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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동방에서 일어난 일 (194/326)

  < 193. 동방에서 일어난 일 >

  193.

  마르쿠스의 가족이 탄 배는 이집트의 여느 왕족 못지않은 호위를 받으며 항구에 정박했다.

  무거운 선체가 완전히 멈춰 서고 어린 소년과 소녀가 배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빠르게 내려오는 속도가 두 사람이 얼마나 이 순간을 기대했는지를 드러냈다.

  "아버지~!"

  열 살가량 되어 보이는 소년 소녀는 천진난만하게 달려와 마르쿠스의 앞까지 다가왔다.

  "항구에서 뛰어다니면 위험하다고 말했지?"

  두 사람의 뒤를 따르듯 엄격하면서도 자상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철저한 자기관리 덕분인지 여전히 두 아이의 어머니라고는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미색이 돋보였다.

  율리아는 가볍게 마르쿠스에게 고개를 숙이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평상시의 마르쿠스였다면 환하게 마주 웃어주었겠지만, 저지른 일이 있다 보니 어색한 미소가 지어질 수밖에 없었다.

  남편의 수상한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린 율리아가 뭐라고 입을 열려던 찰나, 그보다 먼저 딸 소피아가 마르쿠스의 무릎을 잡고 매달려왔다.

  "아버지, 앞으로는 여기서 같이 지내는 건가요?"

  "그래. 알렉산드리아에서 휴가를 즐기다가 다 같이 로마로 돌아가자꾸나."

  "우와, 신난다! 그럼 앞으로 아버지도 쭉 로마에서 사는 거죠? 원정 같은 건 나가지 않을 거죠?"

  "당분간은 그럴 거다. 이제 더 정복할 곳도 마땅치 않으니까."

  소피아와 트라야누스는 눈에 띄게 기뻐하며 방방 뛰어다녔다.

  마르쿠스 역시 최근에는 집을 너무 오래 비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아무래도 자식 문제로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폼페이우스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아이들과 시간을 더 많이 보내고 자식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미래를 준비해줘야겠다는 마음이 강해졌다.

  그의 시선이 율리아의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다나에에게 향했다.

  그녀의 품에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훌쩍 자란 아들 아킬레스가 안겨 있었다.

  그 뒤로 푸블리우스와 베레니케가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다.

  마르쿠스는 어색하게 율리아를 한 번 안아주고 푸블리우스에게로 다가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다. 사신으로 갔었던 일은 잘 풀렸고?"

  "예. 만족하실만한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 물건은 안티오키아에 있는 장인들에게 맡겨 놓았습니다. 아마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내에 성과가 나올 겁니다."

  "그래. 잘만 풀린다면 이건 전적으로 네 공이 될 거다. 합당할 만한 보상을 주마."

  "아내가 다시 이집트의 왕족의 권리를 돌려받은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이 사람도 형님과 자기 동생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푸블리우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베레니케가 마르쿠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예전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공손한 태도였다.

  만족스럽게 인사를 받은 마르쿠스가 일행을 슥 둘러보며 말했다.

  "자, 여기에서 계속 서 있는 것도 뭐하니 일단 왕궁으로 돌아가지."

  "환영행사 같은 건 없나요?"

  "안 그래도 파라오가 거창한 환영행사를 준비하는 게 좋지 않을까 물어보긴 했어. 그래도 먼저 피로를 푸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뒤로 미뤄달라고 했는데 혹시 환영식이 없어서 섭섭한 거야?"

  "설마요."

  율리아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거창한 행사가 다 뒤로 밀렸다니 솔직히 다행이네요. 지금은 조금 쉬고 싶거든요."

  "역시 그렇지? 일단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푹 쉬어."

  "음··· 그런데 당신 쪽에서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눈치인데 괜찮겠어요? 이야기라면 지금 여기서 들어도 상관없는데."

  "응? 아, 아니야. 내가 이따가 당신 방에 갈 테니까 그때 이야기를 하자. 그게 조금 뭐라고 해야 할까··· 조심스러운 이야기라서."

  지금까지 이런 남편의 모습을 별로 본 적이 없었던 율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뒤에 있는 다나에에게 시선을 돌렸으나, 그녀 역시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찔리는 거라도 있나?'

  율리아는 카이사르의 딸답게 일반적인 사람보다 눈치가 훨씬 더 빨랐다.

  그녀는 자식들의 손을 잡고 마차로 향하는 마르쿠스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소피아와 트라야누스에게는 여전히 애정표현을 하는데 나와 다나에의 시선은 어물쩍 피하려는 기색이었어.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고··· 스스로 찔릴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파라오······.'

  순간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의 얼굴을 떠올린 그녀는 묘한 표정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 싶었으나,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녀는 다나에와 함께 마차에 오르려다 말고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스파르타쿠스에게 걸음을 옮겼다.

  스파르타쿠스의 동공이 미소 지으며 다가오는 율리아를 보자 지진이라도 난 듯 떨렸다.

  "스파르타쿠스 님, 저희 잠시 이야기 좀 할까요? 같이 마차에 오르시죠."

  "하, 하하··· 저는 마르쿠스 님의 곁에 있어야 하는 몸인지라······."

  "남편은 이미 아이들과 마차를 타고 가버렸는데요? 그이가 없으니 스파르타쿠스 님은 저를 지켜주셔야죠."

  "네. 그건 그런데······."

  "곤란하게 하려는 게 아니니 걱정 마세요. 그냥 한 가지만 대답해 주시면 돼요."

  스파르타쿠스는 율리아의 아름다운 표정에 묘한 냉기가 서려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본 그녀의 미소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우면서도, 오한이 일 정도로 무서웠다.

  ※※※

  궁으로 돌아온 마르쿠스는 아이들과 한 차례 놀아준 뒤 푸블리우스를 방으로 불러 보고를 들었다.

  푸블리우스는 한나라에서 가져온 찻잎을 직접 우려서 마르쿠스에게 건네주었다.

  "그쪽 귀족들이 마시는 차라는 물건입니다. 술은 아닌데 이게 묘한 향이 있어서 그럭저럭 마실만하더군요. 한번 드셔보시죠."

  "오, 고맙다. 잘 마시마."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아든 마르쿠스는 차향을 음미하며 천천히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묘하게 익숙한 그 모습에 푸블리우스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혹시 이전에 드셔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굉장히 자연스러워 보이시는데."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마르쿠스는 모호한 대답을 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현대에서 가끔 마셨던 차와 비교하면 맛도, 향도 달랐으나 어쩐지 그리운 맛이라는 감상이 들었다.

  "그런데 형님, 일단 형수님과 먼저 이야기를 나누셔야 하지 않습니까? 형수님과 다나에가 형님을 굉장히 보고 싶어 하셨는데요."

  "아, 그게··· 매도 먼저 맞는 게 좋다고는 하지만 역시 기왕 맞을 거면 좀 시간을 두고 싶은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너와 이야기를 끝내는 대로 올라가 볼 생각이다."

  당최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였으나 푸블리우스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이유를 묻는 대신 한나라에서 있었던 일들을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고 늘어놓았다.

  푸블리우스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항들을 받아든 마르쿠스는 신중하게 내용들을 하나하나 읽어보았다.

  "그쪽에서 너에게 절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고? 꽤 파격적으로 대우를 했구나."

  "예. 중원의 천자와 형님을 서로 같은 격으로 놓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실제로도 그렇게 말했고요."

  "그럴 리가. 말로는 그렇게 했어도 그놈들 기록을 보면 전혀 다르게 적혀 있을 거다."

  "예?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는데요······."

  "네가 한어를 모르는데 앞에서 입발린 소리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지. 그런다고 나중에 어떤 식으로 기록했는지 직접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중원의 왕조는 원래부터 항상 그런 식이었다.

  한이 흉노에게 패배해 조공을 바칠 때도, 송이 요와 금에게 조공을 바칠 때도 그들은 자신들이 밀려서 굽히고 들어간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그건 천자가 변방의 강국과 화친을 도모하는 차원에서 보내는 성의였을 뿐이다.

  아마 로마에게도 비슷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려 할 거라는 생각은 했었다.

  어차피 그쪽이 그러든 말든 마르쿠스와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

  한나라가 로마를 한의 속국이라고 기록하든 조공을 바치러 온 국가라고 기록하든 달라지는 건 없다.

  가장 중요한 실리는 이미 로마가 다 빼먹은 뒤인데 그런 사소한 글자 장난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대충 사소한 일들은 다 보고받았다고 판단한 마르쿠스는 가장 궁금한 화제를 입에 담았다.

  "혹시 한나라의 관리들이나 천자가 북방 유목민족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더냐? 아무리 사소한 이야기라도 좋다."

  "아, 그런 이야기가 잠깐 나온 적은 있습니다. 그런데 형님께서도 관심을 가지고 계신 걸 보니 그게 혹시 중요한 사안이었습니까?"

  푸블리우스가 살짝 불안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자신의 미숙한 판단으로 혹시나 중요한 정보를 등한시해버린 게 아닐까 해서였다.

  "아직 이걸 중요하게 봐야 할지 아니면 과한 걱정이라고 봐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 그러는 거다. 들은 게 있다면 자세히 말해다오."

  "예. 그러니까······."

  마르쿠스는 내심 흉노가 꾸준하게 한나라를 괴롭히고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만약 흉노와 한나라가 여전히 대립하고 있다면 걱정은 오늘부로 접어놔도 된다.

  상식적으로 저 멀리서 한나라와 치고받고 싸우고 있을 흉노가 서쪽의 유목민들에게 압력을 행사할 수 있을 리가 없는 까닭이다.

  약체화된 스키타이 정도야 지금 로마의 전력이라면 가뿐하게 즈려 밟을 수 있으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푸블리우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마르쿠스가 상정하고 있는 모든 경우의 수 중 최악에 가까웠다.

  "요새 흉노라는 북방 유목민들이 눈에 띄게 조용해졌다고 하더군요. 한나라의 첩보에 의하면 서쪽으로 이동한 것 같다고 하더군요."

  "혹시 어떤 이유에서 그런 움직임을 보이는지 전해 들은 게 있어?"

  "그건 그쪽도 잘 모르는 듯했습니다. 흉노가 한나라가 서역과 교역하는 비단길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래. 아주 유용한 정보였다. 흉노가 서진을 했다 이 말이지."

  마르쿠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걸 본 푸블리우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 흉노라는 자들이 로마까지 올 수도 있다는 건가요? 설마······."

  "유목민들의 행동반경은 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내가 볼 때 그들이 서쪽으로 움직였다면 노리는 건 하나밖에 없어."

  흉노가 중원의 북방에서 끊임없이 준동했던 건 그들이 알고 있는 가장 부유한 국가가 중원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근처에 한나라만큼 풍요롭고 많은 재산을 축적한 나라가 있다면 당장 그쪽으로 옮겨갔을 것이다.

  원 역사에서 흉노는 쇠퇴기를 맞는 그 순간까지 로마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비단길을 통해 로마의 우수한 문물이 한나라로 흘러 들어갔고, 서역의 위대한 문명국에 관한 소문 역시 동쪽으로 많이 퍼져나갔다.

  만약 흉노가 로마를 한나라보다 훨씬 더 부유한 국가라고 판단했다면 어떻게 나올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양국의 거리가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으니 곧바로 쳐들어오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다.

  흉노와 로마의 사이에는 엄청나게 많은 부족들과 작은 군소국가들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만약 흉노가 그들을 복속시키면서 거대한 세력을 형성해 서쪽으로 온다면?

  유럽은 1200년이나 더 일찍 칭기즈 칸의 악몽을 접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이제 본격적인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판단한 마르쿠스는 방에서 나와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로마에 서신을 보내야겠어. 카이사르 님에게 다시 말해서 게르만 동쪽으로 최소 한 달 이상은 더 조사를 해보라고 일러두면 되겠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위층으로 올라온 마르쿠스는 율리아의 방문 앞에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흉노에 관한 문제를 처리하는 것도 좋지만, 일단 그보다 먼저 해야 하는 일도 있는 법이다.

  흉노는 먼 미래가 될 수도 있지만 파국은 바로 내일의 일이 될 수도 있다.

  조심스럽게 방을 들어간 마르쿠스를 율리아가 화사하기 그지없는 미소로 맞아주었다.

  "오셨네요? 안 그래도 언제쯤 와주실지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율리아의 옆에는 다나에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가 율리아와 마르쿠스를 번갈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율리아의 입가에 걸린 호선을 본 마르쿠스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분명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설마 벌써 눈치챈 건가? 설마 스파르타쿠스가 이미 다 불어버린 건가.'

  그러고 보니 스파르타쿠스가 저녁을 먹기 전에 기왕이면 빨리 사과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조언을 하긴 했었다.

  이미 사실이 다 새어나간 거라면 여기서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아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마르쿠스는 재빠르게 허리를 직각으로 숙여서 최대한 진심이 느껴지도록 소리쳤다.

  "정말로 미안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실수를 저질렀어!"

  "어머, 무슨 잘못을 했는지 직접 말해주시지 않으면 전 모르겠는데요. 어떤 실수를 저지르신 건가요?"

  "그러니까 그게······."

  부인의 앞에서 막상 입으로 직접 그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니 양심이 팍팍 찔려왔다.

  "말해주시지 않으면 저는 모르겠는걸요."

  지긋이 바라보며 압박을 가하는 율리아의 시선을 감당하지 못한 마르쿠스는 결국 고개를 떨군 채로 아내의 자비를 구했다.

  "당신에게 말도 하지 않고 그···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를 품었어."

  "아하, 그러셨군요. 정말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셨네요."

  율리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르쿠스는 평생토록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긴장감으로 등골이 서늘하게 시려오는 걸 느꼈다.

  < 193. 동방에서 일어난 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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