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4. 동방에서 일어난 일 (195/326)

  < 194. 동방에서 일어난 일 >

  194.

  "저기, 율리아··· 그러니까 나는······."

  "어머, 그래도 당황하긴 하시네요? 사고를 쳤다는 자각은 있으셨나 봐요."

  "잠깐. 어떻게 된 일인지 내가 다 설명 해줄게. 조금만 진정하고 자리에 앉아봐."

  "진정해야 할 사람은 당신이에요. 전 딱히 흥분하지 않았어요. 그냥 조금 이해가 안 될 뿐이죠."

  율리아는 입가에서 서늘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가족끼리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가지자면서 알렉산드리아로 불러놓고, 본인은 다른 여자를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안았다니 이걸 제가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요?"

  "아니, 그러니까 그건······."

  "고민 중이에요. 내일이라도 아이들을 데리고 로마로 돌아가야 할지 아닐지."

  율리아의 목소리에서는 분노의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무서웠다.

  그녀가 정말로 로마로 돌아가 버린다면 마르쿠스는 엄청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공들여 쌓아온 인기가 한 순간에 추락해 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

  카이사르와의 관계도 미묘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율리아가 진심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 건 아니리라.

  그냥 그만큼 화가 났고 서운하다는 걸 돌려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쿠스는 납작 엎드려 비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하지만 내가 원해서 이런 상황이 된 건 아니야."

  "알고 있어요. 그 아이들이 당신에게 술을 잔뜩 먹여서 침실로 데려다주는 척하면서 몸을 섞었다면서요. 그걸 아니까 제가 이 자리에서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거예요. 반대였다면 이미 전 로마로 돌아가는 배 위에 있었겠죠."

  "어···그건 고맙다고 해야 할지······."

  마르쿠스는 이제 슬슬 율리아의 심리상태가 파악됐다.

  그녀가 화가 난 듯하면서도 진심 어린 분노를 드러내지 않는 이유가 짐작이 됐다.

  그녀도 이성적으로는 마르쿠스의 상황을 이해해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인 이상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

  남편이 자신과 아이들을 전부 불러놓고 다른 여자와 뒹굴었는데 그걸 그냥 대범하게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애정이나 신뢰가 이미 식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제가 지금 찝찝한 건 당신의 사후대처에요. 상식적으로 원치 않은 관계를 맺었다면 그 이후 강경한 조치를 하는 게 당연할 텐데 당신은 그렇게 했나요? 오히려 두 파라오와 더 사이가 돈독해진 것 같은데요."

  "그건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했을 때 어쩔 수 없어서······."

  "그것도 알아요. 상식적으로 그런 문제로 그 두 사람을 어떻게 하는 게 말이 안 되죠. 이집트에 지배력을 행사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상황이 없는데 고마워해야지 화를 내는 게 말이 되겠어요.? 그냥 제 억지에요."

  "······."

  율리아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중간에 끼인 다나에는 눈치가 보이는 듯 섣불리 누구의 편도 들지 못했다.

  마르쿠스의 입장이 이해가 가면서도 기분이 상한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르쿠스는 가시방석에 앉은 심정으로 더는 변명을 하지 않았다.

  율리아가 화가 난 건 어디까지나 감정적인 영역이었으므로 섣불리 말을 늘어놔 봐야 화만 더 돋울 뿐이라는 걸 알아서였다.

  그냥 반성하고 있다는 심정이 팍팍 느껴지는 얼굴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게 최선이었다.

  그런 마르쿠스를 바라보는 율리아의 눈가가 살짝 누그러졌다.

  무턱대고 계속 화를 내기엔 그녀는 너무 이성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아··· 사실 어차피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였겠죠.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에 당신의 혈통을 심어두면 사실상 우리 가문이 이집트를 실효 지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뭐 그렇긴 하지."

  "파라오 측에서도 로마의 최고 권력자와 결합하는 형태로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으니 밑지는 거래는 아니고요. 어차피 정식으로 결혼도 올리지 않을 거고 부부의 관계도 맺지 않을 텐데 제가 필요 이상으로 과민 반응을 보인 걸 수도 있겠네요."

  "아니야. 충분히 화낼 만하지. 당신의 기분을 고려했다면 내가 조금 더 대처를 잘했어야 했는데."

  "제가 섭섭했던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으면 미리 말을 해줬으면 좋았을 거라는 거예요. 이렇게 될 거라는 건 솔직히 먼 예전부터 알고 있었잖아요?"

  마르쿠스는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율리아는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가 마르쿠스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연심과 동경의 모호한 경계선에 있는 느낌이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양쪽의 마음이 커져가는 걸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이미 이 주제로 가볍게 논의를 해본 적도 있었다.

  그때 마르쿠스의 대답은 아직 그런 걸 논하기엔 두 사람의 나이가 어리지 않느냔 것이었다.

  율리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딱히 반론은 하지 않았다.

  마르쿠스는 이번에는 정말로 진심을 담아 사과의 말을 건넸다.

  "당신 말대로야. 난 어쩌면 처음 그 두 사람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을지도 몰라. 이집트를 완전히 내 수중에 넣기 위해서는 그 둘을 내 여자로 만들 수밖에 없다··· 그런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그 시점에서 당신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이해를 구했다면 당신은 별말 하지 않고 허락해 줬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도 몇 가지 조건은 걸었을 거예요."

  "그건 당연하지. 일을 저질러 놓고 말하긴 뭐하지만 나도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균형을 잡아볼 생각이야."

  아무리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 사이에서 자식을 낳는다고 해도 이들은 로마인이 아니다.

  그리고 당연히 마르쿠스의 자식으로서 어떠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었다.

  다나에의 자식은 그래도 로마인이고 마르쿠스의 양자로 입적하는 형태로 가문에 들어왔으나, 파라오의 아이들은 그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마르쿠스는 율리아에게 이 점을 확실히 약속했다.

  크라수스 가문의 모든 걸 이어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오직 율리아가 낳은 자식뿐이다.

  마르쿠스는 아예 이 점을 문서로 확실히 명시해놓기까지 했다.

  조심조심 서류를 앞으로 내밀어서 보여주는 마르쿠스의 모습에 율리아는 그만 더 화를 내지 못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주의깊게 율리아를 살피던 마르쿠스는 그 모습에 안도하며 준비해온 마지막 비장의 한 수를 날렸다.

  그는 천천히 율리아의 귓가에 자신의 입을 가져가 몇 마디 귓속말을 건넸다.

  이 한번의 귓속말에 율리아의 입가에 결국 미소가 걸렸다.

  마르쿠스도 마주 웃어주었다. 충분히 달콤한 말이었으리라.

  "어쩔 수 없네요. 이쯤 하고 용서해 드리죠. 애들 앞에서 제가 당신에게 냉기를 날려봐야 딱히 좋은 것도 없을 테니."

  "진짜로 이렇게 넘어가주는 거야?"

  "완전히 용서해주는 건 아니에요. 만약 다음에도 이런 식으로 사후보고를 한다면 진짜로 참지 않을 수도 있어요."

  "당연하지.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정말 만에 하나라도 그럴 필요가 생긴다면 무조건 먼저 말을 할게."

  율리아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평상시처럼 진짜 미소를 보여주었다.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난 그녀가 다나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무슨 신호를 주고받았는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오늘은 분위기도 좀 그렇고 시간도 늦었으니 이쯤에서 끝내죠. 대신 내일부터는 저희와 함께 어울려 주셔야겠어요."

  "···응? 어울려 달라는 게 무슨 뜻이야?"

  "당연히 말 그대로의 의미죠. 옛날에 저와 했던 약속 잊으셨나요? 무조건 저를 최우선으로 해주실 것."

  "아, 그런 말이었어? 그 정도야 당연히 해줘야지. 걱정 마. 오히려 당신이 날 밀어내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잠깐··· 그런데 두 사람과 함께 어울려 달라면 다나에도?"

  "당연하죠. 이집트 여자애들과는 그렇게 즐기셨을 거 아니에요?"

  결혼한 뒤에 안 사실이지만 율리아는 기본적으로 누군가에게 지는 걸 굉장히 싫어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마르쿠스가 다른 여인들에게 해준 모든 걸 자신도 누리고 싶어 했다.

  정실부인으로서 이는 이상한 게 아니었으므로 마르쿠스도 되도록 그녀의 기분을 맞춰주고 싶었다.

  이전에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충분히 아내의 마음을 풀어줄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마르쿠스는 이 순간만 하더라도 자신이 무덤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섣부르게 약속을 한 그는 그 다음날부터 거의 매일을 율리아의 침실로 불려갔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여인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를 빨려버렸다.

  그는 태어나서 난생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자는 게 무서운 경험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르쿠스가 율리아에게 완벽히 용서를 받은 건 일주일 정도를 시달린 그가 침상 위에서 거의 기절하다시피 쓰러진 뒤였다.

  ※※※

  사람들은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아 얼굴이 해골처럼 핼쑥해진 마르쿠스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랜만에 점심 만찬을 함께한 아르시노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마르쿠스 님, 혹시 건강에 이상이라도 생기셨나요? 실력 좋은 의사를 붙여 드릴까요?"

  "아니. 건강이 상한 건 아닙니다."

  "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날이 갈수록 피골이 상접해지시는데······."

  "기력이 빠져나가는 만큼 사랑으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의미 불명의 얼빠진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르시노에를 남겨두고 마르쿠스는 오늘의 일정을 처리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돌아다니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피곤해서 곯아떨어질 뻔한 걸 억지로 참아냈다.

  그래도 다행히 율리아도 너무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그날 저녁은 마르쿠스를 침실로 호출하지 않았다.

  간만에 푹 쉰 마르쿠스는 휴식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체감하며 새로운 하루를 맞이했다.

  그래도 남자의 심정을 잘 이해하는 건 같은 남성인지 푸블리우스가 찻잎을 들고 마르쿠스의 방을 찾았다.

  "형님, 아내에게 들었습니다. 기절하셨었다고요? 괜찮으십니까?"

  "······그게 네 귀에까지 들어갔다고?"

  "예. 아내가 형수님과 다나에와 이야기할 때 들었다고 하더군요. 근데 정말입니까?"

  "그 이야기는 더 하지 말자. 악몽이 떠오르려고 하니까."

  찻잔을 들어서 입으로 가져가는 마르쿠스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일주일 내내 시달리며 몸에 박힌 본능적인 공포가 스멀스멀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푸블리우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잔에도 차를 따랐다

  "그래도 형수님 정도면 쉽게 용서해주신 거 아닙니까? 만약 제가 그랬다면 전 이미 아내에게 살해당했을지도 모릅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네 표정 보면 즐겁다는 게 다 티가 난다. 결혼생활은 어때? 이제 슬슬 신혼 단물도 좀 빠질 시기인데."

  "단물이 빠지다니요. 전 언제나 오늘이 어제보다 행복합니다. 하하."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환한 미소에 급격히 짜증이 솟구친 마르쿠스가 가볍게 혀를 찼다.

  "아직은 한창 좋을 때인가 보군."

  "네? 뭐라고요?"

  "아니다. 한 잔 더 따라줘 봐."

  오랜만에 형제끼리 사소한 화젯거리로 이야기를 즐기던 알렉산드리아의 하루.

  급하게 달려오는 병사의 발소리가 평온한 일상을 깨트렸다.

  "급보입니다. 마르쿠스 님에게 급히 전달해야 하는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하··· 또 무슨 문제가 터진 건가. 어디에서 온 거냐? 안티오키아? 아니면 로마?"

  "로마입니다. 한시가 급하다는 말을 꼭 전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발신인을 확인해 보니 키케로에게서 온 편지였다.

  심상치 않은 예감에 단숨에 두루마리를 펼쳐 읽어 내려갔다.

  어찌나 급하게 써 내려갔는지 다 마르지 않은 잉크 자국이 군데군데 번져 있었다.

  평상시의 키케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흔해 빠진 안부 인사를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는다는 것도 키케로답지 않았다.

  대신 급박함이 느껴지는 사과 문구가 편지의 첫 소절을 장식했다.

  자신을 믿고 로마를 맡겨줬는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수습할 수 있는 선을 넘었으니 한시라도 빨리 마르쿠스가 귀환해줬으면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 이유는······.

  "섹스투스가 군단을 일으켜서 갈리아를 선제공격했다고?"

  "예?"

  심각한 표정으로 마르쿠스를 지켜보던 푸블리우스의 입에서 얼빠진 물음이 튀어나왔다.

  그 정도로 편지에 적힌 내용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마르쿠스가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전령을 돌아보았다.

  "여기 적힌 편지의 내용은 한 치의 거짓 없는 사실이겠지?"

  "물론입니다. 어떤 조작도 가해지지 않은 원본입니다."

  "미쳐버리겠군. 그렇게나 주의를 줬는데 기어코 사고를 쳐? 아니, 이건 사고 정도가 아니잖아."

  단순하게 대립하는 것도 아니고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갔다면 사실상 봉합이 불가능하다.

  마르쿠스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전령에게 나가보라는 손짓을 건넸다.

  다시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자연스럽게 마르쿠스의 입에서 분노로 가득 찬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말을 들어 처먹는 놈이 한 명도 없군. 성질대로 했으면 그냥 다 쓸어버렸을 텐데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니."

  "형님, 괜찮으십니까?"

  "그래. 내 팔자에 느긋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 리가 없지. 난 일 보러 가마. 넌 천천히 마시다 오거라."

  "네. 형님. 들어가십시오."

  터덜터덜 걸어가는 마르쿠스의 등을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본 푸블리우스는 다시 창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가문을 물려받은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점에 진심으로 안도하며 차를 한입 들이켰다.

  "거참 맛 한 번 고소하군."

  기분 탓일까.

  오늘따라 차의 향과 맛이 한층 더 잘 느껴지는 듯했다.

  < 194. 동방에서 일어난 일 > 끝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