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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갈리아 내전 (198/326)

  < 197. 갈리아 내전 >

  197.

  이제 섹스투스에게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결심을 굳힌 그는 즉시 자신의 구상을 행동으로 옮겼다.

  이기지 못할 것 같으면 후퇴한다.

  일견 당연한 선택으로 보였으나 막상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기세 좋게 군단을 이끌고 선제타격을 했는데 역으로 반격당해서 쫓겨나는 것이다.

  총사령관인 섹스투스의 명성이나 체면에 엄청난 타격이 갈 수밖에 없다.

  로마에서 내전은 결국 자신을 따르는 클리엔테스들에게 자신의 위엄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약 어설픈 모습을 보여주게 되면 폼페이우스가 물려준 기반이 단숨에 흔들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로마의 사령관들은 아예 싸우지도 않고 뒤로 빼는 선택을 쉽게 내리지 못했다.

  섹스투스에게도 이번의 후퇴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이 소식이 로마에 알려지면 꼴불견이라거나 창피하지도 않냐는 조롱이 빗발치리라.

  그러나 자존심이나 체면 때문에 질 가능성이 훨씬 높은 회전을 벌일 수는 없었다.

  살아서 후퇴하기만 하면 기회는 다시 찾아오기 마련이다.

  섹스투스는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 따위는 얼마든지 감내하기로 했다.

  중요한 건 최후의 승리를 거머쥐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비참한 승자가 영광스러운 패자보다 낫다.

  그것이 수만 명의 목숨을 짊어진 섹스투스가 내린 결론이었다.

  부관들도 이제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후퇴는 신속하면서도 은밀하게 이뤄졌다.

  어설프게 병력을 빼려고 하면 카이사르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치고 들어올 것이다.

  카이사르의 전기를 읽어본 섹스투스는 갈리아 부족 중 하나가 그렇게 패망한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섹스투스는 마치 회전을 걸 것처럼 병력을 움직이면서 카이사르의 주의를 끌었다.

  카이사르는 혹시나 섹스투스가 도주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남쪽의 경로를 틀어막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러나 섹스투스는 카이사르의 예상을 뒤엎고 동쪽으로 병력을 돌렸다.

  군량을 수송하기 위해 대기시킨 함대와 합류한 그의 군단은 바로 퇴각을 개시했다.

  병사들을 수송하기 위해 적재량을 넘어선 군량은 주저 없이 바다에 버려버렸다.

  한 발 늦게 도착한 카이사르의 군단은 유유히 바다로 사라지는 섹스투스의 군단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해군의 전력은 상대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바다로 나간 상대를 잡을 방법이 없었던 까닭이다.

  저 멀리 사라지는 배의 후미를 바라보는 카이사르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체면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이렇게 후다닥 내뺄 줄이야."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카이사르는 섹스투스가 예상보다도 더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섹스투스의 퇴각은 깔끔하면서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마냥 도망가는 게 아니라 중간에 기병을 돌려 카이사르의 추격병에게 역공을 가하려는 시도까지 했다.

  카이사르의 적절한 대처로 무위로 돌아갔으나 덕분에 많은 병사들이 배에 오르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적을 쫓아내긴 했으나 실질적으로 치명타를 입히지는 못한 것이다.

  숙영지로 돌아오자마자 라비에누스가 이후의 방침을 물었다.

  "어쩌실 겁니까? 바로 히스파니아로 진격할까요?"

  "적에게 숨을 돌릴 틈을 줄 이유는 없겠지. 저쪽이 재정비를 하면 내전이 예상보다 더 장기전으로 흘러갈 우려가 있어."

  "섹스투스의 경제력은 압도적입니다. 처참한 대패를 당한 것도 아니니 클리엔테스들이 이 한 번의 패배로 등을 돌리진 않겠지요. 저 역시 전쟁이 장기화되면 힘들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쫓아갈 수 있도록 군단을 정비하겠습니다."

  현재 카이사르가 가용할 수 있는 군단의 수는 여섯.

  섹스투스는 일곱이 조금 넘는다.

  그러나 섹스투스가 히스파니아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병력을 보충한다면 얼마든지 10개 군단을 다시 동원할 수 있다.

  게르마니아에 병력을 주둔시켜 둘 수밖에 없는 카이사르로서는 시간이 갈수록 병력의 차가 불어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카이사르가 다스리는 지역은 아직 섹스투스의 영역에 미치지 못했다.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의 토지는 이제 한창 개간되고 있는 시점이라 아직 생산력이 물이 오르지 않았다.

  각 부족들이 자급자족하는 정도라면 문제없는 수준이었으나, 카이사르의 군단을 먹이고 장기간의 원정에 대비한 군량을 비축하는 건 역시 무리였다.

  필연적으로 로마에서 식량을 수입해 와야 하는데 지중해의 제해권을 쥐고 있는 사람은 섹스투스였다.

  물론 이렇게 진흙탕 싸움을 해대면 로마에서 여론이 좋지 않겠지만, 지금의 섹스투스는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이다.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의 의견대로 지금 당장 히스파니아로 6개 군단을 진격시키는 게 최선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갑작스레 들이닥친 예상외의 변수가 발목을 잡았다.

  막 군단을 출병시키려던 찰나, 전령 한 명이 급하게 라인강을 넘어 왔다.

  거의 말에서 굴러 떨어지다시피 다가온 그가 입을 열었다.

  "임페라토르시여, 엘베강 동쪽에서부터 상당한 수의 이민족들이 건너오고 있습니다. 저희가 대응은 하고 있지만, 저들의 수가 워낙 많아 2개 군단만으로는 방어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민족이 침략해 왔다고?"

  보고를 전해들은 카이사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르쿠스가 이전에 말했던 유목민들의 대대적인 침공이 시작된 것인가 해서였다.

  다행히도 전령은 그건 아닌 것 같다고 고개를 저었다.

  "침략보다는 두서없이 그냥 밀려드는 느낌입니다. 말을 탄 자들이 별로 없던 걸로 봐선 유목민들도 아닌 듯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힘 싸움에서 밀려 쫓겨난 야만족들인가······."

  그리 낯설지 않은 경우였다.

  당장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 1년 차에 맞닥뜨린 헬베티 부족이 그런 상황에 처한 자들이었지 않은가.

  게르만족에게 하도 시달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그들은 부족 전체가 서쪽으로 이주를 시도했다.

  그로 인해 생긴 갖가지 혼란으로 갈리아가 들썩였고, 카이사르는 그걸 수습하기 위해 헬베티족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저 먼 동쪽에서 거주하고 있었을 슬라브족을 쫓아낸 자들은 과연 누구일까.

  "이전에 엘베강 동쪽으로 정찰을 나갔던 탐사병들은 별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탐사병들이 살펴보았던 것보다 더 동쪽에서 왔다는 이야기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일단 지금은 저들이 더 넘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만."

  "당연히 그들이 더 넘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야지. 사정이 어찌 됐든 야만족들을 로마에 정착하도록 둘 수는 없다."

  카이사르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즉답했다.

  낙후된 지역인 게르마니아는 아직 제대로 개간되지 않은 상황이다.

  여기에 대규모의 야만족들을 추가로 받아들이는 건 식량문제를 자초하는 악수였다.

  게다가 슬라브족들은 지금까지 로마와 접촉한 적이 없었기에 게르만족 이상으로 로마화가 쉽지 않았다.

  다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2개 군단만으로는 슬라브족의 이동을 제어하긴 힘들었다.

  게르만 부족들도 자신들의 땅에 이 이상 침략자가 들어오지 않도록 협조하고 있었으나, 손이 더 필요하다는 건 사실이었다.

  카이사르는 어쩔 수 없이 한 개 군단을 추가로 게르마니아 지역에 주둔시키기로 했다.

  필요하다면 브리타니아에서 1개 군단을 더 데려올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두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니 섹스투스를 공격하러 갈 군단의 수가 마땅치 않았다.

  라비에누스는 그 점이 마음에 걸렸던 듯, 쭈뼛거리며 의견을 제기했다.

  "게르마니아에 병력을 추가로 보내면 이쪽이 가용할 수 있는 군단은 고작 5개입니다. 그 정도로 히스파니아에 있는 섹스투스군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물론 가능하고말고. 엘베강 방면의 일은 11군단을 추가로 배치하는 걸로 매듭짓고, 우리는 예정대로 히스파니아로 진군할 것이네."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아무리 임페라토르시라도 방심하다가는 상당한 손해를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방심? 자네는 내가 섹스투스를 얕보고 있다고 보는 것인가?"

  "······."

  어이없다는 듯한 되물음에 라비에누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카이사르는 섹스투스를 얕잡아 봐서 5개 군단으로 공격해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반대였다.

  "난 섹스투스를 폼페이우스만큼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적으로 상정하고 있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단기결전으로 승부를 봐야하는 것이고. 만약 섹스투스가 폼페이우스에 준할 정도로 전략을 세울 수 있다면 시간이 끌릴수록 이쪽이 낭패를 볼 수밖에 없지 않겠나."

  시간이 질질 끌린다면 좋을 게 없다는 건 라비에누스도 얼마 전 동의했었던 바다.

  그래도 병력 차이가 너무 나면 힘들지 않겠냐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임페라토르께서는 섹스투스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처럼 될 수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충분한 경험과 시간이 주어진다면 마그누스에 준할 정도로는 자랄 수도 있겠지. 그러니 이 이상 그에게 시간을 벌어다줄 마음은 없네. 그리고 전략에서의 열세는 전술로 뒤집어 버리면 그뿐. 자네는 무엇도 걱정할 필요 없으니 나를 믿고 따라오게."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의 확신 어린 말에 더 이상 고민을 이어가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가 본 카이사르는 말한 대로 모든 걸 이루어 온 사내였다.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단언하는 이상 더 이상의 의심은 불필요하다.

  10년에 이르는 시간동안 카이사르와 그의 부하들은 단 한 번도 회전에서 패배한 적이 없었다.

  가끔은 계획이 꼬여 곤란한 상황에 처한 적도 있었으나, 그럴 때마다 카이사르는 압도적인 전술로 모든 상황을 타파해 왔다.

  5개 군단으로 7개 군단 이상이 버티고 있는 적의 심장부로 쳐들어간다?

  카이사르가 이길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런 것이다.

  "한데 섹스투스도 시간을 계속 끄는 게 유리하다는 걸 알 텐데 우리와 싸우려고 할까요?"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해야지. 이번에는 섹스투스도 나오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걸세."

  라비에누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훌쩍 말 위에 올랐다.

  진군할 준비를 서두르라.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퍼져나갔다.

  총사령관의 결정과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목소리다.

  위험할 수도 있다는 염려는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

  카이사르의 진군 소식은 곧장 섹스투스의 귀에도 들어갔다.

  무사히 히스파니아에 도착한 그는 카이사르의 역습을 막아내기 위해 한창 병력을 충원하고 있었다.

  덕분에 휘하에 거느리고 있는 군단의 수는 무려 9개에 가까워졌다.

  그래서 처음 보고를 받았을 때는 자신이 뭔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5개 군단이라고? 그게 확실한가?"

  "예. 현재 엘베강 동쪽에서 이민족들이 쏟아지고 있어서 그걸 방어하기 위해 추가로 병력을 파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굳이 5개 군단을 데리고 이쪽으로 쳐들어왔다고? 내가 그리도 얕보인 것인가······."

  심기가 뒤틀린 섹스투스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반면 가비니우스나 폼포니우스의 얼굴에는 화색이 가득했다.

  "이건 명백한 카이사르의 실책입니다. 아니, 실수라기보다는 그는 우리를 과소평가하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카이사르가 전투의 귀재라고는 해도 이쪽은 수가 2배에 가깝게 더 많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이사르에게 밀려 전전긍긍해 하던 것과는 완전히 상반된 태도였다.

  그도 당연한 게 이전에는 1개 군단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으나 지금은 무려 4개 군단이나 자신들이 앞서고 있다.

  거기에 이전과는 달리 앞으로 전투가 펼쳐질 지역은 자신들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장소였다.

  자신감이 들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되니 폼포니우스와 가비니우스 외에도 수많은 클리엔테스들이 섹스투스에게 회전을 종용했다.

  사실 섹스투스는 조금 더 안전하게 상황을 끌면서, 카이사르를 조급하게 만들고 싶었다.

  어차피 시간을 질질 끌면 유리한 건 자신이었는데 굳이 나가서 싸워줄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클리엔테스들의 태도는 완강했다.

  코앞에 적군이 쳐들어왔는데 수는 고작 자신들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맞상대하지 않으면 겁을 집어먹었다는 오명을 피하기 힘들었다.

  더욱이 카이사르군은 섹스투스는 싸움에서 꼬리를 말고 도망친 겁쟁이라고 목소리를 드높이며 진군해 오고 있었다.

  이걸 계속 용인하고 있으면 파트로네스의 위상이 흔들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신중한 건 좋지만 그게 지나치면 우유부단한 게 된다.

  안 그래도 갈리아에서 한 번 등을 보이고 도망친 적이 있는 섹스투스였기에 이 시점에서는 무언가를 한 번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부하들의 간곡한 요구에 흔들린 섹스투스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평원으로 나가서 카이사르군과 일전을 벌이도록 하죠."

  "와아아아!"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좌중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섹스투스를 따르는 클리엔테스들이 연신 박수를 치며 옳은 결정을 내렸다고 환호했다.

  하지만 섹스투스의 귀에 그런 말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정신은 오롯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카이사르의 5개 군단에 집중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여기서 계속 클리엔테스들의 말을 무시하면 그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을 테니 싸울 수밖에 없었어.'

  이미 일어난 일이니 이제 어떻게 승리를 거둬야 할지에 대해 고민해 봐야 했다.

  그래도 섹스투스는 이전처럼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은 느끼지 않았다.

  병력 차는 거의 두 배에 달하고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히스파니아다.

  모든 조건이 자신에게 웃어주고 있었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 지겠는가.

  이것이 출병하면서 섹스투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생각이었다.

  < 197. 갈리아 내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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