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동방에서 일어난 일 >
192.
마르쿠스는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시진 않았는데.'
아직도 머리가 멍하긴 했지만 조금씩 어제의 일들이 떠올랐다.
마르쿠스는 평상시 포도주를 마실 때면 언제나 조금씩 물에 희석해 먹는 습관이 있었다.
원액 그대로의 포도주는 도수가 너무 높은지라 원래 그대로 들이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포도주를 즐기는 문화가 발달한 로마에서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마시는 사람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마르쿠스는 이런 점에서는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술에 취해서 실수를 저질러본 기억이 없었다.
'이거 아무래도 두 사람한테 당한 거 같은데.'
그의 기억으로는 분명 자신의 침실에 올 때까지 옆에 있던 사람은 클레오파트라 한 명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르시노에가 침대에 같이 있는 것인가.
게다가 주변을 보면 저항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르쿠스는 일단 두 사람이 눈을 뜨기 전에 모든 일을 기억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어제 일을 되짚어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필름은 끊겼었지만 단편적으로나마 머리에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었다.
술에 취해 자신의 침실 문 앞까지 왔을 때는 분명 클레오파트라만이 그의 옆에 있었다.
그녀는 마르쿠스의 옆에 찰싹 붙어서 침실의 안까지 들어오려고 했다.
"마르쿠스 님, 몸을 가누기 힘들어 하시니 제가 보살펴 드릴게요. 우선 그 답답한 토가부터 벗으시죠."
"으음, 그러지."
클레오파트라는 마르쿠스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 걸 도와주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몸을 밀착하고 자신 또한 옷을 벗으려고 했다.
"최근에 이런저런 일로 고민이 많으신 것 같은데 제가 위로해 드릴게요."
"응? 아니, 잠깐······."
"괜찮아요. 가만히 계시면 제가 알아서 다 할게요. 마르쿠스 님은 그냥 눈 딱 감으시고 제 봉사를 받기만 하시면 돼요."
이미 거의 필름이 끊긴 상태에 술기운으로 완전히 몽롱한 마르쿠스의 귀에는 클레오파트라의 말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몸을 기대오는 그녀가 거의 반쯤 율리아로 보이기까지 했다.
클레오파트라의 말대로 마르쿠스는 최근 정신적으로도 많이 지쳐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율리아와 다나에에게 푸블리우스가 돌아오는 대로 그와 함께 알렉산드리아로 오라는 편지를 보내놓았다.
가족끼리 다 함께 휴양을 즐기다가 로마로 함께 돌아갈 생각에서였다.
이성이 거의 날아간 마르쿠스는 언제나 율리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클레오파트라를 침상 위에 눕혔다.
클레오파트라의 계획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려던 찰나, 갑작스레 들려온 날카로운 목소리가 두 사람을 제지했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불안하다 싶어서 와봤더니 역시······!"
"뭐야, 방해하러 온 거야?"
목소리의 주인인 아르시노에가 문 앞에서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클레오파트라를 가리키며 언성을 높였다.
"어쩐지 마르쿠스 님이 그렇게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너무 빨리 취하신다 했어. 술에 약이라도 탄 거야? 이런 짓을 했다가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래?"
"약을 타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난 그냥 물로 희석해 달라는 요구를 중간부터 깜빡 잊었을 뿐이야."
"그게 그거잖아! 처음부터 작정하고 일을 저지른 거지?"
"그래서 뭐 잘못된 거라도?"
클레오파트라는 조금도 찔리지 않는다는 듯 당당하게 응수했다.
아르시노에의 말대로 클레오파트라는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다.
처음에는 마르쿠스의 요구대로 포도주에 물을 적당히 타서 희석한 상태로 건네주었었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원액을 주면 바로 눈치챌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간 취기가 올랐다고 판단한 순간부터 그녀는 슬슬 희석하는 물의 양을 줄이기 시작했다.
알코올 성분으로 혀가 둔감해진 마르쿠스는 농도가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주는 대로 그냥 술을 마신 것이다.
그러니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확 취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아르시노에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마르쿠스에게 안겼다.
"방해하지 말아줄래? 이러다가 마르쿠스 님이 잠들기라도 하시면 네가 책임질 거야? 마르쿠스 님, 쟨 신경 쓰지 마시고 계속 즐기시죠."
"야! 그런 짓을 했다가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뒷감당을 할 거냐니까?"
"거참 시끄럽네. 뒷감당을 할 일이 생기면 오히려 좋은 거지. 그리고 이집트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우리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마르쿠스 님의 아이를 가져야 해. 그런 기초적인 계산도 못 하는 너랑은 더 할 얘기가 없어."
"계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오히려 그런 논리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너에게 그 자리를 양보할 마음은 없어."
잠깐 동안 고민하던 아르시노에는 이내 망설임을 떨쳐버리고 자신도 침상 위로 올라왔다.
클레오파트라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끝까지 방해하겠다는 거야?"
"이집트의 미래를 위해서라는 이유를 댈 거면 굳이 네가 마르쿠스 님과 잘 필요는 없잖아? 내가 해도 문제는 없을 텐데?"
"잠깐. 너······."
"난 마르쿠스 님이 원하시면 언제라도 기꺼이 동침할 수 있어. 너처럼 이상한 이유를 대지 않아도."
두 사람이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마르쿠스의 이성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간 상태였다.
그의 눈에는 이미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가 율리아나 다나에와 거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자신의 침상 위에서 나신으로 있는 여인들이 그 두 사람 외에 또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이미 몇 번인가 다 같이 함께 잠자리에 들었던 경험이 있었다.
마르쿠스는 말싸움을 하려던 두 사람을 그대로 사이좋게 옆에 껴안고 하룻밤을 보냈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말은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의 아찔한 한 마디였다.
"좋아. 그러면 우리 둘 다 저분의 여자가 되는 걸로 하자. 그리고 아이를 가진 사람이 최종적으로 승자가 되는 거야. 그러면 불만 없겠지?"
"물론. 아문-라는 당연히 우리 둘 중 누가 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 거야. 보다 적합한 사람이 저분의 아이를 가지게 되겠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기억나는 건 없었다.
대략적으로 상황을 이해한 마르쿠스는 자신의 옆에서 곤히 잠든 두 여인을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마냥 어린 아이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일을 벌이다니······."
그의 머릿속에 순간 지금쯤 알렉산드리아로 갈 준비를 하고 있을 율리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이번 일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단 말인가.
물론 총명한 율리아는 마르쿠스가 이집트의 파라오를 품는 걸 고깝게 보진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집트 왕가의 혈통에 마르쿠스의 피가 섞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전에 충분한 설명을 하고 양해를 구했을 때의 일이다.
이렇게 일을 저지른 뒤에 사후통보를 한다면 그 어떤 아내가 좋아서 박수를 치겠는가.
원래부터 마르쿠스는 필요한 때가 온다면 클레오파트라나 아르시노에 중 한 명을 품을 마음이 있었다.
물론 두 사람이 원했을 때의 일이지만, 마르쿠스는 두 파라오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원하면 거절을 당하지 않으리란 건 분명했다.
그런데 설마하니 이렇게 저쪽에서 먼저 자신을 덮쳐버릴 줄은 몰랐다.
그것도 두 사람과 동시에 잠자리를 가진다는 건 맹세코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이거 진짜로 곤란한데······.'
덜컥 아이가 생기기라도 하면 율리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이건 전적으로 마르쿠스가 잘못한 일이니 뭐라고 변명을 할 여지도 없었다.
'도서관에서 클레오파트라가 했던 말의 의미는 바로 이거였군.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마르쿠스가 이집트 왕가에 자신의 혈통을 심어두려고 한 것처럼 클레오파트라 역시 노리는 바는 명확하게 있었다.
우선 마르쿠스와 동침을 한다면 아르시노에만이 가지고 있던 마르쿠스의 여자라는 이미지를 자신도 가질 수 있게 된다.
여기에 운이 좋아서 아이까지 가지게 된다면 아르시노에보다도 훨씬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그래도 두 사람의 아들은 로마인이 되지 않을 것이고, 마르쿠스와 정식으로 결혼을 할 수도 없다.
로마에서 오래 머물렀던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관습과 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미 다 꿰뚫고 있었다.
어차피 그녀는 로마인 아들이 필요한 게 아니었으니 개의치 않았다.
바라는 건 어디까지나 마르쿠스와 자신의 아들, 그리고 자신이 마르쿠스의 여자로 알려지는 것 단 두 가지였다.
그것만 있으면 이집트 왕가의 위치를 반석처럼 견고하게 만들 수 있다.
그 사실을 다 알고 있는 마르쿠스도 설마하니 클레오파트라가 바로 이렇게 행동으로 옮길 줄은 몰랐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행동력 하나는 끝장나는군. 이왕 엎질러진 물이니 다시 주워 담는 건 무리겠지. 어떻게 수습할지를 생각해 봐야 하나."
생각을 정리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도 잠에서 깨어났다.
"하암, 가니메데스, 물을 좀 가져 오······."
습관적으로 환관을 부르려던 아르시노에는 자신이 완전히 나신으로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반사적으로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아, 일어나셨네요. 마르쿠스 님 그러니까··· 편안히 주무셨나요?"
"좋은 아침이네요."
당황하는 아르시노에와 반대로 클레오파트라가 넉살 좋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취기는 이제 가라앉으셨나요? 숙취를 다스리는 데는 꿀을 탄 물이 좋다는데 준비해두라고 이를까요?"
"누군가가 아니었다면 숙취에 시달릴 일도 없었겠지만요."
당당한 클레오파트라의 태도와 혹시나 혼날까 싶어서 안절부절못하는 아르시노에를 보고 있자니 화를 낼 기분도 들지 않았다.
마르쿠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의 옷을 건네주었다.
"일단 두 사람 다 옷부터 입고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
마르쿠스는 될 수 있으면 자신이 두 파라오와 잤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으나, 이건 덮는다고 덮힐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가 마르쿠스의 방에서 함께 동침을 했다는 사실은 왕궁에 파다하게 퍼졌다.
사람들은 마르쿠스를 부러워하면서도 벌써부터 두 파라오 중 누가 아이를 가지게 될지 궁금해했다.
클레오파트라는 만약 임신을 하게 되면 그걸 어떻게 활용할지 전부 계획을 짜둔 상태였다.
"마르쿠스 님의 말대로라면 올해와 내년엔 나일강이 범람하지 않는다고 했죠. 이런 건 미리미리 공표를 해놔야 해요. 그래야 일이 터졌을 때 되지도 않는 음해에 시달릴 일이 없어지니까요."
"하긴 파라오가 임신했는데 갑자기 나일강이 범람하지 않으면 신의 분노니, 저주니 하는 헛소리를 하는 자들이 나올 수밖에 없겠군요."
"네. 분명히 나올 거예요. 아직도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으니까요. 그런 자들은 파라오가 로마인의 씨를 받아 신들이 분노했다는 선동을 할 게 뻔해요. 그러니 그러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선수를 쳐야죠."
마르쿠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대화에 아르시노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떻게 선수를 칠 건데?"
"일단 기근의 책임은 파라오가 질 수밖에 없어. 이건 그 어떤 이유를 대도 회피할 수 없어. 그러니 조금 죄송스럽지만 아버님에게 일정 부분 책임을 돌려야지."
"···아버님이 잘못하신 게 있어서 이렇게 기근이 들은 거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건 조금 설득력이 없지 않을까? 그랬다면 작년에 일이 터졌어야지."
"아버님께서 실정을 하셨다는 게 아니야. 올해와 내년에 기근이 드는 건 어디까지나 이집트 왕가의 후계구도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신들이 경고를 보내는 거라고 하면 돼. 아버지는 공주들을 훌륭하게 키워내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왕자들은 파라오의 자리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시키지 못했지."
이집트 권력의 정점에 있는 파라오에게도 몇 가지 의무는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엄격하게 요구되는 건 바로 생산의 책임, 자식을 낳아야 할 의무였다.
클레오파트라의 말을 의미한 아르시노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겠어. 그러니까 앞으로 있을 두 해의 기근은 어디까지나 빨리 자식을 봐서 선대처럼 후계구도를 어지럽히지 말라는 경고일 뿐이라는 거지?"
"그래. 그리고 그 경고는 우리 중 한 명이 성공적으로 출산을 한다면 씻은 듯이 사라질 거라고 먼저 발표를 해야 해. 마르쿠스 님, 여름비가 내리지 않는 건 올해와 내년만으로 한정되는 게 확실하겠죠?"
"그렇습니다. 2년 뒤에 나일강은 풍요 수위에 도달할 겁니다."
"그런데 이시스 사제들이 엘레판티네 섬의 수위계를 확인하는 건 일주일 뒤의 일이잖아? 어제 우리가 회임을 했다면 내년의 수위를 측정하기 전에 아이를 낳을 텐데? 그러면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 거 아니야?"
클레오파트라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그냥 이유를 가져다 붙이면 그만이야. 영아 사망률은 높으니까 애가 안정적으로 1살이 되어야 나일강이 안심한다고 하면 그만이지. 중요한 건 나일강이 범람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는 점이지."
"그렇구나. 하긴 기근이 들 거라는 사실과 이게 어떻게 하면 풀릴지 미리 예언을 한다면 불만이 나올 리가 없겠네."
아르시노에는 그런대로 납득했으나 마르쿠스는 한 가지 중대한 사항을 지적했다.
"이 계획은 두 분께서 아이를 가진다는 걸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제 동침을 했다고 해서 무조건 아이를 가졌으리란 보장은 없는데요."
"전 확신이 있어요. 분명히 저나 아르시노에 둘 중 한 명은 아이를 잉태했을 거예요. 그리고 어차피 그렇지 못했다고 해도 문제는 없죠. 만약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면······."
클레오파트라가 살짝 뒷말을 흐렸다.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면 가질 때까지 동침을 하면 된다.
그 의미를 이해한 마르쿠스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런 일은 제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는 아무런 걱정이 없어 보였으나, 마르쿠스의 마음은 결코 편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바로 어제 푸블리우스가 안티오키아로 돌아왔으니 알렉산드리아로 오겠다는 율리아의 편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편지가 도달한 지 며칠 후, 율리아와 아이들이 탄 배가 마침내 알렉산드리아의 항구에 당도했다.
< 192. 동방에서 일어난 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