더욱 수월했다.

  효선황제가 직접 자신의 인장이 박힌 마차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천자의 이름이 박혀 있는 마차는 어떤 관이나 성문에서도 지체되는 일이 없었다.

  누구의 제지도 받지도 않는 마차는 계속해서 쌩쌩 내달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푸블리우스는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눈살을 찌푸리며 나지막하게 혀를 찼다.

  "쯧, 승차감 한 번 구리군. 그냥 우리가 가져온 마차를 타는 게 훨씬 나았겠어."

  푸블리우스의 혼잣말을 들은 베레니케 역시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쩔 수 없잖아요. 황제가 직접 하사한 마차니까 그에 걸맞은 신분이 타야죠. 그렇지 않으면 예의에 어긋나는 거라고 하잖아요."

  "무슨 놈의 쓸데없는 절차가 그렇게 많고 복잡한지······."

  "그래도 꽤 그곳에서의 생활을 즐겼지 않나요? 우리 중에 가장 신난 사람처럼 보이던데."

  "그거야 뭐, 음식은 맛있었고 저쪽에서도 이쪽을 신경 쓰는 게 훤히 보였으니까. 융숭하게 대접 받는 걸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잖아. 당신이야말로 이국에서 맛보는 화려한 생활에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던데?"

  "그건 당신이 마음껏 즐겨도 된다고··· 아니, 제발 마음이 가는 대로 풀어진 나날을 보내라고 했잖아요. 전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물론 아주 잘해줬어. 덕분에 나도 같이 마음껏 즐겼고 일도 잘 풀렸으니까."

  푸블리우스는 즐거워 보였다.

  실제로도 그랬다.

  단순히 기분 좋아 보이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오기 전부터 가슴속에 얹혀 있던 막중한 임무를 잘 끝냈다는 홀가분함 덕분이었다.

  "동방에 이 정도로 크고 강력한 제국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어. 아마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인도 정벌만 생각했지, 그보다 더 동쪽에 더욱 강한 국가가 있을 거라는 상상은 못 했겠지?"

  "어차피 저기도 로마의 존재를 굉장히 뒤늦게 안 것 같은데 아마 우리와 비슷한 감상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어쩌면 한나라가 로마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행이야. 만약 인접한 국가였다면 서로의 특산물을 노리고 언제 전쟁을 걸었을지도 모르니까."

  푸블리우스는 냉정하게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한나라의 국력을 분석해나갔다.

  "일단 내가 듣기 좋으라고 계속해서 좋은 말만 하긴 했는데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이 보이더군.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마차만 해도 그래. 로마의 것과는 너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아?"

  베레니케는 이번에는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들이 타고 있는 마차는 포장된 길을 가고 있는데도 엉덩이 쪽에 은은히 느껴지는 통증이 가실 줄을 몰랐다.

  두 사람은 한나라령을 벗어나자마자 자신들이 원래 애용하는 마차로 바꿔 탈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성들의 지위도 조금 낮은 듯 보였어요. 이전 왕조까지는 여성들에 대한 교육이 아예 없는 수준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하고요."

  "내가 볼 때는 아테네와 비슷하게 보였어. 역시 예상 이상으로 국력이 강한 건 맞지만, 기술이나 문물 모두 로마와는 비교할 수는 없겠어. 인구도 로마만큼 많지는 않은 것 같고··· 뭐, 음식 하나는 맛있었지만. 그건 인정해야겠지."

  푸블리우스가 볼 때 한나라는 마르쿠스가 손을 보기 이전의 로마와 비교하면 얼추 합이 맞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의 로마는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기술의 발달도 그렇고, 무엇보다 무지막지하게 늘어난 생산력과 청결한 위생의 힘이 컸다.

  메소포타미아 평야의 병합과 새로운 농법의 개발, 거기에 갈리아라는 비옥한 토지의 개간으로 로마의 식량 생산량은 종래의 배 이상으로 뛰었다.

  위생의 개선으로 사망률도 극적으로 낮아졌고, 인구 부양력도 높아졌으니 당연히 폭발적으로 인구가 늘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이탈리아 반도와 마르쿠스가 다스리는 동방 속주에는 그런 조짐이 보였다.

  현재 동쪽에서 강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한나라를 보았기 때문에, 역으로 지금 로마가 얼마나 황금기를 맞이했는지 냉정히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푸블리우스는 타디우스에게 받은 대나무 지팡이를 바라보면서 묘한 미소를 지었다.

  "임무도 성공적으로 완수했고. 생각보다 쉬웠어."

  속이 빈 지팡이의 내부에는 타디우스가 몰래 빼내온 누에고치가 들어 있었다.

  푸블리우스가 식도락을 즐기며 생각 없이 노는 것처럼 보이는 동안 타디우스가 몰래 누에고치를 빼돌린 것이다.

  히죽거리는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는 베레니케가 검지로 관자놀이를 짚으며 작게 혀를 찼다.

  '어째 점점 누구를 닮아 가는 것 같은데··· 설마 이것도 가족 유전인가?'

  < 190. 대국의 관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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